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98화 (98/215)

#98. 구출(救出)인가, 구애(求愛)인가?

수월을 나선 여인은 공방 골목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각.

밤안개마저 짙어 한 치 앞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보이지 않는 등불을 발끝에 매단 듯, 어두운 골목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레는 먼 곳에서 은밀히 여인의 뒤를 쫓았다.

워낙 어둡고 밤안개까지 진득하니, 미행(尾行)이 쉽지 않았다.

길잡이 하는 사람들마저 없었다면 진즉 놓치고 말았으리라.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설키고 얽힌 골목을 빙빙 돌던 여인이 한순간 자취를 감췄다.

두리번거리는 이레의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담벼락 위를 달리던 홍인모가 기와집을 손짓했다.

그곳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네가 사람의 기척을 놓치는 경우도 있구나.”

이레의 곁을 따르던 형운이 속삭였다.

“남의 뒤를 몰래 쫓아다닌 경험이 드물어 그럽니다.”

“그래, 그런 일엔 전문가가 따로 있는 법이지.”

이레는 소리 없이 지붕 위를 걷는 홍인모에게 시선을 던졌다.

형운이 지칭한 전문가, 바로 홍인모이리라.

“저분은 참으로 다양한 재주를 지닌 것 같습니다.”

“머리도 명석하고, 무예 실력도 그럭저럭 쓸 만하니. 몰래 남의 뒤를 밟는 추적(追跡)과 잠입에 능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나, 지붕까지 잘 타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구나.”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수월에서 소란을 피워 어사대의 시선을 돌린 침입자 역시 홍인모였다.

“귀한 분의 호위가 된다고 하여 마냥 좋은 건 아닌 모양입니다.”

왕세손의 우익위라 하면 허리에 칼 차고 오만한 눈빛으로 군림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편하기만 한 사람이 어딨겠느냐.”

“…….”

이레는 형운을 빤히 응시했다.

귀하디귀한 왕세손이신 은백도 세상살이가 어려우십니까?

“많이 누리는 만큼 책임져야 할 일도 많고, 맞서 싸워야 할 적도 많은 법이다.”

형운이 이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봐라, 좋은 여인과 함께하기 위한 나의 고군분투를.”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별궁에서 접한 수많은 궁중 법도와 절차를 떠올리니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귀한 분을 고군분투하게 하여 송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으면 좋겠습니까?”

“은혜라…….”

형운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나의 마음이 이미 너와 같은데, 어찌 배려와 은혜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

“……은백.”

그저 덤덤히 마음을 털어놓는 형운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건만.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밤이 그려낸 신묘한 그림인 듯 느껴져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보았다.

그 오롯한 시선에 형운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리 보느냐?”

“…….”

“얼굴은 왜 이리 붉어졌고?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레는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차마 그의 미려한 옆태에 넋이 나갔노라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게 다 밤안개 탓이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이 희뿌연 안개가 잡념을 불러온 모양이다.

핑곗거리를 찾는 이레에게 형운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동하는 모양이다.”

기와집 뒷문으로 은밀히 나오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이레는 서둘러 여인의 뒤를 쫓았다.

형운이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

공방 골목 한 귀퉁이.

3대째 옻칠로 유명한 장인의 공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뛰어난 솜씨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장인이지만, 어제오늘은 다른 일로 소란스러웠다.

괴한들에게 쫓기던 수월의 어린 소녀가 이곳에서 실종되었던 까닭이다.

실종과 더불어 참혹한 살인사건도 있었다.

그 까닭에 옻칠 공방의 입구는 두꺼운 새끼줄로 가로막혀 있었다.

살벌하고 냉혹한 사건의 현장인지라.

근처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밤안개를 헤치고 걸음을 옮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그 공방 앞이었다.

새끼줄을 들어 올리고,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마당이 보였다.

숱한 자들이 조사하고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여인은 깨지고 부서진 가구와 흐트러진 공구들이 널브러진 마당을 무심히 가로질렀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긴 그녀가 향한 곳은 작은 창고 앞이었다.

익숙한 몸짓으로 창고 구석의 작은 쪽문을 열고 나가자 뒷마당이 나왔다.

옻칠을 끝낸 가구들이 차곡차곡 쌓인 그곳엔 작은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장 노인은 그곳에 있었다.

이 공방의 주인이자, 공방 거리에서 옻칠로 가장 유명한 장인.

“이제 오는가?”

여인을 흘끔 본 장 노인은 들고 있던 곰방대에 불을 댕겼다.

