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파문(波紋)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 듯 머릿속이 아득했다.
이레는 텅 빈 시선으로 세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누구라 하셨습니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입을 움직일 뿐이다.
“여인들의 실종이 제 오라버니의 소행이라고 하셨습니까?”
왕실의 엄격한 법도나 규율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무람없이 묻는 이레를 세자는 나무라지 않았다.
이레가 제 오라비를 얼마나 애틋하게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사건 현장을 본 목격자가 나왔다. 그들의 증언이 한결같이 한 사람을 지목하였다 하는구나.”
“그럴 리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대체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사헌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한다. 머잖아 결과가 나올 것이다.”
“제 오라버닌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테지. 네 오라비는 오래전에 실종되어 죽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세자는 이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넌…….”
짧은 침묵을 깨트리며 세자가 말했다.
“네 오라비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
“그에게서 소식이라도 왔느냐?”
담담한 세자의 물음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오라버니가 보내온 생의 징표가 떠올랐다.
은색 수실의 호침.
아직 행방을 찾지 못했으나, 기대는 살아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일을 곧이곧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전 단 한순간도 제 오라비가 죽었다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직접 만나러 오거나 서찰을 받은 적도 없느냐?”
“없습니다.”
차분한 시선으로 이레를 살핀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내게도 연락을 했을 테니 말이다.”
세자의 눈길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께서 여인들을 납치할 리 없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그래서 확인하러 온 것이다. 혹여 네게는 무슨 연통이 없었는가, 혹여 이 일과 관련하여 무슨 소식을 들은 것은 없는가 하여.”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아무것도…….”
“알겠다. 너를 믿는다. 그러나 행여 무슨 소식이라도 듣게 된다면 내게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네 오라비는 본래 나의 사람이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으며 세자가 말했다.
“그 아이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내가 직접 이 일을 살펴야 하나, 급한 사정이 있어 당분간 한양 밖으로 잠행을 떠나게 되었구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행여 무슨 일이 생기면…… 은협 저 사람에게 말하여라.”
세자는 문 앞을 지키고 앉은 서강율을 턱짓했다.
서강율과 짧게 시선을 마주한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살펴 가십시오.”
짧은 인사와 함께 세자는 빈씨의 처소를 떠났다.
홀로 남은 이레의 몸이 한순간 휘청거렸다.
이내 그녀는 허물어지듯 서탁에 엎드렸다.
“오라버니…….”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이 눈 그치면 만날 수 있으려나, 이 눈 녹으면 그리운 얼굴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겨울 끝나고 봄 오면 돌아오실까.
찬 바람 그치고 꽃비 내리면 그 모습 보이려나.
애타고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기다리던 소식은 아니 보내시고, 이 어인 날벼락 같은 소식이란 말입니까.”
헤어진 날이 무색할 만큼 반가운 얼굴로 올 줄 알았더니.
빈씨가 된 자신을 보고 두 눈 휘둥그레 뜨며 놀란 표정 지을 줄 알았건만.
여인들을 납치한 주범으로 몰리고 있을 줄이야.
“……오라버니.”
가슴을 짓누르는 격통을 삭이기 위해 이레는 마른 주먹을 움켜쥐었다.
***
동편에서 떠오른 태양이 서편으로 기울었다.
낮의 시작처럼 밤 또한 동편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무리 지어 펼쳐졌다.
입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으로 노르스름한 불빛이 하나둘 내걸렸다.
장무열은 입전의 불빛을 조족등 삼아 늦저녁 길을 걷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 화성을 다녀오는 길이라.
물먹은 솜처럼 전신이 묵직했다.
그러나 피곤을 떨쳐 낼 잠깐의 겨를이 없었다.
형, 장선제의 깡마른 모습이 내내 그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집안의 눈을 피해 연모하는 여인과 숨어 들어간 곳.
바로 화성의 깊은 산골이었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
형에게서 청상의 소식을 전해 들은 장무열은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쓰러지기 직전의 낡은 초가집.
대사헌의 장남으로 일평생 가난을 모르던 형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찌 이런 곳에서 살 생각을 하였을까 싶을 정도로 초라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달리 형은 꽤 행복했던 모양이다.
초가 구석구석 형과 청상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비친 둘의 모습도 세상 다시없을 다정한 부부였다.
언제나 빙글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사내는 바보 같아 보일 지경이라 하였다.
여인도 순하고 고왔다고 했다.
