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만사여의 (下)
이레는 소녀의 안내를 따라 ‘수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월은 시전의 여느 점포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와 분위기를 자아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담한 크기의 가옥으로 보였건만.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넓고 긴 회랑이 보였다.
긴 회랑의 좌우엔 네 칸 가옥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가옥마다 화용(花容), 월태(月態), 절색(絶色)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소녀는 이레를 회랑의 가장 끝에 위치한 가옥으로 안내했다.
화용이란 편액이 걸린 가옥의 첫 번째 방문을 열자 커다랗게 봄(春)이라 적힌 휘장이 나부꼈다.
방 안엔 따사로운 봄 빛깔의 비단이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 벽엔 노란빛과 연분홍빛 그리고 이제 막 대지에 싹을 틔운 새순인 듯 순수한 연초록의 비단이 보였고, 방 중앙엔 노랑 치마에 연분홍 저고리가 걸려 있었다.
옷 옆에 작은 장식장엔 옷과 어울릴 법한 속치마와 속적삼, 그리고 동그랗게 숱을 단 버선과 몇 가지 장신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곳은 처음 봅니다.”
평소 옷이나 장신구엔 별 관심이 없어 이 방면으론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옷과 장신구였다.
옷의 태와 바느질의 느낌, 그리고 비단의 결과 빛깔이 남달랐다.
장신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댕기와 머리꽂이, 노리개…….
얼핏 범상한 것으로 보였으나, 조금만 눈썰미 좋은 이라면 알 수 있으리라. 그곳에 있는 건 작은 돌조각 하나조차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옷의 자수는 물론 장신구의 보석과 정밀한 세공들.
어찌하여 중년의 여인이 이곳에 들어오길 그토록 갈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상하는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물건들이 이곳에 있었다.
이레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감탄사를 속으로 삼켰다.
그때, 소녀가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충분히 살펴보셨으면 다음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문이 열린 방의 이름은 여름(夏)이었다.
싱그러운 여름의 빛깔이 파도처럼 이레의 눈앞에 넘실거렸다.
여름의 방에 전시된 비단과 옷은 봄의 것보단 훨씬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여름 하늘처럼 청아한 푸른빛과 만개한 여름꽃의 붉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싱그러운 봄의 방과 생동감 넘치는 여름의 방을 건너 이번에는 풍성한 가을(秋)의 방으로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겨울(冬)의 방에 다다랐을 때, 소녀가 말했다.
“아가씨께서 지금까지 보신 건 황 노인의 사계(四季)라는 작품입니다.”
이레는 황 노인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언젠가 유경이 그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미려한 옷태와 세심한 세공, 뛰어난 안목으로 장안의 화제가 된 장인.
비단 유경만 황 노인을 아는 게 아니었다.
간택인들이 모인 자리에선 어디서나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하였다.
소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황 노인은 옷을 지을 때, 직접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비단을 짠답니다. 그리고 그 계절의 꽃과 잎으로 비단에 색을 입히지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이는군요.”
“옷을 짓는 시간보다 재료를 구하고 바탕을 마련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지요. 그렇게 밤낮을 보내고 계절의 경계마저 잊은 채 수십여 일 애를 써야 고작 이 옷 한 벌을 지어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옷들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절로 감탄이 일만큼 황 노인의 옷은 보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마음이 담긴 옷.”
재료는 특별하지 않았다.
진실로 특별한 것은 옷을 지은 장인의 마음이었다.
입을 사람의 입장을 세심하게 살피고 고민한 흔적이 황 노인의 작품 곳곳에 묻어 있었다.
“그동안 제가 입었던 옷도 이분의 작품이었군요.”
영빈 이씨의 다과회에 참석할 때 이레가 입었던 옷과 장신구.
어디 그뿐이랴.
가마는 물론이고 가마를 장식한 작은 장식품 하나마저 수월의 것이었다.
이레가 소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자상하게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는 머리를 저었다.
“수월은 공짜로 물건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 정당한 대가를 받고 판 것입니다.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소녀의 말에 이레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분의 옷은 감히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보물임이 분명합니다.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말씀, 황 노인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필시 기뻐할 겁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혹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이레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현의를 지을 때, 사용되는 옷감을 찾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수월에서도 그 옷감만은 보유하지 못하였습니다.”
