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빈씨가 모르는 한 가지
밤하늘에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캄캄한 어둠이 가득한 야심한 시각.
이레의 고운 손길에 들린 세필 붓이 서탁 위를 다급히 내달렸다.
-큰일입니다.
붓끝이 서탁에 닿기 무섭게 글씨가 사라졌다.
잠시 후, 위엄 서린 글들이 서탁 위를 가득 메웠다.
-큰일이라니?
상의 불퉁한 필체를 필두로 악과 화의 글씨가 이어졌다.
-대체 무슨 일인 게냐?
-아이야. 우선 마음부터 가라앉히거라.
이레는 다시 붓을 잡았다.
-참으로 이상하고 괴이하니. 이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와 악이 혼란에 빠진 이레를 다독였다.
-아이야, 무슨 일이냐? 네가 이리 당황하는 모습을 근래 들어 처음 보는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나, 일단 마음부터 가라앉히거라.
할아버지의 조언에 이레는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잠시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쉬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동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상, 악이 차례로 말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이러는 것이냐?
-불안해하지 마라. 내가 바르고, 그 속에 품은 뜻이 올곧으면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화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일에도 차분하던 네가 필체마저 흐트러질 지경이라니.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구나.
예 할아버지 역시 걱정을 보였다.
-아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말해 보아라. 내가 모두 들어줄 터이니.
다정한 다독거림.
그제야 이레는 불안한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이레는 난생처음 겪었던 황망하고 난감한 이야기의 말머리를 풀어놓았다.
*
무채색의 계절이 절정을 향해 치달렸다.
사나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이른 새벽.
별궁의 심처로 노 상궁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준비는 어찌 되었소?”
정 상궁이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형 탁자에 나란히 앉았던 이 상궁과 모 상궁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시어요.”
“소홀함 없이 준비하였습니다.”
답하는 두 상궁의 표정은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늘 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달리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오.”
운을 뗀 정 상궁은 이 상궁을 응시했다.
“자릿조반 직후의 교육은 이 상궁이 맡아주시오. 오늘은 무얼 하실 생각이오?”
이 상궁이 턱 끝을 추어올렸다.
“오늘은 산학(算學)에 관해 논해볼까 합니다.”
“산술을 말이오?”
정 상궁의 눈동자에 놀란 빛이 들어찼다.
다소 둔해 보이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이 상궁은 셈을 다루는 이치에 해박했다.
단순한 산술뿐만이 아니라, 공부 꽤나 했다는 선비들도 어려워하는 산술도 척척 풀곤 하였다.
그런 이 상궁이 이제 갓 교육을 시작한 빈씨에게 산학을 논하겠다니.
정 상궁은 펄쩍 뛰었다.
“과하오. 그러다 빈씨께서 앓아눕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요?”
모 상궁도 역시 우려를 표했다.
“단순한 셈이라면 모를까, 복잡한 산학의 이치를 어찌 단기간에 전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두 상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상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알고 보면 산학만큼 명확하고 실용적인 학문도 없습니다. 빈씨의 자질이 출중하시니, 틀림없이 잘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빈씨의 재능을 믿는다는 말과 달리 이 상궁의 입가엔 교만한 미소가 서렸다.
저 꿍꿍이셈을 모를 리 없었다.
첫날의 수모를 이리 되갚아 주려는 것이겠지.
정 상궁과 모 상궁의 얼굴에 빈씨를 향한 측은지심이 매달렸다.
이 상궁의 집요한 가르침에 기겁할 빈씨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 상궁은 모 상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 상궁께선 무얼 하실 생각이시오?”
“저는 문안례(問安禮)와 내명부의 예법을 전할까 합니다.”
정 상궁이 반문했다.
“벌써 문안례를 가르치겠다는 말이오?”
아침저녁으로 왕실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안부를 여쭙는 예법, 문안례.
문안 인사라 하니 단순히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정도로 착각하기 쉽지만, 궁중 예법은 작고 사소한 동작 하나마저도 정해진 규범에 따라야 하니.
