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당장 꺼지는 게 옳다!
“금정아.”
금정을 부르는 음성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뜻밖의 재회라.
이레는 한달음에 금정에게 다가갔다.
“그간 어찌 지냈느냐?”
“아가씨.”
세손빈씨라는 귀한 자리에 올랐음에도 금정을 대하는 이레의 태도는 변함없이 순순했다.
금정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은? 상처는 잘 치료하였느냐?”
“네. 아가씨 덕분에 잘 치료받았습니다.”
말과는 달리 금정의 손등엔 화상 흉터가 붉게 자리하고 있었다.
“흉터가 남았구나.”
“괜찮습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걸요.”
금정이 슬그머니 옷깃을 당겨 흉터를 가렸다.
이레는 애잔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더냐?”
“방을 청소하러 왔사옵니다.”
“방?”
“방을 청소해? 상의원의 궁녀가 어찌 방을 청소하느냐?”
이레의 물음에 금정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얼마 전부터 별궁의 무수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무수리라면…….”
궁의 허드렛일이나 험한 잡역을 도맡아 하는 낮은 신분의 궁인이 아니던가.
상의원 궁녀였던 금정이 무수리가 되다니.
“금정아…….”
“그런 표정 짓지 마셔요. 그렇게 큰일을 벌이고도 목숨 부지 할 수 있었는걸요. 이게 다 아가씨들께서 마음 써주신 덕분입니다. 아차, 자꾸만 아가씨라고 아네요. 감히 빈씨께 결례를 저질렀나이다.”
“되었다. 너와 내가 어디 하루 이틀 안 사이이더냐. 그리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감히 무수리 따위가 어찌 빈씨께 예를 차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어허!”
한사코 법도에 따르려는 금정에게 이레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위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정녕 빈씨에게 혼나야 말을 듣겠느냐?”
“…….”
지금껏 겪어왔던 이레와는 전혀 다른 모습.
금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 중에 만났다.
한순간.
풋, 둘의 얼굴에 웃음이 열매처럼 매달렸다.
이레의 작은 장난에 금정이 긴장을 풀었다.
“그럼 감히 빈씨께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금정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얼마든지 물어보아라.”
“좀전의 일, 어찌 된 것이옵니까?”
“무어가 어찌 된 것이야?”
“빈씨께 소학을 가르치러 대단한 분이 오셨다 들었습니다.”
“유 박사님 말이로구나.”
“네. 그분, 종학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하신 분이랍니다. 여기 들어오실 땐 단단히 벼르고 들어오신 것 같던데.”
“벼르고 들어와?”
이해되지 않는 듯 이레가 되려 물었다.
“악명이 높으시다니. 이상하구나. 참으로 좋은 분이시던데.”
“좋은 분이시라고요?”
“그래. 친절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유 박사에 대한 이레의 평가.
궁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쯤 되니 금정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좋은 분이시옵니까?”
“처음엔 다소 딱딱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수업을 시작하셨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편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더구나.”
금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 박사는 거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편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한다고?
믿기지 않았다.
금정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건 어찌 된 연유입니까? 유 박사께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본디 정해진 시간이 그만큼인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짧으면 세 시진, 길면 다섯 시진은 걸릴 거라고 하셨답니다.”
“저런, 서두르는 기색이 보여 급한 볼일이 있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예정보다 일찍 가신 것이었다니.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붙잡고 물어볼 걸 그랬구나.”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힘들긴커녕,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레의 눈동자에 가벼운 흥분과 열기가 떠올랐다.
“예전에 배운 것이 떠올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단다. 이론으로만 알고 실체를 모르던 내용에 대해 많이 여쭤보았단다.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실례를 꼽아가며 짚어주시니. 이처럼 자상한 가르침은 난생처음이었다.”
금정이 다시 물었다.
“유 박사님께서 언문으로 된 소학이 아니라 한문으로 된 소학을 준비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분과 대화하고 질문도 하셨다고 말씀하시니…… 혹, 소학을 배우셨습니까?”
“가르치길 좋아하는 할아버지들이 계셔서 많은 배움을 얻었구나.”
어린 시절부터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나눈 대화가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어떤 교육받았는지 이레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들의 생생한 가르침.
그것이 갖는 엄청난 가치.
수백 년의 경험을 듣고 배운 이레의 깨달음은 단순한 책상물림이 책을 통해 얻은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금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신분의 경계가 극명하고, 남녀가 유별한 세상.
사내는 하늘이요, 여인은 땅이라.
