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파란(波瀾)의 빈씨 교육
삼경오점(三更五點: 새벽 3시).
어둠이 자취를 감추고, 희붐한 새벽이 먼 곳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별궁, 어의동본궁에 모처럼 불이 밝혀졌다.
정당 앞뜰에서 시작된 횃불은 내당의 높은 담을 따라 후당에까지 이어졌다.
동부 숭교방에 있는 어의궁은 효종의 잠저였으며, 인조 장렬왕후 이후부터 이곳에서 왕실의 가례를 행하였다.
왕실의 큰 경사가 있을 때만 사용했던 곳이라.
조용하던 별궁이 오랜만의 온기에 들썩거렸다.
그중에서도 정당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자리한 정 상궁의 처소는 치열한 열기로 가득했다.
방 안에 모인 세 명의 노파 사이로 은근한 공기가 감돌았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정 상궁이 눈가를 초승달 모양으로 여몄다.
미소 짓는 얼굴 가득 얕고 깊은 골짜기가 잔뜩 그려졌다.
흐르는 세월에 버티는 장사 없다고 했던가.
궁중 최고 미인이라 불리던 아득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라.
정 상궁에게 남은 건 자글자글한 주름뿐이었다.
생을 끝낸 고목 껍질 같은 얼굴은 웃어도 우는 듯 보였고, 울어도 웃는 듯했다.
기이한 표정 덕에 늘 속을 알 수 없는 터라.
언제부터인가 궁궐 사람들은 그녀를 ‘매구 상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 상궁의 바로 곁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군요. 세손빈씨 교육, 그 지난한 과정이 시작되겠군요.”
모 상궁은 강퍅한 인상을 한데 모았다.
늘 무언가 못마땅한 듯 한껏 얼굴을 찌푸린 모 상궁은 어린 궁녀들에겐 야차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특히 그녀의 눈 밖에 나면 사사건건 트집이 잡히니.
어떻게든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는 모 상궁 때문에 기어이 궁을 나간 궁녀도 여럿이라는 소문이 궁을 횡행했다.
야차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궁녀 잡아먹는 건 모 상궁이라.
모 상궁에겐 ‘야차 상궁’이란 별칭이 붙었다.
“경기관찰사댁에서 오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을 연 이는 세 노파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이 상궁이었다.
별궁의 이 상궁은 힘세고 손맛 맵기로 유명했다.
가볍게 툭 내리친 노파의 손매에 자줏빛 멍 자국이 안 생긴 궁녀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난(蘭)치는 것을 좋아하고, 궁중 예법에 능통하여 궁녀들의 실수를 잡아내니.
어린 궁녀들에겐 ‘나찰 상궁’이라 불리며 다른 두 명의 노파들과 함께 기피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까닭.
다름 아닌 빈씨가 된 경기관찰사의 여식, 김이레때문이었다.
장차 세손빈이 된 빈씨의 별궁 교육을 맡은 세 노파의 얼굴엔 엄하다 못해 은근한 희열마저 서려 있었다.
“애초에 세손빈으로 내정된 분이 아니라, 많은 교육이 필요할 겝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입으론 힘들 거라 하였지만, 세손빈 교육을 거론하는 노파들의 눈은 생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무지하고 고집이 센 아이일수록 이들의 교육열을 불타게 하니.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이라는 느낌에 오히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흥분마저 느낀 것이다.
늙은 생강.
달리 별궁 삼파(三婆)라 불리는 노파들은 밤을 하얗게 새우며 세손빈씨의 교육을 논의하고 있었다.
“길어야 석 달. 기본이 부족하신 분을 완벽히 만들어야 하니,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모 상궁의 말에 이 상궁이 동의했다.
“그렇겠지요.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은 아가씨도 어려워하는 것이 별궁의 생활이니. 예정도 없이 돌연 빈씨가 되신 분께서 감당하기엔 무척 고단하실 겁니다.”
정 상궁이 호호,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느슨하게 할 순 없지 않겠소?”
모 상궁이 서릿발처럼 눈빛을 세웠다.
“당연하지요. 궁에서 지내시려면 이보다 열 배는 더한 어려움이 있을 것인데. 고작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 어찌 세손빈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일부터 논해보도록 하지요.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이 상궁이 커다란 덩치를 애써 웅크리며 물었다.
“그래도 첫날이니. 가볍게 시작해야겠지요.”
“가볍게요?”
