#99. 생(生)의 점철
야심한 시각.
짙은 밤안개 사이로 느릿느릿 모습을 드러낸 사내.
이레는 단양 관아의 호방, 박진봉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늘고 작은 눈.
하관은 길었고, 코 아래엔 짧고 숱이 적은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 얼핏 순박해 보이기도 하고, 미련해 보이기도 했으며, 또한 교활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레는 박진봉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실종된 오라버니를 찾아 떠났던 충청도.
단양 팔경이라.
절경으로 소문난 단양 관아의 호방이었던 그와 처음 대면하였다.
이방, 그리고 형방과 함께 지방의 관리를 보좌하는 향리.
특유의 느린 말과 순박한 인상을 한 사내.
하지만 박진봉은 생김새와 전혀 다른 속내를 지닌 인물이었다.
순박한 시골 아전은 더더욱 아니었다.
왕세자의 팽례였던 김기대를 절벽으로 밀어버린 잔인한 사내.
이레와 형운 역시 그의 능청에 속아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한데, 단양에서 사라졌던 박진봉이 갑자기 한양 땅에 나타났다.
그것도 하필 실종된 오라버니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건 현장에…….
과연 우연일까?
박진봉을 향한 의심은 이레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네놈이었구나.”
형운의 목소리가 박진봉에게 곧장 날아들었다.
박진봉을 향한 형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고 매서웠다.
“그려유. 바로 나유.”
박진봉이 유들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양반들이 있구먼유. 잘들 지냐셨쥬?”
마치 도타운 벗과의 해후인 듯 박진봉은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함께 웃지 못했다.
박진봉의 웃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형운이 물었다.
“네놈이었느냐?”
앞뒤를 자른 질문에 박진봉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뭔 말이어유?”
“이번 일, 네놈의 소행이더냐?”
“한양 양반들이라 그런가, 도통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유. 이번 일이 뭔데유?”
“죄 없는 여인들을 납치하고, 김기대라는 이름을 흘리고 다닌 흉적들. 이 모든 계략이 네놈의 머리에서 나왔느냐 물었다.”
박진봉이 한서로를 턱짓했다.
“저짝에 있는 계집을 어찌하려고 한 건 맞는데유, 납치는 하지 않았슈.”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낫을 휘휘 휘둘렀다.
“나가 그런 사람이유. 벼 베듯 사람 모가지 베는 앵간히 잘하지만서도, 잡시럽게 뭘 대간히 궁리하는 건 못 해유.”
여울네에게 접근하여 만사여의를 죽이려 한 것은 맞지만, 다른 여인들의 납치와는 무관하다는 말이었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잡곡이 든 비단 주머니는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술수였다.
형운의 뒤편에 서 있던 이레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나도 하나 묻겠다. 내 오라비의 이름을 흘려 누명을 씌우려 한 것도 그대의 소행인가?”
히죽, 박진봉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맞슈. 그건 나가 했슈.”
가슴에 들끓는 분노를 애써 삭이며 이레가 다시 물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니께 나가 보기보다 빽빽해서유, 일을 정갈하게 끝내지 못허문 마음 편하게 쉬지를 못해유.”
“일을 정갈하지 끝내지 못했다니?”
“그러니께 나가 지난번에 그짝 양반들을 놓쳤잖슈? 엉덩이가 가려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쥬. 어떻게든 그짝 양반들 다시 보려고 한참을 고민했슈.”
박진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양에서 벌어지는 슝한 일을 김기대가 했다 하문 그짝들이 들썩거리지 않겠슈? 아무렴유. 배 타고 단양꺼정 온 양반들인데 어련하겠슈. 나가 간신히 생각한 건디, 별일이어유. 굼실굼실 나오셨네유. 먼 데서 다시 보니 월마나 반가워유? 그래서 천천히 나왔어야 했는데, 참을 수 있어야쥬.”
속이 터질 만큼 느릿느릿한 설명.
그러나 느린 말의 속도와 달리 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바짝 조여졌다.
어수룩한 표정과 달리 박진봉은 섬뜩할 정도로 치밀했다.
사람의 심리를 철저히 이용한 계략.
박진봉이 활짝 웃었다.
“인자 궁금한 건 다 풀리셨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좁은 공방 골목 곳곳에서 흑의 차림의 복면인들이 몰려나왔다.
족히 오십은 넘는 숫자.
