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89화 (89/215)

#89. 함께 가지 않을 텐가?

거침없는 파도가 서탁 위를 휩쓸었다.

-먼 곳에서 기리기 한 쌍이 짝을 지어 울어대니, 큰 헛기침으로 아는 척해야 옳을까, 모르는 척 외면해야 옳을까?

힘과 여우가 넘치는 필체는 분명 낯선 이의 것이었다.

백귀다.

처음 보는 백귀.

-당장 꺼지는 게 옳다!

균형과 조화를 이룬, 서체의 교본 같은 글이 대꾸했다.

형운의 글이었다.

“은백께선 이분을 아시는구나.”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서탁에 자신이 모르는 백귀가 있다니.

이레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형운과 백귀 사이의 언쟁에 불꽃이 튀었다.

-꺼지라니? 멋대로 남의 서탁 위에서 낯간지러운 말이나 주고받는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남의 서탁이라니? 어찌 이것이 너의 것이란 말이냐. 장난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둬라.

형운의 단호한 말에도 백귀는 전혀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너야말로 서탁에다 끄적이는 건 그만두고 잠이라 자라.

-무어라?

이대로 두었다간 둘 사이의 대화가 격렬해질 것 같았다.

슬며시 이레가 끼어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 또한 처음이나 낯설지 않으니. 연계, 저 미숙한 녀석이 매일 밤 그대를 애타게 부르짖는 통에, 친숙한 벗을 만나는 기분이다.

-그랬습니까?

-이젠 은랑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반갑다 못해 경기가 일 지경이었다.

형운의 흥분한 글이 서탁 위를 치달렸다.

-내가 언제 그랬더냐? 허풍도 적당히…….

백귀는 능숙했다.

그의 커다란 붓으로 그려낸 크고 굵은 필체가 형운의 불만을 일순간에 덮어버렸다.

-억울하면 증좌를 보여라.

뻔뻔한 백귀의 말에 형운의 글이 묻히고 말았다.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서탁은 신비하여, 남에게 전한 글은 아침 이슬처럼 고였다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그러니 은백과 백귀의 대화 또한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백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증거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있었다.

답답했지만 형운은 백귀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이레가 글을 썼다.

-서탁을 통해 새로운 분을 뵙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귀한 분을 제가 어찌 불러야 할까요?

-서탁은 진명(眞名)을 전하지 못하는 모양이니, 심지어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도 전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서탁에서만 사용되는 가명을 지어야 할 것 같구나.

형운의 불퉁한 마음이 담긴 글이 나타났다.

-백귀면 충분하다.

-그거야 연계, 너에게나 어울릴 이름이고.

또다시 말다툼이 이어졌다.

이레는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글로 느껴지는 기질과 성향이 은백과는 정말 다른 분이로구나.”

형운은 고요한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물이며, 얼음이다.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했다.

최악이라 불릴 법한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새로 만난 백귀는 불이었다.

아니, 차라리 용암이라 부르는 것이 옳으리라.

한순간 화려하게 피어오르다 허무하게 스러지는 불꽃이 아니라, 강처럼 도도하게 흐르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삼키고 지워버리는 용암처럼 거침없으면서도 뜨거운 기질.

이레가 붓을 들었다.

-용(鎔). 용이 어떻겠습니까?

-무쇠조차 녹이다. 훌륭하구나. 기왕이면 내 높은 뜻을 덧붙여 용(龍)이라 하는 게 좋겠군. 그래, 은룡(隱龍). 연계야, 앞으로 날 은룡이라 불러라.

은백은 강하게 반발했다.

-누구 마음대로 은자원의 이름을 붙인단 말이냐.

-그 무슨 대단한 곳이라고 자격을 따지느냐. 나 정도 되면 그까짓 것 대충 넘어가도 탓하는 사람, 없을 것이다.

-내가 허락할 수 없다. 더구나 용이라니. 상서로운 그 이름이 무얼 뜻하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서탁에서 우리끼리만 부르는 이름인데, 용이든 신이든, 염라대왕이든 무슨 상관일까.

-네가 진정 왕실을 능멸…….

-아무튼 내 이름은 앞으로 은룡이다. 연계도 은랑도 앞으로 날 그리 불러라.

일필휘지(一筆揮之).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써 내려간 은룡의 마지막 글은 그 강한 기백만으로도 감탄이 일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은룡이라 부르겠습니다.

-답답한 연계만 만나다 모처럼 말이 통하는 자를 만나니. 오랜만에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은룡께선 무얼 하신 분이시었는지요?

