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85화 (85/215)

#85. 믿지 않겠다

집 안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이레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문턱을 넘어온 햇살이 서탁 위를 어슬렁거렸다.

철이 들고 이리 늦잠은 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레는 화들짝 놀라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툇마루로 나가자 행랑 할멈이 마른 걸레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쿠, 우리 아가씨. 이제 일어났어요?”

할멈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뭔 잠을 이리 주무신대요? 일어나실 때까지 깨우지 말라셔서 참느라 이 늙은이 죽을 뻔했어요. 배는 안 고파요? 무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에구,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할멈은 이레의 머리를 뒤로 쓸어주며 연신 혀를 찼다.

“어떻게 된 거야?”

유난히 조용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레가 물었다.

지난밤.

재간택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상전하께서 이레가 만든 옷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경기관찰사 김시묵의 여식이 세손빈이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임금께선 그저 제례 때 입을 옷을 선택한 것에 불과했지만, 사실상 삼간택에 오를 간택인을 직접 지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한양에 사는 사대부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더러는 명선이 아닌 이레가 선택된 것을 두고 천심이 하늘에 닿은 것이라 하는 이도 있었다.

대제학의 여식이 세손빈 자리에 내정된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전혀 엉뚱한 집안의 여식이 삼간택에 오르니, 대제학의 집으로 보내려 한 선물 보따리를 되찾아 경기관찰사의 집으로 다시 보내는 웃지 못할 소동마저 벌어졌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삼간택에 오른 여인이 세손빈이 된다.

이레가 사가로 돌아왔을 때, 집 앞은 축하해주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문중에선 선물과 함께 잔치 준비를 도와줄 사람들까지 보냈다.

그러나 정작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이레의 부친, 김시묵은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사람들과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경솔함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간 긴장했을 여식에게 조금이나마 쉴 시간을 주고 싶은 아비의 배려이기도 했다.

이레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부엌에 전해졌다.

곧 아침상이 들어왔다.

푸짐한 상차림에 이레의 놀란 표정이 채 가라앉기도 전,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일어났느냐?”

김시묵이었다.

아비의 느닷없는 방문에 이레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날 필요 없다.”

김시묵은 별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방문 밖에 앉아 불편한 헛기침만 연발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부녀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고생했다.”

정적을 깬 아비의 한마디.

이레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 여식에게 김시묵이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호사다마라 하였다. 좋은 일엔 언제나 마가 붙는 법이다. 그러니 마음가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모두가 너를 지켜볼 것이니 행동에 섣부름이 없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국 식겠다.”

그 말을 끝으로 김시묵은 별채를 떠났다.

아비가 사라진 후에도 이레는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했다.

오늘은 왜 이리 별스러울까.

분명 어제와 같은 날인데.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멍하니 앉은 그녀에게 행랑 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응?”

“문밖에 가마가 있어요. 아가씨를 조용히 뵙고 싶다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뒤꿈치를 세우고 담벼락 너머를 살피니 낯익은 가마가 보였다.

교꾼들과 함께 대문 앞을 서성이는 천호의 모습도 있었다.

시장기가 가신 이레는 아침상을 물리고 밖으로 나갔다.

천호가 그녀에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아가씨를 뵙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

이레를 태운 가마는 곧장 시전 한복판을 지나 공방 골목으로 향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엉킨 골목 끝.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입전, 수월이 있었다.

“이리 다시 뵙는군요.”

언젠가 이레를 수월 안으로 안내한 소녀가 미소로 맞이했다.

이레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천호와 마차를 보았을 때, 당연히 은자원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도착한 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소녀가 이레를 위해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아가씨께선 오늘 수월에 계신 것으로 알려질 겁니다.”

“아!”

소녀의 명료한 설명에 이레는 가마가 은자원이 아닌 수월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는 방편.

삼간택에 오른 이레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연 지켜보는 눈도 한둘이 아니리라.

수월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이레를 지켜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될 터였다.

가마를 바꿔 타는 이레에게 소녀가 속삭였다.

“삼간택에 오르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한서로.”