독한 연초향이 굵게 주름진 얼굴로 피어올랐다.

일평생 지켜온 고집과 진득한 세월의 흔적이 뭉툭한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인이 장 노인을 향해 물었다.

“어제오늘 무척 소란스러웠을 터인데, 이제 좀 살 만해진 모양이오?”

“말도 말게. 목에 힘깨나 주는 양반들이 어찌나 사방 뒤지고 다니던지. 온갖 험한 꼴을 다 보았네. 망할 놈들. 사람이 사라졌는데, 옻칠한 가구는 왜 죄 부수지 못해 안달인지.”

“고생 많았소. 그래도 물건은 지켰소?”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아무렴 잘했겠지.”

장 노인은 연기를 길게 하늘로 뽑아 올렸다.

탁탁, 곰방대에 남은 재를 툇마루 모서리에 털어낸 그가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게.”

장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쩔뚝쩔뚝 걸음을 옮겼다.

뒷마당에 난 문을 열고 나가 좁은 골목을 지나자 허름한 창고가 나왔다.

옻칠을 기다리는 가구와 목재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공방에선 흔하게 볼 수있는 광경인지라.

치밀한 조사의 손길도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다.

장 노인의 입에서 불현듯 키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망할 놈들. 하여간 귀찮은 일은 언제나 건성이란 말이지. 덕분에 물건을 잘 보관할 수 있었지만.”

창고 앞엔 지키는 젊은 사내가 여럿 있었다.

공방에서 일을 배우는 사내들이었다.

장 노인이 눈짓을 보내자, 젊은 사내들이 가구와 목재를 옆으로 치웠다.

톱밥 가득한 바닥을 쓸어내자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장 노인은 여인을 돌아봤다.

“뭘 하는가. 어서 오지 않고.”

여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톱밥과 먼지가 부옇게 일어난 곳에 선뜻 몸을 들이기가 싫었다.

그러나 연이은 노인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그분의 안가(安家)였군요.”

“정확하게는 안가 중 하나라네. 아마 이런 안가가 한양 땅에만 열 곳이 넘을 것이야.”

장 노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서책으로 가득한 책장과 탁자 그리고 간단한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한서로.

수월의 문앞에서 고객을 상대하던 소녀이자, 만사여의라는 신비한 정체의 여인.

시전의 여장부라 불리던 만사여의는 손발이 묶인 것은 물론이고 재갈까지 물려 있었다.

여인은 한서로를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무사히 잘 계셨군요.”

안가에 갇힌 한서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인은 장 노인에게 물었다.

“뭔가 말하지는 않았소?”

“입에 물린 재갈을 푼 적이 없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못했겠지. 바깥에 사헌부의 어사들이 눈이 벌게서 돌아다니는데, 비명이라도 새어나가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재갈을 풀어주시오.”

장 노인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한서로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휴우.”

재갈이 풀리자 한서로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물 좀 주게.”

한서로의 요구에 장 노인은 두말하지 않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시원하게 물 한 사발을 들이킨 한서로가 장 노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리 노려보시오?”

“……내 평생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하였는데, 설마 할아범이 날 배신할 줄은 몰랐군.”

“당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소. 당시엔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었으니. 다만, 사람이라는 게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오.”

장 노인은 대를 이어 공방거리에서 살아왔다.

고지식하고 성격도 괴팍했지만, 신의를 제 목숨만큼 중하게 여겼다.

한서로는 그의 한결같은 성품을 믿고 위급할 때 은신처로 사용할 안가 중 한 곳까지 맡겼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구쳐도 장 노인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기 까닭이다.

하지만 한서로의 믿음과 달리 위기의 순간과 마주하자 장 노인은 손바닥 뒤집듯 그녀를 배신하였다.

공방 골목에서 괴한들에게 느닷없는 습격을 받은 만사여의는 호위들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발 빠른 사내들에게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숨을 곳을 마련해 두었다.

필사적인 도주 끝에 그녀는 이곳을 찾았고, 장 노인의 도움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괴한들을 피해 도망친 안가에 배신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안가에 숨어 괴한들의 눈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장 노인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한서로가 날을 세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저 재물이 탐나서 그랬다 생각하시오.”

한서로의 쏘는 듯한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장 노인은 시선을 회피했다.

“난 공방을 치우러 갈 테니, 이야기 나누시오.”

장 노인은 불편한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작은 지하실에 한서로와 여인, 두 사람만 남았다.

