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왕의 어미
“유 박사의 후임으로 오셨단 말입니까?”
별궁 대문을 지키는 군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두 사내를 살폈다.
빈씨가 든 이후 별궁의 파수는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하였다.
40명의 수호군이 별궁을 지켰다.
담장 밖에 4개의 군보(軍堡)를 설치하고 각각의 군보에 2명의 군사들을 파견했다.
별궁 대문은 4명의 군사가 지켰고, 군보와 대문을 지키지 않는 나머지 28명의 군사는 별궁 주위를 순찰했다.
당연히 별궁을 오가는 자들에 대한 관리도 엄격하였다.
특히, 사내의 출입을 철저히 감시했다.
빈씨의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게 글 선생을 들이는 경우도 사가나 문중의 친인척이 동원되었다.
그런 곳에 젊은 사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나타났다.
그들을 향한 군사들의 눈 속에 경계심이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유 박사의 후임으로 왔다는 사내는 날 선 군사들의 눈빛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사내는 부채를 펼치며 여유롭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다네. 유 박사께 급한 사정이 생겨, 대신 나와 이 친구가 오게 되었다네.”
“가례도감에선 별다른 통보가 없었소.”
“젊은 친구가 기억력이 영 안 좋은가 보군. 좀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유 박사께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곧 가례도감에서도 연락이 올 걸세. 그리고 여기, 유 박사의 서찰일세.”
사내가 소매에서 서신을 꺼냈다.
다급한 사정으로 이 서찰을 지닌 자(者)에게 빈씨의 교육을 위임한다.
빈씨의 교육을 위임하는 것치곤 지극히 짧고 간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유려한 필체와 수인은 분명 유 박사의 것이 분명했다.
곤궁에 빠진 군사가 처신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유 박사가 허락한다 해도 따로 가례도감의 허락이 없으면 곤란하오.”
별궁에서 입직하던 승지가 얼굴을 비쳤다.
한숨돌린 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대신 깐깐한 인상의 승지가 빈씨의 새로운 글 선생을 자처하는 사내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유 박사의 서찰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승지는 쉬이 대문을 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내가 소매자락 안을 다시 뒤적거렸다.
“다른 것도 준비했소. 여기 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도 확인해 보시게.”
사내의 소매에서 여러 장의 서찰이 줄을 지어 나왔다.
“이것은 빈씨의 사가에서 보낸 확인서이고, 이건 그분의 문중에서 내어준 확인서일세.”
“소용없소. 궁의 허락이 없으면 곤란하오.”
두 손 가득 올려진 서찰과 증명서에도 승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척!
쥘부채를 소리 나게 접은 사내는 혀를 끌끌 찼다.
“어허, 이거 큰일이군. 이미 약조한 시간이 지났으니. 알겠네. 원칙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이만 돌아갈 수밖에.”
사내가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승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자네, 이름이 무언가?”
“이름은 왜 물으시오?”
“이후에 벌어질 일은 온전히 그대가 감당해야 하는데. 그래도 일의 경위를 올릴 때 이름 석 자 정도는 써야 하질 않겠는가.”
사내가 마지막이라는 듯 곱게 접힌 서찰을 꺼내 승지의 손 위에 턱 올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오?”
“세자 저하께서 주신 것인데, 시간 나면 한번 펼쳐보게. 어허, 큰일이군. 세자 저하께 이 일을 어찌 고한다? 그분의 낙심이 얼마나 클꼬. 어허, 큰일이군, 큰일이야.”
“자, 잠깐.”
세자 저하란 말에 승지는 돌아서는 사내의 소매를 잡았다.
사내가 그를 향해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왜 그러시는가?”
“정녕 세자 저하의 명이란 말이오?”
“그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가례도감의 명이 없으면 이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을.”
“…… 안으로 들어가시오.”
머뭇거리던 승지가 결국 옆으로 비켜섰다.
***
“후후후. 역시 우리 세자 저하께선 못 이루시는 일이 없단 말이야. 그분만 입에 담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별채를 걷는 젊은 관원의 모습은 지극히 한가로워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뒤를 따르는 또 다른 사내의 표정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무얼 하는 거냐?”
장무열의 차가운 질문에 서강율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자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가를 찾아간다 하지 않았는가?”