구멍 난 벽을 메우고, 거친 마루를 닦으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을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렵게 결실 맺은 연모이니, 그만큼 소중하였겠지.
시리고 힘든 시절을 버텨 냈으니, 남은 날은 늘 따사롭길 염원했으리라.
하지만 새 출발의 달콤함은 찰나에 불과했다.
화성의 현장은 그가 아는 여인들의 실종 현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내가 집을 비운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인.
문 안쪽에 놓인, 곡식이 든 작은 비단 주머니.
형과 청상의 관계도 좋았다 하니, 무거운 몸으로 무리해서 집을 나갈 이유도 없었다.
‘이번 역시 한 사람이 아닌 다수가 관여한 사건이다.’
듬성듬성한 싸리 울타리 아래에 사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큰 발자국이 여럿 발견되었다.
범행을 저지르기 직전 주변을 살핀 흔적이었다.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범인의 수는 넷.
장무열이 찾아낸 단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마지막까지 여인이 발악한 흔적은 있어도,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수소문해도 뾰족한 증거를 수집할 수 없었다.
‘범인이나 범행 현장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점이 장무열의 신경에 거슬렸다.
순박하고 넉넉한 것이 시골 인심이라 하지만…….
낯선 외부인에겐 생각만큼 후하지 않았다.
텃세도 심하고, 경계심도 많았다.
벌건 대낮에 수상한 사내가 넷이나 마을로 들어와 여인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건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사헌부로 돌아가면 다시 한 번 사건을 살펴봐야겠군.’
장무열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집의 김익현의 경고나 사헌부 안에서의 불편한 처지도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거지꼴로 돌아와 아우에게 매달리던 형의 울부짖음.
장무열의 집요한 열정에 불이 붙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한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렸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빨리 걸었다.
그리하여 어둠이 깊어지기 전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전을 지나 사헌부로 향할 때였다.
대로에서 벗어난 골목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장터의 소란이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일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심히 지나치려던 장무열은 발길을 돌렸다.
소음 속에 섞여 들려온 ‘여인’, ‘납치’라는 몇몇 단어들이 그를 잡아끌었던 것이다.
어지럽게 늘어선 좁은 골목.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 현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낮은 움막이었다.
사람이 거처하는 방보다 작업하는 공간이 넓어 보이는 움막.
황토로 지은 작은 가마, 숯과 검은 수액이 담긴 종기들, 나무를 깎고 갖가지 재료로 조형을 새기고 올린 목침 여러 개와 옷장으로 보이는 가구들.
칠기(漆器).
목재와 철기를 장식하고 옻칠하는 일을 하는 장인들의 공방이었다.
공방의 규모와 위치로 보아 상인의 요구에 따라 간단한 작업을 하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밤늦은 시각까지 불을 밝히고 작업에 여념이 없어야 할 공방.
하지만 지금은 일하는 장인 대신 창을 든 군졸들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장무열의 물음에 공방의 입구를 막아선 군졸이 손에 쥔 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범행 현장이니,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저리 가슈.”
어사대 복색이 아닌 일반 사대부 차림을 한 장무열을 구경꾼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범행 현장?”
“거참, 뭘 그리 물으시오. 어쨌든 공무 집행 중이니 떨어지시구려.”
휘휘, 하루살이 쫓듯 군졸은 팔을 내저었다.
하는 수 없이 어사패를 꺼내 보이려 할 때였다.
“아니, 이 사람이 이제 왔군.”
떠들썩한 목소리와 함께 부채를 든 사내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서강율이었다.
일순, 장무열의 눈썹이 곤두섰다.
반면, 내내 뻣뻣하던 군졸의 허리가 공손하게 기울어졌다.
“아이쿠! 나리께서 부른 분이셨군요.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내 이곳의 일이 워낙 엄중하여, 조사하는데 바빠 그만 이 사람에 관해 언질 주는 것을 잊고 말았군. 그 사람의 신원은 내가 보장할 테니 안으로 들이게.”
“어서 드시지요.”
군졸이 얼른 입구를 비켜 주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장무열이 서강율을 턱짓하며 군졸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당연히 알지요. 조정에서 내려온 무척 높은…….”
해맑은 표정으로 답하던 군졸이 눈동자를 뒹굴 굴렸다.
장무열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서강율의 세 치 혀에 놀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어찌 어리숙한 군졸을 탓할까.
적어도 조정에서 내려온 높은 위치의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왜 이제 오는 건가? 사건 현장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공방으로 들어서니 서강율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너는 이곳에 무슨 일이냐?”
