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97화 (97/215)

#97. 밤 풍경

두 마리의 말이 어두운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은자원의 은자들.

서강율과 장무열은 역관에서 빌린 말을 타고 곧장 인왕산 중턱에 있는 기루(妓樓)로 향했다.

이레가 회임한 여인들이 잡혀 있을 거라 짐작한 장소였다.

마을에서 기루가 있는 계곡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반 시진.

다행히 길이 험하지 않아 말을 타고 이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산 초입에 들어서기 무섭게 말을 두고 도보로 움직였다.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산을 오른 지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서강율이 끙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무슨 놈의 기루가 이런 첩첩산중에 박혀 있나. 말 없는 사람은 찾아오지도 말란 소리인가? 말 못 타는 기녀들은 어쩌고? 설마, 이 높은 곳을 가마 타고 오르는 사람은 없겠지?”

불만이 끝이 없었다.

말도 많고, 엄살도 심하고, 탈도 많은 사내.

장무열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이보게, 은호. 그리 매정하게 걷지만 말고, 우리 좀 쉬었다 가세나. 자네의 급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 사정도 말이 아닐세.”

서강율은 기어이 길옆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보이는가, 이거.”

서강율은 장무열에게 구멍 난 신을 내밀었다.

“치워라.”

“그러지 말고 이 신을 좀 보란 말일세. 이 신으로 말하자면 장안에서 솜씨 좋기로 소문난 갖바치에게 사정사정해서 반값으로 산 신이란 말일세. 그 신에 이렇게 휑하니 구멍이 났네. 이러니 걸을 때마다 얼마나 아프겠나?”

솜씨 좋은 갖바치의 신이라는 점을 자랑하는 것인지, 그런 귀한 신을 싸게 샀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발이 아프다고 푸념하는 것인지.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저런 인간이 암행대의 어사라니.’

장무열은 서강율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밤낮으로 뒤를 쫓던 시절을 떠올렸다.

돌이켜보건대, 참으로 어리석고 쓸데없는 짓을 했더랬다.

서강율의 기이한 행보에 호기심을 느껴 뒤를 캤고, 마침내 정체를 밝혔다.

암행대의 어사.

사헌부 소속의 어사와 달리 왕이 직접 뽑아 임무를 하달하는 왕의 특명 사신.

정3품의 직위이나 왕에게 직접 명을 받고 직접 보고를 올리기에, 그 위상과 위엄은 정승 판서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단한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저리 촐싹대고 방종한 사내일 줄이야.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아직 밝히지 못한 비리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처럼 허술한 사내가 암행대의 어사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서강율의 목소리가 장무열의 상념을 깨트렸다.

좀 전까지 바위에 앉아 엄살을 떨던 그가 어느 사이엔가 장무열의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설마, 우리 은랑 생각을 한 건 아니지?”

빙긋, 서강율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다.”

냉랭한 대답이 서강율을 향했다.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은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장무열은 가슴 한가운데로 바람이 부는 듯 헛헛하였다.

그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터덜터덜 걷던 서강율이 무심히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만 미련을 버리시게.”

우뚝.

장무열은 걸음을 멈췄다.

다리가 땅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몸을 굳게 한 서강율은 태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제 은랑은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셨네.”

그의 걸음만큼이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자네가 어쩌다 그분께 깊이 빠져들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감히 마음에 품어선 아니 될 분일세.”

서강율이 뒤를 돌아보았다.

“별궁에 계신 그분의 모습. 그대도 보지 않았는가?”

한들한들 느긋하게 흔드는 부채.

하지만 장무열의 향한 서강율의 눈빛은 심해처럼 깊었다.

그런 것이었나.

별궁에 갔었던 이유, 그런 셈속이었나.

그 여인의 모습을 보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한 분이시니, 그만 마음 접으란 의미였던가.

“이 이상 집착하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네. 은백의 뉘인지, 자네도 모르진 않을 터.”

알고 있다.

그분이 누구인지.

그런 자리에 계신 분이 아니었다면.

이리 맥없이 당하고만 있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쓸데없는 간섭이다.”

장무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성큼 큰 걸음으로 그는 서강율을 지나쳤다.

등 뒤에서 서강율의 신세 한탄 같은 넋두리가 들려왔다.

“실은 나도 자네의 그 아픈 마음을 잘 알고 있다네.”

“……?”

느닷없는 고백에 장무열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재주라면 재주.

서강율은 종종 몇 마디 말로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고, 마음을 흔드는 요사를 부리곤 하였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언제나 저자의 세 치 혀에 현혹당하고 만다.

“나도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은 사람들이 있다네. 그래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그 애타는 마음, 잘 알고 있지.”

마음에 품은 여러 사람이라.

