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능이시지불능 용이시지불용
밤이 종말을 고했다.
희붐하게 새벽이 밝아왔다.
유난히 이른 시간에 잠이 깬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정성껏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은백. 계십니까?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움직인 붓이 마침내 마지막 온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레가 한 자 한자 정성 들여 쓴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이 전해지지 않으니, 당연히 되돌아오는 글 또한 없었다.
“안 되는구나.”
서탁의 신묘함은 언제나 밤과 함께 시작된다.
사람의 시간이 끝나고, 달과 구름이 어우러지는 귀의 시간이 되면 비로소 서탁은 시공을 초월한 조화를 일으켰다.
지금처럼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엔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할아버지들! 은백!
돌아오지 않을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레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서탁은 언제나 해답을 주었다.
슬픔에 젖어 눈물 흘리면 달래주었고, 불안해하면 용기를 주었고, 답을 갈구하면 방도를 알려주었다.
부족할 땐 가르침을 주시고, 운명을 속삭여주었고, 만남을 인도하였다.
모든 일이 이 서탁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일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아시지요?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재간택 시험의 마지막 날.
지금껏 만든 결과물을 보여야 하는 날이었다.
제례 때 임금께서 입으실 옷을 지어야 했던 시험.
그동안 정성 들여 만든 옷을 마침내 오늘 왕실 어른들 앞에 펼쳐놓고 평가받아야 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곳곳에 남았다.
“그분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내가 최선을 다하였는지 모르겠구나.”
유난히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험이었다.
이레는 씁쓸한 표정으로 서탁을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들, 모든 일이 할아버지들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이레는 재간택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기 전, 할아버지들과 나눈 필담을 떠올렸다.
*
유난히 달빛이 밝은 밤.
이레는 서탁에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세자빈으로 낙점된 여인이 이미 존재하고, 시험에 관여한 사람들이 그 여인을 지지하고 있다면, 어떤 일을 벌일까요?
방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술수를 부릴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막을 방도도 생각할 수 있으니.
화가 말했다.
-허허, 간택 시험에 내정된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인을 떨어트리려고까지 하겠느냐?
상이 나섰다.
-왜 없겠어? 지금까지 일들을 보면 더한 일도 하고도 남음인데.
-하긴 그렇겠군.
할아버지들은 진지하게 이레의 고민에 동참했다.
서탁의 할아버지들이야말로 이레가 만났던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분들이었다.
때때로 이레를 방해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이런저런 악행을 들려주었고, 때론 이레의 편이 되어 그들의 수작에 맞설 방도를 내놓았다.
이레로서는 상상도 못 할 비열하고 치졸한 권모술수가 서탁 위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수법에 맞서는 방법 또한 기상천외하였다.
이레를 위해 많은 시간 동안 지혜와 경험을 짜낸 할아버지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진정 궐의 힘 있는 자들이 널 밀어내려 작심하였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악할아버지의 말에 화와 상, 예가 동의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보면 그들의 힘과 권력이 절대 가볍지 않으니.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막기 힘들 것이다.
-자잘한 수작들이야 어찌어찌 해보겠지만, 저쪽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어렵겠어.
-이번만큼은 정말 쉽지 않구나.
훼방꾼의 입장이 되어 방해하려 마음먹으니, 세상에 못 할 짓이 없었다.
그 모든 수작을 혼자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불행하게도 할아버지들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옷감이 불에 타? 이런 망할 놈들을 보았나.
이레의 소식을 전해 들은 상은 버럭 욕을 쏟아냈다.
화와 악 또한 분노했다.
-참으로 치졸한 수작이구나. 아이야, 다치지는 않았느냐?
-내 그들이 비열한 짓을 할 거라 생각하였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구나.
상은 흥분하여 날뛰었다.
-그놈들이 도대체 누구냐? 이름이 뭐냐? 어느 집안의 누구야? 내 이놈들을 싹 잡아들여서 너의 원혼을 위로해야겠다.
예는 차분했다.
-사고임에도 상의원에서 옷감을 다시 내어주지도 않았느냐? 일정을 미루지도 않았고?
이레가 답했다.
-네. 그렇게 결정된 모양입니다.
상의 흥분한 글이 서탁 위를 질주했다.
-이런 형편없는 놈들을 보았나. 아무리 내정된 여인이 있어도 형평성이 있거늘. 아예 대놓고 한통속이라고 부르짖고 있구나.
