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매혹(魅惑)
궁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곳을 꼽으라면 세상 사람 중 태반은 시전을 꼽을 것이다.
값비싼 비단에서 사소한 노리개까지.
서역에서 흘러들어온 아름다운 보석에서부터 산골 노인이 만든 투박한 방망이까지.
새롭고 신기한 물건은 모두 시전으로 모인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진귀한 물건을 취급하는 이들이 첫손에 꼽는 곳은 달리 있었다.
입전, 수월.
겉보기엔 좁은 공방거리 끝에 위치한 입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귀한 물건들이 모인 곳이었다.
사계 노인을 비롯한 조선 팔도의 이름난 장인들의 작품이 이곳에 걸려 있었다.
부와 명예를 노리는 장인이라면 누구나 수월에 자신이 만든 작품이 걸리길 소망하였다.
그 수월의 내실에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여인과 키 큰 사내가 걷고 있었다.
빈씨가 된 이레와 팽례 강현보였다.
‘드디어 이곳까지 왔구나.’
세자에게서 오라버니의 소식을 들은 이후, 이레는 내내 고민하였다.
이대로 마냥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이레는 별궁을 빠져나왔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러 번 간담이 서늘할 만큼 큰일을 도모하였지만, 이번만큼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던 적은 없었다.
‘그나저나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불 꺼진 수월의 음울한 모습이 이레의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잠긴 수월이 마치 만사여의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암시하는 것 같아 두려움마저 일었다.
“아가씨.”
그녀가 수월의 안채로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 나왔다.
무리의 한 가운데 선 중년 여인을 알아보고 이레는 반색했다.
“여울네가 아니오.”
여울네.
세손빈 간택에 참여한 이레의 치장을 돌봐준 수모였다.
“귀한 분께서 이런 시각에 어인 걸음이십니까?”
이레를 맞는 여울네의 눈에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만사…….”
반사적으로 ‘만사여의’를 찾아왔노라 입을 뗐던 이레는 말끝을 흐렸다.
수월의 어린 소녀, 한서로.
그녀가 신비의 여장부 만사여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사여의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공개하기 전엔 침묵해야만 했다.
“서로…… 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딜 다녀온다거나, 아니면 급한 볼일이 있어 나간 것은 아닙니까?”
이레의 물음에 답을 한 것은 여울네가 아니었다.
여울네의 등 뒤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갑자기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 했습니다.”
이레가 재간택에 참여하는 내내 가마의 호위를 섰던 천호였다.
“정말…… 아가씨였군요.”
이레를 향한 그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잘 지냈소?”
“백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녀석이 착각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대체…….”
“일이 그렇게 되었소. 그보다 큰일이 벌어졌다 들었소. 자세한 정황을 알고 싶은데. 어찌 된 일이오?”
천호는 깊어진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정황을 저희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이나 이상한 점은 없었소?”
“어제 일이 늦게 끝나 평소보다 늦었던 점을 빼면 특별히 다른 건 없었습니다.”
천호의 설명에 귀 기울이던 이레는 한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만사여의의 정체는 수월 내부에서도 극히 일부만 아는 비밀이로구나.’
여울네와 천호, 두 사람은 한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한서로를 언급할 때, 두 사람의 표정과 음성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만사여의의 정체를 숨기는 건…….
한서로, 수월의 어린 소녀의 정체가 밝혀져선 안 된다는 뜻일 터.
이레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평소엔 언제쯤 일을 마쳤소?”
“해지기 전엔 일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근래엔 늦게 돌아 가는 일이 잦긴 했습니다만, 어제는 많이 늦어졌습니다.”
“무슨 일로 늦었는지 알고 있소?”
이레의 연이은 물음에 천호가 대답을 이었다.
“글쎄요. 늘 하던 것처럼 거래 장부나 고객명단을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가 일했던 곳을 볼 수 있겠소?”
이번엔 여울네가 나섰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런데…….”
강현보를 돌아본 여울네가 눈빛으로 물었다.
저 사내는 누구입니까?
이레가 설명했다.
“필요한 일이 있어 동행을 부탁했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오.”
“그렇군요. 하지만 그곳은 외인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인지라…….”
여울네의 말끝에 난감함이 묻어 있었다.
“그럼 소인은 예서 기다리겠습니다.”
강현보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이곳에서 기다리거나.”
여울네는 뒤를 따르는 수월의 일꾼들까지 물렸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물러간 이후에야 여울네는 이레를 안내했다.
