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래서 결과는?
세손빈 재간택 마지막 시험.
모두가 기다린 시험의 결과가 마침내 내려질 순간이었다.
중희당에 모인 사람 모두가 숨조차 죽인 채 영빈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왕의 등장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저, 전하.”
내명부를 대표하여 마지막 결정을 전하던 영빈이 황급히 물러나고, 대신 어린 중전이 왕을 맞이했다.
“전하, 이곳까지 어인 행차이시옵니까?”
“재간택을 매듭짓는 데 어려움이 많다 들었소.”
“송구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지막 결정을 내리던 참이었습니다.”
“오호, 그렇소?”
호기심을 보인 왕이 중전에게 자신의 귀를 보였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하군. 내게 먼저 귀띔해 줄 수 있겠소?”
잠시 주위를 살피던 중전은 왕에게 작은 목소리로 결과를 전했다.
왕의 눈가에 주름이 깊어졌다.
“과연, 과연 그리하였군. 현명한 처사요.”
“하오면 이대로 속행해도 될는지요.”
“헌데…….”
“네,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그 결론…….”
왕이 허리를 곧게 폈다.
“내가 내려도 되겠소?”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 여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들어찼다.
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을 평하고 정하는 일은 어디까지 내명부의 소관으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간택이란 것이 시작하기 전부터 내정된 사람이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무리 형식적이라 하여도 엄연한 왕실의 법도.
왕의 말은 그러한 법도와 절차를 무시한 발언이었다.
“과인이 묘선(妙選) 하겠다는 말은 아니오.”
“하오면…….”
“생각해보니 이 늙은이가 입을 옷이 아니겠소. 마지막 시험은 내가 직접 낸 것이기도 하니, 이번 시험의 결정만큼은 내가 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하였소.”
왕의 말인즉, 삼간택으로 오를 간택인을 고르는 게 아니라 단지 마지막 시험의 우열만을 가르겠단 뜻이었다.
하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최종시험까지 치르게 된 간택인들이었다.
이번 시험의 결과를 말한다 함은 결국 왕이 삼간택에 오를 간택인을 직접 정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느닷없는 사태에 중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사이로 문 소원의 카랑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전하, 참으로 기가 막힌 혜안이시옵니다.”
“허허허, 소원도 그리 생각하느냐?”
“미천한 신첩도 그리하면 어떨까 내내 생각하였나이다.”
왕의 곁에서 야살을 떠는 문 소원의 모습에 중전과 영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문 소원은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레를 향한 영빈의 두둔과 중전의 망설임에 내심 불안하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옷을 보고 결론을 내리겠다는 왕의 참견은 그녀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하, 다시 한번 간택인들이 지은 옷을 살펴봐 주시옵소서. 간택인들 간의 우열이 확실하니. 전하의 선택이 어렵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 생각하느냐? 안 그래도 제대로 보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렸느니. 어디 한 번 제대로 살펴보자.”
왕은 상석에 앉아 이레와 명선, 두 간택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내 지엄한 명령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저 아이들이 지은 옷을 내어오라.”
왕의 곁에 시립했던 내관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의 과제로 지은 현의와 속저고리가 왕의 앞에 놓였다.
왕은 주름 깊은 눈으로 두 옷을 찬찬히 살폈다.
문 소원이 명선의 현의를 왕 앞으로 바싹 당겼다.
“전하, 입어보시어요.”
문 소원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현의를 펼쳤다.
무릇 옷이란 직접 몸에 걸쳐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귀하디귀한 비단으로 만든 현의는 서로 스칠 때 때마다 사각사각 듣기 좋은 소리를 자아냈다.
게다가 옷에 놓인 수자는 또 얼마나 화려한가.
입어보면 왕께서도 아시리라.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만든 무명 속저고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옷이라는 것을.
“전하, 어서요.”
문 소원은 교태로운 웃음으로 왕을 재촉했다.
“그럼 그리해볼까.”
왕과 간택인들 사이로 긴 발이 쳐졌다.
