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92화 (92/215)

#92. 인연과 운명

어둠이 내려앉은 세자의 처소로 상선이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마침, 처소에 든 손님과 담소를 나누던 세자가 상선을 바라보았다.

“송구하오나 저하, 비답을 기다리는 상소가 있사옵니다.”

“그래?”

세자는 상선이 올린 상소문을 펼쳤다.

이내 그의 얼굴에 주름이 그려졌다.

맞은편에 앉은 서강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 좋지 않은 내용이라도 있사옵니까?”

“소원 문씨의 산달이 임박하였으니, 호산청을 마련하여 달라는 상소로구나.”

서강율은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벌써 날이 그렇게 되었나이까.”

“그러게나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세자가 상선에게 명을 내렸다.

“관상감에 일러 호산청을 설치할 길일을 잡으라 하라. 내의원에는 호산의관으로 합당한 자의 명단을 올리라 하고, 탕약서원과 호산청의 의녀를 가려 뽑으라 명하라.”

“명 받잡겠나이다.”

상선이 물러갔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비로소 서강율이 입을 열었다.

“문 소원이 아들을 낳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그러하냐?”

“후궁의 사가로 숱한 사대부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더구나.”

“궁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연이은 서강율의 첨언에도 세자는 그저 무심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문 소원이 아들을 낳으면 나와 세손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들에게 또 다른 대안이 생길 터이니.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주군의 태평한 대답에 애가 마른 것은 서강율이었다.

“저하, 이대로 지켜보기만 하실 것이옵니까?”

서강율의 물음에 세자는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지켜보지 않으면? 나오는 아이를 못 나오게 막기라도 하란 말이냐?”

“…….”

되묻는 세자를 향해 서강율은 고개를 숙였다.

예의 짐작한 대답이었다.

세자 저하의 성품은 깊고 대범하여 저들의 수작을 아시고도 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애가 탔다.

대리청정을 명하신 주상께서 여전히 형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니, 세자 저하의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원인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손 놓고 지켜만 보아도 괜찮을까?

상대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인지라.

문 소원과 관련한 어이없는 소문에 이리 마음 불편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세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다른 이야기나 해 봐라. 이번엔 다른 때와 달리 빨리 돌아왔구나.”

세자는 서강율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물었다.

“그래, 어딜 다녀왔느냐?”

“별궁에 다녀왔습니다.”

“그래. 별궁에 갔었…… 무어라? 어딜 다녀왔다고?”

세자는 잠시 멍한 눈으로 서강율을 응시했다.

찻잔의 물이 넘치는 것도 모를 만큼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설마, 그대가 말하는 별궁이 내가 아는 그 별궁은 아니겠지?”

다시 묻는 세자의 목소리에 의문과 호기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기행이라면 남에게 절대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세자라 하더라도 서강율의 파격적인 행보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강율은 고개를 낮추었다.

“저하, 사방에 보는 눈과 엿듣는 귀가 있사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자가 서강율 앞에 귀를 가져갔다.

“어서 빨리 말해 보라. 어찌 된 사연인가?”

“긴한 볼일이 있어 별궁에 다녀왔사옵니다.”

“들키면 목이 달아날 일이니, 필시 범상한 볼일은 아니렷다?”

“은자원에 은호라는 자가 있사옵니다.”

“알고 있다. 사헌부의 장령이라 하였지?”

“맞사옵니다.”

“별궁을 다녀온 연유를 말하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사헌부 장령을 들먹이는 것이냐?”

“그자가 관심 두는 사건이 워낙 괴이하고 심각하여, 하는 수 없이 빈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서강율의 대답에 세자는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여인들이 납치되는 흉악한 사건이 계속되고 있다더니, 그 일 때문이냐?”

“그렇사옵니다. 바로 그 일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별궁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빈씨가 아니더냐. 무슨 도움이 된다고 거기에 갔었단 말이냐?”

“도움이 되었사옵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분의 도움을 받았사옵니다.”