수월의 안채 깊숙한 곳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두 사람은 한서로의 거처 앞에 다다랐다.
***
여울네가 안내한 방은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여장부의 방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했다.
금실로 수자 놓인 열 두폭 병풍을 제외하곤 그저 열여섯 어린 소녀의 정서가 가득 담긴 평범한 방이었다.
병풍 앞에 놓인 작은 서탁엔 장부를 비롯한 여러 서책이 쌓여 있었다.
한서로는 평소 이곳에서 머물다 중요한 손님이 오면 접객을 위해 나갔다.
“그분, 무척 검소한 모양이오.”
“세상 모든 것엔 계량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생각하시는 분이시랍니다. 굳이 사치와 검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과하지 않을 사치를 선택하실 분이시죠.”
둘만 남게 되자 여울네는 이레가 기다린 설명을 내어놓았다.
“이미 아시는 듯하지만, 노파심에서 설명하면 이곳은 그분의 진짜 집무실은 아닙니다.”
예상했던 바였다.
아마도 이곳 어딘가에 진짜 집무실로 통하는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으리라.
그러나 여울네는 그 비밀통로까지 공개하진 않았다.
대신 옷장을 열었다.
두드리고 밀어 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철컥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옷장 속으로 사라졌던 여울네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엔 한 권의 서책과 몇 개의 두루마리가 들려있었다.
“그분께서 최근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어젯밤에도 이것을 살피다 귀가가 늦은 것이지요.”
이레는 서책을 받았다.
돌연, 여울네가 무릎을 꿇었다.
“빈씨께 예를 갖추지 못함을 용서하시옵소서.”
갑작스러운 여울네의 행동에 이레는 당황하였다.
“그만 일어나오.”
이레의 만류에도 여울네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도와주십시오. 빈씨께서 남다른 지혜를 가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감히 부탁합니다. 부디 그분께서 어디에 계신지 찾아주십시오. 그분은…… 그분은 단순히 수월을 이끌기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버틸 수 있게 만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레는 여울네의 두 손으로 맞잡았다.
“내 얕은 재주가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소. 다만, 최선을 다해보겠소.”
“감사합니다.”
여울네를 위로한 이레는 서책과 두루마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서로, 만사여의가 남긴 서책과 두루마리에는 거래한 물품의 내용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최근 반년 간 누가 어떤 물건을 얼마나 거래하였는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어찌 보면 별다를 것이 없었다.
어느 상단에나 있을 물류의 동향과 시장의 기호를 파악하는 용도의 내역서.
하지만 그 의미 없이 나열된 물품과 숫자들 속에서 이레는 의미 있는 흐름을 발견했다.
이레의 눈동자에 빛이 떠올랐다.
눈치를 살피던 여울네가 물었다.
“찾으셨습니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그분이 관심을 보인 게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소.”
말과 달리 이레는 확신했다.
이 책이다.
이 서책과 두루마리의 내용이 지난밤에 벌어진 사건의 원인이었다.
이레가 진지한 눈으로 여울네에게 물었다.
“한양 인근 지역에 위치한 큰 규모의 저택이나 건물의 위치들을 알 수 있겠소?”
“자금의 동향을 살핌은 장사의 기본이라 들었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이레가 한서로의 방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의 일이었다.
***
“이걸 그분께 전해주게.”
한서로의 방에서 나온 이레는 기다리고 있는 강현보를 찾았다.
그녀는 미리 작성한 서찰을 건넸다.
“가까이 접근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니, 구태여 그분께 직접 전하지 않아도 되네. 어떻게든 그분께 전달만 되면 되는 것일세.”
“염려 마십시오.”
서찰을 갈무리한 강현보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어느새 수월 밖을 향해 내달리는 그의 등 뒤에서 이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무리해선 아니 되네.”
“고작 서찰을 전하는 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순박하게 웃은 강현보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잠깐 사이,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레는 쉬이 눈길을 떼지 못했다.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어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인기척이 다가왔다.
“무얼 그리 보느냐?”
누군가 물었다.
“걱정되어 그렇습니다. 매번 무리한 부탁을 하는데도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으니 미안할 따름입니다.”
“저런, 지금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건만. 그런 걱정으로 스스로는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까.”
이레의 말을 받아치는 상대의 음성엔 성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제야 이레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체 누구신데…….”
이레는 말끝이 흐려졌다.
이윽고 그녀의 입속에서 익숙한 호칭이 흘러나왔다.
“……은백?”