안타깝게도 마지막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레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구나.”

아쉽게도 서탁이 허락한 시간이 끝났다.

하늘의 달이 사라지면 서탁의 신묘한 힘도 사라졌다.

아니, 서탁이 허락한 시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레가 아는 것은 서탁의 법칙이 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정도뿐이다.

신비로운 시간이 끝났음에도 그녀는 좀처럼 서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은룡, 대체 어떤 백귀일까?’

이토록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도 오랜만이었다.

서탁과 통하는 백귀가 은백과 할아버지들 외에 더 있었다니.

더구나 이번엔 이레보다 형운이 먼저 그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알던 서탁의 규칙들이 궁에만 오면 모조리 바뀌는구나.”

은룡도 궁의 신비가 불러온 또 다른 인연일까?

무얼 하는 귀일까?

할아버지들과 같은 왕일까?

아니, 그가 백귀이긴 한 걸까?

대체 서탁에 머무는 백귀는 몇이나 될까?

어떤 원리로 대화가 가능한 것일까?

모든 것이 의문이고, 비밀이었다.

그렇게 은룡에 관해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정작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은백!”

이레는 궁궐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은룡이라는 새로운 백귀에게 정신이 팔려 은백과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사모.

은백이 남긴 고백이 이레의 심장에 각인되었다.

조용히 두 눈을 감으며 피톨에 흐르는 감정을 되뇌었다.

***

같은 시각.

언제나 고요한 세손궁.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적막한 곳에서 뜻밖의 고함이 튀어나왔다.

“전해라, 난 아직 할 말이 남았다. 그러니 전하란 말이다!”

세손의 성난 목소리에 놀란 최 내관과 좌익위 최치성이 급히 침소로 향했다.

“저하.”

“무슨 일이옵니까?”

서탁 앞에 앉은 형운은 칼을 쓰듯 붓을 휘두르고 있었다.

종이는 이미 그가 쓴 글로 검게 물들어 빈틈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건만, 형운은 붓을 거두지 않았다.

사뭇 심각한 그의 표정에 최 내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하, 무슨 일로 심기 그리 불편하시온지요.”

“…….”

형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고 있는 붓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였다.

주인의 낯선 모습에 연신 눈치만 살피던 최치성이 물었다.

“저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옵니까? 바라는 것이 있으시옵니까?”

“……필요한 것이라.”

드디어 굳게 닫힌 형운의 입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최 내관에게 말했다.

“최 내관.”

“네, 저하.”

“궁 안팎을 은밀히 살펴 한 사람을 찾아보라.”

“누굴 찾으면 되겠나이까?”

형운의 눈빛이 깊어졌다.

은룡에 관해 아는 것이 전무 하였던 까닭이다.

어쩌면 하찮은 백귀 때문에 괜히 마음 부대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지금껏 서탁에서 보아왔던 백귀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

어쩌면 그가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레처럼 숨을 쉬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존재.

“은룡.”

“네?”

“은룡이라 자처하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라.”

“진짜 이름이옵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만하고 오만한 성격의 사내이니, 필시 스스로를 드러내고 다닐 것이다.”

“송구하오나, 그자를 찾으면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평범한 자면 조용히 훈계할 것이고, 만약 관직에 있는 자라면…….”

형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조용히 삭탈관직하여야지.”

최 내관에게 은룡의 수색을 명한 형운이 이번엔 최치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성아.”

“네, 저하.”

“네가 꼭 구해줘야 할 물건이 있다.”

최치성은 자세를 단정히 했다.

세손 저하께서 이처럼 심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범상치 않은 물건이 필요한 것이리라.

“말씀만 하시옵소서. 소신, 그것이 무엇이든 구하겠나이다. 설사 바다를 건너고 저승 끝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도 찾고 구할 것이옵니다.”

좌익위 최치성의 눈동자에 결의가 들어찼다.

“무엇을 구하면 되겠나이까?”

“붓이다.”

“……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최치성은 당황했다.

“송구하오나 방금 붓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다. 붓, 붓이 필요하다.”

형운은 서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서탁 위, 종이를 검게 물들인 먹.

“누구보다도 크고 훌륭한 붓.”

평생 근검과 절약을 가슴에 새기고, 검소한 삶을 신조로 여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구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내 마음이 아무리 대단하여도 전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의 글을 모조리 삼켜버린 은룡의 흔적들을 보며 형운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붓, 큰 붓을 구해 오너라.”

최치성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요구에 응했다.