화는 신중하게 의견을 덧붙였다.
-이번 일은 분명 부당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그런 식으로 났다면, 상의원만을 탓할 수는 없을 터.
예가 동의했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어찌 대처할 생각이냐?
이레가 붓을 들었다.
-고민 중입니다.
화가 이레를 다독였다.
-쉽지 않겠구나. 아이야, 불안해도 침착해야 한다.
할아버지들이 흥분하고 위로해준 덕에 이레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할아버지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의 거친 필체가 돌아왔다.
-이번 일을 어찌어찌 잘 처리한다 해도 다음에 또 수작을 부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이렇게 된 거, 한 번 물귀신이 되어보면 어떻겠느냐?
-물귀신이라니요?
-너의 옷감도 못 쓰게 되었으니, 다른 간택인의 옷감도 못 쓰게 하는 게다. 불로 지지고, 난도질하고, 아주 갈기갈기 진조밥을 내는 거다.
예가 즉각 반박했다.
-바른 아이에게 무슨 짓을 가르치려는 게요?
-저쪽이 흙탕물을 튕기면, 이쪽은 오물을 부어버려야지. 악인에겐 틈을 보이면 안 돼. 계속 당해주기만 하면 얕잡아 보고 점점 악랄하게 행동하게 된다.
예가 다시 말했다.
-세손빈을 정하는 신성한 자리임을 잊지 마시오. 그런 마음으로 어찌 성심을 얻을 수 있겠소?
악도 예를 거들었다.
-예의 말이 옳다. 자고로 사악하고 치졸한 술수로 이룬 성과는 반드시 뒤탈이 있기 마련이다.
-하면? 악, 너는 다른 좋은 수가 있단 말이냐?
잠시 침묵하였던 악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아이를 막고 훼방하는 이유는 아이가 그들의 목적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방도가 뭐냔 말이다.
-그들의 수작을 막을 수 없다면, 우선 스스로를 숨겨야겠지. 그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작고 하찮은 사람으로 숙이고 엎드려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다.
예가 악의 말을 받았다.
-능이시지불능(能而示之不能), 용이시지불용(用而示之不用). 할 수 있으면서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쓸 수 있으면서도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상이 코웃음을 쳤다.
-손자병법? 그거야 전쟁이나 처세술에 관한 이야기지. 이건 옷 짓는 일이다. 쓸 수 있는 물건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니. 일부러 엉망인 옷을 지으란 말이냐? 시험은 어쩌고? 대체 무슨 수로 엉망으로 지어진 옷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단 말이냐?
이번만큼은 할아버지들도 좋은 대안을 내어놓지 못했다.
침묵이 감돌던 서탁 위에 화의 글이 새겨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였다. 포기하지 않고 궁리하면 반드시 길이 나타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
할아버지들과의 대화를 떠올린 이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할 수 있으면서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쓸 수 있으면서도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예가 전해준 병법.
상 할아버지의 말처럼 병법을 옷 짓는 일에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응용할 수는 있으리라.
이레는 붓을 세웠다.
-할아버지들께서 전해주신 가르침대로 옷을 지었습니다. 이제 곧 그 결과를 알게 되겠지요.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쓸 수 있는 물건을 쓸 수 없는 물건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안다.
어쩌면 이 모든 노력이 쓸데없는 짓이 될 수도 있음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옷감이 망가진 순간부터, 정상적인 방법은 쓸 수 없었으니까.
“이제 곧 그 결과를 알 수 있겠구나.”
문밖으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다가왔다.
치장을 도와줄 수모와 수모곁시이리라.
이레는 할아버지들께 인사를 올렸다.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들.
***
같은 시간.
어둠이 짙은 양덕당 마당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꾸벅꾸벅 졸던 궁녀가 느닷없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누, 누구시오?”
“쉿!”
침입자가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웠다.
번을 서던 궁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침입자를 보았다.
비록 코와 입을 면사로 가렸으나, 전체적인 얼굴의 윤곽이 눈에 익었다.
무엇보다 침입자의 옷차림.
다름 아닌 상궁의 차림이었다.
침입자가 궁녀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날이 밝기 전에 긴히 살펴볼 것이 있다. 언질을 받았겠지?”
궁녀는 대답 대신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대로 교육받았구나.”
상궁 차림의 침입자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궁녀 곁을 지나쳤다.