보통은 별궁 교육이 끝나고 정식으로 궁으로 들어가 경험 많은 상궁에게 별도의 가르침을 더 받아야 할 만큼 익히는 것이 어려웠다.
모 상궁의 감정 없는 음성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로질렀다.
“그간 많은 분들이 별궁을 거쳐 갔으나, 제대로 된 문안례를 익히지 못해 늘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내 나이 이미 적지 않으니, 어쩌면 별궁에서 교육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요.”
이 상궁이 눈을 끔뻑였다.
“그래서 제대로 해보겠단 말입니까?”
“과하지 않소?”
정 상궁의 걱정 서린 물음에 모 상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장담합니다. 이번 빈씨께선 틀림없이 제대로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정 상궁과 이 상궁은 아연한 비명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공허한 눈빛.
축 처진 두 어깨.
의욕을 잃고 망연자실할 빈씨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이게 정녕 옳은 것인지 모르겠소.”
정 상궁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궁의 위엄을 보여주자 작정한 일이 예상보다 과열되는 느낌이다.
“그러는 정 상궁께선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 상궁이 물음이 정 상궁을 향했다.
“두 분의 계획이 워낙 거창하니, 난 그저 소소하게 왕실 제례에 관해 말씀 올려야겠소.”
정 상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입가에 인자한 미소마저 떠올리는 정 상궁과 달리 이 상궁과 모 상궁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왕실 제례라니. 설마 모든 절차를 뜻하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소. 기왕 시작하였으면 절차와 예법은 물론이고, 세세한 구성까지 모두 알고 익혀야 하지 않겠소이까.”
이 상궁과 모 상궁은 주름진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비록 말로 뱉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참으로 악랄하구나.’
제례의 절차란 단순히 선왕의 묘를 찾아 뜻을 기리고 정성껏 차린 상에 절을 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제례야말로 예법의 정수라.
길일을 잡고 시간을 정하니, 천문과 풍수를 아는 것은 물론이요, 정해진 법도대로 서고 걷고 절하고 고하고 바라야 하니.
궁중 예법에 해박함은 물론이고 음(音)과 악(樂)을 헤아리고, 백성의 마음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했다.
그 절차의 복잡함과 난해함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라, 종종 제례와 관련하여 선후와 우열을 따지는 설전을 벌어지곤 하였다.
그런 것을 별궁에 들어온 지 고작 사흘 된 빈씨에게 전하겠다니.
그야말로 교육이라 쓰고 고문이라 읽어도 무방했다.
‘이러다 빈씨께서 정말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찌하려고.’
그리되면 교육을 주관한 정 상궁도 한바탕 소나기를 피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이 상궁과 모 상궁은 차마 정 상궁을 말리지 못했다.
정 상궁의 두 눈에 맺힌 결연한 의지.
‘정 상궁을 감당해야 할 빈씨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구나.’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한쪽 구석에서 눈물지을 빈씨를 떠올리니, 애잔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둥, 둥, 둥.
멀리서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정 상궁이 입을 열었다.
“때가 되었소.”
이 상궁의 웅크린 어깨가 활짝 펴졌다.
“오늘이야말로 그분께서 깜짝 놀라게 되실 것이오.”
모 상궁은 얼굴 가득 잔주름을 일으켰다.
“아무렴요. 궁의 법도가 얼마나 엄하고 중한 것인지 여실히 깨닫게 되시겠지요.”
정 상궁은 이 상궁과 모 상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든든하외다. 그분께서도 세상일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배우실 것이오.”
재차 다짐한 세 명의 노 상궁은 힘차게 방문을 열었다.
진눈깨비 흩날리던 새벽.
악명 높은 별궁 삼파의 은밀한 결의가 성사되었다.
***
은빛 세상으로 탈바꿈한 대지 위로 아침 햇살이 떨어졌다.
땅에 닿은 빛살은 산산이 부서져 공기 중으로 튀어 올랐다.