준비가 끝나자 왕이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내관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왕의 환복을 도왔다.
용포를 벗은 왕은 명선이 지어 올린 현의를 몸에 걸쳤다.
비단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훌륭한 현의다.”
왕의 칭찬은 멈추지 않았다.
“내 이미 옷을 살피며 잘 만들어진 것을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입어보니 눈을 본 것보다 더 확연히 알게 되었다. 품은 정확하고, 자수는 꼼꼼하니, 참으로 애썼구나.”
“황공하옵니다.”
왕의 극찬에 명선은 고개를 조아렸다.
눈치를 살피던 문 소원이 서둘러 왕에게 속삭였다.
“참으로 덕스러운 아가씨입니다. 품성이며 학식이며, 거기에 재주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나이다.”
“그렇더냐?”
“가끔 신첩의 처소로 걸음 하시어 말벗을 해주시는데. 어쩜 그리 많은 것을 아시고, 또 어쩜 그리 너른 마음을 갖고 계시는지. 날마다 새롭고 놀랐습니다.”
“허허허. 소원의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재주가 많은 간택인인 모양이구나.”
“어머나, 신첩이 그랬나이까.”
“소원의 이야기만으로도 내 마음이 든든하다.”
문 소원에게 자상한 미소를 보인 왕이 현의를 벗었다.
이번엔 이레가 만든 속저고리를 입을 차례였다.
문 소원은 눈가를 가늘게 치뜨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입으시려나?
화려한 현의를 보고 난 후인지, 속저고리를 살피는 왕의 눈길은 지극히 덤덤했다.
문 소원이 물었다.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
“……아니다. 그럴 필요 없겠구나.”
왕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문 소원은 슬그머니 입가에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 옷을 네가 지었느냐?”
왕의 물음에 이레가 공손히 답했다.
“네, 전하.”
“본디 양반의 옷을 지을 땐 비단으로 짓는다. 너는 그걸 알고 있느냐?”
차디찬 왕의 하문에 이레는 머리를 더욱 깊숙이 조아렸다.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 너는 어찌하여 내게 이런 옷을 지어 바쳤느냐?”
이레를 내려다보는 왕의 눈초리가 엄해졌다.
“네가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한기 가득한 서늘한 음성.
돌연한 왕의 모습에 전각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주상 전하께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겠나이까.”
“하면 무엇이냐? 감히 내게 무명으로 지은 저고리를 바친 연유가.”
왕의 서릿발에 이레는 치맛단을 꼭 쥐었다.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다스린 그녀는 신중에 신중을 더해 대답했다.
“평소 전하께서 소박하고 검소한 것을 즐기시어 면화로 만든 옷을 좋아하신다 들었나이다. 하여, 면화로 옷을 만든 것이옵니다.”
이레의 설명에도 왕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속저고리를 뒤집어가며 샅샅이 옷을 살핀 왕이 안쪽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주머니가 달렸구나. 속에 입는 저고리에 이런 주머니가 달린 것을 본 적이 없다. 잘못 만든 것이로구나.”
“잘못 만든 것이 아니옵니다.”
“그럼 일부러 만들었단 것이냐?”
“제례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렇다. 보통 인시(寅時)에 시작하여 해시(亥時)에나 끝나곤 하지.”
“늦은 가을이나 겨울, 그리고 이른 봄에 제가 있을 때면 그 추위를 말로 못 할 정도라 하더이다.”
“네 말이 맞다. 동짓날 치르는 제례는 매서운 추위로 죽을 맛이지. 하면, 이 주머니가 추위와 관련이 있으렷다?”
“따뜻하게 데운 돌을 품으면 조금이나마 추위를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따뜻하게 데운 돌?”
왕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이레를 노려보던 왕의 표정이 느른하게 풀어졌다.
“그럼 이 주머니는 그 돌을 넣는 용도겠구나. 추운 날 온기를 더할 쓸모로 만들어진 것이렷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나이다.”
“어리석은 생각이라. 허허허.”
왕은 낮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던 사람들은 왕의 웃음에 어리둥절했다.