변복한 상궁은 양덕당의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이내 두 개의 나무 궤가 들어왔다.
재간택인들이 완성한 옷이 든 궤였다.
평소엔 궁녀와 내관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침입자는 곧장 이레의 궤로 다가갔다.
잠시 주위를 살핀 침입자는 조심스럽게 나무 궤를 열었다.
“……!”
침입자의 눈동자가 당혹스럽게 흔들렸다.
나무 궤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 담겨 있었다.
고민하던 침입자는 나무 궤를 그대로 닫고 양덕당을 빠져나갔다.
번을 서는 궁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
재간택 시험의 마지막 날.
마침내 재간택인들이 지은 옷을 평가받는 날이 밝았다.
불안한 마음에 이른 시각부터 문 소원을 찾은 명선은 뜻밖의 광경에 어리둥절하였다.
“호호호.”
문 소원이 부푼 배를 붙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명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주상전하께서 거하시는 상궐의 분위기가 어떠한지 물었을 뿐인데, 문 소원이 돌연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한참을 웃던 문 소원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미안합니다. 내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그런데 뭐가 궁금하다 하였지요?”
“상궐의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하다 하였습니다.”
명선의 목소리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 소원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듣자하니 현의를 기가 막히게 지으셨다는데. 무에 그리 걱정하십니까?”
“제가 만든 옷을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경기관찰의 여식, 그 아이의 눈빛이 조금 이상하여…….”
“그 요망한 계집이라면, 옷감이 망가져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무 당당합니다. 게다가 어젯밤 늦게 옷을 완성하였다는 소식까지 들리지 뭡니까.”
“신경 쓰이십니까?”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면 거짓이겠지요.”
문 소원은 보료에 몸을 기댔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에도 말했지 않습니까? 상의원에서 제일가는 장인이라도 제시간에 옷을 지을 수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완성하였단 말입니다. 김이레, 그 아이가 그리 말하는 걸 들은 궁녀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요. 완성하기는 했지요.”
“뭔가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십니까?”
“이 궁에서 제게 모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명선이 문 소원에게 바짝 고개를 가져갔다.
“무엇입니까? 그 아이가 어떤 수작을 부린 겁니까?”
문 소원이 입가를 비틀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기어이 정신 줄을 놓았나 봅니다.”
“정신을 놔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어처구니없는 것을 만들 리 없지요. 지난 닷새 동안 그리 요란을 떨며 만든 것이 고작 그런 것이라니.”
문 소원은 혀를 끌끌 찼다.
영문을 모르기에 명선은 맞장구칠 수 없었다.
문 소원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우리가 그 계집을 너무 높게 평가한 모양입니다.”
“대체 그 아이가 만든 것이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곧 아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곧 중희당에서 선보이기가 시작될 것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있으셔도 되겠습니까? 웃어른 뵐 준비를 하여야지요. 꾸밈도 다시 살피셔야 할 터이고. 안 그렇습니까? 빈씨.”
“지금 절 빈씨라 부르셨습니까?”
“네, 그럼요. 빈씨지요. 이젠 당연히 그리 불러드려야지요.”
문 소원의 야살에 명선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혔다.
“그럼 난 문 소원만 믿고 돌아갑니다.”
“그럼요. 이제 날이 밝으면 모두 끝이 날 것이니. 아무 심려 마시어요.”
명선은 말끔해진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각을 나서는 그녀의 얼굴엔 당당하고 오만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곧 나는 빈씨가 된다. 몇 시진만 지나면 그 자리는 나의 것이 되리라. 그리고 내가 세손빈이 되는 그날…….”
명선은 이레를 떠올렸다.
속내를 뚫어보는 듯한 그 깊은 눈동자.
좀처럼 열리지 않지만 한 번 열 때마다 폐부를 찔러오는 한마디를 뱉는 그 입술.
꼴도 보기 싫어.
불끈, 주먹을 말아쥔 명선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보기 싫은 것, 영영 한양땅에 살지 못하게 해야겠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아주 먼 곳으로 보내야겠구나. 죽으면…… 더 좋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왼쪽 발등이 송곳으로 찌른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곧 빈씨가 된다는 들뜬 생각에 명선은 그 아픔을 잊었다.
***
세손빈 재간택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유난히 길고도 말 많았던 간택이었던지라.
