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풀숲에 숨은 독사
술맛 좋기로 유명한 사월루.
하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탓에 오늘도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그런 사월루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예정에 없었던 빈객의 방문인지라.
기루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오랫동안 이용한 사람이 없었던 별채엔 한기가 가득했다.
기녀들은 서둘러 별채 바닥에 도톰한 보료를 깔고 숯 담긴 화로를 들였다.
덕분에 한겨울의 시린 기운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하하. 이렇게 또 은자원의 은자들이 한자리에 모였구려.”
자리에 앉자마자 서강율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적어도 십 년 안에 다시 모일 일은 없을 거로 생각하였는데, 참으로 뜻깊은 자리가 아닐 수 없소. 어렵게 마련한 자리인 만큼 먼저 듭시다.”
그가 찻주전자를 들고 은자들의 잔에 일일이 차를 따라주었다.
“술이 아닌 게 참으로 아쉽구려.”
서강율은 입맛을 다시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은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채의 싸늘한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형운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고, 그와 마주 앉은 장무열도 좀처럼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앉은 이레는 마치 죄라도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서강율은 연신 부채질만 했다.
“어허, 덥다.”
숨 막히는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장무열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요?”
그의 시선은 이레가 아닌 형운을 향해 있었다.
“어찌하여 별궁에 계실 분이 수월로 걸음 하신 것이오?”
형운은 담담한 눈으로 장무열의 추궁에 답했다.
“그대들의 탓이 아닌가.”
“무슨 뜻이오?”
“사헌부의 어사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니, 엉뚱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걸 바로 잡고자 은랑이 직접 나선 것이 아닌가.”
“…….”
장무열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형운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사건 초기에 범인들을 잡았다면, 이레의 실종된 오라비가 용의자로 지목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레가 별궁 밖으로 나오는 일도 없었으리라.
수사에서 배제된 장무열의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이 있었지만, 변명은 하지 않았다.
“아직 조사 중인 사안으로 알고 있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은…….”
빈씨는 별궁에 있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분명 그래야 옳은 것인데…….
형운이 장무열의 말을 잘랐다.
“빈씨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이냐?”
형운과 무열, 두 사내 사이에 오가는 억양이 점점 뜨거워졌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괜히 찻잔만 들었다 놨다 하던 서강율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분께선 은자원의 은자이기도 하지. 안 그렇소? 은백.”
도발하는 듯한 서강율의 질문.
형운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 뜨거워라.”
서강율은 얼른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긴 했지만, 형운도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은자원의 은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다.
딱히 율법으로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지켜야 할 원칙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규칙을 모르는 은자는 없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철저히 따랐다.
왕세손인 형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속으로는 연신 삭탈관직을 외치면서도 서강율의 무례한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은자원과 은자들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로 자리 잡았다.
형운의 눈빛이 사그라지자 서강율이 주위를 환기했다.
“자자, 다들 진정합시다. 사정이 무엇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거늘. 이제 와 따져 무얼 하겠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다들 알고 있다, 이레의 절박한 상황을.
형운이 서강율에게 물었다.
“그럼 중요한 게 무엇인가?”
“은랑이 수월을 조사하였다는 점.”
서강율은 이레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자, 은랑. 말해보시오. 무얼 발견하였소?”
이레는 서강율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회임한 여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
“이곳입니다.”
이레는 형운이 꺼낸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한양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이었다.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은 깊은 산중이 아니냐?”
“산을 끼고 계곡을 앞에 두고 있어 언뜻 깊어 보이지만, 실은 이곳으로 오르는 평탄하고 완만한 길이 있습니다.”
서강율이 이레의 설명을 보충했다.
“맞소. 이곳에 유명한 기루가 있지. 장소가 은밀하고 기녀들의 미색이 출중하여 고관대작들이 이곳에서 은밀한 만남을 자주 가진다오.”
세세한 부연설명에 은자들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서강율을 빤히 응시했다.
서강율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절대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즐겼다는 뜻이 아니니.”
은자들은 무표정한 눈을 다시 지도로 돌렸다.
이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협의 말씀대로 이곳엔 십여 년 전에 세워진 기루가 있습니다. 병풍처럼 두른 산과 계곡의 자태가 빼어나 풍류를 찾는 많은 선비가 이곳을 방문하였다 들었습니다.”
형운이 한마디 했다.
“금주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들었습니다. 바로 이곳처럼 말이죠.”
이레의 말대로 저녁 늦은 시각이건만 사월루의 손님이라곤 별채에 모인 은자들뿐이었다.
술 대신 음식을 판다고 해도 찾는 손님이 없었다.
장무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기루라면 낯선 여인들이 오가도 수상하게 보지 않겠군.”
서강율도 한마디 덧붙였다.
“어쩌면 이번 사건이 금주령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의심이 드는군.”
일찍이 술의 해악을 깨달은 주상 전하께서 금주령을 내렸다.
역대 많은 왕이 흉년을 이유로 계숭음(戒崇飮)을 하였지만, 현왕은 그 정도가 무척 심했다.
