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묘선(妙選)
소리 없는 술렁임이 중희당 마당을 가득 메웠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재간택의 마지막 시험은 구장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레가 완성한 옷은 상의원에서 보여주었던 구장복이 아니었다.
중단, 현의, 상으로 이뤄진 제례복이 아닌 그저 평범한 속적삼과 바지였다.
뜻밖의 결과물에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엄중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궁녀도 있었다.
상석에 자리한 내명부 여인들의 표정은 돌처럼 굳었다.
하나같이 딱딱한 얼굴로 이레가 지은 속적삼과 바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오랜 정적의 끝에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호호.”
날카로운 웃음의 주인은 문 소원이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전각 아래로 내려갔다.
“그간 무얼 만드나 궁금하였는데, 고작 이런 걸 만드시었습니까?”
속적삼과 이레를 번갈아가며 보는 문 소원의 입가에 짙은 조롱이 매달렸다.
“다른 재간택인들이 현의를 선택하니, 질 수 없겠다 싶어 같은 선택을 하였겠지요. 하지만 현의를 만드는 일이 오직 복잡합니까? 해보니 안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뒤늦게 못 하겠단 말은 못 하겠고, 결국 만든 것이 속적삼인 게지요.”
문 소원의 입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레는 묵묵히 그녀의 비웃음을 듣고만 있었다.
문 소원은 허리를 숙여 이레와 시선을 맞췄다.
“입이 있으면 어디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세요. 구장복 대신 속적삼 따위를 만든 이유가 뭡니까? 혹, 시험 내용이 무언지 몰랐다는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시험 내용은…….”
이레가 뒷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문 소원의 눈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럼, 어쩌다 이런 엉뚱한 옷을 만든 겁니까?”
전각의 대청마루 위에서 영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덕당에서 간택인들이 시험을 치르는 사이, 큰 사건이 있었다 들었소. 혹, 그 일 때문이오?”
영빈의 물음에 궁녀들은 저희끼리 눈짓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서 일하는 궁인치고 양덕당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작금의 궁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가 무엇인가.
세손빈 간택이 아니던가.
당연히 궁 안의 모든 입과 눈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양덕당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구중궁궐의 가장 내밀한 곳에 자리한 중궁전에는 소식이 미처 닿지 못한 모양이다.
어린 중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문했다.
지밀상궁이 황급히 전각 계단으로 올라갔다.
“시험 중에 실수로 달군 숯이 쏟아진 사고가 있었사옵니다. 그 사고로 형조판서댁 아가씨께서 화상을 입으셨사옵니다.”
중전은 낮게 혀를 찼다.
“저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빈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 사건으로 현의를 지을 때 사용할 옷감도 못 쓰게 되었지요.”
“옷감이 망가지면, 새로 내오면 되지 않소?”
중전의 물음에 상의원의 상궁이 앞으로 나섰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중전마마. 주상전하의 면복에는 특별히 제작된 비단만을 사용할 수 있나이다. 이러한 비단은 구하기도 어렵고, 제작은 더더욱 어려워 새로 내어주기엔 어려움이 있었사옵니다. 이는, 처음 비단을 내어줄 때부터 재간택인들에게 주요하게 알린 내용이기도 하옵니다.”
“그럼 화상을 입고 떨어진 간택인의 것은 어떠하냐? 듣자 하니 세 명의 간택인 모두가 현의를 짓기로 하였다지. 그럼 그 간택인 쓰던 것을 저 간택인에게 주면 될 것을.”
“시험의 규칙상 그럴 수 없었사옵니다. 형조판서 댁 여식께선 이미 비단의 마름질은 물론이요, 바느질까지 시작했던 터라. 그분의 비단을 가져다 쓴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솜씨로 현의를 지은 것이라 할 수 없사옵니다. 하여…….”
상궁의 말에 영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비단도 아니 내주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것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로군.”