장무열의 물음에 서강율은 부채를 펼쳐 부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야 사건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불원천리 달려가는 사람이니. 예 있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 보아하니 자네는 어딜 급히 다녀온 듯한데…….”
장무열은 서강율의 은근한 관심을 가벼이 쳐 냈다.
“여기서 여인과 관련한 사건이 있었다 들었다.”
“납치 사건이 있었네.”
“납치 사건? 혹여 이곳에서도 곡식이 든 주머니가 발견되었나?”
서강율은 고개 대신 부채를 살랑살랑 저었다.
“이번에도 발견되긴 하였지. 다만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네.”
“엉뚱한 곳?”
“실은 범행 현장은 이곳이 아닐세. 예서 삼백 보쯤 떨어진 골목이지. 주머니는 그곳에 놓여 있었네.”
“그럼 이곳은……?”
“범인들과 마주친 여인이 호위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필사적으로 도망친 모양일세. 여긴 그녀의 종적이 마지막으로 끊긴 장소라네.”
“호위무사?”
“여인을 지키던 호위무사가 둘 있었네. 안타깝게도 여인을 지키다 죽었지. 흔적으로 보아 실력이 대단한 자들 같은데, 적의 수가 워낙 많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야.”
싸움이 있었다, 그것도 사람이 둘이나 죽을 정도로 치열한.
지금까지 있었던 실종 사건과 전혀 양상이 다른 사건이었다.
“그곳이 어디냐?”
장무열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서강율은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자네가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네. 나가세, 내가 안내하겠네.”
***
서강율은 사건이 벌어진 현장으로 장무열을 인도했다.
장정 두 명이 간신히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한 골목은 혈흔으로 낭자했다.
벽에 새겨진 날카로운 흔적들.
어지럽게 널린 붉은 발자국들이 이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음을 짐작게 했다.
“죽은 사람이 둘이라 하였나?”
사건 현장을 둘러본 장무열이 물었다.
“보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더군.”
“실제로는 몇이나 죽었지?”
“여섯. 호위무사가 둘, 그들의 상대는 넷이 죽었지.”
“일곱이다.”
“그럴 리가.”
장무열은 골목 밖으로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가리켰다.
“즉사는 면했지만,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연 그렇군.”
서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인 채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는 장무열을 바라보는 눈빛에 흐릿한 온기마저 어우러져 있었다.
장무열은 벽에 새겨진 칼자국을 들여다보았다.
‘치열한 싸움. 소녀를 호위한 무인들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범인들은 무려 다섯이나 죽었다. 그런데도 사망한 자는 호위무사 둘만 보고되었다.’
모든 상황이 수상했다.
무엇보다 단순히 여인의 납치가 목적이라면 구태여 호위가 달린 사람을 노릴 이유가 없다.
“현장을 본 목격자는?”
“있네.”
“……목격자가 있어?”
장무열이 서강율을 돌아봤다.
부리부리한 그의 시선에 서강율은 부채를 펼쳐 눈을 가렸다.
“시선이 뜨겁군. 부담스러우이.”
“목격자가 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노인이 있었네. 인근에서 여인들의 노리개를 만들던 노인인데, 사람이든 물건이든 한번 보면 고스란히 기억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하더군. 그 재주로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자의 인상착의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하네.”
“그 노인은 어디에 있나?”
“어사들이 사헌부로 데려갔다네.”
장무열은 곧장 발길을 돌렸다.
서강율의 목소리가 그를 잡았다.
“구태여 갈 필요 없네.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으니.”
“누구냐?”
“노인 외에도 목격자가 두어 명 더 있었네. 목격자의 증언으로는 범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김기대’라 불렀다 하더군.”
“김기대라 하면 빈씨의 오라비와 이름이…….”
서강율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노인이 그린 인상착의, 빈씨의 오라비인 김기대와 일치한다더군.”
장무열의 굵은 눈썹이 날렵한 곡선을 그렸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번 사건은 도성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수상한 점은 하필 이 시점에서 오래전에 실종된 빈씨의 오라비가 언급된 부분이다.
기척도 없이 슬금슬금 다가온 서강율이 장무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차! 내 정신을 좀 보게나. 이번에 큰일을 당한 여인이 수월에서 일하던 소녀라는 걸 말하지 않았군.”
생각에 잠겼던 장무열이 고개를 들었다.
“가자.”
“어딜 말인가?”