제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해도, 여인이라면 그 배움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여인으로 태어나면 붓과 벼루 대신 실과 바늘을 가까이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너무 깊은 배움은 오히려 독이 되니.
그저 많이 쓰는 몇 글자를 제외하고 여인이 익히는 것은 언문으로 족하다 생각했다.
그것은 궁궐 여인이라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오죽하였으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했던 대비께서 신하의 상소를 읽지 못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질까.
그만큼 여인의 배움은 짧았고, 그것을 미덕이라 여기던 세상이었다.
그런데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다른 여인과는 달랐다.
언문뿐만 아니라 한문에도 달통한 모양이다.
제 일인 듯 잔뜩 신이 난 금정이 목청을 돋웠다.
“대단하십니다. 유 박사님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리시다니. 무척 엄하신 분들께 배우신 모양입니다.”
“엄하지만 또 한없이 다정한 분들이란다. 배움이 필요할 땐 누구보다 매섭게 가르치셨고, 외로워하면 자상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었지.”
옛 추억에 잠겼던 이레가 다시 유 박사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분들께 배우던 때에 비하면 유 박사님은 정말 친절하시더구나. 처음엔 긴장하셨는지 굳은 표정이셨지만, 몇 마디 질문이 오간 후엔 느슨해지셨단다.”
표정이 느슨해진 것이 아니고, 당황한 것이었다.
이레의 해박한 지식과 끝없이 이어지는 집요한 질문에 유 박사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곤혹스러워했다.
소학의 기초를 읊으며, 엄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였거늘.
오히려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격치(格致)에 관해 논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유 박사는 창백해진 낯빛으로 별궁을 떠났다.
고작 한 시진이었건만, 유 박사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이레는 금정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상 할아버지께 대학을 배울 땐 정말 눈물 콧물 다 뺐단다. 그 쉬운 이치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며 지청구 꽤 들었지. 그에 비하면 유 박사님은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셨으니. 정말 친절하시더구나.”
“대학도 배우셨단 말입니까? 혹여 사서삼경, 모두 배우신 겁니까?”
“간신히 눈으로 읽은 정도일 뿐, 심오한 이치까지는 아직 다다르지 못했단다.”
이레는 한숨을 쉬었다.
“학문은 참으로 난해하여, 영원히 공부해도 끝을 알지 못할 것 같구나.”
이레의 무덤덤한 대답에 금정의 입이 떡 벌어졌다.
‘혹시 세 노 상궁들께서 넋이 나간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금정은 별궁 삼파를 떠올렸다.
병에 걸린 닭처럼 온종일 앓는 소리를 내는 노파들과 이레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금정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이레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무튼, 널 이렇게 만나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구나.”
“저도 빈씨를 이리 뵈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금정은 목소리를 낮춰 이레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실은 저는 이리될 줄 알았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아가씨께서 빈씨가 되실 줄 진즉 알았습니다.”
금정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본 아가씨는 누구보다도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빈씨가 되지 않으면 어떤 분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진실로 운명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아가씨께서 빈씨가 되실 거로 생각했습니다.”
금정은 이레가 세손빈씨가 된 것을 제 일인 듯 진심으로 기뻐했다.
순수하게 제 감정을 드러내는 금정을 이레는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수리가 된 금정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이레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이레는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금정을 바라보았다.
“금정아, 이리하면 어떠하겠느냐?”
***
“저 아이를 말이옵니까?”
정 상궁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놀람을 숨기지 못한 노파의 눈가엔 잔 경련마저 일었다.
곁에 선 이 상궁과 모 상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 빈씨께서 직접 정 상궁의 처소를 찾아와 곁에 두고 싶은 아이가 있다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아인 비천한 무수리이옵니다.”
세 노파는 이레의 뒤에 선 금정에게 마뜩잖은 눈길을 던졌다.
하고 많은 궁녀 중에 하필 무수리를 곁에 두시겠다니.
“알고 있으이.”
“차라리 궁녀 중에서 한 사람 고르심이 어떠하겠나이까?”
“한때는 궁녀였네.”
“하오나 큰 죄를 짓고 무수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무수리를 곁에 두신다면 모두가 빈씨의 존위에 의구심을 품을 것이옵니다.”
정 상궁의 대답에 이레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내가 원한다 하였네. 무수리를 곁에 두는 것이 궁의 절차와 법도에 어긋남이라도 있는가?”
이레의 목소리와 시선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였던가.
별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빈씨의 자태는 범접이 어려울 만큼 당당했다.
궁에서 육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네 분의 왕비를 교육했으며, 세자빈과 후궁들의 교육까지 치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를 지경이었다.