서강율은 이레와 나눈 대화를 세자에게 전했다.

“그래서 빈씨의 생각으로는 흉수들의 표적이 회임한 여인이란 말이냐?”

“네, 분명 그리 말했사옵니다.”

서강율이 올린 문서를 자세히 살핀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구나.”

세자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웃음이 마치 장성한 여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그것인 듯 흐뭇하고 뿌듯했다.

“별궁의 별난 상궁들에게 붙들려 고초나 겪는 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네 말을 들으니 다행히 무탈한 모양이구나.”

“고초는커녕 되레 별궁 삼파를 질리게 하고 있더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서강율은 별궁 궁녀들에게서 들은 빈씨의 총명함과 빈씨의 교육을 담당한 별궁 삼파의 처연한 모습을 하나 빠짐없이 세자에게 전했다.

마침내 서강율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세자의 입에선 연신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고 운명이구나.”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빈씨 말이다. 우연히 간택에 참여하여 끝내 빈씨가 되었으면 우연치곤 기막힌 인연인 셈이지. 또한, 그 성품이 지혜롭고 현명하며, 똑 부러지는 성정을 가졌으니. 융통성 없는 세손과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람이 아니더냐? 운명이로다. 너무 반듯한 것은 부러지기 쉬움이라. 늘 세손이 걱정이었는데, 빈씨로 인해 한시름 덜어도 되겠구나.”

“아무리 빈씨께서 지혜롭다 하나, 영민하신 세손 저하를 어찌 따를 수 있겠나이까.”

“두고 봐라. 제아무리 뛰어난 세손이라 하여도 빈씨를 따라가기 위해선 제법 노력이 필요할 것이야.”

“연유를 여쭈어도 되오리까?”

“세손이 총명한 것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니. 세손이 가진 지혜라는 것이 서책을 통해 접한 것이 대부분인지라. 아는 것은 많아도 몸소 경험한 것이 아니니. 세상의 미묘한 이치를 깨닫기엔 부족함이 많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닙니까. 왕실이라는 든든한 황금의 고치에서 태어나 자란 분이시니. 궁 밖의 세상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바로 그 때문이다.”

“……?”

“빈씨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세월을 경험한 사람처럼 이치에 밝으니. 꽉 막힌 세손의 고집불통을 조금은 완화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왜? 무에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도 있느냐?”

“고집불통이라면 빈씨도 만만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냐? 하긴, 사라진 제 오라버니를 찾기 위해 남장도 서슴지 않았다 하였지.”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절박하였겠지. 정도 많고 강단도 있으니, 더욱 마음에 드는구나.”

“벌써 며느리 역성을 드시는 것이옵니까?”

서강율의 물음에 세자가 미소를 지었다.

“시아비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새로운 빈씨와 관련하여 세자와 서강율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하.”

문 너머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급히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목소리에 긴박함이 서려 있었다.

“……들라.”

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문이 열리고 젊은 내관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한달음에 세자의 곁으로 달려와 귓속말을 전했다.

일순, 세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사실이냐?”

“틀림없사옵니다.”

“알았다.”

세자는 손을 저어 내관을 물렸다.

눈치를 살피던 서강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사옵니까?”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세자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따르거라. 지금 당장 나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느니.”

***

“회의 시작합니다. 집의청으로 들라 하십니다.”

사헌부 수석 아전의 목소리가 대장청을 휘감았다.

대장청에서 업무에 몰두하던 지평 권문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갑작스러운 회의라니.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둘러 집의청으로 들어서는 그의 귓가로 김익현의 서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다들 무얼 하고 있었더냐?”

고저 없는 음성.

감정 또한 깃들어 있지 않아 무심코 들으면 혼잣말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집의청에 모인 어사들은 빙벽에라도 갇힌 듯 바싹 얼어붙고 말았다.

평소 김익현은 아무리 화가 나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니, 분노하거나 살기가 치솟으면 오히려 목소리가 낮아졌다.

바로 지금처럼.

