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너, 친구 없지?
새벽부터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발에도 김시묵의 집 안팎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가장 좋은 날을 점쳐 정한 삼간택의 날이었다.
지난밤, 중궁전의 궁인들이 삼간택 때 입을 옷과 패물을 보냈다.
진주 귀고리, 옥당돈, 진주 반지, 진옥 부어, 경면 석우황, 순금세호 반지, 산호 반지 1쌍, 남송 별문단, 당의, 송화색 별문저우사 소고의(짧은 저고리), 분홍 장원주 소고의, 송화색 별문단 소고의, 분홍 장원주 소고의 1작, 분홍 저포 한삼(적삼), 다홍 오호로단 겹치마, 다홍 백문복단 홑치마, 흰 숙갑사 핫 너른 바지, 숙갑사 핫 봉디, 서양목 이의(裡衣: 단속곳), 흰 모시 자근치마, 무족 치마, 백근 봉채, 금단 운혜…….
일일이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찰 정도였다.
궁중의 법도에 따라 화려한 복색과 치장을 마친 이레는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건강히 지내십시오.”
김시묵은 무거운 표정으로 여식을 응시했다.
“앞으로 사가의 일은 잊으십시오. 이제 내명부의 사람이니 내명부에 걸맞은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궁중의 규범에 맞추셔야 합니다. 들어도 듣지 말아야 하며, 보아도 본 척하십시오. 입은 있으나 말하는 입이 아니고 그저 음식을 먹는 입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염려를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전했다.
이레를 여식이 아닌 세손빈으로 대하는 아비의 모습.
그 어색한 공대에 이레는 비로소 삼간택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버거운 복색 탓에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신을 신었다.
마당 저편, 행랑 할멈이 연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눈물로 얼룩진 주름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다가가 위로하려 하자 곁에 선 상궁이 만류했다.
“송구하오나, 지체할 틈이 없나이다.”
대문을 나서려던 이레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집안은 모든 것이 아쉽고 새로웠다.
늘 보아오던 기둥도, 서까래도, 마루와 장독대.
담장의 작은 돌멩이마저도 하나하나 새기듯 눈에 담았다.
이제 대문을 나서는 순간, 더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설사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지금까지는 전혀 다른 모습이리라.
이레는 집안의 모든 곳을 새겨넣듯 보고 또 보았다.
집안 식솔들이 모두 나와 먼발치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분께선 마지막까지도 세손빈이 되려는 이레를 반기지 않았다.
지난밤, 안채로 찾아뵈었을 때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 딱딱한 낯빛이 손녀가 헤쳐나가야 할 앞날을 염려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노파심 때문인지 이레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가야 할 시간입니다.”
다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내뱉는 날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대문 밖에는 육인교와 함께 수십 명의 군사들이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이레.
장차 세손빈이 될 귀한 빈씨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
이레를 태운 육인교가 궁으로 향했다.
가마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북소리가 하늘에 허락을 구하고, 긴 호령과 무거운 발소리가 삼간택의 의미를 전했다.
겨울이 그려낸 창백한 풍경을 지나친 가마는 궁궐의 거대한 문을 지나 통영전에 다다랐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예를 갖춰 이레를 맞이했다.
그들은 서둘러 전각 안으로 간택인을 안내했다.
이제나저제나 이레를 기다리던 왕실 어른들은 그녀를 반겼다.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의 어른들께 절을 올리고 따뜻한 덕담을 마음에 담았다.
그것으로 삼간택의 공식적인 절차가 모두 끝났다.
오후 늦은 시간.
이레는 궁녀들의 안내에 따라 통영전을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간택인의 신분이 아닌 명실상부 묘선에 낙점된 빈씨로 탈바꿈할 시간이었다.
사대부 여인의 복색을 벗고 대신 위엄과 격식을 갖춘 왕실의 대례복으로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오니 집에서 타고 왔던 육인교 대신 왕비나 공주가 타는 옥여가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감 도제조를 비롯하여 예조 당상관 및 낭청은 의복을 정제하고 예를 갖춰 이레를 전송했다.
임금의 가마를 메는 사복시 군인들이 가마를 메고 호위했다.
병조와 내시부의 배위와 결속이 길을 열었다.
높은 담을 따라 반 시진 가량 가마를 타고 가자, 궁궐 밖 또 다른 궁이라 불리는 별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당과 내외당, 그리고 후당으로 구성된 41칸 어의동본궁이었다.
앞으로 한동안 빈씨가 된 이레는 별궁으로 지정된 어의동본궁에서 왕실 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레를 태운 가마가 별궁의 대문을 넘어섰다.