도성은 물론이고 조선 팔도의 많은 이들이 마지막 삼간택에 오를 간택인이 뉘일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재간택 시험을 치르기 위한 성안의 움직임도 부산했다.
중희당 처마 아래로 거대한 차일이 쳐졌다.
전각 마당엔 기름진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음악이 들리고 무희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왁자한 축제의 자리.
세심하고 아름답게 손질된 전각으로 왕실 여인들이 들어섰다.
시끌벅적했던 소란이 한순간에 멈췄다.
어린 중전을 필두로 영빈 이씨와 세자빈이 뒤따랐다.
그 뒤로 왕의 후궁들과 옹주들이 줄을 지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귀하신 분들께서 모습을 완전히 감춘 후에야 비로소 잠시 멈춘 시간이 다시 흘렀다.
곡이 연주되고, 잔칫상을 준비하는 부산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궁인들은 까치발을 들어 담벼락 안쪽을 살폈고, 어린 궁녀들은 어딘가로 연신 소식을 물어 날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재간택인들 입시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나무 궤를 든 두 명의 상궁이 나란히 대문 턱을 넘었다.
곱게 단장한 재간택인들이 음전한 자태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상궁과 궁녀들의 긴 행렬이 화려한 원앙의 깃처럼 펼쳐졌다.
천지간의 법도와 궁의 엄격한 예법이 재간택인들을 인도하였다.
내관의 긴 호령은 음악 같았고, 편종의 울림은 발걸음과 때를 같이했다.
재간택인들은 정확한 시와 때에 맞춰 정해진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미리 기다리던 왕실 여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내관은 아랫배를 단단히 하고 긴소리를 뽑았다.
“곡배!”
이레와 명선.
두 명의 간택인들이 절을 올렸다.
이후, 서와 열에 따른 예가 이어졌다.
왕실 여인들은 부드러운 미소와 고갯짓으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앞서 온 나무 궤가 재간택인들 앞에 놓였다.
나무 궤 안엔 재간택인들이 보름 동안 정성 들여 지은 옷이 들어있었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영빈 이씨는 넉넉한 미소로 재간택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양덕당에서 두 분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는지, 이미 잘 들어 알고 있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간의 결과를 시험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이기도 하니. 모쪼록 마음 편히 즐기세요.”
영빈의 말에 문 소원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편하게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간택인들의 노력과 정성부터 살펴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소원.”
영빈의 조용한 꾸지람에도 문 소원은 거칠 것이 없었다.
“참으로 긴 시험이었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전 잠시도 못 참겠습니다. 영빈께서는 저 안의 것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소첩은 궁금해서 못 참겠습니다. 중전마마, 세자빈께서도 그러하신 듯한데…….”
말꼬리를 길게 늘인 문 소원이 상궁들에게 명을 내렸다.
“우선 그 상자부터 열어보아라.”
힐끗, 중전의 눈치를 살핀 상궁들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먼저 명선의 현의가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 저것을 정녕 재간택인이 지었단 말입니까?”
“세상에. 참으로 훌륭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감탄과 칭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옷을 고작 보름 만에 재간택인이 지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문 소원은 과장되게 웃으며 명선의 현의를 칭찬했다.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의 여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지은 옷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만들어진 현의였다.
특히, 소매와 어깨에 놓인 자수의 섬세함은 상의원에서 제작한 면복에 버금갈 만큼 대단했다.
명선의 현의가 다시 나무 궤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남은 나무 궤로 향했다.
“열어 보아라.”
문 소원의 말에 굳게 닫힌 이레의 옷 상자가 열렸다.
“세상에…….”
“저것은…….”
“이게 무엇인가?”
명선의 것과는 다른 의미의 탄성과 놀란 목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상자를 연 지밀상궁이 이레의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잘못되다니요?”
“옷을 잘못 담은 듯합니다.”
지밀상궁의 말에 이레는 상자 속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내 담담한 얼굴로 그녀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만든 것이 확실합니다.”
당황한 지밀상궁이 다시 속삭였다.
“하지만 상자 속의 옷은 현의가 아닙니다. 저 옷은…… 속저고리와 바지가 아닙니까?”
면사로 만든 속저고리와 바지.
뜻밖의 물건이 던진 파장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조용하던 실내가 술렁거렸다.
그 가운데 오직 이레만이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날카로운 화살처럼 날아드는 수많은 눈총 속에도 그녀는 내내 당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