어리둥절한 표정의 중전과 달리 영빈은 저간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상의원을 비롯한 가례도감의 결정에 그녀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상궁의 뻔뻔한 변명을 들으니 기어코 참았던 노기가 끓어오르고 말았다.
그때 한발 물러선 문 소원이 끼어들었다.
“영빈 마마, 자중하시어요. 규칙이 그렇다 하지 않습니까? 이 나라의 법도와 간택 시험의 원칙이 그러하니, 다소의 불편은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시험을 온전히 치를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조금의 불편이라 할 수 있겠소? 더구나 내가 알기로 양덕당에서의 일은 간택인의 실수도 아니라 하던데.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어찌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영빈의 서늘한 눈초리가 상의원의 상궁을 향했다.
엄중한 눈빛에 상궁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문 소원이 다시 상의원의 가림막이 되었다.
“영빈 마마, 조금 전 설명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귀하디귀한 비단이라 합니다. 여분이 없다는 말도 수차례 했다 하더이다. 주상전하의 제례복 짓는 일이 시험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빈의 날카로운 시선이 문 소원에게로 옮겨졌다.
“소원, 여기가 어디라고 자꾸 나서는 것이오?”
“그리 말씀하시면 참으로 서운하옵니다. 저 역시도 내명부의 사람이 아닙니까.”
문 소원은 불룩해진 자신의 배를 보란 듯 쓰다듬었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 행태에 영빈 이씨는 어이가 없었다.
영빈 이씨와 문 소원이 눈매를 여미며 소리 없이 충돌할 때였다.
중전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세히는 모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은 확실히 알겠소.”
좌중의 혼란을 잠재운 중전이 이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그대의 선택이 그것이었소?”
“…….”
“옷감을 구할 수 없어, 현의를 포기한 것이오?”
모두 이레를 응시했다.
“시험의 규칙상 외부에서 재료와 도구를 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옷감을 새로 지어내기로 하였습니다.”
중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한데, 어째서 현의를 만들지 않고 엉뚱한 옷을 지어낸 것이오?”
중전의 의문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궁금해하던 질문이었다.
“현의에 사용되는 비단은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 상의원에서도 손꼽히는 분들만 만드는 법을 알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미흡한 저의 재주로 그분들의 비단을 흉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저런. 상의원에서 비법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
중전의 음성에 질책이 담겼다.
상의원에서 나온 상궁의 고개가 깊어졌다.
중전이 다시 물었다.
“하면, 직접 비단을 짜지 그랬소? 상의원에서 내어준 옷감에 비할 바는 못 하여도 엉뚱한 옷을 지어내는 것보다는 나았을 터인데.”
“비단은 능숙한 장인이 작업하여도 하루 반 자도 채 짤 수 없사옵니다. 사고가 일어난 날로부터 남은 날은 꼭 열흘이옵고, 그 시간을 온전히 들여도 필요한 양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못 쓰게 된 비단만 만들면 되는 게 아니었소? 아! 그렇구나. 상의원의 옷감이 특별하다 하였지. 서로 다른 비단으로 옷을 지으면, 보기 좋지 않겠구려. 그래서 비단을 짜는 건 포기했단 소리로군.”
중전은 안타까운 듯 탄성을 흘렸다.
처음 이레가 지은 속적삼을 보았을 땐 엉뚱한 여인이라 생각했다.
사고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땐, 가엾다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걸 대견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레는 엉뚱한 사람도 아니었고, 가여운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속적삼을 만들게 된 것이오?”
어느새 이레의 이야기에 푹 빠진 중전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베틀 사용하는 법을 배우며 깊이 생각했사옵니다. 남은 기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 답이 속적삼이었단 말이오?”
“평소 주상전하께서 면화로 된 옷을 즐겨 입으신다 들었사옵니다.”
“옳거니.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신 분이라. 평소 전하께선 면화로 된 옷을 입으시어 몸소 검소함을 실천하시는 분이시오.”