그런 정 상궁이었건만.
이상하게도 이레의 말에 위축되었다.
분명 경기관찰사의 여식이라 하였는데.
간택에 참여하기 전까진 문중에서 소외되어 한직을 전전하는 아비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어미를 둔 변변찮은 집안의 여식.
당연히 세손빈으로써 갖춰야 할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리라.
하지만 고작 하루 만에 그러한 우려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다.
한미한 가문이라고?
교육이 부족하였을 것이라고?
아니었다.
그녀는 부족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이레의 일거수일투족엔 궁중 예절과 법도가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태도는 고상하였고, 말씨는 단아했다.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예법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잉태된 순간부터 왕실의 법도에 따라 산 사람처럼 모든 행동이 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나마 부족하다 느낀 것이 권위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무수리 금정을 감싸고 도는 태도에서 그러한 의혹 또한 눈 녹듯 사라졌다.
‘이분은 대체…….’
별궁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모든 일에 능숙한 이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세손빈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지 않은가.
“물었네. 이 아이를 내 곁에 두고 싶네. 궁의 절차와 법도로 저촉되는가?”
빈씨의 단호한 뜻.
타협을 거부하는 당당함에 정 상궁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빈씨의 뜻대로…… 하옵소서.”
***
밤이 깊었다.
문 소원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도 상궁을 기다렸다.
평소라면 일찌감치 잠이 들었을 시각,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마마, 소인 도 상궁이옵니다.”
바깥 동정을 살피러 나간 도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도 상궁이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 되었느냐?”
문 소원은 도 상궁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질문부터 던졌다.
“별궁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더냐? 처절한 울음이었느냐? 아니면 살려달라 난동을 부렸다더냐?”
“그것이…….”
도 상궁이 머뭇거리자 문 소원은 버릇처럼 손부터 치켜들었다.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겁먹은 짐승처럼 움찔, 목을 움츠린 채 도 상궁이 대답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옵니다.”
“아무 일도 없어?”
문 소원의 눈썹이 불편하게 휘어졌다.
“별궁 삼파에 유 박사까지 가세하였는데, 아무 일이 없다니. 그럴 리 없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느냐?”
“별궁 삼파라 불린 상궁들은 일찍 수업을 마쳤고, 유 박사도 예정보다 서둘러 돌아갔다 하옵니다.”
“이런, 세월이 흐르니 날카로운 송곳도 조금 무뎌지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첫날이고 하니, 가볍게 수업한 게지.”
“어쩌면 생각보다 둔하여 가르치기 난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궁녀들의 말을 들으니 수업을 마친 별궁 삼파와 유 박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하옵니다.”
“그래, 틀림없이 그런 것이렷다. 아무렴, 경기관찰사 따위의 여식이 궁의 빈틈없는 예법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것이옵니다.”
그제야 안심한 듯 문 소원은 보료에 등을 기댔다.
“천하의 둔재라, 선생들의 마음고생이 극심하겠구나.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터이니, 답답하겠어.”
“그…… 아이도 무척 괴로워할 것이옵니다.”
“흥, 당연한 소리. 오늘은 운 좋게 넘겼는지 몰라도, 며칠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문 소원은 잘근잘근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그 천한 계집, 분명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게야.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자리를 탐한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야. 아무렴, 필시 그럴 것이다.”
***
삿된 저주가 통한 것일까?
모든 일과가 끝난 밤늦은 시각.
이레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회와 외로움에 몸부림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유난히 햇살 따사로운 날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어떠셨는지요.
이레는 평소처럼 서탁 위에 일과를 써내려갔다.
-오늘은 별궁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날이었습니다. 또한, 별궁에서의 수업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일상.
처음 겪는 일이라 불안하기도 했고, 긴장도 하였다.
그러나 궁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그런가.
별궁에서 받는 빈씨 교육은 우려했던 만큼 어렵지 않았다.
오경(五更: 새벽 3)에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간단한 자릿조반을 먹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식사가 끝나면 내훈을 암기해야 했다.
정 상궁이 불러주는 내용이 무척 귀에 익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들께서 심심찮게 들려주신 내용이었다. 워낙 많이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무려 일각에 이르는 내훈의 긴 내용을 한꺼번에 불러준 정 상궁이 내용을 읊어보라 하였을 때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정 상궁의 깐깐한 표정이 경악으로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느라 이레는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훈 이후엔 궁의 역사와 가계도를 배웠다.
대전을 비롯하여 중궁전, 그리고 세자전과 빈궁전, 그리고 내명부의 후궁과 공주와 왕자, 대군을 대할 때의 예법과 격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또한 어려움이 없었다.