가마가 지나는 길 양옆으로 수십 명의 궁녀가 머리를 조아린 채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별궁을 관리하는 세 명의 상궁들이 전각 앞에서 이레를 기다렸다.
정 상궁, 이 상궁, 모 상궁.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세 노파는 궁에서 가장 엄격하고,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각각 궁중에서 쓰이는 격식, 마음가짐 그리고 예법을 교육할 이레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실 터이니, 푹 쉬십시오.”
정 상궁은 이레를 처소로 안내했다.
이레의 처소는 사가의 별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화려했다.
하지만 비단 금침과 너른 방을 보고도 이레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이 어색한 곳에서 한동안 지내야 한다 생각하니, 그저 막막한 마음뿐이다.
이레가 정 상궁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머무르게 됩니까?”
“한 달에서 석 달 정도입니다.”
정 상궁은 교육이 빨리 끝나면 과정 또한 빨리 끝날 것이고, 게으름을 피우면 기간 또한 늘어나게 될 거라 하였다.
“교육은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옵니다.”
정 상궁의 눈빛은 별궁의 공기처럼 차가웠다.
노 상궁이 물러가자 이레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한동안 이곳에 갇혀있게 되었구나.”
고즈넉한 분위기의 별궁은 사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곳이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거야.’
외로움은 견뎌낼 수 있었다.
낯선 환경도 불편할 뿐이다.
집에서도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당분간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잘 계실까?’
이레는 세손궁에 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은백.
그분 곁에 바로 서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뎌왔다.
이제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생각했는데, 이번엔 별궁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분 곁자리에 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간절히 바라는 건 매번 쉽게 얻지 못하니. 정녕 얄궂은 운명이로구나.”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운명이 허락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처소의 창문을 열었다.
“눈은 그쳤네.”
온종일 내리던 눈이 간신히 그쳤다.
하지만 밤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오늘은 만나지 못하려나.”
이레는 차가운 손을 비비며 서탁 앞에 앉았다.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았다.
사각사각,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먹이 풀려나온다.
적당히 농도가 무르익자, 붓을 들었다.
-오늘도 무탈하십니까?
이레가 쓴 글이 강물에 떨어진 꽃잎처럼 흘러갔다.
곧 인자한 필체의 글이 나타났다.
-아이로구나.
“화 할아버지!”
기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삭막한 곳에서 만난 정든 글이라.
화 할아버지의 글이 더없이 반가웠다.
이레를 반긴 이는 화 하나만이 아니었다.
곧 예의 글도 떠올랐다.
-무탈하였다. 너도 잘 지냈느냐?
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성품을 드러냈다.
-아직도 서탁을 배회하고 있느냐? 이쯤 하였으면 그만 성불할 때도 된 듯한데.
-상 할아버지야말로 이제 성불하라는 말을 그만하셔요.
뒤늦게 나타난 악이 이레와 뜻을 함께했다.
-듣기 좋은 말도 삼세번이라 하였거늘. 무슨 놈의 인사가 매번 성불은 언제 하느냐 묻는 것이냐?
-그럼, 이대로 아이가 영원히 구천을 떠돌았으면 좋겠냐?
-그놈의 백귀 타령도 지겹다.
-백귀를 백귀라 하지, 그럼 뭐라 부른단 말이냐?
-어디서 이렇게 앞뒤로 꽉 막힌 답답한 화상이 나왔을꼬.
악의 혀 차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했다.
상은 길길이 날뛰었다.
-무엇이? 감히 날 더러 화상이라 하였느냐?
“두 분은 오늘도 여전하시구나.”
악과 상은 시시때때로 말다툼을 벌였다.
언뜻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여도 두 분만큼 죽이 잘 맞는 분도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난 뒤, 화가 물었다.
-세손빈 간택은 어찌 되었느냐?
악의 글도 뒤따랐다.
-그러고 보니 삼간택에 오르게 되었다 하였지. 간택에 떨어질 방법을 고민하던 네가 삼간택에 오르다니.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구나.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초간택에 참여할 때만 하여도 일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아버지들의 물음에 이레가 대답했다.
-실은 이미 별궁에 들어왔습니다.
악과 화의 글이 연이어 서탁 위로 떠올랐다.
-그래? 그렇다면 이미 삼간택도 끝났다는 말이로구나.
-이번에도 초간택 때처럼 서탁을 들고 간 게야?
-네. 이번에도 서탁을 잊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별궁에 있으면서도 지금처럼 할아버지들과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이 말했다.
-용케 서탁을 챙겼구나. 내가 경험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끊기 어려운 게 서탁질이었다. 그러니 너도 서탁에만 열 올리지 말고, 별궁에서 익혀야 할 가르침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예도 이레를 다독였다.