그녀를 향한 형운의 눈이 잔잔한 수면에 부서지는 노을처럼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여울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이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형운을 올려보았다.
밤낮으로 그리워했던 사람이었다.
꿈속에서라도 만나길 염원했던 사람이었건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이레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은백께서 여긴 어떻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형운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체 별궁에서 어찌 나온 것이냐?”
***
날이 저물었다.
온종일 부산하였던 별궁 역시 어두운 휴식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어쩐 일이래?”
뒷정리하던 궁녀들이 빈씨의 처소를 보며 저희끼리 쑤군거렸다.
별궁에서 교육받는 빈씨는 남달리 부지런한 분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서둘러 아침을 시작하고, 밤늦은 시각까지 불을 밝혀두셨다.
별궁에 든 이후, 단 하루도 어김이 없었다.
그런 빈씨께서 오늘은 밤이 되기 무섭게 불을 끄셨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좀 전에 정 상궁께서 다른 분들께 하는 말씀을 들었는데, 빈씨께서 편찮으신 모양이야.”
“빈씨께서 편찮으시다고? 신기하네.”
“뭐가 신기해?”
“참으로 대단한 빈씨가 아니더냐. 오죽하면 교육을 맡은 별궁 삼파마저 쩔쩔매실 지경이니. 그렇게 작은 빈틈조차 용납하지 않던 분께서 편찮으시다니 신기할 수밖에.”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 힘든 일정을 군소리 한 번 안 하고 받으셨으니, 병이 나실 만도 하지.”
궁녀들은 불 꺼진 빈씨의 처소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정 상궁이 그 모습을 보고 쌍심지를 켰다.
“어찌 이리 소란스럽더냐?”
서릿발 같은 호통에 궁녀들은 가을 논의 메뚜기 마냥 사방으로 흩어졌다.
쯧쯧 혀를 찬 정 상궁은 멈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날은 저물었지만, 그녀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정 상궁은 별궁 구석구석을 단속하고 정리하였다.
한 시진에 걸쳐 모든 곳을 살핀 후에야 비로소 정 상궁은 빈씨의 처소를 방문했다.
일찌감치 불이 꺼진 빈씨의 처소.
중년의 상궁이 문앞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별일 없는가?”
정 상궁의 물음에 중년의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빈씨께서 편찮으시다 하시며 일찍 침소에 드셨나이다. 온종일 이불을 덮고 계시고, 목소리도 불편하신 듯하였습니다. 많이 불편하신 모양인데, 의원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살펴볼 생각이다. 그밖에 다른 일은?”
“빈씨께서 아끼는 무수리가 집안에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오늘 오지 않았는가?”
중년의 궁녀가 고개를 저었다.
“변고를 알리는 서찰만을 보내왔다 합니다.”
“내일 돌아오면 혼쭐을 내주어야겠군. 욕봤으이. 그만 돌아가게나.”
중년의 상궁이 물러가자 정 상궁은 빈씨의 처소로 발을 들였다.
상궁의 말대로 빈씨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둘 말고 있었다.
“많이 불편하시옵니까?”
“쿨럭쿨럭.”
“얼마나 불편하시옵니까?”
“쿨럭.”
“그리 불편하시면 의원을 불러드릴까요?”
“……쿨럭쿨럭.”
안부를 물어봐도 기침 소리만 돌아왔다.
공손하게 자리에 앉은 정 상궁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매번 꼬박꼬박 대답 대신 기침을 하니, 틀림없이 들키고 말겠구나.”
정 상궁의 말에 이불이 번쩍 들춰졌다.
이불 안에서 모습을 보인 이는 빈씨 치장을 한 금정이었다.
“저, 정 상궁 마마님.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합니까? 무섭고 두려워 정말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금정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느냐? 네가 그분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금세 들통 나고 말 터인데.”
“하지만…….”
“그분의 어려운 사정을 들었을 때, 네가 선뜻 대신하겠다 나서지 않았더냐? 설마, 이제 와 못하겠다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남을 속이는 일이 죄스러워…….”
“죄스럽기만 하느냐? 이 일은 감히 왕실을 기만하고 궁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다. 들키면 온전히 죽지도 못할 것이야.”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금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단단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정 상궁이 풀썩 마른 웃음을 웃었다.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못 견디겠다면서, 정작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내가 들어본 중 가장 씩씩한 헛소리로구나.”
금정도 정 상궁을 따라 웃었다.
정 상궁이 어찌 알까.