밤새 고요했던 별궁 내당으로 종종걸음이 이어졌다.
번연한 시간이 흘렀다.
치장을 마친 빈씨께서 자릿조반으로 올린 상을 물렸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음이라.
내당 마당에 모인 별궁 삼파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다녀오겠소.”
전장에 나서는 장수인 듯 이 상궁은 빈씨의 처소로 다부진 걸음을 옮겼다.
정 상궁과 모 상궁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켰다.
“잘되어야 할 터인데.”
“정 상궁께선 걱정도 많으십니다. 이 상궁의 저 당당한 뒤태를 보십시오.”
“당당한 건 모르겠고, 듬직하긴 하오.”
“이 상궁이 빈씨께 가르치려는 산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평생 공부에 매진한 학자라면 모를까, 평범한 양반댁 규수가 감당하기에 다소 버거운 학문이 아닙니까.”
“그렇겠지요?”
“그럼요. 제가 장담합니다.”
모 상궁의 확신에 정 상궁은 그제야 시름을 내려놓았다.
짹, 짹, 짹.
나무 위의 새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뿐하니, 별스런 새소리마저 정겹게 느껴졌다.
새소리를 노랫가락인 듯 즐기길 얼마나 했을까.
듬직한 덩치로, 당당히 빈씨의 처소로 향했던 이 상궁이 드디어 돌아왔다.
정 상궁과 모 상궁은 반색하며 그녀를 맞았다.
예정보다 일찍 나온 걸 보니 틀림없이 빈씨께서 공부를 포기한 것이리라.
“어찌 되었소?”
“빈씨께서 두 손 두 발 들었겠지요?”
정 상궁과 모 상궁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 상궁의 안색이 썩 밝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정 상궁의 물음에 이 상궁은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곤 어제처럼 대청마루 끝에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마방진을 알고 계시더이다.”
“마방진?”
가로와 세로의 개수가 동일한 정사각형에 일(一)부터 차례로 숫자를 적되, 수를 중복하거나 빠트리지 않고 가로, 세로, 대각선의 수의 합이 모두 같도록 만드는 숫자의 배열을 마방진이라 하였다.
수의 개념과 빠른 계산력이 필요한 놀이.
여간한 사람은 생각하는 자체를 싫어하는 놀이건만.
빈씨께서 어찌 그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놀라움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상궁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명분(命分)과 약분(約分)은 둘째치고, 과분(課分), 합분(合分), 석분(石分), 통분(通分)에 감분(減分), 승분(乘分), 제분(除分) 역시 훤히 꿰고 있더이다.”
이 상궁은 흡사 전장에서 패한 장수처럼 침울했다.
정 상궁이 재차 확인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승분, 제분이라니. 설마, 빈씨께서 산술에도 능하였단 말이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이오?”
“모르겠습니다. 빈씨께서 하시는 말씀을 반도 알아먹지 못하겠습니다.”
비 맞은 중처럼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 상궁이 돌연 정 상궁의 멱살을 잡았다.
“저분은 대체 어디에서 오신 분입니까? 경기관찰사댁의 아가씨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분이 어찌 산법에 대해 저리도 해박하단 말입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어요.”
절절한 절규가 내당 마당을 덮었다.
이 상궁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이레가 서탁을 통해 만나는 할아버지 중 한 분이 조선의 산학을 정립하고, 널리 장려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이 상궁은 두 손으로 주름진 얼굴을 감쌌다.
“난 더는 저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이 상궁, 정신 차리시오. 새벽녘, 진눈깨비 날리는 미명 아래서 우리가 나눈 다짐을 벌써 잊었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가 끝인가 봅니다.”
결국, 이 상궁은 패배를 선언했다.
당혹스러움에 정 상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아무래도 이 상궁은 틀린 것 같습니다.”
“모 상궁.”
모 상궁은 가늘게 여민 눈으로 빈씨의 처소를 노려보았다.