“소신, 최선을 다해 명을 받들겠나이다.”

***

차가운 새벽공기가 하궐, 왕세자의 침소를 휘감았다.

주춤주춤 어둠이 물러가고 어슴푸레 날이 밝아왔다.

새벽빛과 함께 왕세자의 침소에 긴 그림자가 들어섰다.

서강율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용포를 입은 한 사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넓고 든든한 등을 볼 때마다 서강율은 매번 감탄했다.

또한, 안타까웠다.

저리도 크고 훌륭한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시니.

어쩌면 저분의 큰 뜻을 담기엔 조선이라는 하늘이 비좁은 것은 아닐까?

“이번엔 어디를 다녀왔느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음성은 부러 성내거나 꾸미지 않아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수원에 잠시 다녀왔사옵니다.”

“수원이라.”

사내가 붓을 내려놓았다.

사용한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새 종이를 서탁 위에 펼쳐놓았다.

왕세자의 오래된 습관.

세자께선 언제나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서탁 위를 말끔하게 정리하곤 하였다.

그리고 텅 빈 백지 한 장을 서탁 위에 펼쳐놓았다.

오랜 옛날부터 그리하였는데, 자세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 서강율이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세자는 ‘그저 버릇이다.’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서강율은 그때 본 세자의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단 한 점의 그늘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웃음.

마치 그리운 고향이나 옛 친구를 떠올릴 때, 저도 모르게 짓게 되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찌하여 서탁이 세자로 하여금 그런 미소를 짓게 하는 걸까.

천하의 서강율도 풀지 못한 몇 안 되는 비밀 중 하나였다.

“수원엔 무슨 일로 갔느냐?”

“십학사와 관련 있는 자가 있다 하여 가보았습니다.”

“십학사.”

십학사란 말에 세자의 눈썹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자들의 행방을 찾았느냐?”

물어보는 음성에 깊은 울림이 담겼다.

서강율의 고개가 낮아졌다.

“송구하옵니다. 관련한 자를 수소문하여 찾아냈을 때에는 이미…….”

“또 죽었더냐?”

“그렇사옵니다.”

“허허.”

세자의 긴 탄식이 들려왔다.

“실로 간악한 자들이로다. 조금이라도 꼬리가 드러나려 하면 누구든 서슴없이 처치하니. 부리던 자를 이처럼 헌신짝처럼 버리는데, 어찌 따르는 자들이 그리 많은지 알 수 없구나.”

“그만큼 큰 이득이 걸려 있어서이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이득이 목숨보다 중할까. 악랄한 무리를 한시바삐 발본색원 못 함이 아쉽고 원통할 따름이다.”

“소인의 능력이 미천하여 저하를 상심케 했나이다.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벌하여 달라?”

세자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못 본 사이에 말재주가 많이 늘었구나.”

서강율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슬슬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어 연습하고 있사옵니다. 자연스럽지 않았습니까?”

“자연스럽긴. 낯간지러운 소릴 들으니 개미가 전신에 달라붙은 것 같구나.”

“송구하옵니다. 사실 저만한 사람이 천하에 몇 되지 않을 거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강율의 말에 세자가 씩 사내답게 웃었다.

“하하. 이제야 내가 아는 그 사람이로군.”

“송구하오나, 앞으로 그리 웃지 마시옵소서.”

“내 웃음이 왜?”

서강율은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저하의 그 털털한 웃음에 속아 제가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어라. 내 웃음에 속아?”

“농이 아니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좋은 일 다 마다하고 하필 암행대의 그 고행길을 제가 선뜻 택하였겠습니까?”

“과연 말재간이 늘었구나. 그것이 어디 내 웃음 탓인가? 비밀을 캐고 싶어하는 그대의 끊임없는 호기심 때문이지.”

“억울합니다. 저는 진정 충심으로…….”

“객쩍은 말 그만하라.”

세자와 서강율.

군주와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틀림없이 저 웃음이다.

저 꾸밈없는 웃음에 속아 주상 전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자리임에도 기꺼이 세자 저하를 따르는 것이리라.

“일 이야기는 됐고, 어디 여행 이야기나 해 봐라. 네가 본 수원은 어떻더냐?”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주위를 감싸고, 하천이 발달하여 물이 풍부하니, 풍수가 뛰어나 정기가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품 또한…….”

서강율은 이번 여정을 열심히 설명했다.

“과연 살기 좋은 곳이로구나. 그리 좋은 곳이라면 다음 외유는 마땅히 그곳으로 가야겠다.”