“면화라면 궁 안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는 데다,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지어낼 수 있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의 대신 저고리와 바지를 지었다는 말이구려.”
이레의 설명을 들은 중전은 궁녀들을 시켜 이레의 옷을 가져오라 명했다.
나무 궤에 담긴 속저고리와 바지가 내명부 여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갔다.
중전이 저고리를 손끝으로 만지며 이레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눈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옷의 촉감이 무척 부드럽군요.”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알려주시길, 어린아이들의 배냇저고리를 만들 땐 장수하신 분께서 즐겨 입던 옷을 가져다 만든다 하였습니다. 거기엔 오래오래 무탈하게 살라는 어미의 마음도 있지만, 실은 새로 지은 옷은 거칠고 뻣뻣하여 입기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눈치만 살피던 문 소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이 옷도 남이 입던 것으로 지었단 말이오? 감히 주상 전하가 어떤 분이라고…….”
“당연히 그 옷은 실부터 뽑아낸 새 옷입니다.”
중전이 물었다.
“하면, 어찌 이리 부드럽소?”
“베틀로 직접 짠 면화를 여러 번 삶고 빨아 거칠지 않게 하였습니다.”
중전을 비롯한 영빈과 세자빈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러 여러 번 삶고 치대었다.”
“그래서 새 옷이되, 새 옷 같지 않은 부드러움이 있었던 것이로군.”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중전마마.”
“그렇습니다. 피부가 예민한 우리 전하께 꼭 필요한 옷이네요.”
영빈은 물론이고 중전까지 가세하여 이레를 칭찬했다.
중희당의 분위기가 포근해졌다.
문 소원이 그 평온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하를 생각하는 마음은 참으로 가상합니다. 그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옵니다. 하지만 이번 시험은 구장복을 짓는 일이옵니다. 저 옷은 구장복이 아니니, 안타깝지만 저 간택인의 옷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빈 이씨가 문 소원을 돌아보았다.
“이보시게, 문 소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이번 재간택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오?”
문 소원은 동그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미련한 사람이 무슨 수작을 걸려고 시험 내용을 묻는 것일까.
“제례 때 주상 전하께서 입으실 구장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영빈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시험은 제례때 주상 전하께서 입으실 옷을 만드는 것이라오.”
문 소원은 어리둥절했다.
“제례때 주상 전하께서 입으실 옷이 바로 구장복이 아닙니까?”
“맞소. 당연히 구장복을 입으실 테지. 하지만 그때, 입는 옷이 구장복만은 아니오.”
중전이 웃음기 어린 눈으로 영빈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구장복을 입기 전, 속적삼과 바지를 입으시지요.”
“그러니 제례 때 입으실 옷을 짓는 시험 내용엔 틀리지 않은 것이오.”
문 소원의 눈꼬리가 곤두섰다.
“시험이 시작될 때, 재간택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지을 옷을 스스로 골랐다 합니다. 제가 듣기로 재간택인들은 모두 현의를 선택하였다 하였다지요. 그러하였으면 마땅히 현의를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의원의 말을 들으니, 애초에 옷을 고르라 한 것은 옷감이 부족하여 그리하였다는 것 같소. 그리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옷감이 망가진 일도 있었지. 전후의 사정을 보면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생각되네. 난 오히려 그런 일을 겪고도 포기하지 않은 재간택인의 의지를 칭찬해주고 싶소.”
“그건 억지입니다.”
“내 보기엔 소원이 오히려 지나치게 인색하게 구는 것 같소만. 특별히 저 간택인을 떨어뜨리고 싶은 이유라도 있소?”
영빈과 문 소원, 두 여인의 시선이 또다시 팽팽하게 맞섰다.
바로 그때였다.
“어찌 이리 시끄러우냐?”
꽃살문 뒤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희당에 모인 여인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내관의 음성과 함께 용포 입은 백발의 노인이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주상 전하 납시오!”