“안심하세요. 이 상궁은 무너졌지만, 난 다릅니다.”
그녀의 다부진 눈빛에 정 상궁의 굳은 얼굴에도 여유가 돌아왔다.
“자신 있으시오?”
모 상궁은 쪽을 지은 뒷머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숱이 풍성한 머리카락은 그녀의 자부심이었다.
“장담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터이니, 돌아가 차라도 마시며 희소식을 기다리시지요.”
“모 상궁만 믿겠소.”
모 상궁은 결연한 미소와 함께 빈씨의 처소로 들어섰다.
그러나…….
짹, 짹, 짹.
나무 위의 새소리를 얼마 듣지도 못했다.
차나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리라던 모 상궁은 일 다향이 채 지나기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잔에 따라 놓은 차가 채 식지도 않을 시간.
초조하게 기다리던 정 상궁이 대청마루 앞으로 뛰어갔다.
“교육은 어찌…….”
정 상궁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빈씨의 방을 나선 모 상궁은 조용히 대청마루 끝으로 향했다.
그러곤 말없이 이 상궁 옆에 나란히 앉았다.
먼 허공을 바라보는 모 상궁의 얼굴은 그야말로 나라 잃은 충신의 그것과 흡사했다.
늘 자랑하던 머리 모양마저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있었건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아.”
모 상궁의 한숨에 정 상궁의 주름이 깊어졌다.
“설마…….”
“제가 자만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었어요.”
“문안례에도 훤하였단 말이오?”
“모두 알고 계시더이다. 무얼 물어봐도 막힘이 없더이다. 심지어…….”
“심지어? 뭐가 더 있단 말이오?”
모 상궁은 대답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정 상궁, 혹여 낮에 뜨는 별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그 무슨 뜬금없는 소리요?”
“저 별을 따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 아라사라는 얼어붙은 땅이 나온답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아득히 걷고 또 걸으면 서역이 나오는데, 아라사와 서역의 예법은 우리와 서로 달라…….”
모 상궁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혼이라도 나간 듯한 그녀의 모습은 정 상궁에게 큰 충격이었다.
‘참으로 쉽게 볼 수 없는 분이로구나.’
이 상궁에 이어 모 상궁까지…….
처음엔 그저 방심하다 허를 찔렸다고 하지만, 오늘도 이리 맥없이 당할 줄이야.
무시무시한 빈씨의 저력에 정 상궁은 오싹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이번엔 정 상궁의 차롑니다.”
이 상궁과 모 상궁이 정 상궁을 빤히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정 상궁밖에 없다는 듯한 눈빛.
정 상궁은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못 하겠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기대하는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정 상궁은 마지 못해 대청마루 위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치맛자락을 누군가 잡았다.
모 상궁이었다.
“오 그러시오?”
반색하며 정 상궁이 돌아보았다.
가지 말라고 하려나?
그럼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아야지.
하지만 모 상궁은 정 상궁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을 내놓았다.
“정 상궁만 믿겠습니다.”
정 상궁의 어깨가 무거웠다.
끙, 앓는 신음과 함께 정 상궁은 비틀비틀 힘없이 빈씨의 처소로 들어섰다.
짹, 짹, 짹.
새 소리를 들으며 별궁의 궁인들 모두 숨을 죽였다.
일각이 지나고, 한 시진이 지났다.
그렇게 다시 두 시진, 세 시진…….
마침내 굳게 닫혔던 빈씨의 처소가 열렸다.
모 상궁과 이 상궁은 약조라도 한 듯 동시에 정 상궁을 응시했다.
“역시…….”
“이번에도…….”
잔뜩 굳은 정 상궁의 표정에 두 상궁은 자조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뚜벅, 뚜벅.
두 사람에게 다가온 정 상궁 역시 털썩, 허물어졌다.
이 상궁이 정 상궁을 위로했다.
“괜찮습니까? 그래도 이리 오랫동안 견뎌내시다니.”
모 상궁도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를 꺼냈다.