이레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고 없었을 것이다.
“제 말이 그리 이상하게 들립니까?”
“그렇게 들리는구나.”
“그러는 정 상궁 마마님은 어찌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협조하신 겁니까?”
“글쎄다.”
금정의 말에 정 상궁은 몇 시진 전에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그분께서 말없이 눈물을 흘려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
오라버니의 억울한 사연을 말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분껜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으니.’
여인들의 실종에 진실로 오라버니가 관련되었다면, 그 여파는 실로 무거웠다.
가문은 물론이고, 빈씨마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빈씨의 일.
정 상궁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정 상궁은 빈씨의 잠행을 돕게 되었다.
아니, 그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빈씨를 돕고 말았다.
그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망령이 든 게야.’
늙은 모양이다.
사사로운 감정과 헛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니.
하지만 과연 망령 탓일까?
아닐 것이다.
빈씨에게 빠진 것이다.
흠모하고 아끼게 된 것이다.
그분이 아닌 다른 분이 빈씨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이다.
정 상궁은 금정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어리석은 것아. 어쩌면 빈씨께선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넌 정말 죽은 목숨이구나. 하나, 외롭지는 않을 게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정 상궁의 속내를 알지 못한 금정이 말간 얼굴로 물었다.
“네 하는 짓이 웃기니, 이러는 게 아니겠느냐? 내가 왜 돕게 되었느냐 물었지? 나중에 자랑삼고 싶어 그리했다.”
“자랑삼고 싶었다고요?”
“별궁에 든 빈씨께서 사라지시고, 대신 무수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
“말도 안 됩니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실 겁니까?”
“아무렴. 이 좋은 이야기를 내가 왜 묵혀두고 있겠느냐?”
정 상궁의 말에 금정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까르르 웃었다.
“이것아, 그러다 들키겠다.”
금정을 혼내는 정 상궁의 고목 같은 얼굴에도 보기 드문 미소가 그려졌다.
***
“상궁과 무수리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단 말이로구나.”
이레는 곁을 지키는 무수리로 변장하여 별궁을 나온 것이다.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무수리.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으리라.
매번 느끼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이레는 기지를 발휘하곤 하였다.
“은백께선 제가 여기 있는 줄 어찌 아신 겁니까?”
형운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레를 응시했다.
“한번 그대가 되어 보았다.”
이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묻는 표정이었다.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
하지만 이럴 때 짓는 표정은 또 왜 이다지도 귀엽고 어여쁜지.
“내가 은랑이라면 어찌할까?”
“네?”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랫동안 찾고, 기다리던 소중한 혈육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땐 어찌할까?”
형운은 무릎을 굽혀 이레와 눈높이를 맞췄다.
“온전히 그대가 되어 생각하니 자연스레 이곳이 떠오르더구나.”
그의 오롯한 마음이 검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수월을 향해 달리는 내내 두려웠다.
행여 이레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레를 보게 되자 형운은 탁, 맥이 풀리고 말았다.
“제가 무어라고…….”
이레의 말끝이 눅눅하게 젖었다.
자신을 향한 형운의 속내가, 그 절절한 연모에 눈가가 달아올랐다.
애써 속내를 삼킨 이레가 태연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사람이 어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혹, 제 곁에 감시하는 자를 붙여두고 변명하는 건 아닙니까?”
“이해할 수 없단 말이냐?”
“변명이 아니라면 맞춰보십시오.”
“무얼?”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형운의 표정이 잠시간 굳어졌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형운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아마도…… 이것이겠지.”
형운은 이레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보고 싶었다.”
품속 가득히 안긴 이레의 체온과 달콤한 향내.
사람이 사람에게 취한 것이 어떤 기분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지독한 중독에서 헤어날 수도, 헤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뜨면 내 곁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지루하고 복잡한 궁의 법도 같은 것은 제쳐 두고 너와 나, 그저 평범한 아내와 지아비가 되었으면 더는 바랄 것도 없건만.”
형운이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잠시면, 잠시만 기다리면 그리되었을 텐데.”
“은백…….”
“그리 참을 수 없더냐?”
이레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그녀의 검은 두 눈에 눈물이 하나 가득 고였다.
그래, 세상엔 참을 수 없는 것도 있구나.
묵묵히 인내하고 태연히 참아내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거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구나.
과연, 참을 수 없는 것도 있구나.
“이레야.”
네가 그렇구나.
참을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으니.
바로 네가 그렇구나.
“널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형운의 입술이 이레를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