“오전엔 궁중 예법을 전할 생각입니다.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궁중 말씨와 궁체를 연습하고, 조식 후엔 절하는 법의 기초를 세울 생각입니다. 더불어 각 전각에 필요한 예법 또한 전해야겠지요.”
담담하게 말하는 모 상궁을 이 상궁이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가볍게 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절하는 법만 하여도 온종일 제대로 걷지 못할 터인데…….”
“그래서 오늘은 역사, 지리, 산술, 천문을 뺏습니다.”
이 상궁을 대신하여 정 상궁이 물었다.
“그럼 오후에는 무얼 하실 작정입니까?”
“오후에는 빈씨께 소학을 가르치실 스승이 오실 것이오. 그분께서 세 시진 동안 소학교육을 하신다고 하셨소.”
“소학을 가르치실 분이라면……?”
정 상궁의 말꼬리를 이 상궁이 채갔다.
“설마 종학의 유 박사님입니까?”
모 상궁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 상궁의 입에서 측은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빈씨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호된 시간을 보내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야반도주라도 하면 어쩐답니까?”
모 상궁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별궁의 감시를 더욱 단단히 하라 일렀소.”
정 상궁과 이 상궁은 모 상궁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참으로 대단하시오.”
“그렇게나 말입니다. 정 상궁, 나는 일생을 살면서 모 상궁만큼 철두철미하고 독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모 상궁의 얼굴이 모처럼 밝아졌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야차 상궁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
밤의 어둠이 물러가자 찬란한 아침 볕이 세상을 물들였다.
그러나 근신하라는 어명이 떨어진 문 소원의 전각은 여전히 어둠이 휩싸인 듯했다.
무거운 전각.
사방 휘장 내린 문 소원의 처소는 캄캄했다.
불퉁한 표정의 문 소원은 보료에 등을 기댄 채 누워있었다.
그 곁에서 어린 궁녀가 서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어진 아이를 낳으려면 어진 이야기로 마음을 채워야 한다 하니.
아이의 태교를 위해 나름의 정양 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르고 선한 이야기를 들어도 들끓는 화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역정을 참지 못한 문 소원이 손을 휘저었다.
“그만 읽어라.”
사나운 내침에 어린 궁녀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못마땅한 눈으로 궁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문 소원이 몸을 일으켰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잠시 잊었던 지난 일이 떠올랐다.
절로 호흡이 가빠지고 울화가 치밀었다.
심장이 거칠게 날뛰고, 욱신욱신 두통마저 일었다.
사납게 숨을 몰아쉬던 문 소원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은신처를 찾았다.
“도 상궁, 밖에 있느냐?”
“네, 마마.”
도 상궁이 서둘러 모습을 보였다.
문 소원은 손짓으로 그녀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곳은 어찌 돌아가고 있다더냐?”
“별궁 말입니까?”
문 소원이 도 상궁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망할 것. 그럼, 내가 다른 일로 널 불렀겠느냐?”
난데없는 손찌검에 도 상궁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본디 변덕이 죽 끓는 듯했던 주인의 성정일랑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근래엔 변덕을 부리는 것을 넘어 걸핏하면 매질이었다.
맞은 뺨을 감싼 도 상궁이 얕게 앓는 소리를 냈다.
문 소원의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어찌 대답이 없어? 더 맞고 싶어 그러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다만, 아직 빈씨가 별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문 소원이 다시 도 상궁의 뺨을 때렸다.
“빈씨라니? 설마 그 요망한 계집을 그리 부른 건 아니렷다?”
“용서하시옵소서. 이 주둥이가 망언을 뱉었나이다.”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말해봐라.”
문 소원의 눈길이 표독스럽게 갈라졌다.
“바, 밤늦은 시각임에도 별궁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하옵니다. 험한 교육이 한창인 듯하옵니다.”
도 상궁의 보고에 문 소원은 비아냥댔다.
“근본도 없는 것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모양이구나. 하나, 밤을 지새운다고 안 될 일이 될 턱 있겠느냐?”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흥, 얼떨결에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올랐으니, 두렵고 불안하겠지. 욕심도 날 것이야. 어떻게든 버텨내 진짜 궁으로 들어오고 싶을 테지. 하지만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별궁 삼파가 교육을 맡았다 하옵니다.”
“별궁 삼파?”
별궁 삼파를 떠올리며 문 소원은 이를 악물었다.
“아시옵니까?”
“알다마다. 내 후궁 교육을 그 늙은이들에게 받았다. 그 늙은이들한테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전하께서 중도에 그만두라 명하지 않으셨다면, 후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안하무인.