“정 상궁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다른 사람은 모두 몰라도 우리가 압니다. 그러니 정 상궁, 기운 내세…….”
“하하하.”
별안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상궁과 모 상궁은 놀란 눈으로 정 상궁을 응시했다.
자존심과 고집으로 일평생을 살아온 늙은 상궁이 어린 빈씨에게 패한 사실을 참아내지 못하고 드디어 정신줄을 놓았는가 보다.
그리 생각하는 찰나.
“찾았소!”
“……?”
“무얼요?”
“드디어 빈씨가 모르는 한 가지를 알아냈소.”
정 상궁의 말에 모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역시 제아무리 뛰어나신 분이라 해도 제례까지 정통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요?”
정 상궁은 모 상궁의 예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니외다. 그분은 제례마저도 정통하였소.”
“그럼 대체 무업니까?”
모 상궁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한 얼굴로 정 상궁을 바라보았다.
“총명한 빈씨가 모르는 한 가지, 그게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그건…….”
정 상궁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별궁이 다시 열린 이후로 처음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
*
서탁이 상의 웃음으로 가득 찼다.
-푸하하하. 상궁들이 위엄을 세워보려다 오히려 큰코다쳤구나. 아무렴, 누가 가르쳤는데.
악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다.
-이 백귀들이…….
궁엔 수많은 궁인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험 많고 노련한 상궁이 별궁의 교육을 맡곤 하였다.
그런 상궁들이 가르칠 것이 없다며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라니.
-대체 어린아이에게 뭘 가르친 것이야?
서탁에 뒤늦게 합류한 탓에 악은 화와 상, 그리고 예가 이레를 어찌 가르쳤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화의 태연한 대답이 떠올랐다.
-그저 세상 사는 도리를 조금 알려준 것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도리를 어찌 전수하면 궁중에서나 쓰일 문안례와 제례 절차를 훤히 꿰고 있단 말이냐?
예의 글이 나타났다.
-소일 삼아 하나하나 가르치다 보니 그리되었소. 그러는 악, 그대도 아이에게 산학을 전하지 않았소이까?
-그거야 심심풀이로 놀이 삼아 한 것인데, 하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으니 나도 모르게…….
-모두 같은 상황이었소.
-허허.
악의 한숨 소리가 서탁 너머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보니 궁에서 필요한 일을 모두 가르친 셈이 되었군. 한데, 여기저기 끼어들기 좋아하는 상이 조용하군. 넌 아이에게 무언가 가르친 것이 없느냐?
-나? 난 싸우는 법을 가르쳤지.
-예상대로 쓸데없는 소리만 하였군.
-쓸데없는 소리? 너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따지고 보면 세상일 중에 다툼과 경합 아닌 일이 없으니.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먹이든 말이든 일단 상대를 누르고 제압하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놔야지. 내가 아무리 똑똑하여도 대항할 힘이 없으면 남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런 험악한 이야기를 아직 어린아이에게 주절주절 떠들었을 거로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나.
-아이라고 서열과 다툼이 없을까? 모름지기 사람 사는 세상에선 기선 제압이 가장 우선이다. 예법이니 경전이니 하는 것은 그다음에나 필요한 일이지.
상의 말에 악이 반박했다.
-어찌 인간관계가 투쟁만 있을까. 넓은 포부와 깊은 아량으로 상대를 감화시키고 포용하는 방법도 있으니.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그거야말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악한 수작이지. 가령, 밤새도록 일하는 학자들에게 용포를 덮어주어 감동하게 만드는 일처럼 말이다. 알고 보면 사람의 약한 구석을 찔러 뼛속까지 우려먹겠다는 야비한 심산이 아니겠느냐?
-무엇이? 네놈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루 살피고 돌보는 그 지극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
이레는 상과 악의 설전으로 가득한 종이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화의 글이 떠올렸다.
-아이야. 네 이야기를 들으니 무난하게 잘 해결된 듯한데, 어찌 큰일이라 한 것이냐?