또 말 같지 않은 허풍을 늘어놓을 생각인가 보다.

장무열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어떤 여인들인데, 간절히 만나고 싶어도 보지 못한단 말인가?”

“여인? 글쎄, 그들 중에 여인도 있을 수 있겠지. 허나, 아마 대부분은 사내일 걸세.”

“…….”

대부분이 사내들이다?

설마, 자신의 특별한 성향을 고백하고 싶어 말문을 연 것은 아니겠지?

“그들이 누군가?”

“십학사.”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라, 장무열은 미간을 곤두세웠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십학사에 관한 이야기라면 장무열 역시 알고 있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권력.

천하엔 두 개의 하늘이 존재한다.

왕이 다스리는 세상과 십학사들이 좌우하는 세상.

왕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십학사란 자들이라고.

장무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두 만들어낸 소리에 불과하다.”

“차라리 모든 게 뜬소문에 헛소리였으면 좋겠군.”

서강율이 부채를 으스러지라 움켜쥐었다.

언제나 헐렁하던 그의 전신에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직접 보았는가?”

장무열의 물음에 서강율은 분한 듯 중얼거렸다.

“유감스럽게도 산 사람을 만날 기회는 없었지. 허나, 그들은 분명 존재하네.”

그 단호한 대답에 장무열의 표정이 굳었다.

십학사를 입에 담는 서강율의 눈빛.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수많은 아수라장을 지나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픔과 공허함이 그 속에 있었다.

“내겐 세 가지 소원이 있다네. 그중 하나가 십학사를 모조리 잡아 들이는 것이지.”

“나머지 둘은?”

“은자원의 은자들과 일평생 편히 놀고 즐겁게 사는 것.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어느 분께서…… 높고 큰 뜻을 온전히 펼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네.”

장무열은 서강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호젓한 산길을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걸어서일까.

이 밤의 서강율은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엿본 것 같았다.

뜻밖의 감정을 털어내려 장무열은 괜스레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이런!”

돌연 서강율이 장무열을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풀숲으로 끌려 들어간 장무열은 서강율과 한데 뒤엉켰다.

고개를 들자 까만 눈동자가 망막에 맺혔다.

서강율의 날렵한 콧날이 제 코와 닿을 듯 가까웠다.

“이게 무슨 짓…….”

“쉿!”

거칠게 항의하려는 장무열의 입술을 서강율이 부채로 막았다.

장무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 미친 자를 보았나.’

장난이 도를 지났다.

이 어두운 밤, 풀숲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자태란 말인가.

아니면 이 자…….

설마, 남색이라도 즐기는 건가?

뒷목이 뻣뻣해지고 오감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장무열의 귓가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산길을 울리는 어지러운 소음.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장무열은 놀란 눈으로 서강율을 보았다.

이 소리를 미리 들었다고?

장무열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는 듯 서강율은 부채 끝에 힘을 주었다.

곧 두 사람이 숨은 풀숲 옆으로 십여 필의 말이 지나갔다.

말에 탄 자들은 하나같이 칼을 비롯한 무기로 무장한 자들이었다.

“기루에 가는 차림새치곤 특별하군.”

서강율은 옷에 달라붙은 낙엽과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섰다.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는 장무열을 일으켜 세우며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일어나시게. 아무래도 우리 은랑이 제대로 짚은 모양일세.”

***

서강율과 장무열은 말 탄 자들을 쫓아 밤길을 달렸다.

반 식경 후.

그들은 계곡 중턱, 우렁찬 폭포 소리에 잠긴 기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정작 그 흔한 불빛 하나 밝히지 않은 기루라.”

기루의 문이란 문은 모두 덧문이 내려져 있었다.

“이곳의 주인장은 은백과 취향이 비슷한 모양이군.”

“…….”

장무열은 대꾸하지 않았다.

시답잖은 말에 일일이 대응할 만한 정신이 그에겐 없었다.

저곳에 죄 없는 여인들이 갇혀있었다.

절규하던 형의 모습이 그의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는 기루를 향해 성큼성큼 너른 보폭을 옮겼다.

촤륵.

조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장무열의 앞을 서강율이 가로막았다.

“뭐하는 짓이냐?”

서강율을 향한 장무열의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가득했다.

“자넨 다 좋은데, 성격이 급해서 탈일세.”

“저곳에 범인들이 있다.”

“그렇지. 그리고 여인들도 잡혀있겠지.”

“…….”

“허나, 이리 대뜸 뛰어들었다가 놀란 범인들이 여인들에게 위해라도 끼치면 어찌할 텐가?”

“이리 머뭇거리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대책은 세워야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촥.

서강율은 부채를 접었다.

“일단 적의 동정부터 살피세. 행동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터.”

“…….”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인지라.