심지어 제사에 쓰는 술마저도 예주(醴酒)로 대신하라 명하고,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
백성을 위한 조치였지만, 관련 업종에 몸담은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장무열이 말했다.
“하루아침에 돈줄이 막히고,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으니. 독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겠지.”
서강율의 생각은 장무열과 결이 달랐다.
“어쩌면 다른 사악한 종자들이 곤궁한 처지에 놓인 자들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은협은 이를 갈았다.
그의 뇌리에 들어찬 세 글자, 바로 십학사였다.
십학사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주류로군. 괜찮을까 모르겠네.”
서강율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각을 정리하던 형운이 감은 눈을 떴다.
“안심해도 된다.”
사월루의 진짜 주인, 다름 아닌 만사여의였다.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형운의 확고한 대답에 서강율은 안심했다.
“은백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믿을 수 있겠군.”
그는 이번에는 이레에게 물었다.
“은랑은 대체 무슨 수로 여인들이 갇힌 장소를 찾아낸 것이오?”
“제가 아닙니다.”
“그럼?”
“수월의 주인입니다. 그 사람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나름 조사를 한 모양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사여의 한서로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특히 만사여의가 집중한 것은 여인들이 사용하는 물품.
스무 명 가까운 여인들이 실종되었다.
실종된 여인들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분명 필요한 물품을 대량으로 사들인 자가 있을 것이다.
한서로는 회임한 여인들에게 꼭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의 흐름을 조사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실종되었다.
“실종된 여인들이 살아 있으면, 틀림없이 필요한 물품을 사들일 것이다. 과연 상인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로군.”
서강율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지금까지 이 사건을 조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이은 여인들의 실종에 백성들은 불안해했고, 이에 왕세자는 이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헌부 역시 필사적으로 범인 수색에 앞장섰다.
그럼에도 작은 단서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애초에 수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사헌부에서 이뤄진 조사들은 실종된 여인들이 죽었거나, 아니면 먼 지역으로 팔려갔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뤄졌다.
애초에 죽거나 조선 팔도로 흩어졌다고 단정하였으니,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우리 은랑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맞소?”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조금 관심을 가진 정도입니다.”
이레의 대답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라면…… 지금껏 많은 문제를 풀어낸 은랑이라면 처음부터 확신하였으리라.
그러니 그 짧은 시간 동안 범인들의 은닉처를 알아낼 수 있었겠지.
실제로 한서로가 남긴 자료엔 회임한 여인들에게 필요한 품목만 적혀있는 게 아니었다.
한서로는 자신의 정체만큼이나 보안에도 치밀했다.
여울네가 건넨 서책에는 필요한 조사 내역 외에도 잡곡과 비단 같은 품목들이 함께 적혀 있었다.
얼핏 보면 상단의 장부책 정도로 보였으리라.
이레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서로가 남긴 자료를 보고 결론을 도출해내기 어려웠을 터였다.
“이곳에 여인들이 잡혀있단 말이군. 어찌해야 그들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을까.”
서강율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릴 때였다.
돌연, 장무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형의 여인이 저곳에 잡혀있을지도 모른다.
더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거참, 성격도 급한 친구로군.”
말과는 달리 서강율 역시 툭툭 몸을 털고 일어섰다.
“오랜만의 모임인데, 아쉽지만 나도 이만 가봐야겠소. 저 지독한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말이야. 은백, 은랑, 다음에 또다시 만납시다.”
서강율은 선 채로 제 자리에 놓인 차를 벌컥 마셨다.
“이 뜻깊은 자리에 술이 없다니, 참으로 아쉽군.”
탁.
서강율은 텅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
사월루를 나서니 스산한 밤안개가 가득했다.
앞서 걸음을 옮기던 장무열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우뚝 멈춰서 서 별채를 돌아보았다.
이레에게 작별 인사하는 걸 잊었다.
돌아가 인사를 해야 할까?
장무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은 작별 인사를 할 때가 아니다.
장무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강율이 그 뒤를 허둥지둥 따르며 투덜거렸다.
“이보게, 은호. 함께 가세.”
***
은자들의 회합이 끝났다.
은협과 은호.
두 사람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은백과 은랑도 곧 별채를 나섰다.
별채 정원에 낯익은 가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운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이레는 천호와 백호가 지키는 가마로 향했다.
“이레야.”
형운의 조용한 부름에 이레는 걸음을 세웠다.
“약조해다오, 이대로 곧장 별궁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네.”
“오라비 일도 내게 맡겨라. 마음 불편하겠지만, 당분간은 네 생각만 하거라.”
형운의 당부에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둠 속에서 이레가 미소 지었다.
박꽃처럼 하얗고 말간 웃음.
밤안개를 두르고 선 모습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
문 소원을 위해 마련한 호산청에 손님이 찾아왔다.
“옹주마마.”
화완옹주의 방문에 문 소원은 반색했다.
산달이 가까워진 터라.
호산청에 갇힌 듯 살고 있었다.
가끔 산책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보기도 하지만, 예전과 같은 자유로움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화완옹주가 찾아오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잘 지냈는가?”