여인이 입가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장 노인이 배신한 것은 놀라워하시면서, 정작 제가 나타난 것은 놀랍지 않은 눈치십니다.”

“그대밖에 없었으니까.”

“저밖에 없었다니요?”

“이런 일을 꾸밀 사람. 날 보필하고, 내가 하는 일을 조목조목 알고 있는 사람. 내가 죽으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람.”

한서로는 무심한 얼굴로 여인을 보며 말했다.

“여울네, 바로 그대밖에 없으니까.”

여인, 여울네가 품위있는 미소를 흘렸다.

“역시 만사여의십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물어보시지요.”

“이번 일, 모두 그대의 소행인가?”

“유감스럽게도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더냐?”

“주인님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들이 여럿 있지요. 그중 한 곳에서 은밀히 제게 연락을 넣었습니다. 전 그들에게 주인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과 길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장 노인도 그대가 끌어들인 건가?”

“주인님을 대신하여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여러 사람과 만나게 된답니다. 장 노인의 집안에 생긴 어려운 사정도 그때 들었지요.”

한서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처음부터 날 죽일 속셈이었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차마 제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었기에, 여울네는 남의 손을 빌려 한서로를 세상에서 지울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지요. 나중에 장 노인이 찾아와 주인님을 잡아두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원래 계획은 한서로가 괴한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는 것이었다.

그 빈자리를 자신을 차지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과 다르게 한서로는 괴한들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갔고, 안가에 숨었다.

문제는 그 안가를 관리하는 장 노인이 만사여의가 아닌 여울네에게 포섭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내가 직접 나설 입장이 안 되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 것인데……. 오늘 여러 사람에게 배신당하는군.”

한서로는 한탄했다.

짐짓 안타까운 듯 여울네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만사여의께서 너무 큰 재물을 가졌다는 점이지요.”

한숨을 몰아쉰 한서로가 담담한 눈으로 여울네를 응시했다.

“날 죽이지 않고 찾아온 이유는…… 문서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바로 그 문서 때문이지요. 당신만 죽으면 모든 것을 다 차지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저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더군요.”

여울네가 고개를 숙여 한서로와 시선을 맞췄다.

“어디에 숨겨두었습니까? 시전 상가들의 권리증. 거상들과 맺은 계약서. 전국 팔도에 심어놓은 사람들에 관한 서류.”

여울네의 요구에 한서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천진하리만큼 해맑은 웃음이었다.

“그걸 내가 순순히 말할 것 같은가?”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여울네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손을 거칠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주인님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 그리고 끝내 끔찍하게 죽게 될 테지요.”

“그래, 경험하지 않았어도 짐작할 수는 있겠지. 무척 끔찍할 게야. 하나, 말하지 않고 버티면 적어도 며칠은 더 살 수 있겠지.”

“만사여의. 당신은 모르겠지만, 때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비참하고 끔찍한 경우도 있답니다.”

“이번에 경험해 보면 되겠군.”

“그건 서로에게 못할 짓이지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와 거래를 하는 겁니다.”

“거래라. 내게 감히 거래라고 하였는가?”

“당신만큼은 못해도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적지 않습니다.”

“그래, 내게 뭘 줄 수 있는가?”

“만사여의의 명성, 흠집 없이 그대로 이어드립지요.”

“내가 자청하여 만든 명성도 아니고, 죽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명예는 더더욱 아니니. 셈을 못해도 한참 잘못하였어.”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문득 여울네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

“주인께서 소중히 여기는 그 사내, 그에게 어떤 위해도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으로 한서로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그 사람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주인님께선 늘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에겐 인생을 바꿀 기회가 온다고. 그 기회가 왔을 때 낚아챌 수 있어야 한다고. 마침 제게 큰 기회가 왔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여울네!”

“그렇게 부르지 마!”

찢어지는 고함을 내지른 여울네는 한서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여울네, 여울네! 여울네가 대체 뭐야? 여울이라는 동네에서 온 아낙? 세상에 여울네가 대체 몇이나 될 것 같으냐?”

“…….”

“그저 그런 여울네가 되어 일평생을 끝낼 순 없어.”

“…….”

“당신만 없으면, 그대만 없으면…….”

비틀린 잇새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만 사라지면…… 내가 만사여의가 될 수 있어.”

그녀의 일갈이 지하실을 울렸다.

그 표독스런 외침이 채 흩어지기도 전, 누군가의 물음이 들려왔다.

“고작 그런 이유였는가?”