“나가 한양 분들 뫼시려고 준비 좀 했슈. 워떡해유. 만나자마자 이별혀서. 잘난 분들과 요래 헤어지려니 아쉽네유.”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뭣들 하는가? 워째 구경만 하는 것이여? 어여, 일들 해야지. 꾸물거리다가 해 뜨겠구먼.”
박진봉의 채근에 복면인들은 일제히 흉기를 뽑아들었다.
복면인들이 내뿜는 진득한 살기.
사위를 옥죄는 험악한 기세에 이레는 숨이 턱 막혀왔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어릴 때부터 서탁의 백귀들에게서 많은 교육을 받아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제왕학을 배웠고, 여러 가지 병법을 숙지했다.
무뢰배들과 만났을 때 스스로를 지키는 법 역시도 서탁을 통해 충분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상황에 직면하자, 몸이 굳어 버렸다.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한없이 작게 오그라들었다.
게다가 눈앞의 적들은 단순한 무뢰배들이 아니었다.
저들은 온갖 날붙이로 무장한 살수(殺手)들이었다.
이레는 형운과 그의 좌우익위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자리엔 수월의 호위무사 천호와 백호도 함께 있으니 이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이레는 밀려드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안심하기엔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불안함과 긴장감으로 이레의 입술이 하얗게 말랐다.
그때 청수한 대나무숲의 향기와 함께 너른 등이 그녀의 눈앞을 막아섰다.
“괜찮다.”
이레에게 등을 보인 채 형운이 말했다.
“……은백.”
“내 너에게 약조하지 않았더냐.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니, 걱정 마라. 불안해할 것 없다.”
숨 쉴 틈 없이 짓쳐들어오는 적들을 보면서도 형운은 태연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
아마도 이레를 위한 배려이리라.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은백께서 지켜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은백 자신입니다. 지금은 은백의 안위부터 살피셔야 합니다.”
형운이 뉘이던가.
이 나라의 세손이 아니던가.
그가 다치거나 혹여 죽기라도 한다면…….
“은백, 뒤로 물러서십시오.”
일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악의 순간, 이레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닌 왕세손 형운이었다.
스스로 몸을 던져서라도 그를 지킬 것이라 그녀는 단단히 마음먹었다.
형운의 등 뒤, 안전한 가림막 안에 있던 이레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어린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인 듯 형운의 앞을 막았다.
힐끗, 그녀를 내려다보는 형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여전히 넌 생각이 많구나.”
저리 몸을 떨면서도 다른 사람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여리지만 당찬 여인의 마음이 고맙고도 사랑스러웠다.
형운은 이레의 어깨를 당겨 자신에게로 돌려세웠다.
그는 그녀의 턱을 당겨 올렸다.
형운의 눈 속에 이레가 가득 담겼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거짓말.”
“믿으십시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믿지 않을 것이다.”
형운은 그린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레를 응시했다.
괜찮다, 괜찮다.
소리 없는 위로가 이레를 다독거렸다.
아찔하리만큼 미려한 미소와 다정한 위로, 그리고 감미로운 향내.
위험천만한 작금의 상황을 망각한 채 이레는 단숨에 형운에게 미혹되었다.
형운의 눈에 담긴 이레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적들은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죽어라!”
적의 칼날이 형운의 등을 사납게 헤집어놓으려 하였다.
“은백!”
***
“죽어라!”
“하앗!”
격렬한 외침이 장무열을 덮쳐왔다.
장무열은 검을 비틀어 올렸다.
머리를 쪼개듯 덮쳐오는 도끼를 두 동강 내고, 옆구리를 노리는 적의 명치를 칼집으로 찍어 눌렀다.
달라붙는 자들을 떼어낸 그는 맴을 돌듯 크게 몸을 회전하였다.
스윽!
거칠게 그어진 은빛 섬광이 우악스럽게 덤벼드는 사내들을 훑었다.
털썩, 치명상을 입은 사내들이 신음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장무열은 바닥에 나뒹구는 자들을 헤아렸다.
‘다섯.’
방금 해치운 자까지 모두 다섯이다.
혼자 제법 많은 수를 해치웠다.
문제는 쓰러진 자보다 멀쩡히 두 발로 서 있는 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자니, 등 뒤에서 익숙한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벌써 지친 겐가? 이제 고작 다섯일세. 아직 일곱이 더 남았어.”
서강율의 태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무열은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는 걸 느꼈다.
‘그렇게 말할 시간에 돕기라도 하던가.’
참으로 얄미운 작자였다.
싸움이 시작된 이후, 서강율은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이라곤 재빨리 문을 닫아걸어 저택의 내부와 외부를 차단한 일이 전부였다.