장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강율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은호, 자넨 뭐든 시원시원하군. 그게 참 보기 좋다네.”

***

서강율과 장무열은 기척을 숨긴 채 기루로 접근했다.

지키는 자들의 눈을 피해 이 층 누각에 올랐다.

오래된 누각의 낡은 난간 사이로 듬성듬성 구멍이 보였다.

그곳에 눈을 대고 살피니 아래쪽의 동정이 어렴풋이 잡혔다.

한때는 기루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전각의 문마다 휘장이 내려졌다.

바닥엔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나뉘어 이부자리가 길게 깔려 있었다.

그 이부자리마다 여인들이 누워 있었다.

지쳐 보이는 얼굴들.

깡마른 팔다리.

부푼 배.

모두가 산달이 임박한 임부들이었다.

방문 밖엔 칼 찬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잡힌 환경이 불편해서일까, 아니면 어디 불편한 탓일까.

여기저기에서 옅은 신음들이 흘러나왔다.

개중엔 흐느끼는 속울음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울음소리가 들리는 무섭게 무사들의 협박과 욕설이 날아들었다.

장무열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종된 회임한 여인들.

그녀들이 이곳에 있었다.

살아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끔찍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상황.

끼이익.

굳게 닫힌 방문이 열렸다.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몇 사람이 들어왔다.

화려한 비단도포 차림의 사내를 선두로 아홉 명의 사내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비단도포 차림의 사내였다.

그는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다른 사내들은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좋지 않다.’

상황을 살피던 장무열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피해자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유.

그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납치된 여인들에겐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곧 복면인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환기 좀 하면 안 되겠나?”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복면 사내가 혀를 찼다.

“퀴퀴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 없군.”

이마에 유난히 큰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계곡 옆이라 찬바람이 잦소.”

“좁은 곳에 사람들을 이리 몰아놓고 문도 열지 않으니…… 악취가 들끓지 않나?”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사내는 복면을 반쯤 들고 비단 손수건으로 코를 풀었다.

귀한 비단을 몸에 두르고 값진 흑립을 머리에 쓰고 있었지만, 복면 사내의 언행은 거칠고 몰상스러웠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짓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계집들을 죄 모아놓은 이유가 뭔가? 날 이곳으로 부른 연유는 또 무엇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복면인의 물음에 칼자국 사내가 비열한 웃음을 보였다.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어허, 이 사람이. 뭘 다 안다는 겐가?”

“곧 이 나라의 앞날을 결정지을 큰일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모를 뒤탈을 생각하여 우리가 준비한 일입지요.”

“뒤탈이라니. 그 무슨 입에 담지 못할 말인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할 거란 말인가?”

“일이 모두 잘 될 거란 보장도 없습지요.”

“그럴 일 없네.”

“하면…… 반드시 원하시는 대로 될 거란 말입니까. 그걸 어찌 장담할 수 있는지요?”

“그건…… 어허, 이거 참.”

말문이 막힌 복면 사내는 연신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칼자국 사내가 그에게 바싹 다가갔다.

“아시지 않습니까? 소원 마마께 거는 십학사 어르신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말입니다. 만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이 사람이!”

복면인은 급히 칼자국 사내의 입을 막았다.

그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찌 그리 주의력이 없는 겐가? 누가 들으면 어쩌려 그러는가?”

칼자국 사내가 복면인의 손을 뿌리쳤다.

“뒷걱정은 우리가 감당할 몫이니, 어르신께선 선택만 하시면 됩니다. 듣자 하니 그분께선 이미 동의하셨다 하십니다.”

복면 사내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그분이라니. 설마 내 누이가 이 일을 동의했단 말인가? 이 사람,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가. 내 차근차근 설득해본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우리도 어쩔 수 없었습죠. 예정보다 일찍 산통이 온 모양입니다. 그분께서도, 우리 쪽에서도 더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산통? 아직 한 달이나 남았을 터인데.”

산통이란 소식에 복면인은 안절부절못했다.

사실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허세를 부려보았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일을 어떻게 누이에게 전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칼자국 사내의 말을 들으니 이미 그 문제도 해결된 모양이다.

“큰일이군. 예서 궁으로 옮기는 시간도 적잖게 걸릴 터인데. 만약, 때를 놓치면 어찌한단 말인가?”

“걱정 마십시오. 아이가 그리 쉽게 나온답니까?”

“하지만 산통도 일찍 온 데다 만약…….”

“마지막으로 거둬들인 물건이 마침 수확하기 직전이더군요. 그래서 이곳으로 부르지 않고 곧장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랬는가.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복면 사내의 입에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책으로 두어 명 더 골라주게.”

칼자국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런데 말일세…….”

“또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남은 계집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이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수의 여인들을 납치하였다.