“네?”

“제 이름입니다.”

이레는 시전의 여장부이자 신비한 존재, 만사여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

수월을 나선 이레는 얼마 후, 궁 문 앞에 도착했다.

너울을 쓰고 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노라니,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한때는 이 길이 낯설고 서러웠던 적도 있었다.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그저 오라비를 만나야 하는 의무감으로 무심코 걷던 길이었건만.

시간과 함께 낯설고 어색한 만남이 차곡차곡 쌓여 추억이 되었다.

한 걸음에 기억이 되살아나고, 또 한 걸음에 설렘이 담긴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은자원에 당도하였다.

허름한 대문 앞에 서자 괜스레 코끝이 알큰해졌다.

먹먹한 감정을 삼키며 이레는 은자원의 문을 열었다.

코끝을 파고드는 오래된 서책 냄새와 은은한 묵 향기.

덧창이 모두 내려져 밤처럼 캄캄한 실내.

천장에 난 작은 창으로 간신히 스며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희미하게 밝힌 유등 하나.

텅 빈 책상들.

이레는 유등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등불 아래, 서책무더기 속에 파묻힐 듯 고개 숙인 한 사내.

언제나 그녀를 기다리던 그 익숙한 모습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오시지 않은 모양이구나.’

가마까지 보내 그녀를 이곳으로 부를 사람.

오직 은백, 한 사람뿐이었다.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이내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대 오라버니가 쓰던 책상.

그녀는 가지런히 정돈된 서책을 어루만졌다.

언제쯤 돌아오실 작정이십니까?

오라버니, 저 삼간택에 올랐습니다.

제가 세손빈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 소식 들으시면 깜짝 놀라시겠지요.

말도 안 된다.

내 허락 없인 어림도 없다.

버럭 고함부터 치시겠지요.

누가 위협한 것은 아닌지, 혹여 억지로 등 떠밀려 간택에 참여한 것은 아닌지 눈을 부라리며 꼬치꼬치 캐물으시겠지요.

저…… 오라버니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많은 만남과 많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사흘 밤낮이 부족할 겁니다.

오라버니, 잘 계십니까?

어디 계신 거예요?

대체 얼마나 좋은 곳에 계시기에, 그 흔한 서신 한 장 보내지 않습니까?

절 놀리고 싶은 거라면 충분합니다.

그립다 못해 이젠 서러울 지경입니다.

그러니…… 오라버니, 그만 돌아오세요.

이레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좋은 날, 어인 눈물이냐?”

낮은 목소리와 함께 따스한 숨결이 이레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린 이레의 눈동자에 형운의 까만 시선이 닿았다.

그녀의 눈물에 놀란 듯 그의 눈빛엔 놀람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냐? 누가 속상한 소리라도 했느냐?”

묻는 음성에 걱정이 가득했다.

누구 한 사람, 장난으로라도 이름을 말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하리라, 단단한 각오마저 느껴졌다.

든든한 내 편.

언제든 돌아서면 나를 향해 두 팔 활짝 벌리고 있을 사람.

이레는 서둘러 눈가를 닦았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저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이라…….”

“기억나십니까. 처음 이곳에서 절 만났을 때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셨습니다.”

“오지랖 넓은 네 오라비에게 하도 시달렸던 터라…….”

“정이 많으신 겁니다.”

“말도 많았다.”

“분명 말이 적지는 않았지요.”

기대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차올랐다.

이레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형운은 애써 미소 짓는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의 온기와 진심이 볼을 타고 전해졌다.

다정한 목소리가 슬픈 마음을 다독였다.

“약속해다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게 숨기지 않겠다고.”

“숨기지 않습니다.”

이레의 대답이 흡족한 듯 형운은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번져가는 그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잠시 잠깐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거짓말.”

“네?”

“일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괜찮다, 아무 일도 없었다 하면 절대 믿지 않겠다고.”

“그랬습니까?”

“그랬느니. 한데, 지금 또 그 믿을 수 없는 대답을 하는구나.”

“정말 아무 일 없었습니다.”