“저하의 잦은 외유를 걱정하는 자들이 많사옵니다.”

“그놈들이 어디 내 외유를 근심하겠느냐? 그저 ‘나’라는 존재가 싫은 것일 테지.”

“저하.”

세자는 손을 내저었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 됐다.”

그의 화통한 성정을 아는 서강율은 뒷말을 삼켰다.

큰 걸음을 가지신 분이다.

성큼성큼 걸어 때로는 주변 일에 소홀한 듯 보여도,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지셨다.

비록 지금은 힘든 시간을 보내시지만, 언젠가 반드시 이 나라를 크고 바르게 이끄시리라.

“저하.”

“또 왜 그리 수상쩍은 목소리로 부르느냐?”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무어냐?”

서강율은 서탁을 보았다.

정확하게는 서탁 옆에 걸린 다양한 크기의 붓들에 집중했다.

세자의 붓들은 화려했다.

특히 크기가 다양했다.

서예에 사용되는 일반적인 붓보다 훨씬 큰 붓들이 많았다.

“저 큰 붓들은 무엇에 쓰는 물건이옵니까?”

“붓 말이냐?”

세자가 서탁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에 친구들과 쓸데없는 경쟁을 할 때 사용하던 무기다.”

“붓이 무기란 말씀이시옵니까?”

“글로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글자 크기로 경쟁하게 되었단다. 승부욕이 일어 조금씩 붓의 크기를 늘려가다 보니 저런 터무니없는 물건들까지 갖게 되었구나.”

그리운 기억들을 떠올리는 듯 세자의 눈빛이 아련했다.

“무척 도타운 사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 두 번 다시 없을 만큼.”

세자가 그리운 시선으로 서탁을 쓸었다.

“소중한 벗들이다.”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벗들이라…….”

왕세자의 전각을 나서는 서강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분께 그런 친우들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그분과 관련한 의문이 또 하나 늘었다.

서강율은 탐구자였다.

비밀을 밝히고, 의문을 해소하는 과정을 즐기는 괴짜.

“서탁이라. 그러고 보니 은자원의 은자 중에서도 유독 서탁을 아끼는 친구들이 있었지.”

은백과 은랑.

두 은자들도 유독 서탁을 아낀다 하였다.

은백의 서탁은 궁녀들도 만지지 못한다 하였고, 은랑은 간택 시험을 볼 때에도 서탁을 챙겨갔다 들었다.

“바닥에 꿀이라도 발라두었나. 왜들 그리 서탁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서탁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은자원에 다다랐다.

창에 덧문이 모두 내려가 있었다.

은협, 서강율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거침없이 문을 열며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은백, 잘 있었…… 어라, 은백이 아니네?”

어두침침한 곳에 있는 사람은 은백이 아닌 은호, 장무열이었다.

문서 더미에 코를 박고 일하는 장무열의 모습에 서강율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문을 닫고 은자원 밖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내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왜 날 보고 그냥 나가는 것이냐?”

장무열이었다.

“병이 옮을까 걱정되었다.”

“병?”

“자네 하고 있는 짓이 영락없는 은백의 모습 아닌가.”

서강율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완고한 자네마저 이리 변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은백의 고리타분한 모습은 단순한 습관이 아닌 병인 모양이야. 남에게 전염되는 전염병.”

“방해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방해? 사헌부의 장령이 멀쩡한 제 집무실을 두고 왜 이런 구석에서 궁상을 떨고 있는 것인가?”

“……알 필요 없다.”

장무열은 다시 문서 더미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서강율의 관심을 끌었다.

“최근 여인들의 연이은 실종으로 사헌부의 부담이 크다 들었는데.”

“…….”

“그 사건의 수사 방법을 두고 사한부 내에서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더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장무열이 미끼를 물었다.

서강율은 부채를 촥, 펼쳐 눈 아래를 가렸다.

“그 사건, 해결하고 싶지 않은가?”

“범인을 아느냐?”

“알고 있으면 내가 잡았지, 이렇게 한가하게 놀고 있겠나?”

서강율의 뻔뻔한 반문에 장무열의 눈썹이 사납게 휘어졌다.

화들짝 놀란 서강율이 한 발짝 급히 물러서며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거참 사람, 눈빛하고는. 자고로 된장은 손가락으로 찔러봐야 맛을 알고,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진가를 아는 법.”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냐?”

서강율은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난 범인을 모른다. 하지만 그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지. 지금부터 그 사람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은 서강율이 한쪽 눈썹을 힐끗 들어 올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가지 않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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