***
중희당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왕께서 선보이기 장소에 나타난 것은 일정에 없던 일이었다.
본디 지금은 대전에서 신료들과 경전을 논할 시간이었다.
중전이 황급히 다가서며 물었다.
“어인 행차이시옵니까?”
“이곳의 일이 궁금하여 참을 수 없었네.”
대수롭지 않게 말한 왕은 재간택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작금의 상황이 어찌 되어 가는지 호기심이 생긴 것이리라.
왕의 갑작스러운 변덕이야 궁궐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런 행보에 당황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왕의 앞에 있는 이레는 머릿속이 아득했다.
이레는 가능한 한 깊숙하게 몸을 조아렸다.
그런 그녀를 지나친 왕이 명선에게로 다가섰다.
“네가 대제학의 여식이더냐?”
“그렇사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명선이라 하옵니다.”
“바르고 좋은 이름이로다.”
“망극하옵니다.”
“예전에 네 어미가 해주는 식혜를 맛나게 먹은 기억이 있다.”
“어머니께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어머니께서는 요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식혜를 만들고 있사옵니다.”
“호오, 그렇더냐? 언제 날을 잡아 내가 그 식혜를 맛보러 가야겠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왕이 명선의 현의를 집어 들었다.
“이것이 네가 만든 옷이냐?”
“서투른 솜씨이옵니다.”
“이 수자도 네가 다 놓았느냐?”
“어릴 적부터 수모에게 배운다고 배웠사옵니다. 하오나 워낙 배움의 느려 부족한 부분이 참으로 많사옵니다.”
“참으로 곱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 어려워할 것 없다. 잘하였다고 칭찬하는 것이니.”
명선을 향한 왕의 음성이 부드러웠다.
고개 숙인 문 소원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치만 살피던 문 소원이 왕의 곁에 다가왔다.
“전하, 이리 납시었으니. 간택인이 만든 현의를 한번 걸쳐보시어요.”
문 소원은 명선이 만든 옷을 활짝 펼쳐 들었다.
왕은 귀찮다는 듯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그저 보기만 하여도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알겠구나. 참으로 장한 옷이다.”
“하오나…….”
문 소원은 평소처럼 아양을 떨며 왕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왕은 무심하게 발길을 돌렸다.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긴 왕이 이레 앞에 섰다.
“네 아비가 경기관찰사더냐?”
“그렇사옵니다.”
이레는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왕께서 다음엔 무슨 물음을 하실까, 긴장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명선에겐 소소한 일상까지도 담던 왕이건만.
왕은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이레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전하, 간택인이 만든 옷이옵니다.”
중전과 영빈이 살피던 이레의 옷을 상궁이 가져왔다.
임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속저고리와 바지를 만져보았다.
그러곤 더는 흥미가 없다는 듯 나무 궤에 넣었다.
“오늘이 오기까지 간택인들의 고생이 남달랐으리라. 해가 지기 전에 선택을 끝내도록 하라.”
명을 내린 왕은 중희당을 가로질렀다.
문 소원의 얼굴엔 어느덧 승자의 웃음이 가득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영빈과 중전의 견제로 길어질 싸움이었건만, 왕의 출현으로 해결되었다.
이대로…….
문 소원의 작은 머릿속으로 행복한 상념이 깊어질 찰나였다.
중희당 밖으로 향하던 왕께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나는 두 옷 모두 마음에 든다.”
그저 무심한 한마디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짧은 평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희비가 엇갈렸다.
승리의 미소를 짓던 문 소원과 명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굳어있던 영빈의 표정은 부드럽게 펴졌다.
이레는 숨을 골랐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무엇보다 시험의 내용부터 살피셔야 하옵니다. 현의를 만드는 것이지 않습니까? 재간택인 중에 현의를 제대로 만든 이는 오직 한 명뿐입니다.”
“결과도 중요하나 과정도 소홀히 할 수 없지 않소.”