“믿지 않겠다는 대도.”

“은백께서 그리 의심 많은 사내인 줄 몰랐습니다.”

“매사 조심하여 나쁠 것은 없다. 난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의심하고 거듭 살펴보는 버릇이 있느니.”

“의심도 병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만약, 의심이 진실로 병이라면, 네에게만은 영원히 낫지 않는 병이었으면 좋겠구나.”

“제가 그리 못 미더우십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믿겠다.”

“……진심입니까?”

“아무렴. 괜찮다 말하여도 실은 힘들고 난처하였고, 아무 일 없다 하여도 기실 험하고 어려운 상황이 매번 있었으니. 내 어찌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할 수 있겠느냐?”

“……은백.”

“이번에도 그랬었지. 서탁을 통해 네가 너의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는 걸 보았다. 홀로 필사적으로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아느냐? 그런데도 넌 끝내 내게 한마디도 힘들다 말하지 않더구나.”

“…….”

“그래서 널 의심하기로 했다. 정말 잘 있는지, 진심으로 평온한지, 또 어느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도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영원히, 의심하고 또 의심할 것이다.”

“은백.”

“그러니 앞으론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라. 언제든 내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으니. 내 눈 밖을 벗어나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마치 어린아이 보살피는 어미처럼 형운이 말했다.

애써 거둬들였던 눈물 줄기가 다시 흘렀다.

형운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동자에 당혹스런 감정이 물결쳤다.

“내 말에 무에 서운한 거라도 있었느냐? 내가 잘못 말했느냐?”

“아닙니다. 그저, 그저…….”

좋아서요.

이리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가슴 뛰도록 좋아서요.

눈물 날만큼 행복합니다.

마음속의 말을 온전히 꺼내 놓지 못한 채 이레는 가만가만 고개를 저었다.

젖은 눈으로 전하는 진심.

형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작은 여인이 지닌 힘은 크고 위대하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이리 무력하게 만들었다.

저 커다란 눈에 슴벅한 물기가 서리는 것만으로도 격통이 느껴졌다.

“이레야…….”

이름에 깃든 염원이 그의 심장에 뿌리를 내렸다.

이레 동안 온전히 이 여인을 연모할 수 있게 해소서.

그 이레에 다시 이레를 더한 날만큼 이 여인의 사내이길 바랍니다.

이레와 이레가 모이고, 다시 그다음의 이레가 보태지고 또 덧붙여져 억겁의 인연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레야, 이레야…….”

형운은 이레를 끌어당겨 제 가슴에 가뒀다.

그득 채워지는 충만함.

오직 내 것.

나만의 사람.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고, 빼앗길 수 없는 존재.

행여 빠져나갈세라.

형운은 이레를 안고 있는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더욱 가깝게, 더더욱 가득 담기도록.

그러나 마음의 기갈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형운은 제 품에 안긴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하얗고 말간 얼굴.

겨울 들판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그의 입술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덜커덩.

은자원의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 문이 왜 안 열리는 거야?”

***

은자원의 대문이 연신 덜커덩거렸다.

안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몸짓이 이어졌다.

“거참, 이게 왜 이럴까?”

서강율의 목소리였다.

이레는 숨소리라도 새어나갈까 싶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형운 역시 기척을 숨겼다.

그러나 이레를 품은 팔을 풀지는 않았다.

‘은백, 놓아주십시오. 행여 이 모습을 은협이 보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이레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뉘이던가.

이 나라의 세손이 아니던가.

아무리 자신이 삼간택에 오른 간택인이라 하여도, 이런 모습을 다른 이에게 들켜 좋을 것은 없었다.

이번 세손빈 간택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아는 날엔 그녀는 물론이고 형운의 입장 역시 곤란해질 것이다.

이레는 형운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가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형운의 결박은 더욱 단단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풀어주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

덜컹, 덜컹.

그 사이 문을 흔드는 움직임은 더욱 격렬해졌다.

형운을 보는 이레의 시선이 초조해졌다.