왕의 인자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평소 무명옷 입기를 즐겨 하였다. 하나, 추운 겨울에 솜도 누비지 않은 무명옷은 여간 추운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내 눈치만 살펴 옷을 지을 줄 알았지, 내가 겪는 불편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건만. 너는 입는 사람의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 주었구나.”
왕의 흐뭇한 시선이 이레에게로 향했다.
명선과 문 소원의 얼굴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문 소원은 서둘러 가식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그런 속사정이 있으셨나이까. 신첩이 알았더라면 이까짓 속저고리, 열 벌이고 백 벌이고 지어 드렸을 것이옵니다.”
“내 소원의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그러나 홑몸도 아닌 소원에게 어찌 사사로운 근심을 하게 하겠느냐. 소원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배 속의 아이에게만 전념하라.”
“전하께서 불편하신데, 신첩이 어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그러한가?”
부드러운 왕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문 소원은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레의 속저고리를 평하는 왕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전하, 이 현의의 어깨에 놓인 수자를 보셨나이까. 신첩은 지금껏 이런 신묘한 수자는 처음 보았나이다. 어찌 보면 용이 살아 있는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근엄함이 하늘을 찌르니. 그저 사사로운 솜씨로 묵혀두기엔 참으로 아까울 지경입니다.”
“그렇구나.”
“역시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줄 알았나이다.”
문 소원이 아이처럼 기뻐하자 왕의 입가에도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왕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간택인들의 재주와 마음이 한결같이 뛰어나 참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하나, 결정을 더는 미룰 수 없으니.”
왕이 명선을 먼저 바라보았다.
“대제학의 여식이 만든 현의는 참으로 훌륭하였다. 이것은 가히 상의원에서 올린 것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 할 만큼 대단한 것이니. 내명부에서는 이것을 따로 보관하여 두고두고 내명부 여인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의 여인들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레 역시 몸을 바싹 바닥으로 숙였다.
참으로 훌륭한 현의.
상의원의 침선장이 만든 것과 비교하여도 조금도 손색없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레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역시 명선의 현의를 이길 순 없는 것이려나?
그러나 이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다시 선택하라 하여도 이레의 선택은 이번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아팠다.
형운의 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분께 최선을 다하겠다 하였는데.
기필코 그분 곁에 가겠다 다짐하였는데.
험한 고비를 넘고 넘어 간신히 이곳까지 왔건만.
그분께 미안하고, 또 억울하였다.
간신히 울음을 참는 이레의 귓가에 왕의 음성이 이어졌다.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뜻하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었다. 비록 현의를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찮게 여기는 속저고리에 마음을 담았으니, 그 인내와 노력이 참으로 장하고 기특하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두 간택인을 치하한 왕이 현의와 속저고리를 번갈아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왕의 입술에 모였다.
깊게 고심하던 왕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다음 제례 때 내가 입을 옷은 바로 저것이다.”
***
-그래서?
상이 재촉했다.
-그래서 어찌되었느냐?
결과가 궁금한 것은 상 하나만이 아니었다.
화와 예도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어떤 옷을 선택하였는지 궁금하구나.
-혹, 이번에도 괴이한 일로 일정이 미뤄진 것은 아니더냐?
곧 이레의 글이 나타났다.
-다행히 괴이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정이 미뤄지지도 않았고요.
악이 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숨넘어가겠다.
-주상 전하께서는…….
이레의 글이 이어졌다.
***
“다음 제례 때 내가 입을 옷은 바로 저것이다.”
왕의 손끝이 향한 곳은 이레의 속저고리와 바지가 담긴 나무 궤였다.
뜻밖의 결과에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놀람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문 소원이었다.
그녀는 명선의 현의를 들어 보이며 거듭 물었다.
“전하, 잘못 본 것이 아니옵니까? 현의는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옵니다.”
“잘못 보지 않았다.”
“하오나…….”
“소원이 낄 자리가 아니다.”
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의 인자한 표정이 아니었다.
