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해법(解法)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렸다.
깊은 잠에 빠졌던 궁이 기지개를 켰다.
밤새 안으로 잠겼던 궁 문이 활짝 열리고 드나드는 분주한 걸음들이 이어졌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환관 복색을 한 최치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오늘도 궁 문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멈췄던 재간택 시험이 다시 시작되고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그분께서 언제 오시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수월을 다녀간 이후, 이레는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재간택 시험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렸건만.
이레는 한 번도 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들 이레가 시험을 포기하였다고 단정 지었다.
“무리도 아니지. 옷감을 구할 방도가 없으니.”
영빈을 비롯하여 세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옷감을 내어 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지지하는 간택인의 입장을 두고 조정에서 대신들의 언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권력의 추는 명선에게 기운지 오래였다.
이 일로 세자가 분노했으나 소용없었다.
삼정승을 비롯한 신료들은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무엄한 놈들.”
감히 세자께 저항하던 대신들을 떠올리며 최치성은 분노했다.
하궐의 세자와 상궐의 신료들이 불편한 관계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간 암중으로만 흐르던 기류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표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감히 신하가 주군의 명을 거부하다니.”
잘못된 명이라면 어명이라도 목숨을 걸고 불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세자 저하의 명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세손빈의 자리를 정하는 중요한 시험.
모두에게 불공평해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가 아닌가.
하지만 그 당연한 요구조차도 대신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거절하였다.
해결방법을 모색하시던 세자께서 왕께 직접 청을 올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로구나.”
최치성은 가슴을 쳤다.
“오늘도 아가씨께선 아니 오셨습니까?”
뒤에서 물기 섞인 물음이 들려왔다.
“금정이로구나.”
어린 궁녀가 소매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금정은 양덕당 사건으로 사헌부의 감찰을 받았다.
이레와 유경의 적극적인 변호가 없었더라면, 두 발로 옥사를 걸어 나올 수 없었을 터였다.
“몸도 성치 않건만, 또 나왔더냐.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 터이니, 그만 돌아가 쉬어라.”
“아닙니다. 이젠 많이 좋아졌습니다.”
“무리하는구나.”
“제가 조금 무리하는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모든 게 제 잘못으로 생긴 일인걸요.”
금정은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제가 실수하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만해라. 그 일이라면 이미 아가씨께서도 괜찮다 하지 않으셨느냐? 형판댁 아가씨도 스스로 잘못하였다며 널 변호하였다 들었다.”
“아닙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때문에 유경 아가씨 몸에 지워지지 않는 흉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아가씨의 옷감도 못쓰게 되었으니. 제 죄가 참으로 큽니다. 앞으로 이 죗값을 어찌 갚아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른 입맛을 다시던 최치성이 입을 열었다.
“나도 얼마 전에 큰 실수를 하였단다. 사람을 잘못 믿는 바람에 자칫하면 모시는 분을 큰 위험에 빠트릴 뻔하였다.”
“최 내관님께서도 말입니까?”
“그래.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는 것이지.”
금정이 물기 젖은 눈으로 최치성을 올려다보았다.
치성은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과거가 후회된다면 슬퍼하지 마라. 울 시간에 만회할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나을 것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최치성의 위로는 금정에게 큰 힘이 되었다.
“더는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아가씨께서 삼간택에 오르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금정을 달랜 최치성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노력만으로 해결될 일이면 좋겠다만.’
워낙 답답한 상황이라.
그의 머리론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어쩌면 이대로 이레가 포기한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리청정하시는 세자 저하께서도 어찌하지 못한 일이니.
권력도 연줄도 없는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무슨 수로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대로 아가씨께서 떨어지시면 우리 세손 저하께서 얼마나 낙심하실까.’
형운을 떠올리니 절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가마여요.”
상념에 빠진 최치성의 귓가에 금정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말이냐?”
“저기요. 아가씨의 가마가 틀림없어요.”
최치성은 금정의 손끝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내 눈에 익은 가마가 궁 문으로 다가왔다.
가마를 호위하는 무사들이 최치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천호와 백호.
모두 그가 직접 가르치고 키운 무인들이었다.
또한, 이레를 지키는 호위이기도 하였다.
“아가씨.”
금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가마의 주인을 불렀다.
가마의 창문이 열렸다.
단아한 인상의 여인이 선한 미소로 답했다.
“금정이구나. 잘 지냈느냐?”
이레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녀의 표정이 지치고 초췌해 보였다.
“아가씨…….”
내내 가슴 졸이던 금정이 기어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지켜보는 최치성의 눈가도 뜨뜻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최…… 내관께서도 잘 계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아가씨께서 돌아오시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다 보니 생각보다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담담한 이레의 미소에 최치성도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이제라도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됐다.