임금의 총애만 믿고 날뛰는 문 소원마저 치를 떠는 위인들.
바로 별궁 삼파였다.
“별궁 삼파가 그리 대단하다면, 경기관찰사의 여식 또한 감당하기 어렵겠사옵니다.”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겠지.”
오랜만에 문 소원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쉽구나. 내 눈으로 직접 그 꼴을 봐야 하는데. 얼마나 재미있을까. 이런이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구나, 호호호.”
***
미시초(未時初:오후 1시)
별궁의 대청마루 밑으로 바람이 숨었다.
돌계단을 쓸던 궁녀는 연신 전각 뒤뜰을 곁눈질했다.
돌계단 위, 대청마루에서 마른 걸레질을 하던 궁녀가 그녀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저분들 왜 저러셔?”
걸레를 내려놓은 궁녀가 턱짓한 곳엔 별궁 삼파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새벽까지만 해도 세손빈씨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불태우던 별궁의 노 상궁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대청마루 끝에 힘없이 앉아있었다.
무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호승심 넘치던 눈빛은 안개처럼 불투명했고, 살신성인의 기상으로 충천하던 어깨도 축 늘어져 있었다.
“난들 알겠어? 빈씨 처소에 들어갔다 나오신 이후로 줄곧 저러고 계시니.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
“혹시 빈씨께서 저분들도 손쓸 수 없을 만큼 엉망인 건가?”
“설마, 그렇게까지 엉망일까.”
“좀 전에 지나가며 들으니, 저분들께서 이렇게 중얼거리시더라고.”
“뭐라 하던데?”
“이럴 리가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앞으로…… 앞으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말을 하였어.”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러시는 거지?”
“소문으로 들으니 이번에 빈씨가 되신 분은 달리 내정된 분을 제치고 간택되셨다 하더라. 예정에 없던 일이니 천둥벌거숭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분들이 누구셔? 별궁 삼파야, 별궁 삼파. 숱한 분들을 겪으면서도 한 번도 꺾이지 않은 분들인데.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이 함께 꺾이실 리가 있겠어?”
“그렇긴 한데……. 그럼, 저분들께서 대체 왜들 저러시는 거지?”
“모르겠네. 아무튼, 큰 충격을 받으신 건 확실한 것 같아.”
두 궁녀의 속닥거림이 이어지려는 찰나.
별궁 내당으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다닥 걸레를 들고 대청마루로 돌아가던 궁녀가 돌연 헉, 마른 숨을 삼켰다.
“왜 그래?”
궁녀가 빈씨의 처소로 들어가는 사내를 가리켰다.
“저분.”
“누구?”
어느새 두 사람의 주위로 주변의 궁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야?”
“뭐야?”
미간에 큰 점이 있는 궁녀가 아는 척을 했다.
“종학의 유 박사님이셔.”
“유 박사님?”
비질하던 궁녀가 다가와 물었다.
“그분이 어떤 분인데 이 소란입니까?”
점박이 궁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종학에서 종친들을 가르치는 분이야. 엄하고 무섭기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하실걸.”
“아무리 그래 봤자 종학에서 종친들을 가르치시니. 종친들이 어떤 분들인 줄 알잖아. 태생부터 귀한 분들이니. 까다롭고 제멋대로인 분이 어디 한둘이야? 아마 저분도 마음고생 꽤 하셨겠네.”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유 박사님으로 말하자면 주상전하의 신임이 두터우시니. 행여 배움을 게을리하는 종친에겐 매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셨어.”
“정말? 정말 종친들에게 회초리를 든단 말이야? 그랬다가 나중에 어떤 화를 당하시려고?”
“그게 무서우셨으면 애초에 종친들을 가르치는 종학에 계시겠느냐? 어쨌든 종친들에겐 지옥의 염왕보다 더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그런 분이 별궁엔 어쩐 일이실까?”
“보면 몰라? 저분이 들고 있는 저 서책, 소학이잖아.”
“소학?”
“이 맹추. 소학도 몰라. 주자께서 쓰신 책이잖아.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유학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배우는 책.”
“넌 저 서책, 읽어 본 적 있어?”
“내가 저런 걸 어찌 읽겠느냐?”
“그러면서 아는 척하긴.”
티격태격하는 궁녀들 사이로 비질하던 궁녀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저 소학이 뭐가 문제여요?”
이번에도 점박이 궁녀가 말했다.