슬픔과 분노로 얼룩져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느닷없는 불청객이라.

놀란 여울네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곧 계단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여울네는 눈에 놀람이 들어찼다.

“천호!”

사내는 천호였다.

공방의 비밀공간으로 들어온 그는 부릅뜬 눈으로 여울네를 노려보았다.

“그래, 나 천호다. 이름도 없이 뒷골목을 떠돌던 무뢰배.”

“당신이 어떻게 이곳을…….”

천호만이 아니었다.

곧 백호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호가 어금니를 갈아 물었다.

“믿지 않았다. 네 뒤를 쫓으면서도 설마 주인님의 실종이 너와 관계있을 거라곤 터럭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천호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여울네를 추궁했다.

“주인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 잊었느냐? 저분이 우릴 어찌 대해 주셨는지. 버림받고 갈 곳 잃은 우리를 거두며 무슨 말을 하셨는지, 어떤 장담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약조를 어떻게 지키셨는지.”

“그래 봐야 돈 많은 상전에게 아첨하며 굽실거려야 하는 삶이잖아?”

“무어라?”

“그래, 이분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었지. 그걸 지켜보며 내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

“가능성이었다. 저분의 재물이 있다면, 저분의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면, 나 또한 저리 당당하게 살 수 있겠구나. 아무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계집도 정체를 숨기고 저만큼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 할 건 무어냐.”

“네가 정녕 사람이길 포기했구나.”

“무어라고 비난해도 상관없다. 한 사람만 없어지면, 그 모든 부귀영화가 내 것이…… 아니, 우리 것이 될 것이야. 그러니 천호, 백호.”

여울네는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천호와 백호를 쳐다보았다.

“더는 남의 호위나 하지 않게 하마. 일평생 기루의 기녀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 엄청난 재물을 너희에게 주지.”

여울네의 제안에 천호와 백호는 허망하고도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주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탄식 섞인 한 사람의 목소리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흔들었다.

“남이 이룩한 것을 빼앗는다고 어찌 그 모든 영화가 자신의 것이 되겠소? 내겐 그와 같은 재주가 없음이니. 결국,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새어나가듯 허망함만 남을 뿐이오.”

가녀린 인영이 여울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약한 모습과는 달리 당찬 기백과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으로 무장한 여인.

이레는 선선한 눈빛으로 여울네를 바라보았다.

***

그저 시선을 마주하는 건데, 이상하게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여울네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별궁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그대가 간절하게 부탁하지 않았소? 만사여의, 저분을 꼭 구해달라고.”

허망한 웃음이 여울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는군요. 천호와 백호, 저 미련한 자들이 나를 의심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인제 보니 빈씨께서 뒤에 계셨던 게로군요.”

“그렇게 되었소.”

“어사들과 괴한들의 시선을 잠시 돌려놓을 생각으로 빈씨를 이용한 것인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여울네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내가 꾸민 짓인 줄 어찌 알았습니까?”

“이번 일은 다른 실종사건과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달랐소. 회임한 여인이 아닌 어린 소녀를 노린 점. 또한, 상당한 손해까지 감수하며 호위무사가 지키는 여인을 노린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레는 여울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라진 여인이 다른 실종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소.”

“듣고 보니 의심할 구석이 있군요. 하지만 그런 모든 일이 저와 연관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괴한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뒷조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오. 그 배후가 수월이라는 것도 알아냈을 테지. 허나, 정작 수월의 누가 그 일을 하였는지는 알기 힘들었을 게요.”

만사여의의 정체는 수월 내에서도 극히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레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괴한들은 정확하게 표적을 정했소. 그것도 방비가 가장 약할 시기를 노렸지.”

“그런 정보를 알려줄 사람을 찾아보면……. 이런, 제가 첫손가락에 꼽히겠군요.”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여울네는 피곤한 듯 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간택 때 당신이 보인 총명함을 제가 과소평가한 모양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아 다된 거래를 그르치고 말았군요.”

여울네의 한숨 섞인 말에 한서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너만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다.”

그녀는 어느새 포박이 풀려있었다.

천호와 백호가 시선을 끄는 사이 몰래 숨어든 세손의 좌익위 최치성이 그녀를 구한 것이었다.

“괜찮으냐?”

최치성의 걱정에 한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라버니.”

“감사라면 저분께 하여라. 빈씨께서 여울네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두 번 다시 널 보지 못할 뻔하였구나.”

최치성은 이레를 눈짓했다.