-낯선 곳이라 많이 긴장하였겠구나. 편하게 생각하려무나. 세상만사 모두 네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니.
악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렴, 고작해야 죽기밖에 더할까. 이미 백귀인 네가 두려워할 건 세상에 하나도 없느니라.
상 역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이야.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라도 물어보아라. 네게 나와 다른 할아비가 있음을 잊지 마라.
이레는 가만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들의 진심이 너무도 고마웠다.
-할아버지들 덕분에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
밤이 깊어졌다.
서탁을 통해 할아버지들과 대화하였던 이레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녀가 잠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하던 서탁에 신비한 조화가 일었다.
-별궁이라.
서탁에 펼쳐놓은 텅 빈 종이 위에 절로 글이 새겨졌다.
연잎의 부드러움과 대쪽 같은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필체.
상이었다.
-나쁜 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그의 혼잣말에 예가 대답했다.
-예법은 이미 충분하니, 큰 탈은 없을 것이오.
악의 휘갈겨 쓴 글이 서탁 위를 질주했다.
-세상사 모든 갈등이 사람 간의 관계에서 초래되니. 나쁜 인연만 조심하면 되겠지.
상도 거친 필체로 응했다.
-빌어먹을. 착한 아이가 앞으로 나쁜 놈, 사악한 놈, 미친놈. 두루 만나게 될 걸 생각하니, 벌써 울화가 치미는군.
화가 버럭 화를 터트렸다.
-어찌 하나같이 괴상망측한 군상들만 언급하는 거냐? 모르는 사람이 보면 궁이 온갖 사악한 악한으로 넘쳐나는 줄 오해하겠구나.
-차라리 악한 정도면 괜찮지. 적어도 그런 놈들은 자신이 나쁜 놈인 건 알고 있으니까.
-하면, 궁엔 더한 작자들이 득시글한단 말이냐?
-자고로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작자들이 바로 자신이 무조건 옳다 여기는 자들이다. 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니, 반성도 후회도 없고, 흐르지 않는 연못처럼 고이고 썩을 뿐이지.
상의 글엔 인간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예도 드물게 상의 의견을 두둔했다.
-권력은 악취와 같소.
상의 다시 물었다.
-듣자하니 아이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군. 그들이 과연 별궁에 든 아이를 잠자코 지켜보기만 할까?
상의 말에 다른 백귀들은 침묵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힘있게 쓴 화의 글이 서탁 위를 가득 메웠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아이라면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
세상을 뒤덮은 눈은 세손궁에도 어김없이 하얀 자취를 남겼다.
그 절경 위를 조심조심 걷던 최 내관이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이쿠.”
요란하게 넘어진 그를 부축하기 위해 홍인모가 달려나갔다. 하지만 살얼음이 깔린 바닥은 빙판과 다름없었다.
일어서는 최 내관과 도와주던 홍인모가 함께 바닥에 털프덕 주저앉았다.
“하하하.”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던 형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즐거우냐?”
때마침 세손궁을 찾아온 세자가 관심을 보였다.
좀처럼 웃지 않던 형운이 멀리서도 들릴 만큼 크게 웃으니, 그 모습이 색다르고 신기했다.
“아바마마.”
세자가 손을 저었다.
“귀찮으니 그냥 앉자.”
짧게 눈인사를 건넨 세자는 형운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얇게 깔린 눈밭에서 허우적대는 최 내관과 홍인모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 주인 하나 웃기겠다고 여러 사람이 애쓰는구나.”
세자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그의 시선은 아들에게로 향했다.
찬찬히 형운의 낯빛을 살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생각지 못한 광경에 그만 실소하였습니다.”
형운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정녕 그뿐이냐?”
되묻는 세자의 입가에 문득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들어찼다.
“내내 얼굴 같은 표정에 온기가 깃드니. 마치…… 혼인날만 기다리는 어린 신랑 같구나.”
“……그리 철없어 보였사옵니까.”
무표정한 형운의 반응에 세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목석 같은 네놈과 내 무슨 이야기를 하랴.”
“…….”
“그보다, 드디어 간택이 끝났구나.”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들었사옵니다.”
“앞으론 더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형운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앞으로 지금보다 더한 고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세자는 이레와 형운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재간택에서 이레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형운이 직접 아버지인 세자를 찾아가 간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자는 형형한 눈으로 물었다.
“그러한 고난이 닥쳐왔을 때, 네 사람이 될 그 여인을 보호할 자신이 있느냐?”
“싸울 것입니다.”
형운은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어떤 일이 닥친다 하여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의 당당한 대답에 세자의 눈이 커졌다.