“빈씨의 기본 소양 교육 중 소학이 있는 건 맞아. 다만, 보통의 사대부 아가씨들 대부분이 언문만 읽은 줄 아시니. 저리 한문으로 된 소학이 아니라 <언해소학>으로 수업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건 죄다 한문이네.”
“그러니 문제라 하는 것이지.”
“언해소학도 어려운데, 소학이라니. 괴롭히려고 작정한 모양이네.”
수군대는 궁녀들의 말을 들은 것일까?
대청마루로 올라서던 유 박사가 돌연 발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별궁 삼파가 쪼르르 앉아 있는 대청마루였다.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유 박사의 물음에 십 년은 늙은 얼굴이던 세 노파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어찌하겠는가. 명이 받잡고 따르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니.”
유 박사는 끌끌 혀를 찼다.
마지못해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한데, 병든 병아리처럼 그곳에 모여 뭣들하고 있는가? 궁의 예절과 법도를 알려드리려면 할 일이 많을 터인데…….”
“그것이…….”
정 상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진실을 알려줄 수 없어 말끝을 대충 얼버무렸다.
“생각할 것이 많아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한데, 소학을 가르치실 생각이십니까?”
정 상궁의 물음에 유 박사가 챙겨온 서책을 들어 보였다.
“그럴 생각이네.”
“빈씨께는 언해소학으로 교육을 하심이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그 무슨 소리인가? 장차 이 나라의 세손빈이 되실 분이 아닌가. 겨우 소학 정도도 깨치지 못해서야 어찌 그 자리를 감당하시겠는가.”
“그래도…….”
“걱정하지 말게나. 배움이 부족하시면 내가 채워드리면 될 것이니. 완벽하게,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채워드릴 것이네.”
“…….”
“그래서 하는 말인데, 빈씨 저녁 수라 준비하실 때 내 것도 준비해 주시게.”
늦도록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식사 준비야 어려울 것이 없지만. 첫날인데 너무 심하지 않겠습니까?”
유 박사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욕심 같아선 소학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을 모두 떼고 싶지만, 그건 턱도 없을 것이니. 우선은 내편만이라도 대강 훑어볼 생각이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
유 박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총명하신 분이라면 세 시진이면 될 것이고, 그에 미치지 않는다면 다섯 시진 이상 걸리지 않을까 생각하네만. 물론 제대로 익히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일세.”
“다섯 시진이란 말입니까?”
무려 열 시간 동안이나 공부를 시키겠다니.
정 상궁은 질린 표정으로 유 박사를 응시했다.
“그것도 짧게 잡은 것일세, 어험.”
거만한 헛기침을 흘린 유 박사가 처소 안으로 사라졌다.
완고한 그의 태도에 모 상궁은 혀를 끌끌 찼다.
“저 노친네가 제대로 날을 잡았구나.”
정 상궁과 이 상궁은 약조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친 중에 저 노친네에게 앙심 품지 않은 분이 없다 합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풍문을 듣고는 욕먹는 걸 장수의 비결로 삼는다 하더이다.”
“정신 나간 노친네로군. 그나저나 그분께서도 이번만큼은 어렵겠지요?”
모 상궁은 완고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렴. 이번에야말로 참기 힘드실 것이외다.”
***
소원 문씨의 전각.
도 상궁의 들뜬 목소리가 회랑을 길게 울렸다.
“마마.”
“무슨 일인데 이 소란이냐?”
“별궁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문 소원의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왜? 그 계집이 죽겠다고 목이라도 매달았다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문 소원은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하면?”
싸늘한 시선에도 도 상궁은 희희낙락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별궁에 종학의 유 박사가 들었다 하옵니다.”
“종학의 유 박사라고 하면 그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 늙은이 말이냐?”
“듣자하니 빈씨께 소학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학? 그게 무에 새롭다고 이 호들갑이냐?”
“유 박사가 이번 빈씨껜 제대로 소학을 가르치겠다고 작정하였다 합니다.”
“제대로 소학을 가르쳐?”
“네. 언문으로 된 소학이 아닌 한문 소학을 가르치겠다고 장담하였다 합니다.”
“분명 그리 말하였다 합니다.”
문 소원이 무릎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 깐깐한 늙은이가 그 아이를 괴롭히려고 작심한 모양이구나.”
“안 그래도 과연 며칠 만에 곡소리가 울릴 것인가를 두고 궁인들 끼리 내기를 걸었다 하옵니다.”
“며칠? 하루면 족할 것이다. 별궁 삼파에 종학의 유 박사까지 붙었으니. 오늘이 가기 전에 그만두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겠구나.”