분명 무언가 해결할 방도를 찾아낸 것일 거야.
최치성의 눈에 은근한 기대가 차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레가 진지한 표정으로 최치성과 금정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두 분이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최치성과 금정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시어요.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해낼게요.”
***
이레가 양덕당으로 돌아온 일은 곳곳으로 전해졌다.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재간택에 참여하였다는 소식, 들었는가?”
“포기한 거 아니었어?”
“간택이라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
“돌아온 걸 보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생긴 모양이지.”
“예끼 이 사람아. 소문도 못 들었는가? 옷감이 못쓰게 되었다네. 상의원에서 새 옷감을 내어주지도 않는다 했어. 조선 팔도에선 그 비단을 구할 수 없다 하질 않는가. 옷감이 없는데 무슨 수로 옷을 짓는다는 겐가?”
“그럼, 어찌할 방도도 없는데 돌아왔단 말인가?”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쉬웠겠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경기관찰사댁 아가씨라지? 용케 예까지 올라왔는데,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하겠지.”
사람들은 이레의 복귀를 마지막 발악으로 평했다.
이레의 복귀는 지밀상궁을 비롯한 궁궐의 궁인들에게도 큰 화젯거리였다.
그녀의 복귀도 놀라웠지만, 돌아와서 이레가 한 일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이레는 최치성에게 베틀을 구해오게 하였다.
금정에겐 그 베틀로 자아낼 실을 상의원에서 받아오라 하였다.
두 가지 모두 궁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상의원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할망정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준비가 끝나자 이레는 곧장 작업에 돌입했다.
베틀의 앉은깨에 앉아 윗날과 아랫날로 나뉜 날실에 북으로 씨실을 넣었다.
발로 실 끈을 당기고, 북으로 씨실을 넣고 조이고 다시 당기는 작업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지난 며칠간 양덕당으로 오지 못한 이유, 바로 옷감 짜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가지가지로구나.”
한동안 작업에 열중하고 있노라니, 낮지만 선명한 비아냥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레는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샌가 명선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못마땅한 듯 내려다보는 명선의 눈빛.
이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고개를 내려 작업에 몰두했다.
그녀의 귓가엔 유경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보았어요, 언니. 그때 금정이의 치맛자락을 김명선이 밟는 걸 제가 보았어요.’
울컥,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이레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베틀을 움직이는 손과 발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베틀이라. 이건 또 무슨 낮도깨비 같은 짓인지 모르겠구나. 설마, 이제 와 옷감을 짤 생각이더냐?”
“…….”
“잊었는지 모르지만, 시험이 끝날 때까진 고작 닷새 남았단다. 그 안에 필요한 비단을 다 만들 수도 없겠지만, 설사 만든다 해도 옷을 지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니.”
“…….”
“아서라. 괜한 고생일 뿐이다. 다 널 위해 하는 말이다.”
명선은 베틀 주위를 오가며 노골적인 조소를 흘렸다.
하지만 정작 이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로지 베틀을 움직이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옷감을 받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구할 수도 없다면,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스스로 만드는 것.
명선의 말처럼 남은 시간은 고작 닷새.
잠시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감히…….”
거듭된 이레의 무시.
명선은 부아가 치밀었다.
포기할 줄 알았던 이레가 돌아온 것도 의외인데,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불안하기도 했다.
‘불가능해. 지금부터 옷감을 마름질하고 바느질을 한다 해도 남은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없거늘. 하물며 필요한 옷감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니. 설사 상의원에서 가장 뛰어난 침선장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야.’
당연히 못 할 것이다.
지금 이레가 벌이는 모든 것들이 해괴하고 엉뚱한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저 눈.’
베틀을 향한 흔들림 없이 이레의 눈.
‘대체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거지?’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괜히 성화를 솟구치게 하였다.
“왜 사람이 말을 해도 들은 척을 하지 않느냐?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느냐?”
이레를 향한 명선의 음성이 사나워졌다.
그 사나움이 끝내 주위로 전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밀상궁이 걱정스레 물었다.
날카로운 명선의 음성을 듣고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명선은 입가에 머금은 냉소를 서둘러 지워냈다.
“오랜만에 이 친구가 돌아온 것을 보니 몹시 반갑지 뭐요. 하여 안부를 물어보고 있었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정녕 둔한 것인지.
지밀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친근한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인사 나누셨으면 그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마침, 나도 그럴 생각이었소.”
명선이 이레를 돌아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해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으니, 불가능한 일도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작은 성과라도 있겠지.”