사내아이를 얻기 위함과 출산 시기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복면 사내는 일이 모두 끝난 후가 궁금했다.

상황이 끝난 후, 납치한 여인들과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찌할 것인지.

칼자국 사내가 풀썩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뒤탈 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여인들을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대하는 사내의 표정과 말투가 어쩐지 섬뜩했다.

“하, 하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어험.”

복면인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칼자국 사내가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어르신께서 결정하셨다. 적당한 계집으로 두어 명 추려서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무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잠시 후, 여인들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려달라는 외침과 친분이 생긴 여인들끼리 서로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였다.

사람을 끌어내는 일이 수월하게 풀리지 않자, 칼자국 사내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젠장, 바빠 죽겠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칼자국 사내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쇠붙이를 뽑았다.

“어차피 이젠 필요 없으니. 솎아낸 계집을 제외하곤 모두 정리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사들은 손에 칼을 쥐었다.

어둠 속에서 섬뜩한 날붙이가 번뜩거렸다.

불길한 죽음의 냄새가 기루를 가득 채웠다.

***

내내 숨죽이던 장무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인들을 향해 다가서는 무사들의 살기.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장무열은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난간을 밟고 바람처럼 날아오른 그는 섬뜩한 살기를 흩뿌리는 무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이놈은 뭐야?”

“누, 누구냐!”

무인들 사이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승사자다.”

은호, 장무열.

그는 성난 범처럼 날뛰었다.

그가 몸을 날릴 때마다 무인들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쯧쯧, 끝내 참지 못하고 뛰어나갔네.”

서강율은 혀를 찼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는 장무열을 막으려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생사 사의 갈림길에 처한 여인들의 모습.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수가 좀 많군. 원군이 오려면 아직 멀었나?”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장무열이 사헌부에 연통을 넣었다.

곧 그들을 도와줄 아군이 도착하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길에 몇 사람 더 챙겨올 걸 그랬군.”

서둘러 오느라 평소 함께 다니던 사람들을 부르지 못했다.

“하여간 은호, 저 독종과 함께 있으면 항상 몸이 고생하는 것 같단 말이지.”

서강율은 부채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연신 앓는 소릴 흘리는 그의 입가엔 선선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같은 시간, 공방 거리 끝에 위치한 수월.

범인을 찾는다며 한바탕 폭풍처럼 몰려와 온갖 소란을 떨던 어사대는 별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다.

어사들이 물러간 후에야 비로소 수월은 본래의 고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마당의 횃불이 하나둘 꺼지고, 방안의 희미한 등잔도 사라졌다.

수월은 그야말로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내외부를 살피고 정리한 여인이 마지막 문단속을 끝냈다.

그녀는 곧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수월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화려한 가마가 수월의 밤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호위 무사인 천호의 말에 가마의 창이 열렸다.

가마 안에서 지혜로운 별빛을 담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

이레였다.

형운과 작별인사 후, 마땅히 별궁으로 향해야 했을 이레는 아직 공방 거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찾지 못한 한 사람 때문이었다.

만사여의, 한서로.

그녀가 남긴 자료로 실종된 여인들이 어디에 잡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만사여의의 종적은 묘연하였다.

그간 만사여의에게 받은 여러 가지 도움과 오라버니가 덮어쓴 억울한 누명.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단서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기다렸고, 드디어 원하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레는 가마 문을 열고 나왔다.

“지금부터 저 여인의 뒤를 은밀히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단정한 한 마디에 천호와 백호는 당황했다.

뜻밖의 명이었던 까닭이다.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저자냐? 네가 쫓는 자가.”

천호와 백호가 빠른 움직임으로 이레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경계하는 그들 앞으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사내를 확인하고 천호와 백호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다, 당신은…….”

당황한 두 호위무사 사이로 이레가 나섰다.

“오셨습니까, 은백.”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내.

이레는 형운과 그의 좌익위 최치성, 그리고 우익위 홍인모에게 차례로 시선을 보냈다.

하얗게 미소 짓는 이레를 향해 형운이 말했다.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꼭 오실 거라 믿었으니까요.”

형운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가 괜찮다 하였으니.”

언젠가 그는 다짐하였다.

이레가 괜찮다, 아무 일 없다 하면 절대 믿지 않기로.

별궁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말에 이레는 괜찮다 답하였다.

그러니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얌전히 별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 말했던 것이다.

이레가 물었다.

“화내지 않으십니까?”

형운이 미소를 보였다.

“화내면 앞으로 이런 짓 하지 않을 테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도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면…….”

“너는 또 이리하겠지.”

“송구합니다.”

이레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런 그녀를 형운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겉보기엔 한없이 연약하고 여린 여인.

하지만 이 여인이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그녀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내 그림자 속에 숨겨둘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가자.”

형운은 이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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