언제나 너그러운 지아비 노릇을 하던 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군주의 눈빛에 문 소원은 겁을 집어먹었다.
문 소원을 물린 왕이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제학의 여식이 만든 옷은 참으로 잘 만든 옷이다. 하나, 완벽하지 않으니. 제례란 선왕들의 뜻과 업적을 기리며, 안부를 여쭙고, 이 나라 만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자리다. 마땅히 정성에 정성을 더하고, 스스로를 살피고 절차를 다듬어 완벽을 기해야 하니, 어찌 나은 것을 두고 부족한 것을 택할 수 있겠느냐?”
명선의 현의가 잘 만들어지긴 하였으나, 상의원에서 만든 것보다 낫지 않다는 말이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왕의 뜻에 명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어지럼증까지 밀려와 저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그런 명선을 대신하여 문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 하오면 속저고리 또한 더 나은 선택이 있지 않겠습니까?”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저 속저고리가 최선이란 말씀이옵니까?”
“속저고리는 속에 입는 옷이니, 체면과 예의와는 달리 보아야겠지.”
왕은 이레가 만든 옷을 넉넉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록 만듦새는 최고라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입는 사람의 사정과 형편까지 두루 살피는 마음만은 이 속적삼보다 더 나은 옷이 없을 것이다.”
“하, 하오나…….”
“비록 구차하여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매번 제례 때마다 춥고, 덥고, 간지럽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번 제례 때는 이 옷으로 불편을 덜어볼 것이니. 모두 그렇게들 알라.”
말을 마친 왕은 뒷짐을 지었다.
그 엄숙하고 단호한 결정에 감히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왕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것이면 되었다.’
늙은 왕의 귓가에 세손과 나눈 대화가 맴돌았다.
‘신료들의 말과 의견은 마땅히 이치와 명분을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였겠지.’
‘이는 당연한 결정이나 어쩌면 한 가지 생각이 부족하지 않을까 저어되옵니다.’
‘무엇이 부족하단 말이냐?’
‘왕실의 실리이옵니다.’
‘왕실의 실리?’
‘무릇 사소한 관직을 뽑을 때도 명분보다 인품을 우선하여야 하고, 모든 방면에 다재다능한 자보다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능력 한 가지를 넘치도록 갖춘 자가 합당하다 배웠사옵니다.’
왕의 고민이 깊어졌다.
세손빈의 자격만을 살피던 것에서, 인품과 더불어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세손빈의 자리에 꼭 필요한 자격. 이 나라에 보탬이 될 자질.’
세손이 뿌린 씨앗이 어느덧 싹을 틔우고 가지를 펼쳤다.
이윽고 왕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기왕이면 왕실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좋겠구나.’
신료들의 대의명분과 왕실의 대의명분은 엄연히 달랐다.
그래, 그걸 잊고 있었다.
신료들의 실리와 왕실의 실리가 다르다는 것을.
명분에 눈이 멀어 왕실의 권위를 놓칠 뻔하였으니.
대제학의 여식은 뛰어난 여인이다.
미색도 훌륭하고, 고아한 자태 역시 세손빈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대제학의 여식이니 마땅히 가진바 재지(才智)도 뛰어날 터.
배경 또한 훌륭하니, 세손빈이 된다면 든든한 뒷배가 될 터이다.
그에 반해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크게 살필만한 면모가 부족하였다.
집안이 풍족한 것도 아니고,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왕실의 명분과 실리를 두고 살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경기관찰사 김시묵.
그 집안에서 일찍이 왕비가 나왔으니.
‘왕실에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사람. 왕실의 흠과 부족한 부분을 다듬어 줄 사람.’
왕비의 혈통이라는 완벽한 정통성.
그런 것이라면 신료들의 입에서도 더는 혈통 운운하는 말 따윈 나오지 않겠지.
왕에겐 약점이 있었다.
혈통.
왕은 천한 무수리 출신의 어미를 두었다.
적장자가 아닌 후궁 태생의 차남.
그런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형이었던 전대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슬프고 비통한 일이었다.