“이곳이 어딘지 모르고 그런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별궁이다. 이곳에 함부로 발을 들인 게 발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는 있느냐?”
서강율과 함께 은자원을 나설 때만 해도 설마 사태가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걱정 마시게. 그래서 이렇게 변장까지 하지 않았는가? 아무도 우릴 알아보지 못할 것이야.”
서강율은 부채 끝으로 덥수룩한 수염을 쓸어 보였다.
그를 한심하다는 듯 응시하던 장무열이 물었다.
“좀 전에 승지에게 준 문서들은 다 무엇이냐? 유 박사의 서찰은 또 어떻게 위조한 것인가?”
“위조라니? 어허, 이 사람 큰일 날 소릴 하는군. 내가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장무열은 대답 대신 서강율을 빤히 쳐다봤다.
종학의 유 박사가 빈씨 교육을 맡게 되었을 때, 그 집안에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세손빈이 되실 분이니.
장차 이 조선의 주인이 되실 세손 저하의 곁자리가 아니던가.
그리 귀한 분을 가르치는 글 선생이니.
다시 없을 광영이었다.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쉬이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사람은 없었다.
또한, 함부로 위임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장무열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강율을 바라보았다.
“거참, 사람 말을 좀 믿으라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딱 그대 한 사람 남았다고 해도, 그대의 말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해라.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예전에 유 박사의 일을 조금 도와준 일이 있었지. 마침 그 사람이 별궁에 드나들게 되었다기에 찾아가 편의 좀 봐달라 부탁을 한 것뿐이라네.”
“……약점을 잡고 협박했군.”
“협박은 자네 전문이고, 나는 그저 순수한 의미의 부탁일 뿐이야.”
“사가와 문중의 증명서도 그렇게 협박하여 받아낸 것인가?”
서강율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인덕과 친목을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더니,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
인덕과 친목을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필시 여유 생길 때마다 찾아가 끈질긴 협박과 회유를 했으리라.
‘만나는 사람을 죄 뒷조사해서 먼지 한 올이라도 나오면 꾸준하게 협박했다는 말이 아닌가?’
서강율의 치밀한 수법에 장무열은 질릴 지경이었다.
집요함이라면 장무열도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단 한 명에게만 몰두한다. 서강율처럼 광범위한 수작은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이 궁에 알려지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죽어도 함께할 길동무가 있으니. 외롭진 않겠군.”
“뭐?”
“독종, 자네와 좀전의 그 승지도 함께 죽겠지.”
서강율은 마치 남의 일처럼 히죽 웃음을 보였다.
그 얄미운 미소에 장무열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할 것 없네. 나름 이곳저곳에 손을 써 놨으니. 그리고 자네도 이곳에 흥미가 있지 않았나? 그렇지 않고서야 호랑이 굴이나 진배없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테지. 안 그런가?”
“…….”
장무열은 침묵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세 치 혀로 천하의 장무열을 휘어잡은 서강율은 별궁 이곳저곳을 관찰하며 눈을 빛냈다.
“별궁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풍광 참 아담하고 좋구나. 이곳에 우리 은랑이 있단 말이지. 밥을 잘 먹고 있으려나. 누가 해코지라도 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열심히 부채질하며 흥분하던 서강율의 눈에 기묘한 광경이 잡혔다.
부연 햇살 내리는 대청마루.
그곳에 늙은 상궁 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햇볕을 쬐는 상궁들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맹렬하게 타오른 끝에 하얗게 재만 남은 것 모습 같달까.
“저 상궁들, 악명 자자한 별궁 삼파 중 둘이 아닌가.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저 사람들이 어찌 저 모양이 되었지?”
궁금증이 인 서강율은 때마침 지나가는 궁녀를 붙잡고 사정을 물었다.
“그러니까 빈씨께 교육을 하러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단 말이오?”
“네.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어제도 저곳에 저리 계셨지요. 아! 정 상궁님께서 나오십니다.”
마침 제례 교육에 나선 정 상궁이 빈씨의 거처를 나서고 있었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휘청거리며 나온 정 상궁은 앞서 자리 잡은 상궁들 옆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땅이 꺼지라 하고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
굽은 허리, 축 처진 어깨.
직접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허허, 털렸구나. 탈탈 털렸어.”