하지만 장무열은 차마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서강율의 등 뒤로 보이는 회임한 여인들의 모습.
두려움에 질린 여인들은 서강율이 만든 가림막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허, 이 긴박한 상황에 무슨 잡생각인가. 정신 차리게, 또 달려드네. 이번엔 셋이야.”
“……알고 있다!”
장무열은 이를 악물며 뛰어나갔다.
적에 맞서는 그의 모습은 굶주린 늑대처럼 매섭고 사나웠다.
“허허, 저리 성격이 거칠어서야. 은호라는 이름이 아깝군. 차라리 은자원의 늑대라 부르는 게 좋겠어. 아! 그러면 우리 은랑과 같은 이름이 되겠군. 어쩔 수 없이 계속 은호라 불러줘야겠구먼. 은호, 그쪽이 아니라네. 어허, 검을 그리 휘두르면 어찌하는가.”
서강율은 부채를 흔들며 쉴 새 없이 장무열의 싸움에 참견하였다.
때로는 혀를 차고, 때로는 핀잔하며 잠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어찌 보면 참견쟁이 같았고, 또 어찌 보면 엄한 스승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의 말참견이 있을 때마다 장무열의 검은 더욱 거칠어졌다.
“은인.”
여인 중 한 명이 서강율을 불렀다.
서강율은 얼른 부채를 접었다.
부르는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있었다.
“무슨 일이오?”
“아무래도 탈이 생긴 모양입니다.”
“탈이라니?”
겁에 질린 여인들이 한데 모인 곳에서 간신히 참아내는 신음이 들려왔다.
“으윽, 아아아악!”
잡혀 온 여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임부(妊婦)였다.
서강율은 서둘러 어린 임부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창백했고, 열이 심했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이오? 어디 불편하오?”
어린 임부가 밭은 숨을 내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기가…… 아기가 나오려나 봅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 서강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노릇을 어찌한다?
앞이 캄캄했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아직은 장무열이 잘 버티고 있지만, 남아 있는 적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서강율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꽃 피는 봄이 멀지 않은 이 좋은 때에 태어나다니. 제법 운치를 아는 아이인가 보오.”
임부를 안심시킨 서강율은 주위를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산파는 없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서강율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망할 놈들. 이 많은 임부를 잡아 와놓고 산파 하나 부르지 않다니.”
그가 다시 소리쳤다.
“하면, 아이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 없소?”
만삭의 중년 여인이 앉은걸음으로 다가왔다.
“제가 아이를 받아보긴 했는데…….”
“어서 와 도와주시오.”
서강율은 서둘러 중년 여인을 어린 임부에게로 안내했다.
어린 임부의 상태를 살핀 중년 여인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에구머니나, 아기 머리가 보입니다. 한데…….”
상태가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흐윽, 어머니, 어머니…….”
급기야 어린 임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에 가고 싶어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흐윽……. 어머니, 무서워요.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아요.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울음을 터트린 임부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급기야 쉬익쉬익, 마른 바람 소리를 내며 낯빛이 파랗게 변하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이걸 어쩐대? 숨을 못 쉬네요. 이봐요, 숨 쉬어요. 숨을 길게 내뱉어요.”
여인들이 달려들어 어린 임부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좀처럼 불안증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러다 애도, 어미도, 둘 다 죽겠어요.”
“어찌한대? 저걸 어찌한대?”
발을 동동 구르는 여인들 사이로 서강율이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어린 임부의 손을 가만히 그러잡았다.
“이보시오. 정신 차려야 하오. 지금까지 잘 견디지 않았소? 조금만 기다리면 집으로 돌아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억울하지 않소?”
그의 말에도 여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임부의 상태는 심각해지는데, 그 와중에 다른 곳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고개를 돌려보니 빈틈을 노린 무인 둘이 흉기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싸움이 시작될 무렵, 서강율이 재빨리 걸어놓은 문마저 부서지며 외부를 지키던 무사들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졸지에 적에게 둘러싸인 장무열에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천벌 받을 놈들. 아이가 태어나려는 순간에 이 무슨 부정한 짓거리란 말이냐.”
할 수 없다는 듯 서강율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무사들과 한데 뒤엉킨 그의 도포 자락이 바람처럼 나부꼈다.
교묘한 손재간으로 밀치고, 당기고, 치니 순식간에 두 무사의 팔과 목이 굵은 줄로 묶여버렸다.
“인두겁을 쓴 악귀 같은 놈들. 조금만 기다려라. 내 너희를 끌고 가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 테니.”