바닥에 가라앉다 못해 땅속으로 꺼질 듯한 집의의 음성은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하고 있었다.

어사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집의의 눈치를 살폈다.

“보고된 것만 열셋.”

김익현은 손에 쥔 문서를 내려놓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집의청에 모인 어사들을 한 사람씩 쓸어 보았다.

“너희는 이 많은 여인이 사라질 때까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느냐?”

최근 한양 땅을 뒤흔들고 있는 여인들의 실종 사건.

이 괴이한 사건에 어사들이 투입된 것도 여러 달이 흘렀다.

그러나 사건을 쫓는 어사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책망이 담긴 김익현의 눈길이 어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닿았다.

“입이 있으면 누가 변명이라도 해 봐라. 이 사건이 어째서 아직 해결되지 않는 것인지, 허튼소리라도 지껄여 보란 말이다.”

김익현은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열고 뒤집었다.

탁자 위에 누런 곡식이 우수수 쏟아졌다.

“놈들이 어사대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범행 현장에 이따위 증거까지 버젓이 남겼겠느냐.”

어사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이…….”

누군가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헌 지평, 권문이었다.

김익현이 핏줄이 곤두선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밤 사헌부의 감찰 수십 명이 도성 곳곳에 잠복하였습니다. 사건에 투입된 어사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놈들이 실재한다면 몸통은 아니라도 꼬리 정도는 발견할 수 있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나름 추측해 본 결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익현의 주름이 깊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다?”

“종종 형편이 어려워진 백성들 사이에서 입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 제 자식을 내다 파는 경우가 있습지요. 혹시 이번 사건 역시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니까 빈궁해진 사람들이 여인들을 거래했다, 그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권문의 의견에 어이없다는 듯 김익현의 눈꼬리가 매섭게 변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하라. 어린아이나 젊은 여인이라면 모를까, 회임한 여인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사고판단 말이냐.”

“하지만…….”

“실종된 여인 중엔 궁벽하지 않은 사대부의 여인도 있다. 이 경우는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느냐?”

“그건 지금부터 조사를 해봐야…….”

“닥쳐라!”

“송구합니다.”

김익현의 일갈에 권문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달리 또 헛소리를 지껄일 녀석이 있느냐?”

김익현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어사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았다.

섬뜩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럼 제가 올린 의견을 바탕으로 재수사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듣기 좋은 묵직한 중저음의 음성.

모두의 시선이 상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중되었다.

얼어붙은 정적 속에서 장령, 장무열이 천천히 일어섰다.

***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눈길에도 장무열은 느긋했다.

그 호기로운 여유가 김익현의 심기를 거슬렀다.

김익현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낯빛으로 턱을 괬다.

“재수사라니?”

내내 나직했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눈 밖으로 치워 버리고 싶었으나, 상대는 대사헌의 핏줄이었다.

속내를 마구잡이로 드러내었다간 뒷감당이 쉽지 않았던지라.

김익현은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범인들의 목적이 회임한 여인들이라는 의견을 바탕으로 수사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 일 말인가?”

김익현이 권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날카로운 눈길에 찔끔 놀란 권문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장 장령의 의견을 토대로 나름의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최근 범행의 추이로 보아 큰 신빙성은 없다 판단하였습니다.”

장무열이 반박했다.

“그것은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범인들의 수작일 가능성이 높다.”

“그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빙할 만한 증좌가 없습니다.”

“제대로 조사한 것이 맞느냐?”

“물론입니다.”

“구체적으로 어찌 조사하였는지 말하라.”

“그것은…….”

장무열의 추궁에 권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김익현이 손을 들어 뜨겁게 과열된 공기를 가라앉혔다.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건 그쯤 해 두게, 장 장령.”

“사건의 경위를 살피는 중입니다.”

“자네가 왜? 무슨 권리로 그러한 일을 한단 말인가?”

“…….”

“이 사건과 자네는 아무 관련도 없을 터인데.”