“이 답답한 곳에 갇혀 숨만 간신히 붙어있습니다. 옹주마마께서 이리 찾아주시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화완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 소원의 부른 배를 보았다.
“예정일이 언제라 하였는가?”
문 소원은 뿌듯한 표정으로 제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 꼭 한 달 남았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먼.”
도 상궁이 다담상을 내왔다.
화완옹주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조정의 기강이 예전 같지 않으이. 주상 전하께선 연로하시고, 대리청정하는 세자께선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시니.”
“여전히 외유가 잦으신 모양입니다?”
“연일 일탈만 일삼으시니, 관료들과 백성들의 근심이 클 수밖에.”
“걱정 마시옵소서. 이제 나라의 종묘사직은 이 아이가 책임질 것이옵니다.”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화완옹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쓰다듬던 옹주가 넌지시 말을 내어놓았다.
“그런데 말일세…….”
“무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만약 그 아이가 사내아이가 아니라면 어찌하겠는가?”
“네?”
“자네 배 속의 아이 말이야. 낳고 보니 사내아이가 아니라면 어찌할 생각인가?”
문 소원은 배를 감싸 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저었다.
“이 아이는 틀림없는 사내아이입니다. 이 조선을 강건하게 지킬 왕이 될 아이란 말입니다.”
“자신할 수 있는가?”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어미이기에 장담할 수 있는 겁니다.”
그간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사내를 낳게 해준다는 온갖 것들을 쓰다듬고, 만지고, 품고, 베개 아래에 두었다.
영험한 무당을 궁으로 불러 몰래 굿을 하고, 관상가와 점쟁이까지 동원해 길일까지 잡아놓았다.
그런데 이 아이가 사내가 아니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불안함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안은 풀숲에 숨은 독사 같았다.
평소엔 어둠 속에 똬리를 튼 채 그 존재조차도 숨긴다.
그곳에 독사가 있는 줄 모른 채 지나치기 마련.
하지만 일단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불안은 그 즉시 사람의 발목을 물어버린다.
독이 퍼지듯, 빠르게 전신으로 퍼져나간 불안은 곧 몸과 마음 모두를 삼키고 만다.
“그럴 리…… 없습니다.”
문 소원은 체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간 애써 감추고 무시한 불안이 화완옹주의 몇 마디로 인해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정작 그녀를 흔들어 놓은 화완옹주는 태연하기만 하였다.
조용히 차를 마시고, 비단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다 문 소원의 낯빛이 파랗게 변하고 나서야 비로소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리 장담하니 다행이군.”
“대체 그런 말씀을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옹주마마께선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내가 소원에게 무얼 원하겠는가. 다만…….”
화완옹주는 뒷말을 흐렸다.
그녀의 느긋한 태도에 조급증이 인 문 소원은 속이 탄 듯 가슴을 두드렸다.
이윽고 화완옹주가 고개를 들었다.
“난 그저 조선의 종묘사직인 강건하길 바랄 뿐일세. 그래서 자네가 꼭 사내아이를 출산하기를 바라고 있다네.”
옹주의 검은 눈동자가 문 소원을 향했다.
문 소원은 미간을 찡그렸다.
화완옹주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체 무슨 셈속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화완옹주는 직접 답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마시던 차를 찻상 위에 내려놓았다.
“부디 그 아이가 사내아이이길 바라고 또 바라겠네. 그것이 이 나라와 문 소원, 모두를 위한 길일 터이니 말이야.”
부드러운 미소와 상반되는 냉혹한 한 마디를 남긴 채, 화완옹주는 호산청을 떠났다.
문 소원은 차마 옹주를 배웅하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
그녀는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사내아이야.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렇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아이를 품은 자신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사내아이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
간신히 손에 넣은 부귀와 영화.
왕의 총애와 자신을 향한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
이 모든 걸 잃고 다시 천하디천한 자리로 굴러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가 왕세자와 세손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처럼, 그들 또한 그녀를 마뜩잖게 생각할 터이니.
이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천대받는 궁녀가 되어야 한다면……?
뼛골이 시릴듯한 찬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절대, 절대 그럴 수 없어.”
문 소원은 발악하듯 고개를 저었다.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난……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다.”
반드시!
문 소원은 이를 악물며 다짐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화완옹주가 풀어놓은 불안에 중독된 문 소원은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끙끙 앓았다.
객을 잃은 찻상.
화완옹주가 마시던 찻잔에 절반가량 남은 차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
그날 밤.
궁녀 복색을 한 사람이 문 소원을 찾아왔다.
십학사가 보낸 밀사(密使)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밀사의 전언에 문 소원은 카랑카랑한 분노를 터트렸다.
문밖까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성화는 그 한 번으로 끝이었다.
반 시진 후.
십학사의 전갈을 가져온 궁녀가 호산청을 나섰다. 돌아가는 밀사의 입가엔 흡족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
문 소원의 신음이 들려왔다.
“마마, 무슨 일이옵니까?”
화들짝 놀란 도 상궁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옆으로 돌아누운 문 소원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배가…… 배가…….”
주리를 트는 듯한 고통.
산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