서강율은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아무튼, 덕분에 은랑과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겠구나.”
별궁에 사내가 들면 상궁이 곁에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이 법도였다.
심지어 수업 중에도 문밖에 앉아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 그래도 귀찮은 상궁들을 어찌 따돌릴까 고심하였는데, 저런 상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서강율과 장무열은 궁녀의 안내에 따라 빈씨의 처소로 발을 들였다.
처소 한가운데는 빈씨와 빈객의 사이를 가로막는 듯 커다란 발이 처져 있었다.
촘촘하게 짜인 발 너머, 빈씨의 그림자가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빈씨를 뵙습니다.”
두 사내는 빈씨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유 박사께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였다 들었습니다. 혹여 신상에 별 탈은 없는지요.”
유 박사의 안부를 묻는 빈씨의 목소리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서강율의 대답이 들려왔다.
“빈씨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 박사라면 지금쯤 무릉도원에서 팔선녀들과 함께 복잡한 세상사를 잊고 계실 것이옵니다.”
“무릉도원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한데, 방금 말씀하신 빈객의 목소리가 무척 귀에 익은듯합니다.”
서강율의 눈가에 잔주름을 그려졌다.
“과연 눈치가 여전하십니다, 은랑.”
“지금 은랑이라 하셨습니까?”
내내 시야를 가렸던 발이 위로 살짝 걷혔다.
빠꼼 얼굴을 내민 이레가 서강율과 장무열, 두 사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은협이시군요. 제가 잘못 들었는가 했습니다. 이곳엔 대체 어떻게 오신 것입니까?”
행여 밖에서 들을까, 이레는 작은 목소리로 속달거렸다.
서강율이 덩달아 속삭였다.
“은랑이 잘 계신지 걱정되어 참을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별궁까지 오신 겁니까?”
은협의 엉뚱함에 이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서강율의 뒤편으로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에 이내 장무열의 모습이 맺혔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무열은 수척해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었습니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은호가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대답했다.
“……무탈하였습니다.”
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극히 경직되어 어색하게까지 느껴졌다.
***
“이곳에서 두 분을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옥 아닌 옥살이.
별궁에 갇혀 지낸 터라.
이레에게 두 사람의 방문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은자원엔 별일 없고요?”
뜻밖의 장소에서 은자원의 은자들과 마주하니.
마치 그리운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별궁에 든지 고작 며칠인데,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아주 먼 옛날 일처럼 아득했다.
“당연히 별일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은랑께선 참으로 많이 변하신 듯하오.”
서강율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으로 이레를 대했다.
심지어 이레를 대하는 말투마저 은근슬쩍 예전처럼 변하였다.
“아직 어색하기만 합니다. 한데,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당연히 우리 은랑이 잘 계신지 궁금하여 찾은 것이지요.”
서강율이 부채로 눈 아래를 가렸다.
진심이었다.
설사, 다른 볼일이 있었을지라도 가장 큰 볼일은 이레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증명이라도 하는 듯 서강율은 저도 모르게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진실을 말하거나, 남의 진의를 살펴볼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었다.
단지 잘 지내는지 궁금하여 찾아왔다는 서강율의 대답.
이레는 기뻤다.
또한,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이…….”
은호, 장무열이었다.
마치 자신이 별궁을 찾은 용건은 이레의 안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장무열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여인들의 실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실종이라면. 혹여 일전에 들었던 그 사건입니까?”
이레의 뇌리로 한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삼간택 중에 벌어졌던 일.
양화사에서 만났던 청상이 보쌈 되었던 사고였다.
“그때 듣기로 의적이라 불리는 자가 여인들을 납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이레의 말에 서강율이 반색했다.
“은랑도 알고 있었구려.”
“그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겁니까?”
“오히려 심각해졌소이다.”
서강율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건이 시작된 것은 몇 달 전.
도성 안팎에서 회임한 여인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실종된 현장엔 곡물이 담긴 손바닥만 한 비단 주머니가 남겨져 있었다.
항간에 의적이라 불리는 자의 징표라, 사헌부에서는 의적을 용의자로 지목하였다.
또한, 상황의 특수성을 살펴 미신이나 잡귀를 신봉하는 사교나 집단을 조사했다.
민간에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관련한 근거 없는 속설이 참으로 다양하였다.