“과정은 물론 중요하지요. 옷을 보십시오. 제대로 만들어낸 현의와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적삼이 어찌 비교가 되겠으며, 그 옷을 만드는 과정 또한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 않은가. 뛰어난 재간을 가진 자는 많아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는 무척 어려운 법. 더구나 뛰어난 사람이 꺾이지 않은 의지마저 갖춘 경우는 더더욱 드문 법일세.”
재간택인들을 둘러싼 내명부의 논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논쟁이 격해졌다.
결국, 이레와 명선에게 휴식이 주어졌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옵소서. 논의가 끝나는 대로 두 분을 부르시겠다 하시었사옵니다.”
양덕당으로 간택인들을 안내한 지밀상궁은 다시 잰걸음으로 중희당으로 사라졌다.
텅 빈 양덕당에 이레와 명선, 두 여인만 남았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명선은 거칠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마당 저편에 있는 이레를 돌아보았다.
김이레.
물이 스미듯 자신의 일상에 침입한 여인.
그녀로 인해 완벽했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모두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하찮은 계집이 매번 앞길을 가로막으니.
이번 상황도 그러했다.
제 주제를 알고 순순히 물러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도 좋고, 저에게도 나쁠 일은 없었을 테지.”
이레를 향해 이를 갈던 명선이 무슨 이유에선지 눈살을 찌푸렸다.
주위의 동정을 살핀 그녀가 버선을 벗었다.
티끌만 한 화상을 입은 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발은 그사이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짓무른 상처 부위가 더욱 커졌고 곪은 정도도 심해졌다.
살짝 만지는 것만으로도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명선의 눈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바로 그때였다.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명선은 황급히 발을 치마 속으로 감췄다.
황망하여 크게 벌어진 눈동자에 대제학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버님.”
“변변찮은 것.”
“송구합니다.”
명선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 줄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러니까…….
고통으로 미간이 일그러지는 찰나.
대제학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색하지 마라.”
“네?”
“여기서 그런 꼴 보였다간 그간 들였던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니. 쓰러져도 집으로 돌아가 쓰러져라. 내 말 알아들었느냐?”
아비를 바라보는 명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고 계셨어?
아비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은 비정하고 냉정한 아버지를 고스란히 빼다 박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흉한 꼴 아니 보일 겁니다.”
“그래야지.”
“어떻게든 이길 겁니다.”
그래야지 저를 이리 함부로 대했던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저 아이에게 무얼 잘못했든지 알려 줄 것 아닙니까.
아비의 어깨너머로 이레의 모습이 들어왔다.
명선의 원망 가득한 시선이 이레를 향했다.
***
같은 시간.
세손궁으로 분주한 걸음이 달려왔다.
“어찌 되었느냐?”
사정을 살피라며 중희당으로 최 내관을 보낸 참이었다.
형운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내관은 서둘러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아직 의견이 분분하옵니다. 이레 아가씨의 사정을 감안하여 지금 지은 옷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선희궁 마마의 의견이옵고.”
“문 소원과 옹주마마께선 대제학의 여식이 만든 현의에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한단 말이렷다.”
“그렇사옵니다.”
“그럼 어마마마와 중전마마의 의견은 무엇이더냐?”
“아직 의중을 내비치지 않고 있사옵니다. 하여…….”
“하여?”
“대전에서의 경전이 끝나면 주상 전하께서 마지막 결정을 내리시겠다 하사옵니다.”
“주상 전하께서?”
“네. 이대로 내명부에 맡겨 두었다간 날만 지나게 되니. 더는 기다릴 수 없다 하시었사옵니다.”
“지난밤에 누가 대전을 드나들었느냐?”
“평소처럼 문 소원께서 듭시었사옵니다.”
“그런가?”
“새벽에 삼정승께서 독대를 청했다 하온데. 그것이 이번 세손빈을 결정하는 데 무슨 영향이 있을는지.”
“그야말로 안팎으로 입김을 불어넣는구나.”