무인들을 처리한 서강율은 다시 어린 임부에게 돌아왔다.
“으, 은인. 피가…….”
그를 본 여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서강율의 옆구리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 터라.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적을 상대하다 다친 것이었다.
“괜찮소. 조금 긁힌 것뿐이라오.”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과 달리, 옷을 적신 핏물은 연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심상치 않은 출혈이었다.
그러나 서강율은 상관없다는 듯 어린 임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허, 이분 안색이 왜 이렇게 좋지 않소?”
어린 임부의 낯빛은 파랗다 못해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날 적에도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하오.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는데, 자칫하였으면 태어나기도 전에 어미 죽인 불효를 저지를 뻔하였다오.”
“…….”
“달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탓인지, 자랄 때에도 어딘가 모자라고 엉뚱하여 사람 구실 제대로 못 할 거란 소릴 수없이 들었다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시오?”
어린 임부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훌륭한…… 분이 되셨겠지요. 은인.”
“바로 맞췄소.”
서강율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건 그대만 아시오. 비밀인데 그대에게만 특별히 알려주겠소. 사실은 내가 보통 신분의 사람이 아니라오.”
“그…… 그럼…… 무얼…… 하시는 분입니까?”
“어사라오.”
“어……사요?”
“그렇소. 그것도 암행대의 어사. 나는 임금님의 명령만 받고, 임금님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오. 어떻소? 이만하면 그래도 꽤 성공한 축에 속하지 않겠소?”
“그렇…… 지요.”
“내 보기엔 이 아이 또한 그럴 것 같소. 때를 가리지 않으니,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당당할 터이고, 이처럼 고생하며 태어나니 그 어떤 고난을 만나도 굴하지 않을게요. 장담하건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인물이 될 것이외다.”
그의 호언장담이 통한 것일까.
희미해져 가던 어린 임부의 막힌 숨통이 트였다.
“쿨럭, 쿨럭.”
서강율은 반색했다.
“이제 되었소. 숨을 크게, 크게 쉬시오.”
“은인. 정말……그리 생각하십니까?”
“……?”
서강율의 되묻는 시선이 임부를 향했다.
“정말 제 아이, 은인처럼 대단한 사람이 될까요?”
서강율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 조선 팔도는 물론이고 저 청국까지, 두루두루 안 다녀본 곳이 없다오. 그리 발품을 팔다 보면 만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니. 그 덕에 사람 보는 눈 하난 정확해졌소. 여아이면 둥근 달마저 시샘하는 절세미인이 될 것이고, 사내라면 필시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 될 큰 인물이 될 것이오.”
“…….”
“그러니 그 대단한 아이를 위해 조금만 힘을 내는 거요. 걱정일랑 접어두시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리리다.”
“하지만 저분께선…….”
어린 임부의 시선이 장무열을 향했다.
여인들의 신음과 절망으로 가득하였던 기루는 이젠 죽은 자들이 흘린 피와 절규로 뒤덮였다.
장무열은 여전히 무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연이은 격전에 지친 탓인지, 처음의 기백은 사라지고 위태롭게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보지 마시오. 본디 아이 가진 어미는 좋은 것만 눈에 담는 법이라오.”
서강율은 부채를 펼쳐 어린 임부에게 건네주었다.
“이 부채를 줄 터이니, 아이가 크거든 주시오. 이 산수화 말인데, 알고 보면 꽤 대단하신 분께서 그려준 것이라오. 보면 분명 힘이 날게요.”
“고맙습니다, 은인.”
어린 임부에게 도포마저 벗어준 후에야 서강율은 몸을 일으켰다.
“내 산책 좀 하고 오리다. 곧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서강율은 홀로 분투하는 장무열에게 걸어갔다.
그가 난입하자 위태롭게 기울었던 싸움의 양상이 금세 균형을 찾았다.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서강율의 검에 최후의 적이 쓰러졌다.
챙강!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적을 보며 서강율은 검을 놓았다.
일순, 느닷없는 정적이 기루에 밀려들었다.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상황.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은 길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으아아아앙.”
우렁찬 울음소리가 경직된 고요를 뒤흔들었다.
***
서강율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무사하오?”
어린 임부의 상태를 묻는 물음에 산파 노릇을 하던 중년 여인이 대답했다.
“둘 다 무사합니다.”
“아이는?”
“고추입니다, 고추.”
“하하하. 유난히 애를 먹이더니, 역시 소란스러운 녀석이었군.”
곧이어 어린 여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인. 이름을……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내가 말이오? 그런 것이면 아이의 아버지가…….”