“저 역시 사헌부 소속의 어사입니다.”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김익현이 장무열의 항변을 단호히 잘랐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권 지평, 장 장령에게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다시 정확히 알려 주게나.”

권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장령 장무열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근신에 처한다. 권력남용. 위 사람은 수사권을 남용하고, 사사로운 용무로 권력을 남용하였으므로 사헌부의 위신을 크게 떨어트렸다. 상기의 사유로 근신 육월(六月)에 처한다.”

권문의 보고가 끝나자 김익현이 입가에 가는 웃음을 띠었다.

“다행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로군.”

“…….”

장무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권력남용.

재간택 때, 장무열은 이레를 위해 사헌부의 어사들을 동원한 적이 있었다.

야심한 시각, 장무열과 만났던 이레의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다.

김익현이 이 일을 문제 삼았고, 장무열은 근신에 처해 졌다.

평소 김익현은 그를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사건 해결을 위해서라면 상관과의 충돌도 피하지 않는 장무열로 인해 김익현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 잦았다.

이번 근신도 적당한 빌미를 잡아 장무열의 손발을 꽁꽁 묶어 버렸다는 것이 어사들 사이의 중론이었다.

장무열이 대사헌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진즉 파면당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원칙대로라면 오늘 회의에도 참석하여서는 아니 되지. 대사헌만 아니었다면, 아마 한양 땅에 발붙이고 살지도 못했을 것을.”

낮게 혀를 차던 김익현이 충고를 덧붙였다.

“대사헌의 골칫덩이는 장남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장무열의 형, 장선제를 입에 담은 김익현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떠올렸다.

“부디 자중하게. 장 장령의 이런 철부지 같은 행동을 대사헌께서 아시면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는가.”

장무열의 가슴에 김익현의 조롱이 비수처럼 꽂혔다.

바로 그때였다.

집의청으로 비방주 허상익이 급히 들어섰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김익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지난밤, 또 한 명의 여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무어라?”

김익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사들은 모두 현장을 살피라. 그리고…….”

김익현은 장무열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말을 이었다.

“이 사건과 관계없는 자는 지금 당장 물러가라.”

***

김익현의 축객령에 장무열은 대장청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얇은 창 너머로 어사들을 다그치는 김익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범인을 잡아내라는 은근한 협박에 어사들은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장무열은 무연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 며칠 따뜻하더니, 오늘은 먹구름에 찬 바람까지 떠돌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이쯤에서 놔주어야겠구나.”

연이은 여인들의 실종.

자꾸 신경 쓰이는 사건이었다.

근신 중임에도 여러 곳에 손을 써서 사건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회임한 여인들의 실종, 실종된 장소에 놓인 곡식이 든 비단 주머니, 의적과 관련한 소문…….

알면 알수록 기이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더는 무리였다.

“그대의 조언도 있고 하여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 보려 하였으나……. 미안하오.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소.”

장무열은 한 여인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실은 그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를 따라 은자원에 들었고, 그곳에서 우연히 이번 사건에 관한 자료를 보게 되었으니.

모든 게 그녀의 인도인지도.

어사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무리하여 회의에 참석한 것도 이레가 전해 준 조언을 흘려보내기 아쉬워서일 것이다.

장무열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듯 고개를 저었다.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이번 사건도.

별궁에 있는 그 여인도…….

돌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답답한 한숨을 쉬고 있자니, 사헌부 대문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곧이어 군졸 하나가 사헌부 마당으로 들어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군졸은 이내 장무열에게로 다가왔다.

“볼일이라도 있느냐?”

장무열의 물음에 군졸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느 미친놈이 장령님을 뵙게 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있습니다.”

“나를?”

흥미가 돋은 장무열은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헌부 대문 밖, 번화한 육조거리.

허름한 행색의 사내가 앞을 가로막는 관졸들을 밀치며 발악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사내를 발견한 장무열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문 앞에 이르러선 호흡마저 가빠질 지경이었다.

떠다미는 군졸들의 힘에 허름한 행색의 사내가 쓰러졌다.