예도 동의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별궁의 상궁들인 것 같은데.
이레는 마른침을 삼켰다.
-실은…… 해가 저물 무렵부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데, 그 교육의 내용이 워낙 황망하고 당혹스러워…….
화와 예가 재촉했다.
-황망하고 당혹스러워?
-무슨 교육인데,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네가 이리 당황한단 말이냐?
-그것이…… 그것이…….
어찌 된 연유에선지 이레는 좀처럼 사정을 밝히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이레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서탁의 백귀들이란 스승이자 친혈육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기에 무슨 일이건 숨기고 감추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무슨 일인데 저리 당황하는 것일꼬.
-그러게.
화와 상의 의문이 사라질 즈음, 악의 글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가만, 별궁에서 교육을 받는다 하였지. 별궁에서 하는 교육이라면……. 허허허, 그것이로구나. 옳거니. 그 교육이 있었구나.
악이 무언가를 깨달은 탄성을 질렀다.
궁금증에 못 이긴 예가 악에게 물었다.
-그 교육이라니, 대체 무슨 교육 말이오?
-다들 왕이라 자처하였으니,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왕이라면 알 수 있다?
-별궁의 교육 내용을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예와 상의 글이 이어졌다.
-별궁에서의 교육이라. 궁중 예법과 큰절하기, 거기에 문안례와 제례까지 공부하였으니…….
-평범한 글공부에 당황할 아이는 아닌데.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지?
화가 가장 먼저 정답을 유추하였다.
-아침에는 구름(雲) 되고, 저녁은 비(雨)가 되어 볕 좋은 대(陽臺) 아래 기다리고 만나니. 이 어찌 정이 싹트지 않을까.
악과 예는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 실전 연습이로군.
-그렇구나. 아이가 곤란하고 난감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로다.
할아버지들의 글을 본 이레의 얼굴이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설마 이런 교육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악이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뭘 어찌해? 다 필요한 것이니 애써 가르치는 것이지. 눈 크게 뜨고 새겨두어라. 다 피와 살이 될 것이니.
-하지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 또한 세상사의 한 부분이니.
화와 예의 글이 이어졌다.
-아이야. 화의 말이 맞느니. 그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중요한 부분이란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세손도 너와 같은 교육을 받고 있을 터이니. 여기서 뒤처져서는 아니 될 것이야.
“세상에…….”
형운도 자신과 같은 교육을 받는다니.
이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앞으로 형운을 어찌 봐야 할까.
불덩이라도 집어삼킨 듯 두 뺨이 붉어졌다.
그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은 갑갑증에 가슴을 쳤다.
-뭘 눈 크게 뜨고 새겨들어? 대체 무슨 교육인데? 다들 빙빙 둘러 말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 봐라. 뭔데? 사람 복장 터지게 하지 말고 그냥 속 시원히 말해 봐. 대체 무슨 교육이야?
***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늦은 시각.
세손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탁 앞에 앉아 서책을 읽었다.
“사각사각, 비단 자락이 허공을 쓸었다. 성큼성큼 사내의 너른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름 대숲의 향내가 짙어졌다. 여인의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온몸의 세포들이 오직 한 곳을 향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사락사락.
형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동그란 이마에 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등골이 꼿꼿해지고 입술이 하얗게 버석거렸다. 길게 땋은 연분홍 댕기 끝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던 여인은 입술을 다부지게 말아 물었다.”
서책에 담긴 옛 성현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운은 책을 덮고 먹을 갈았다.
“사내의 낮은 속삭임이 귓불을 간질였다. 고요한 숲에 바람이 일었다. 동그마하던 여인의 눈이 놀라 화등잔만 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여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서걱서걱.
차분히 먹을 간다.
검은 먹물이 차분하게 우러나왔다.
“여인은 한순간 사내의 품으로 뛰어들 듯 안기고 말았다. 서로의 만남은 따뜻하였다. 또한, 뜨거웠다. 사내는 불문곡직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먹이 충분히 갈렸다.