“마땅히 감사해야지요.”

한서로가 이레에게 다가갔다.

“다행입니다.”

“네, 무사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한서로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사한 것은 당연히 고마운 일이지요. 제가 다행이라 한 것은 빈씨께서 이곳에 계신 것을 뜻한 겁니다.”

“네?”

한서로가 이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제 안목, 그래도 전혀 쓸모없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하였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여 죽을 뻔하였다.

하지만 그 믿음이 다시 그녀를 죽음의 나락에서 구하였다.

“이번 거래로 큰 빚을 졌으니,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축난 몸부터 추스르시지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혼란이 정리되었다.

여울네는 마지막 발악인 듯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까지 들고 거칠게 저항했지만, 천호와 백호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레야, 괜찮으냐?”

뒤늦게 홍인모와 함께 나타난 형운은 이레의 안위부터 챙겼다.

창고 앞을 지키던 공방의 젊은 일꾼들을 정리하느라 한발 늦게 도착한 것이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이레의 말에도 형운은 안심하지 못했다.

“믿지 않는다 하였다.”

형운은 이레를 제 품속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듣기 좋은 나직한 저음과 함께 따뜻하고 너른 가슴이 이레의 뺨에 닿았다.

천길 아득한 벼랑 끝에 서 있다 한순간 든든한 바람벽으로 둘러싸인 듯 아늑했다.

완벽한 보호막에 둘러싸인 어린 짐승처럼, 이레는 형운이라는 완벽한 둥지 속에 안착했다.

익숙한 향기에 이레는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형운은 좀처럼 이레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영영 놓고 싶지 않았다.

형운은 하늘에 염원하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길.

그러나 그의 염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흠흠.”

등 뒤에서 어색한 헛기침이 들려왔다.

이윽고 한서로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형운과 이레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두 분, 구출(救出)하러 오신 겁니까? 구애(求愛)하러 오신 겁니까?”

***

“……저 여인이었구나.”

잠시 멈췄던 세상이 다시 흘렀다.

상황을 정리하던 형운은 여울네를 보며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참으로 묘한 것이 인생이라.

여울네는 한서로를 묶은 포승줄에 포박되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참으로 그러하구나.”

“욕심이 일을 망치는 법이지요.”

좀 전까지 발악하듯 날뛰던 여울네도 포승줄에 묶인 이후로는 저항을 포기한 듯 순순히 움직였다.

“좁은 곳에 있었더니 답답하구나. 어서 나가자.”

형운의 말에 모두 밖으로 향했다.

일행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이레는 한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번 사건을 주도한 자가 제 오라비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 괴한 중에 제 오라비가 있었습니까?”

이레가 별궁에서 나온 이유.

바로 만사여의를 납치한 주범이 김기대, 이레의 오라버니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정상을 되찾았다.

만사여의도 구했고, 범인을 잡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오라버니에 대한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다.

“오라버니라니요?”

한서로는 김기대에 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여울네에게로 집중되었다.

여울네는 눈과 입을 꾹 닫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네게 조금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고집 그만 부리고 아는 대로 말해라.”

천호가 달래듯 말하자 여울네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일에 관하여는 아는 바 없소. 주인님을 습격한 것은 내가 도모한 일이 아니라, 그자들이 꾸민 일이니…….”

“그자들?”

그제야 이레는 망각한 사실이 하나 더 있음을 깨달았다.

“괴한들은 대체 누굽니까?”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이레는 일행들과 함께 창고 밖으로 나섰다.

일순, 새카만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세상은 고요 속에 잠들어 있었다.

문득 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조용해.’

밤은 소란스러웠다.

밤벌레소리, 들짐승 우는 소리.

고요를 깨우는 밤새 소리.

작은 인기척조차 크게 울리기에, 오히려 시끌벅적한 낮보다 밤의 소란이 더 크고 깊은 진동을 만들었다.

한데, 지금은 너무도 조용했다.

그 흔한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일순,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답이라도 하는 듯 반갑지 않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이구, 이게 누구래유.”

소름 돋는 긴장감 사이로 한 사내가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부처럼 어리숙한 인상.

“오랜만이네유.”

사내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의 손엔 시퍼런 낫이 들려 있었다.

“잘 지내셨슈? 그러니께…… 이게 얼마 만이래유? 간만에 만나니께 참말로 반갑네유.”

단양에서 사라진 호방, 박진봉이 속없는 사람마냥 이레와 형운을 향해 빙글빙글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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