눈물을 삼키며 왕위를 계승하였다.
하나, 그를 바라보는 천하의 눈길은 결코 순순하지 않았다.
왕이 되기 위해 제 형을 죽인 패륜아(悖倫兒).
보이지 않는 비난의 칼날이 늘 왕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왕이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검소를 실천했다.
왕실의 법도와 규범에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살았다.
왕의 자리에 미련 없음을 보이기 위해 양위(讓位)를 하겠노라고 끊임없이 선언했다.
그러나 긴 세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난과 반란은 끊이지 않는다.
정통성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언제나 그를 괴롭게 하였다.
비등한 가치의 현의와 속저고리 중에서 이레를 선택한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적인 포석과 셈속이 있었던 까닭이다.
문 소원이 왕의 상념을 깨트렸다.
“전하, 하오나 그것은 시험의 과제가 아니옵니다. 본디 제례 때 왕께서 입을 구장복 중 한 가지를 택해 만드는 것이 과제였사옵니다. 옷의 모양이나 자수의 모양으로 볼 때 대제학의 여식이 만든 현의를 더 높게 평가해야 하는 줄 감히 아뢰옵나이다.”
그녀는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날 수 없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왕은 묘선하지 않겠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의 승자를 정하였으니, 묘선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명선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문 소원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현의가 고작 속저고리 따위에게 밀리다니.
그 누가 상상이나 하였을까.
마음?
속저고리에 달린 주머니에 대체 무슨 마음이 담겼단 말인가.
‘이렇게 잃을 순 없어.’
그간 들인 공이 얼마인데.
대제학의 여식을 세손빈으로 만들기 위해 갖가지 술수를 다 동원하였다.
감언과 이설을 서슴지 않았다.
그 노력을 하였는데, 이런 결과라니.
공공연하게 명선과의 관계를 드러냈건만.
앞으로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전하, 다시 한번 더…….”
문 소원이 끈질기게 늘어지자, 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이곳이 무얼 하는 자리더냐?”
“네?”
“무얼 하는 자리냐 물었다. 여기가 상의원의 침선장을 뽑는 자리더냐?”
“……!”
“나는 여기가 세손의 빈궁을 가리는 자리라 알고 있다. 한데 소원은 어찌하여 바느질 솜씨 좋은 자를 뽑으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냐?”
“전하…….”
문 소원을 노려보던 왕이 돌연 중전을 건너보았다.
“내명부의 기강이 참으로 허술하오.”
“송구하옵니다.”
왕은 질책 담긴 목소리로 영빈에게 말을 건넸다.
“중전께서 차마 나서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땐, 선희궁 자네라도 나서서 왕실의 법도를 굳건하게 해야 할 것을. 여기가 어느 자리라고 일개 후궁 따위가 목소리를 높이게 하는 겐가?”
영빈 이씨가 머리를 조아렸다.
“신첩이 미흡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사옵니다.”
“아이 가진 사람이니…….”
왕은 냉랭한 시선으로 문 소원을 돌아보았다.
“소원이 오직 태교에만 전념할 수 있게 선희궁이 좀 더 마음 써주오.”
“명을 받잡겠나이다.”
“전하…….”
문 소원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들어찼다.
비참하고 참담했다.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인 일도 엉망이 되었고, 설상가상 왕의 따뜻한 눈길마저도 잃어버렸다.
식은땀이 절로 나고, 정신마저 혼미했다.
문 소원은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이대로 혼절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뒤집으리라.
하지만 그 필사적인 다짐은 곧이어 들려온 소음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털썩!
속이 꽉 찬 부댓자루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건만,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바닥에 명선이 쓰러져 있었다.
왕께서 현의를 살필 때부터 낯빛이 좋지 않더니, 기어이 쓰러진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지밀상궁이 달려가 명선을 살폈다.
흔들고 깨우는 소리에도 명선은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심각한 상태를 본 왕이 명선을 약방으로 옮기라 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명선의 상태를 확인한 의녀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였다.
대제학의 여식에게 큰 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