형운 역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담담히 여며진 그의 눈길엔 잔잔한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굳건한 눈빛에 긴장이 풀어졌다.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문은 당장에라도 열릴 듯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를 쓰고 들어오려는 서강율의 목소리 또한 여전했다.

그럼에도 이레는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단지 형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듯 느껴졌다.

“이런 낭패를 보았나.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더니. 이 변변찮은 문이 드디어 망가진 모양이구나.”

문을 붙잡고 한참 용을 쓰던 서강율이 그제야 포기했다.

“부서진 문을 어찌 고친다. 차라리 누가 안에서 걸어 잠근 거라면 좋으련만.”

탄식과 함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서강율의 기척이 사라지자 이레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형운을 올려다보며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괜찮은…… !”

괜찮지 않았다.

돌연 형운의 입김이 그녀를 덮쳤던 까닭이었다.

느닷없는 그의 습격에 겨우 풀렸던 긴장이 다시 한껏 솟구쳤다.

***

형운과 이레가 숨 가쁜 대결을 펼치고 있을 때, 서강율은 터덜터덜 전각 밖으로 걸음하고 있었다.

“대체 다들 어딜 갔는지 모르겠군.”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는 예의 쥘부채를 펼쳐 한가롭게 팔랑팔랑 흔들었다.

“우리 은랑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 함께 축하할 일을 상의하려 했더니. 아무래도 오늘은 틀린 모양이네. 어쩔 수 없이 나 혼자라도 은랑을 찾아가 봐야겠구나.”

이레를 떠올린 은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은랑.

알면 알수록 대단한 여인이다.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재간택 과정에서 그녀가 보인 재치와 과감한 선택은 지금까지의 평가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찌 속저고리를 만들 생각을 하였는지.”

서강율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잠시 궁리하던 그가 기어이 결단을 내렸다.

“도저히 못 참겠구나. 이참에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다.”

경기관찰사댁에 몰래 숨어들 계획을 꾸미던 서강율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허허, 참. 무언가를 빼먹은 것 같은데.”

곰곰 생각한 끝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군! 은호, 그 집요한 친구가 보이지 않는군.”

쥘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은 서강율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이 좋은 날, 독종은 또 어딜 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이냐? 눈에 보이면 귀찮고, 안 보이면 이리 마음 걸리니. 내 마음을 나도 모를 일이야.”

***

날이 추워 한동안 전각 밖으로 운신하지 않았던 화완옹주는 모처럼 산책에 나섰다.

세손빈 간택으로 궁 안팎이 뒤숭숭했다.

특히, 소원 문 씨의 전각은 초상집을 방불케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 소원과 한배를 탄 듯 보였던 화완옹주의 표정은 그리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화를 내다 못해 이젠 앓아누웠다고?”

옹주의 물음에 그림자처럼 따르던 상궁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성정, 아시지 않사옵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부수고, 말리는 궁녀들의 얼굴에도 수없이 생채기를 만들더니. 오늘 아침엔 기어이 이불 속에서 끙끙 앓는 소리만 뱉고 있다 하옵니다.”

상궁이 전하는 이야기에 화완옹주는 입가를 길게 늘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번 간택에 많은 기대를 하였을 터이니, 실망도 크겠지.”

“문 소원의 뒤를 봐주던 자들 또한 뒤숭숭한 분위기인 모양이옵니다.”

“간사한 자들의 인심이야, 능히 알고도 남음이거늘.”

“주상전하께서 문 소원에게 보인 냉대를 두고 뒷말이 많은 듯하옵니다.”

“그간 배 속의 아이만 믿고 안하무인이었지. 이번 일로 깨달음을 얻었을 게다.”

상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하오면, 어찌하오리까?”

“무얼?”

“문 소원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전할까요?”

화완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구나. 내 위로의 말을 몇 자 적어줄 터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탕약과 함께 보내거라.”

“네, 마마.”

“혼자 걷고 싶구나.”

번거롭게 따라붙는 궁녀와 내관들을 모조리 물린 화완옹주는 홀로 전각의 후원을 거닐었다.