형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최 내관이 그 뒤를 황급히 쫓았다.
“저하, 어딜 가시옵니까?”
“이레가 판을 깔았으니, 나도 한몫해야지 않겠느냐?”
“하오나,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세손 저하의 혼례이옵니다. 왕실의 법도 상 세손께선 이 혼례에 관심을 두어서도 아니 되며, 영향을 끼쳐선 더더욱 아니 되옵니다. 그저 묵묵히 어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세손께서 하실 일이옵니다.”
“그래. 법도상 나는 이 혼례에 관심을 두어선 아니 된다. 또한, 이 혼인과 관련한 말을 입에 올려서 아니 되지. 그렇지만…….”
형운은 세손궁의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임금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나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세손은 아니 되겠지만, 한 사내가 한 여인을 위해 하는 일은 괜찮을 터.”
“저하.”
뜻밖의 말에 최 내관은 멍한 얼굴로 형운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형운은 저만치 멀어졌다.
아차차, 정신을 차린 최 내관 서둘러 형운의 뒤를 따라갔다.
“할바마마를 뵈어야겠다.”
어느새 대전에 다다른 형운이 대전 앞을 지키는 내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전하, 세손 저하 입시옵니다!”
문전비의 고하는 목소리에 굳게 닫혔던 대전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세손이 아니더냐.”
중희당으로 나설 차비를 하던 왕이 형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디 걸음 하시나이까?”
“중희당으로 나갈 참이었다. 내명부의 여인들이 워낙에 뜸을 들이니. 나처럼 성격 급한 노인네는 기다리다 숨이 넘어갈 판이다. 하여, 내가 결론을 내리려 한다.”
“그렇사옵니까.”
왕이 걸음을 옮기다 형운을 돌아보았다.
“이번 세손빈 간택,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
“조정의 신료들은 대제학의 여식을 세손빈으로 들이라 하는구나. 그들의 말처럼 대제학의 여식이 네 곁자리가 된다면 앞으로 네 행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몇몇 왕실의 사람들은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제격이라고 하더구나. 참하고 덕스러운 성품이 두루 사람들을 끌어안아 왕실을 평안케 할 것이라 한다.”
“…….”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무지한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허허. 그래?”
“다만, 이번 시험은 세손빈을 가려 뽑는 자리인 줄 아옵니다.”
“그렇지.”
“전하. 무지한 소손의 생각으론 신료들의 명분과 왕실의 정통성엔 엄연한 차이가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신료들의 명분도 중요하나 왕실을 정통성을 잊으시면 아니 될 것이옵니다.”
“왕실의 정통성이라…….”
내내 느긋하던 왕의 얼굴에 바싹 긴장이 들어찼다.
톡톡,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리던 왕의 얼굴에 돌연 미소가 떠올랐다.
“내 늙어서 그런가. 자주 깜빡깜빡하는구나. 하하하, 그렇지. 왕실의 정통성.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구나.”
***
중희당으로 이레와 명선이 다시 들어섰다.
무거운 공기가 그들 앞에 내려앉았다.
각자 자신이 지은 옷 앞에 앉은 간택인들을 보며 영빈 이씨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두 간택인이 보여준 정성과 노력은 보통을 넘어선 큰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수고하였습니다. 대제학의 여식은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상의원의 침선장들도 감히 엄두 내기 어려운 현의를 만드는 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니. 모두가 그 정성과 신묘한 솜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또한, 경기관찰사의 여식 또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옷감이 없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으니. 비록 그것이 시험의 과제로 나온 제례복이 아니라 해도 들인 정성은 참으로 훌륭하였어요.”
잠시 말을 멈춘 영빈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는 날숨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는 두 사람의 간택인 중에서 삼간택에 올린 한 사람을 뽑는 자리이니. 우열을 가리지 어렵지만 깊은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을 발표하겠습니다.”
그때였다.
“결정은 내가 하마.”
문이 열리고 왕께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