아이를 고아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거나, 잘사는 집의 갓난아이를 훔쳐 기르면 기우는 가세가 일어선다는 식의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그중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의 태아와 관련한 끔찍한 속설도 있었다.
“한데, 그런 상황이 최근 변하였소.”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회임하지 않은 여인들도 실종되기 시작했다오. 최근 한 달간 실종된 다섯 명의 여인 중에 회임한 여인은 단 한 명뿐. 나머지 넷은 혼례도 치르지 않은 여인이었소.”
“사헌부에선 이 일을 어찌 보고 있습니까?”
이레의 물음에도 장무열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헌부 내부의 일을 외인에게 함부로 밝힐 수 없음이라.
사정을 눈치챈 서강율이 대신 대답했다.
“실종된 여인이 열을 훌쩍 넘기고, 회임한 여인뿐 아니라 혼인하지 않은 여인들도 실종된 만큼 지금까지와는 수사 방향을 급선회하여 광범위한 조사를 하고 있다 하오.”
이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흉수들의 목적은 회임한 여인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처음에 실종된 여인들이 회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최근엔 회임한 여인의 실종이 급격히 줄어들었소. 이를 보면 혼인의 유무와 상관없이 젊은 여인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목적을 숨기기 위한 연막이겠지요.”
노리는 대상이 회임한 여인으로 국한되면 지키는 쪽이 유리해진다.
회임한 여인이 있는 집만을 선별하여 잠복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 도성에 회임한 여인이 얼마나 많을까.
그 모두를 지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젊은 여인이 사는 모든 집을 감시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수월할 것이다.
“옳거니. 처음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을 저지르다, 범행이 계속될수록 대담해지고 지능적으로 바뀌었단 말이로군.”
서강율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흘렸다.
“깨달음을 얻은 선인은 복숭아나무 아래에 앉아 천 리 밖을 내다본다 하더니, 우리 은랑을 두고 하는 말이구려.”
“그저 제 생각을 말해본 것일 뿐입니다. 단순한 의견일 뿐이니,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은랑의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오. 내 부채가 그리 말하고 있다오.”
서강율은 부채를 꼭 움켜쥔 채 확신했다.
***
“과연 우리 은랑이로다. 은랑을 만나러 가길 정말 잘하였다.”
별궁을 나선 서강율은 껄껄 웃었다.
이번 일은 애쓴 보람이 있었다.
미궁으로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고, 무엇보다 은랑의 평온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장무열이었다.
“자넨 어찌 그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가? 보아하니 우리 은랑과 마주하였을 때도 내내 바닥만 보고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 은랑의 고운 얼굴이 궁금하지도 않았는가?”
“감히 빈씨의 거처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지엄한 국법을 어긴 것이거늘. 어찌 그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단 말이냐?”
그가 어찌 알까.
감히 그분을 보지 못하는 이 마음을.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여쁠까 봐.
별궁에 갇혀 지내고 있음에도 환히 웃고 있을까 봐.
그는 알지 못하리라.
“허허, 그 와중에도 국법을 상기하고 있다니. 과연 자네답군.”
서강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은랑을 향한 저 친구의 마음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시작은 양가의 혼담이라는 다소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지만, 언덕 위에서 굴려진 작은 눈덩이처럼 어느새 집채만큼 불어나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일 테지.
‘별궁에 계신 은랑의 모습을 보면 조금은 포기할까 기대하였는데.’
아무래도 은호를 위한 배려는 별다른 성과를 만들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집착이 남다른 친구니, 한 번 마음에 품은 순정 역시 쉬이 털어내기 힘들 테지.
저러다 무모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서강율은 불편한 생각을 털어내듯,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였다.
“어험, 대체 어떤 자들이 회임한 여인들을 납치한 것일까. 대체 무슨 용무로 그런 몹쓸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
휘오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후원.
높은 곳에 위치한 정자.
부른 배를 조심스럽게 받친 문 소원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새의 날갯짓처럼 펄럭였지만, 정작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날이 몹시 춥소이다.”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희끗희끗한 반백의 사내가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섰다.
사헌부의 집의, 김익현이었다.
문 소원은 뺨을 때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허. 몸도 가볍지 않으신 분께서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오. 듣자 하니 주상 전하께서 당분간 쉬며 몸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라 하였다던데.”