건네는 목소리는 상냥했으나 결국 노력해도 늦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이레가 명선의 등에 대고 대답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하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낙수가 끝내는 바위를 뚫는 법이지요.”
노력과 인내는 불가능을 이기는 법.
말 속에 숨은 뼈가 명선을 아프게 찔러왔다.
명선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기엔 둘러싸고 있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었다.
“네 말대로 꼭 되었으면 좋겠구나.”
자리로 돌아온 명선은 자신이 지은 옷을 보았다.
이미 형태는 거의 완성되었고, 마지막 자수를 놓는 참이었다.
빠듯한 일정.
그러나 서두른 덕분에 늦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스스로 보기에도 옷의 완성도가 제법 썩 괜찮았다.
“그래, 네가 무슨 재주로 닷새 만에 이처럼 훌륭한 옷을 짓겠느냐?”
딱딱하게 굳은 명선의 얼굴이 풀어졌다.
“아무렴, 어림도 없지.”
***
날이 밝고 기울길 반복했다.
달은 하루가 다르게 동그랗게 몸을 부풀렸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고, 양덕당에서 들리는 베틀 소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한양 사람들 입엔 연일 세손빈 재간택의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궁 안의 궁인들 역시 두 명의 간택인들을 두고 내기를 걸었다.
이미 떠도는 소문이 무성하였기에.
대부분의 궁인들은 명선의 승리를 예견했다.
간혹 이레를 점찍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혹시나 모를 행운에 기댄 것일 뿐.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시험 종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후 늦은 시간.
세손궁을 찾은 최치성은 형운에게 양덕당의 일을 보고했다.
“마침내 옷감을 다 자아냈단 말이냐?”
형운이 물었다.
최치성은 잔뜩 흥이 나 대답했다.
“이미 마름질도 끝나고, 바느질에 전념하고 계시옵니다.”
“훌륭하다. 참으로 용하구나.”
형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의원에서 끝내 옷감을 내어줄 수 없다 하였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레가 며칠째 양덕궁을 찾지 않는다 하였을 땐 실의에 빠져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세손으로 불리며 만백성이 우러르는 자리에 있건만.
정작 마음 준 여인을 위한 작을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슬픔으로 얼룩진 작은 얼굴을 닦아내며 괜찮다 말하고 싶었다.
내가 다 해결하마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세손궁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였다.
“주상 전하께선 요즘도 매일같이 부르시옵니까?”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시시때때로 부르시는구나.”
“전에 없던 일이 아니 옵니까? 연유가 무엇인지요.”
“내 공부를 확인하고 싶다 하시는구나.”
형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연일 이어진 할바마마의 부름.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음이 분명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었다.
형운과 이레와의 만남을 막으려는 보이지 않는 술수.
세손에게 조금의 짬도 주지 않으려는 비겁한 계략.
형운은 언젠가 불쑥 자신을 찾아왔던 문 소원을 떠올렸다.
자신을 살피던 그 오만하고 교만한 표정.
‘힘이 필요해.’
권력이든.
무력이든.
세력이든 상관없었다.
세상을 제 마음대로 흔들 절대적인 권력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그 어떤 외압에서도 내 사람만큼은 지킬 수 있는, 그런 힘이 필요했다.
“내일이 시험을 평가하는 날이라 하니.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 날이로구나. 그래, 은랑의 표정은 어떻더냐?”
그 어려운 상황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
베틀로 옷감을 짜고, 마름질을 끝낸 이레가 어제부터 바느질을 시작했다 들었다.
어찌어찌 간신히 옷의 형태는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애당초 생각했던 현의의 형태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겠지.
너무 깊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이면 옷이 완성될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전해달라셨습니다.”
“뭐라?”
내가 무어 잘못 들었나?
형운은 재차 물었다.
“치성아, 지금 뭐라 했느냐? 옷이 완성되었다고 했느냐?”
“네.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태연한 최치성의 대답에 형운은 혼란에 빠졌다.
“현의는 짓는 방법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아무리 능숙한 침선장이라 하여도 보름 안에 옷을 짓고 자수를 놓기 어려울 터. 하물며 은랑은 필요한 옷감을 직접 짜야 했다.”
“그렇사옵니다.”
“바느질을 시작하였노라 전한 것이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옷을 완성해?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느냐?”
“당연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네가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방금 옷을 완성하였다질 않았느냐?”
“옷은 완성되었사옵니다.”
“어떻게?”
“아가씨께선 전혀 다른 발상으로 문제에 접근하였습니다.”
“다른 발상?”
“그것은…….”
궁금해하는 형운의 귓가에 최치성이 속삭였다.
형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어라? 지금 무얼 어찌했다고?”
놀란 음성이 세손궁 밖으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