“마땅히 그럴 것이옵니다.”
“그래, 필시 그럴 것이야.”
비틀어진 붉은 입에서 카랑카랑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세손빈 교육에 몸부림치는 이레를 떠올리니, 가슴에 맺힌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악명 자자한 유 박사가 빈씨의 처소로 들어간 지 한 시진이 흘렀다.
“어험어험.”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유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마루에 끝에 멍하니 앉아있던 별궁 삼파 중 모 상궁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어험,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
“네?”
모 상궁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못 해도 세 시진은 족히 걸릴 거라 장담하던 그가 아니던가.
그의 결연한 표정에 어쩌면 날이 바뀔 때까지도 수업이 끝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불과 한 시진 만에 돌아가야겠다니.
“아무래도 내가 서책을 잘못 갖고 온 것 같네.”
“역시 한문으로 된 소학은 빈씨께서 보시기 어렵겠지요? 서둘러 아이들을 시켜 언해소학을 준비하게 하겠습니다.”
유 박사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그럴 필요 없네.”
“언해소학이 필요하신 게 아닙니까?”
“학문에 어찌 위아래가 있겠는가? 다만…… 어험, 이런 낭패를 보았나. 어험어험.”
“……?”
“소학이 아니라 대학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유 박사의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반 기세 싸움에서 눌려 버린, 그리하여 싸울 의지조차 꺾여버린 패잔병.
그 모습에 모 상궁은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없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그의 심정이 어떤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살펴 가십시오.”
“어험, 그럼세. 어허험.”
터덜터덜 걸어가는 유 박사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초라해 보였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유 박사와 마루에 쪼르르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는 별궁 삼파.
대체 오늘 하루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궁녀들은 턱 끝까지 차오른 호기심과 의구심에 안달이 났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정말 궁금해 미치겠네.”
“그리 궁금하면 네가 들어가서 사정을 살피고 오던가.”
“그걸 내가 어찌해? 그러다 빈씨께서 역정이라도 내시면? 난 안 해. 아니, 못 해.”
세손빈씨 되신 분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은 아니나, 워낙 분위기가 신비로워 궁녀들은 물론이고, 상궁들도 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래도 궁녀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엉망이면 가르치는 분들이 한결같이 저런 반응을 보이실까?
“그럼 저 아이에게 시키면 어떨까?”
점박이 궁녀가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를 가리켰다.
“무수리?”
“저런 아이가 감히 그분 앞에서 입이나 뗄 수 있겠느냐?”
“아무렴 어때? 안 되면 그만이지.”
점박이 궁녀가 무수리에게 손짓했다.
“너 이리 좀 와봐라.”
장독 뚜껑을 옮기던 무수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무에 시킬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 너에게 긴히 시킬 일이 있단다.”
“무엇입니까?”
“저곳 말이다.”
“빈씨의 처소 아닙니까?”
“잘 아는구나. 네가 그곳에 가서 빈씨께 한 가지만 여쭤보려무나.”
무수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늘처럼 높은 분께 제가 어찌 감히…….”
“어허! 나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궁금한 것이 있어 여쭤보라는 것뿐인데, 무슨 잔말이 많으냐?”
“하오나…….”
“듣자하니 궁녀였다가 큰 죄를 짓고 무수리가 되었다지? 우리가 네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얄미운 표정으로 겁박하던 점박이 궁녀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니 잔말 말고 들어가서 별궁 삼파의 일과 유 박사님의 일에 관해 여쭤보아라. 알겠느냐?”
무수리는 마지 못한 표정으로 빈씨의 처소로 걸음을 뗐다.
“진즉 말을 들을 것이지.”
“그런데 저 무수리 말이야. 이름이 뭐라 하였지?”
“글쎄, 아무렴 어때. 손에 화상 자국이 있으니, 대충 화상(火像)이라 부르면 되지 않겠어?”
***
밖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과는 상관없다는 듯 빈씨 처소는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낮게 내려앉은 고요함 한가운데, 이레의 모습이 보였다.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레의 모습은 마치 그린 듯 아득하고 아름다웠다.
“빈씨를 뵈옵니다.”
문밖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차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무수리 복색의 궁녀가 들어왔다.
“빈씨를 뵈옵니다.”
넙죽 절하는 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너는…….”
이레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금정이가 아니냐?”
손에 화상 흉터가 있는 무수리.
재간택 마지막 시험에서 이레를 도왔던 상의원 궁녀, 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