형운은 서탁 위에 흰 종이를 펼쳤다.
“싫다 해야 한다. 더는 이런 만남은 싫다고. 이리 남의 이목을 피해 만나는 인연일랑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뿐 숨결은 성난 파도처럼 덮쳐왔다. 여인의 입안으로 뭔가 말캉한 것이 느껴졌다. 아릿하면서도 여린 꽃잎인 듯 촉촉한 감촉과 한없이 달콤한 향내가 혼탁한 격류처럼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붓에 먹을 먹이고 종이 위에 세웠다.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정심(正心).
“사내의 야만스런 숨결 속엔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여인은 허물어졌다. 그래, 다음에 하자, 다음에 말하자.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온전히 지금 이 순간만을……. 사내의 입술이 다시 덮쳐왔다. 아찔한 감각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훅훅. 맹수의 그것과 같은 사내의 숨결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없이 위로, 더 위로 솟구치는 듯한 아득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발끝이 한껏 오그라들었다.”
형운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마음을 바로잡으려 해도 자꾸만 글이 흐트러졌다.
한숨을 쉰 그가 잠시 붓을 내려놓고 최 내관을 보았다.
“최 내관…….”
“한순간 사내에게 점령당한 입술 사이로 탄성 섞인 숨결이…….”
“최 내관!”
“네, 저하.”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은 형운이 물었다.
“그걸 꼭 그리 소리 내어 읽어야겠는가?”
저녁 늦은 시각, 최 내관이 왕세손의 침소로 찾아왔다.
삼간택 이후에 꼭 필요한 절차라며, 그는 형운의 맞은 편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차마 온전한 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최 내관은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저는 읽어야 하고 저하도 반드시 들으시고 숙지해야 할 내용이옵니다.”
“나중으로 미루면 아니 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뭐든 때와 시기가 엄격히 정해져 있으니. 이 또한 미룰 수 없나이다.”
“하면 다른 방법으로 할 수는 없는가?”
“그 또한 순서와 절차가 정해져 있나이다.”
“…….”
강건하게 버티는 최 내관의 완고한 태도에 형운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설마, 가례의 절차 중에 이처럼 난감한 과정이 있을 줄이야.
최 내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단단히 매듭짓고 있던 여인의 저고리 고름이 단숨에 풀어졌다. 속적삼 사이로 희고 뽀얀 둔덕이 연신 가쁘게 들썩거렸다. 사르르륵, 사르르륵. 저고리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매미 날개 같은 속적삼도 속절없이 그 위에 안착했다. 아찔한 갈망이 두 연인을 사로잡았다.”
형운은 다시 붓을 들었다.
정심, 정심, 정심…….
혼잣말하듯 끊임없이 같은 글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안고, 안기고 싶은 본능. 연리수처럼 본디 한 몸인 듯 뒤섞이고 싶은 충동. 오랜 가뭄에 기갈난 사람들처럼 서로를 탐닉하던 두 여인은 대숲의 바람을 따라 몸을 흔들었다. 사내의 두루마기를 바닥에 깔고, 여인의 열두 폭 치마를 그 위에 올리니 제법 괜찮은 침상이 만들어졌다. 행여 다칠세라 조심조심 여인을 뉘인 사내가 그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태초, 세상에 처음 나올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여인과 사내는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아아, 좀처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다.
형운은 물끄러미 최 내관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책을 읽어나가는 최 내관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가슴과 가슴이 한데 맞닿았다.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의 양손을 사내가 깍지꼈다.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이 질끈 동여맨 여인의 가슴가리개를 끌렀다. 천천히 드러나는 은밀한 동산과 그곳에 자리한…….”
“하아.”
형운은 끝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하다못해 감정이라도 조금 담아 읽어주면 좋을 것을.’
형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최 내관은 격정적인 운우지정의 내용을 그야말로 책 읽듯 무심히 읽어내려갔다.
“아. 아. 아. 거대한 열락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