언제나 나약하고 의기소침하던 아들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하하. 네놈의 마음가짐을 보니 장차 이 조선에 외척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겠구나.”
“걱정 마시옵소서. 공명과 정대, 할바마마께서 늘 강조하신 것이었사옵니다. 살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것이옵니다.”
한참 아들을 바라보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어리석구나.”
뜻밖의 말에 형운은 어리둥절했다.
“아바마마.”
“내 여인을 위해 싸움도 마다치 않겠다 하였으니 어찌 공명(公明)할 수 있겠으며,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 하였으니 어찌 정대(正大)할 수 있겠느냐?”
세자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아비를 향해 무언가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껏 받은 도움이 있는지라.
형운은 목 안에서 맴도는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아들에게 세자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
“지금껏 배우고 익힌 대로 군주의 도리를 행할 것이옵니다.”
“그저 배운 대로만 행한다면 어찌 바른 군주가 되겠느냐? 배운 것이 있으면 이리 응용도 해 보고, 저리 요령도 피워보는 것이 올바른 군주의 덕이다.”
“소자 하나만 여쭙겠나이다.”
“말하라.”
“근래 아바마마께오서 잠행이 잦다 들었사옵니다. 그러한 잠행은 아바마마께오서 말씀하신 군주의 올바른 덕을 베풀기 위함입니까?”
세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무엇이옵니까? 배움의 응용이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요령이옵니까?”
이윽고…….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세자의 대답이 들려왔다.
“반항이다.”
***
-반항, 반항이라. 하하하.
서탁 위에 웃음이 하나 가득 펼쳐졌다.
하필이면 서탁에서 마주한 백귀가 건방진 백귀라.
형운은 미간을 한데 모았다.
늦은 밤.
이레가 별궁엔 잘 도착했는지 궁금한 마음에 서탁 앞에 앉았다.
먹장구름 가득한 하늘이라.
어쩌면 오늘은 못 만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더랬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를 불식하기라도 하듯, 서탁 위에 쓴 글은 어김없이 지워졌다.
반갑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는 아바마마와의 일을 적었다.
그러나 막상 나타난 이는 시건방진 백귀였다.
저리 비웃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와의 일은 쓰지 않는 것인데.
-언제까지 웃을 것이냐?
보다 못해 형운이 물었다.
마침내 웃음을 그친 백귀가 대답했다.
-너,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아비를 두었구나.
-재미가 있는지, 골치가 아픈 것인지는 당사자만 알 것이다.
-왜? 아비로 인해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긴 모양이지.
-알 필요 없다.
-또 못된 버릇.
백귀가 형운의 행동을 두고 지청구를 날렸다.
-내가 무얼 어찌하였다고?
-이야기를 꺼냈으면 속을 보여줘야지. 툭하면 알 필요 없다 하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나 말던가.
-그거야 속이 답답하여 끄적인 것을 네가 본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까 멋대로 글을 읽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이 말이렷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문득 서탁 위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을 심하게 하였나?”
마음 한 귀퉁이가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못된 백귀가 떨어져 나간다면 그것도 나쁠 것은 없지.
생각하는 찰나.
백귀의 글이 떠올랐다.
-너, 친구 없지?
-무어라?
뜬금없는 물음에 형운은 버럭 화를 냈다.
-갑자기 그런 것은 왜 묻는 것이냐?
-누구 하나 네 친구를 자청하는 이가 있다면 다른 이를 대할 때 이리는 못 대하겠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그야말로 너 혼자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렷다?
-감히 내가 뉘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떠드는 것이냐?
-안다고 해도 너와 내가 사는 곳이 다른데. 네가 무얼 어찌하겠느냐?
-네 이놈! 두고 봐라. 네놈의 극락왕생을 어떻게든 방해하고 말 터이니.
-흥, 두고 보자는 놈치고 변변찮은 놈 못 봤다.
-사람 잘못 건드렸다, 백귀야.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상대를 잘못 잡았어.
티격태격한 말들이 서탁 위로 스며들었다 다시 나타났다.
그렇게 얼마나 말싸움을 하였을까?
형운은 부지런히 움직이던 붓대를 우뚝 멈췄다.
“내, 대체 무얼 하는 짓인가.”
이건 마치…….
마치…….
벗과 시시한 말놀이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불경한 백귀에게 휘말려 이런 지경까지 오다니.
형운은 붓을 내려놓았다.
서탁 위로 다시 글씨가 떠올랐지만 보지 않았다.
어서 저 백귀가 사라져야 이레와 대화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밤이 깊도록 백귀의 장난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을 놀리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 꼭 누군가를 닮은 듯했다.
하지만…….
“누굴 닮았지?”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해 형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끝끝내 생각나지 않은 채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