“수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장무열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공방거리 끝자락.
입전, 수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적조차 드문 곳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시전의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입전.
그러나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인지 수월은 불 하나 밝히지 않은 채 조용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건을 조사하러 왔다.”
어사패를 든 장무열의 음성이 묵직한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덩치 큰 사내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사헌부 소속의 어사다.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왔다. 만약 수사를 방해한다면 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장무열의 나직한 겁박에도 사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듯 천하의 어사패 앞에서도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 명을 내린 자가 누구냐? 어떤 자가 감히 국법을 능멸하려 하느냐?”
“사건은 수월과 상관없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사가 필요하면 사건이 벌어진 곳을 살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장무열이 무뚝뚝한 표정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너, 이름이 무엇이냐?”
“수월의 호위무사, 천호라고 합니다.”
“천호. 더 이상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국법의 지엄함을 알려 주기 위해서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다.”
“죽어도 비킬 수 없습니다.”
“좋다. 그럼, 규정과 절차에 따라…….”
“하하하, 이 사람 뭘 그리 또 흥분하고 그러나.”
서강율의 목소리가 뜨겁게 가열된 공기를 가라앉혔다.
“자, 자! 다들 흥분을 가라앉히시게. 이보게, 은호. 자넨 사람 좀 그만 노려보게. 그리 쳐다보면 누군들 무서워하지 않겠는가? 그쪽도 도와주러 온 사람들에게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말게나. 자칫 잘못하였다간 엉뚱한 사람들끼리 칼부림하게 생겼군.”
“…….”
“…….”
서강율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장무열과 천호의 대치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팽팽한 긴장감에 작은 몸짓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수월의 대문 앞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쓰개치마를 쓴 여인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였다.
훑듯 천호와 백호를 바라보던 여인이 천호와 함께 수월의 대문을 지키던 백호에게로 접근했다.
나직한 음성으로 몇 마디를 전하자 백호의 표정이 돌변했다.
“어?”
장무열과 천호 사이에서 진땀을 빼던 서강율이 그 광경을 놓칠 리 없었다.
서강율은 부채 끝으로 턱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저 뒤태와 걸음걸이. 왠지 눈에 익은데…….”
***
급한 발소리가 세손궁 회랑에 울렸다.
세손의 처소로 그림자처럼 스며든 홍인모가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형운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근래 한양 인근을 떠들썩하게 만든 납치 사건의 진범이 밝혀졌다 하옵니다.”
형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건의 진범이 마침내 밝혀졌다니, 참으로 다행이로구나. 그래, 어떤 자라더냐?”
“그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다름 아닌…….”
“범인이 뉘인데 그리 대답을 망설이느냐?”
“다름 아닌 빈씨의 오라비인 김기대라 하옵니다.”
“무어라?”
놀란 형운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당탕.
서탁 위에 자리했던 서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여느 때라면 서책들부터 정리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서책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해라. 불민한 사건의 범인이 김기대라 하였느냐?”
“그렇사옵니다.”
“말도 안 된다. 어찌 그런 일이…….”
형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뒷덜미를 훑는 섬뜩한 예감.
“인모야.”
“네, 저하.”
“이레는 어찌하고 있다더냐?”
세손의 목소리에 긴박함이 가득했다.
“빈씨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혹여 별궁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진 않았겠지.”
“별궁은 안팎으로 철저히 차단된 곳입니다. 심려 마옵소서.”
홍인모의 대답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인모야, 은밀히 사람을 보내 별궁의 동정을 살피거라.”
형운은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빈씨가 별궁에 계신지 확인하라. 반드시 조용하게 진행해야 한다.”
“명을 받잡나이다.”
홍인모가 날랜 걸음으로 세손궁을 빠져나갔다.
텅 빈 처소에 홀로 남은 형운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제와 달리 유백색 둥근 달이 교교한 달빛을 흩뿌렸다.
그는 서탁에 앉아 서둘러 글을 썼다.
-이레야.
서탁의 글은 이내 사라졌다.
빈자리를 메우듯 백귀의 글이 번져 나갔다.
-어허, 오늘도 애가 달았구나. 시작부터 애타게 부르짖으니.
은룡이었다.
형운은 다시 이레를 불렀다.
-이레야, 거기 있느냐? 있으면 대답해라.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은룡도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형운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최 내관, 최 내관! 밖에 있느냐?”
허공에 번지는 긴박한 파동.
최 내관을 찾는 형운의 목소리가 어둠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