“은인께서 아니 계셨다면 이 아이, 세상 구경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은인께서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여인의 부탁에 서강율은 잠시 고민했다.
이내 특유의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윤복(潤福)이라 하면 어떻겠소? 태어나기 전에 평생 겪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였으니, 앞으로의 삶은 윤택하게 복록을 누리라는 의미로 윤복.”
“지아비의 성이 신(申)이니, 신윤복이 되겠군요.”
“신윤복이라. 내가 지었지만 참으로 복되고 훌륭한 이름인 것 같소.”
“제 아이, 은인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시오. 난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며 사는 처지라 남에게 권할 운명이 아니라오. 부디 세상사에 휘둘리지 말고,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며 살아주길 바랄 뿐이오.”
“은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키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하하, 말만이라도 고맙소.”
껄껄 웃는 서강율을 장무열이 다가와 부축했다.
서강율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자네가 웬일인가? 이리 친근하게 굴고.”
“……일단 치료부터 하자.”
장무열이 서강율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어느새 흘러내린 피가 바지마저 붉게 물들였다.
서강율은 핏기없는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리 간절하게 말하니, 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이 꼴을 하고도 여전하군.”
장무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였다.
옆구리가 아니라, 입을 다쳤어야 했는데.
잠시 아쉬운 표정을 하던 장무열은 서강율의 상처 부위를 살폈다.
우선은 지혈부터 하고 깨끗한 헝겊을 찾아 상처를 감쌌다.
대충 마무리가 될 때였다.
기루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
서강율이 지쳤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무열 역시 바싹 긴장하여 밖의 상황을 살폈다.
이내 기루 마당으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보였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장무열과 서강율은 사내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안심하였다.
검푸른 빛의 철릭.
흉배에 수 놓인 문양으로 보아 사헌부 소속의 어사들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급히 보낸 전갈을 보고 이제야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출동한 어사의 인원은 적었지만, 그 구성은 심상치 않았다.
무려 집의 김익현이 직접 출두한 데다, 비방주 허상익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함께 한 어사들 역시도 어사대에선 가장 실력이 좋은 자들이었다.
대열의 선두에 있던 김익현이 제일 먼저 기루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놀란 눈으로 싸움의 흔적을 훑었다.
이내 장무열을 발견한 김익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결국, 찾아냈군.”
장무열의 집요한 근성,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기란 것을 모르는 사내.
한번 잡은 사건은 어떻게든 해결하고 마는 그의 집요함에 김익현은 혀를 내둘렀다.
장무열이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에 보이는 자들은 처치하였으나, 숨어 있는 자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쪽에 실종된 여인들이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으니, 의원을 불러주십시오.”
김익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또 필요한 것은 없는가?”
장무열은 서강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사람의 치료도 급합니다.”
“걱정 말게.”
그 이후로도 장무열은 사건 현장과 관련한 몇몇 보고를 이어나갔다.
서강율은 그의 지혈을 받으며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출혈이 심했던 탓일까.
눈앞이 흐려지고, 머릿속도 흐리멍덩해졌다.
장무열과 김익현의 대화가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가물거렸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정신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잡생각이 사라지니,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오직 하나, 사건에 관한 생각.
‘한양과 그 인근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여인이 사라지고 납치되었는데, 어찌 사소한 단초 하나 발견되지 못한 것일까.’
지금까지 범인들의 행각이 용의주도하여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십학사.
참으로 대단한 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간의 범행으로 보아 범행에 가담한 자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십여 명이 납치에 가담한 정황도 포착되었다.
그렇게 많은 자가 꽤 긴 시간 범행을 벌였는데, 하찮은 실마리 하나 발견하지 못하다니.
부자연스럽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사건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서강율은 괴리의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했다.
다음엔 입장을 바꿔 사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범인이라면, 이런 일을 꾸몄다면, 어떻게 사건을 숨길 수 있을까?
어떤 수단을 마련해야 십수 명의 여인들을 납치하고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설마…….’
단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웅웅웅, 벌이 나는 듯 스쳐 지나가던 장무열과 김익현의 대화가 또렷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자네의 끈기엔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정말 꺾이지 않는 의지로군.”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도와준 이가 많습니다.”
“그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얼굴이나 보고 싶군.”
장무열의 공을 치하한 김익현이 몸을 돌렸다.
보고를 끝낸 장무열은 서강율의 부상을 돌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 순간, 김익현이 검을 뽑았다.
푸욱!
섬뜩한 소리가 허공에 깊은 울림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