어명을 함부로 어긴 그녀의 행동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갇혀만 있으려니 얼마나 갑갑한지요. 어의도 산책이 필요하다 하였으니, 주상 전하께서도 크게 탓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뒷짐을 진 채, 먼 곳을 보던 김익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오늘은 무슨 일로 날 보자 한 게요?”
“최근 소식이 뜸하여 궁금하였습니다. 경사스러운 일이 멀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일도 계획해야 할 터인데.”
문 소원이 부른 배를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그렇구려. 곧 때가 되겠구려.”
김익현은 문 소원을 흘끔 보았다.
바라보는 눈길이 예전과 달리 차갑고 서늘했다.
“오늘 아침 내의녀가 다녀갔소.”
“내의녀가 어인 일로 집의를 찾았을까요?”
“어제 소원의 진맥을 짚었을 때, 여아의 맥이 짚였다 하오.”
문 소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아의 맥이라뇨?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어요.”
문 소원은 제 배를 끌어안았다.
“이 아이는 분명 사내아이입니다.”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제가 압니다. 아이를 품은 어미인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사내아이입니다.”
문 소원의 눈길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 내의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계집,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내 당장 그년을 찾아내 집의께 허튼소리를 한 그 요망한 주둥이를 요절을 내고 말 겁니다.”
“좋은 일을 앞두고 어찌 거친 일을 입에 담으시오. 매사에 조심하여야지요. 그래야 성군을 낳을 것이 아니겠소?”
성군이라는 말에 문 소원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제가 잠시 흥분하여 실수하였습니다. 아무렴요. 성군이지요. 성군이 되어야지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김익현이 발길을 돌렸다.
“소원에게 거는 기대가 크오. 그러니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오. 만약 계획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경우엔, 그 모든 책임이 소원에게 돌아갈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오.”
김익현의 경고에 문 소원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계획은 절대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믿겠소.”
김익현은 감정 없는 한마디를 끝으로 후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하던 문 소원은 핫, 억눌린 감정을 토해냈다.
“감히 네놈들이 나를. 감히!”
추위에 붉어진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성난 걸음으로 정자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기다리는 도 상궁에게 따귀부터 올려붙였다.
“마, 마마.”
“네년은 대체 무얼 하는 년이냐? 천한 내의녀의 미천한 주둥아리 하나 단속하지 못해서야 어디 날 제대로 보필한다 말할 수 있겠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그놈의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이젠 지겹다. 그리 송구하면 일이라도 제대로 하던가. 당곳네는 아직도 입궐하지 않았느냐?”
“곧 당도한다 하옵니다.”
“부른지가 언제인데 이리 더딘 것이야?”
“행여 궁의 다른 눈에 띄었다간 경을 칠 노릇이라.”
“일이 잘못되면 어디 경을 치는 정도로 끝날 것 같으냐? 서둘러 들이거라.”
“네. 마마.”
도 상궁을 매섭게 몰아친 문 소원은 그러고도 성화가 가시지 않아 어깨를 거칠게 들썩였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였다.
내리 아들만 열 낳았다 하여 더럽고 불결한 거지의 속곳도 마다치 않고 입었다.
아이를 품은 열 달 내내 섬뜩한 도끼를 자리 밑에 깔고 잤으며, 우물 속의 붉은 황토물도 서슴없이 마셨다.
어디 그뿐일까.
오늘 밤에는 도성 최고의 무녀, 당곳네를 불러 은밀히 굿판을 벌일 참이었다.
뱃속 아이의 성별을 바꾸는 신묘한 재주를 지닌 무녀라.
자궁을 빠져나오는 계집아이도 사내아이가 되리라.
“나는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야.”
문 소원은 제 배로 시선을 내렸다.
행여 이 많은 노력에도 이 아이가 여아라면…….
스멀스멀 기어 나온 불안함이 가슴을 들끓게 하였다.
그녀는 버릇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라버니껜 기별 넣었느냐?”
“네.”
“준비는 어찌 되어 간다더냐?”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니, 마마께선 그저 건강하게 아기씨를 낳으시면 될 거라고 하셨나이다.”
“알았다.”
문 소원은 그제야 조금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내 아이는 사내아이다. 나는 왕의 어미가 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