스산한 겨울 정취에 취한 듯 뺨이 붉어지도록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렀다.

화완옹주는 연못 가에 앉아 지친 발을 쉬었다.

얼어붙은 연못과 늘어진 느티나무 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옹주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 그대의 노고가 많았소.”

느티나무 뒤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 간택에 관한 말씀이라면, 딱히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제가 한 일이 없으니까요.”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그대와 함께 궁을 나간 후에 마지막 시험의 가닥을 잡은 것 같다 하던데…….”

“……전 단지 가능성을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가능성이라. 그 작은 실마리만으로 이미 내정된 대제학의 여식을 거꾸러뜨렸으니.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보오?”

화완옹주의 목소리에 희미한 경계가 어려있었다.

느티나무는 그 어떤 반응도 내어놓지 않았다.

“참, 그 소식 들었소?”

“…….”

“대제학의 여식 말이오. 의녀의 말로는 아무래도 크게 잘못될 모양이오. 들킬까 싶어 화상 입은 것을 숨긴 모양인데, 그만 치료 시기를 놓쳤다지 뭐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한때는 그대와 인연이 있던 여인인데. 너무 무심한 것 아니오?”

“…….”

“지나친 욕심 때문에 원하던 세손빈의 자리도 놓치고, 영영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안타깝게 되었소.”

안타깝다는 말과 달리 화완옹주의 얼굴엔 비웃음이 실려있었다.

“이번 일을 두고 주상 전하께서 간택인들의 몸 상태를 꿰뚫어 보고 세자빈으로 적합한 이를 선택하였다 하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오.”

“…….”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소? 우연히 벌어진 일을 두고 꿰맞추며 부풀리는 말들이 참으로 재밌단 말이지.”

화완옹주의 거듭 이어진 목소리에도 느티나무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대화.

화완옹주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의 과묵함엔 이미 익숙해졌다 여겼건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운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찬바람과 함께 어색한 침묵이 떠돌았다.

곧이어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물음이 반가웠던 화완옹주가 활짝 핀 미소로 답했다.

“그저 지켜볼 생각이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좌시(坐視).

그녀는 그저 관망할 거라 답했다.

하지만 느티나무 너머의 사내는 그녀가 진실로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옹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바로 권력의 절묘한 배분이었다.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팽팽한 힘의 균형.

그리하여 그녀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저울이 순식간에 기울어질 수 있는.

그런 아찔한 상황을 그녀는 바라고 원했다.

그러니 만약 균형이 무너지려 한다면, 은밀히 손을 쓸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리다.”

“…….”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깊어졌다.

갑갑증에 화완옹주는 느티나무를 끼고 돌아갔다.

그녀의 물음에 화답하던 사람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냥 가버렸구나.”

아쉬움을 삼킨 화왕옹주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푸른 수실이 달린 작은 침통.

“이런 곳에 어인 침통일까?”

화완옹주는 사내가 머문 자리와 침통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었다.

침통에는 별다른 특색이 보이지 않았다.

옹주는 미련 없다는 표정으로 침통을 연못 위로 던져버렸다.

얼어붙은 연못 위를 작은 침통이 어지럽게 굴렀다.

이윽고 화완옹주는 후원을 떠났다.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 금세 밤이 찾아왔다.

한동안 아무도 찾지 않던 느티나무 아래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급히 달려온 모양인지, 그의 어깨는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미처 고를 틈도 없이 사내는 느티나무 주위를 살폈다.

주위를 샅샅이 뒤져도 원하던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의 끈기와 인내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사내는 마침내 얼어붙은 연못에서 작은 물건을 찾아냈다.

푸른 수실이 달린 침통이었다.

화완옹주가 하찮게 여긴 그 침통을 사내는 언 손으로 여러 번 털고 닦았다.

침통을 살피고 손질하는 모습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을 대하는 듯했다.

집요하리만치 오래도록 침통을 털어낸 사내는 작은 티끌조차 보이지 않은 후에야 비로소 안심한 표정으로 침통을 갈무리했다.

둥! 둥! 둥! 둥!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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