예 할아버지께서 예절 교육을 하며 알려주신 내용과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 이후에 이어진 큰절 올리는 연습과 밥상머리 예법 또한 할아버지들께서 옛이야기처럼 늘 하시던 내용이었다.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였던지라.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는 무엇이든 신기했다.
워낙 지루한 일상이라, 12첩 반상을 상상하며 할아버지들께서 시키신 대로 수저를 움직이고, 뒤뚱뒤뚱 큰절 올리는 연습도 놀이 삼아 했더랬다.
배움이 있으니,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격식대로 행하였다.
결국, 늙은 상궁들의 가르침은 무의미했다.
빈씨의 비명을 예상했던 별궁 노파들은 다들 앓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제대로 된 예법을 배우고 익히려면 적어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릴 것인데, 순하게 생긴 빈씨는 가르치기 무섭게 척척 해냈다.
오히려 어떤 부분은 상궁들의 경험과 가르침을 훌쩍 뛰어넘었다.
“유 박사님은 내일도 오시려나?”
이레는 유 박사와의 시간을 떠올렸다.
내일은 또 어떤 것을 물어볼까.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났다.
-내일은 또 무얼 배울까요? 또 어떤 일이 있을까요? 아참, 그러고 보니 참으로 반가운 얼굴도 만났습니다.
이레는 금정에 관한 이야기도 서탁으로 전했다.
그 직후였다.
스스슷!
내내 서탁을 가득 채우던 글씨가 녹아내리듯 서탁의 나뭇결 사이로 사라졌다.
이윽고 스며들듯 나타난 글.
-금정이란 그 아이가 나보다 더 반갑더냐?
반듯하고 단정한 서체.
-은백!
이레의 글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엔 달이 휘영청 밝았다.
‘맑은 달밤인데, 어찌 은백께서……. 아! 궁에서는 규칙이 바뀌는구나.’
서탁엔 일정한 규칙이 있다.
맑은 달밤엔 할아버지들과 만나고, 흐리고 안개 짙은 날엔 은백을 만난다.
그런 규칙이 궁에만 오면 반대로 변하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찌 지냈습니까?
내내 기다렸던 사람과의 대화인지라.
가슴이 뛰었다.
-그러는 넌 어찌 지냈느냐? 쓴 글을 보니 잘 적응하는 것 같긴 한데.
-아직 크게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천성인 것 같습니다.
-농담도 다 하고. 낯설고 고된 일이 많은 줄로 안다. 무리하지 마라.
-참입니다. 그저 온종일 먹고, 배우고, 익히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즐겁기만 하느냐?
-실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마.
이레가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움입니다.
-가족이 보고 싶으냐? 이참에 글 선생을 부친으로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마.
“물론, 가족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그리운 분이 계십니다.”
이레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담아 써내려갔다.
-혈육보다 더 그리운 사람이라.
-깊은 밤, 밤안개와 더불어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분이니. 이분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잠시 후, 형운의 답이 돌아왔다.
-은백.
평소보다 크게 쓰인 그의 글에서 혼자 짓고 있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 대답이 맞느냐?
-아마도 정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답이다. 내 장담하마.
-은백께서 그리 장담하시니, 분명한 듯합니다.
-그럼 나도 문제를 내마.
-내 보십시오.
-언제나 그립다. 낮이면 그 목소리 들리는 듯하고, 밤이면 그 부드러운 미소 그린듯하니, 한날한시도 떨칠 수 없는 아픔과 같구나. 이것을 무엇이라 하느냐?
-정(情)입니까?
-아쉽구나. 반만 맞았다.
-정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사모(思慕).
-…….
-내 마음이 그러하다.
거침없는 고백에 이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줍은 마음에 괜스레 낡은 서탁의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바로 그때.
-미치겠구나.
백지 위에 낯선 글씨가 새겨졌다.
힘차게 뻗어 나간 필체는 형운의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들의 것과도 전혀 달랐다.
‘새로운 백귀다!’
은백과 악 할아버지 이후에 실로 오랜만에 나타난 새로운 백귀였다.
낯선 백귀가 터질듯한 기상을 담은 글로 자신의 고뇌를 풀어나갔다.
-먼 곳에서 기리기 한 쌍이 짝을 지어 울어대니, 큰 헛기침으로 아는 척해야 옳을까, 모르는 척 외면해야 옳을까?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물음.
은백이 진심을 담은 섬세한 필체로 답했다.
-당장 꺼지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