사내가 차가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기 직전, 장무열이 그를 받았다.

“…….”

사내를 본 장무열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땀과 먼지로 지저분하게 얼룩진 얼굴.

먼 거리를 쉬지 않고 온 듯 신도 엉망이고, 찢긴 도포 자락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

영락없는 거지의 행색이었다.

하지만 장무열은 그 사내를 알아보았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는…….

“형님!”

장무열의 형, 장선제였다.

집안의 기둥.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장남.

그러나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와 명예를 내팽개치고 대신 한 여인과의 야반도주를 택한 사내.

지금쯤 한양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둥지를 틀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어야 할 그가 어찌 된 이유에선지 거지꼴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굶주리고 지쳐 까무룩 혼절하려던 선제는 동생의 목소리에 두 눈을 부릅떴다.

“열아!”

“네, 형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니. 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선제는 무열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그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

장무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청상의 실종.

형님께서 연모하는 그녀는 회임한 여인이었다.

***

장무열이 형님과 뜻밖의 재회를 하는 그 시각.

별궁에도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저녁을 물린 빈씨가 경전을 공부할 시각.

오늘도 유 박사는 다급하고 위급한 볼일로 별궁을 찾지 못하였다.

유 박사를 대신하여 은협 서강율이 이레를 찾아왔다.

참으로 재주 좋은 분이라 생각하며 이레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문제는 서강율과 함께 온 사내였다.

발 너머로 보이는 풍채 좋은 사내의 모습에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 장령님은 아닌 듯한데.’

키가 훤칠한 장무열은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하지만 오늘 서강율과 함께 별궁을 찾은 사내는 체격이 다부졌다.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위를 압도하는 위엄이 느껴졌다.

형형한 눈빛은 공간을 구분 지은 촘촘한 발마저도 뚫고 들어올 지경이었다.

유심히 사내를 살피던 이레는 불현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발 너머의 사내가 물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레의 공손한 대답이 이어졌다.

“네, 저하.”

“하하하.”

사내는 껄껄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발을 치워라.”

사내의 명에 서강율은 조심스럽게 발을 걷어 올렸다.

곧 사내의 온전한 모습이 이레 앞에 드러났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용케 날 알아보았구나.”

“저하의 기상과 용안을 어찌 몰라보겠나이까.”

세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히 고개 숙인 이레의 눈에 서강율의 부채가 잡혔다.

세자의 뒤에 자리 잡은 서강율은 부채를 붓 삼아 열심히 바닥에 글을 썼다.

‘불내하(不奈何). 어쩔 수 없었소.’

이번 세자의 방문은 서강율이 획책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세자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널 만나고자 내가 고집을 부렸으니.”

“송구하오나, 저하. 별궁에서의 교육은 안팎이 철저히 구분된다 들었사옵니다.”

세자가 별궁에 방문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결코 가볍게 넘어가진 않으리라.

나름 수염을 덧붙여 변장하였다고는 하지만, 워낙에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니.

세자의 풍채가 가려질 리 만무했다.

‘어련히 알아서 손을 쓰셨겠지만…….’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세자가 말했다.

“걱정 마라. 방해될 사람은 모두 물러가게 하였으니.”

그러고 보니 좀 전부터 밖이 조용했다.

그 흔한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이레의 짐작대로 세자의 준비는 철저하였다.

문득, 그 완고하고 말 많은 별궁의 노파들을 어찌 물러가게 하였을까 궁금했다.

무력으로 물러나게 하였다면 오히려 궁의 법도를 언급하며 완강히 버텼을 것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감히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너의 도움이 꼭 필요하여 부득불 찾아오게 되었느니라.”

세자의 진중한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만사여의가 사라졌다.”

“……!”

만사여의의 실종.

시전상가의 삼 할을 차지한 그녀의 실종은 분명 심각하고 중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세자의 말은 더 큰 충격으로 이레를 휩쓸었다.

“만사여의를 비롯한 여인들의 실종이…… 네 오라비의 소행으로 지목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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