“옷감을 자아내는 법만이라도 배우고 싶습니다.”
작은 희망을 품고 물었다.
이번에도 소녀는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 또한 왕실만의 비법이라.”
“……그렇군요.”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무리한 청을 한 제가 더 죄송할 따름입니다.”
소녀는 정중했고, 이레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달리 원하시는 것은 없습니까?”
거듭된 질문에 이레는 소녀를 가만 바라보았다.
이곳을 찾았을 땐 목적한 바가 뚜렷했다.
만사여의(萬事如意).
원하는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는 수월의 주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도 간절히.
하지만 지금은…….
“이젠 되었습니다.”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괜찮으신지요.”
이레는 눈가를 초승달 모양으로 여몄다.
“정말로 이젠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한 답을 들었으니까요.”
“네?”
“귀한 구경 감사합니다, 만사여의.”
이레의 말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레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다음 순간, 소녀 역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수월은 언제나 아가씨를 환영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될 날을 학수고대하겠습니다.”
***
이레는 수월을 나섰다.
노심초사 대문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서강율과 장무열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괜찮으시오? 어디 상하거나 협박을 당하진 않았소?”
서강율의 호들갑스런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강율이 이레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하면 수월의 주인장은 만나보았소? 은랑에게 문을 열어준 연유가 무엇이오? 혹, 부당한 거래를 제안하지 않았소?”
이레는 슬쩍 그와의 간격을 벌렸다.
“고귀한 옷과 장신구들을 구경하였을 뿐입니다.”
“영문도 없이 사람을 초대하여 고작 옷만 보여주었단 말이오? 이런 속내 모를 작자들을 보았나? 어디 좀 봅시다. 정말 괜찮은지 내가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겠소.”
슬금슬금 다가온 서강율은 버릇처럼 이레의 양손을 잡으려 들었다.
그 집요한 손길을 장무열이 쳐냈다.
“독종, 지금 무얼 하는 짓이냐?”
“그대야말로 무슨 심보로 함부로 여인의 손을 잡으려 하느냐?”
“귓구멍에 말뚝을 박았느냐? 은랑이 괜찮은지 걱정되어 그런다 말하지 않았느냐?”
“헛소리는 그쯤 해둬라.”
장무열은 특유의 뚝심으로 서강율을 밀어버렸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레에게 물었다.
“만사여의의 행방은 알아냈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수월에 다녀왔지만, 만사여의가 누군지는 끝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물론, 짐작은 하고 있다.
자신을 수월 안으로 안내했던 소녀.
그녀가 수월의 주인이자 만사여의이리라.
그리 짐작한 첫 번째 이유.
수월 곳곳을 지키던 무사들의 기척 때문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무사들이 소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소녀가 걸으면 무사들도 함께 걸었다. 소녀가 멈춰 섰을 때 무사들의 기척도 사라졌다.
두 번째 이유는 소녀의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소녀는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디귀한 황 노인의 작품이 가옥 곳곳에 있었다.
손을 뻗치는 곳마다 값비싼 패물들이 가득했다.
그런 곳을 마음대로 거닐고 보여줄 수 있는 권한.
무언가를 결정할 때도 소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레가 소녀의 정체를 만사여의로 짐작한 이유는 표정 때문이었다.
수월의 주인과 만사여의를 언급할 때의 담담한 표정.
그것은 어린 소녀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일 뿐이다.
만사여의냐는 이레의 말에도 소녀는 미소로 응답했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
그리 정체를 꼭꼭 숨기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그러기에 장무열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내 이럴 줄 알았소.”
서강율은 코웃음을 쳤다.
은근슬쩍 다시 이레에게 접근한 그가 부채를 펼치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난 처음부터 독종, 저 녀석을 믿지 않았다오. 그러니 아쉬워하지 마시오. 이 사람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사여의의 정체를 밝히고 말 터이니.”
“지금 뭐라 하였느냐?”
“네게 한 말이 아니니. 독종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사람을 앞에 두고 험담을 하는데 어찌 신경이 안 쓰인단 말이냐.”
“눈치는 없는 놈이 귀는 또 밝구나.”
“무어라?”
“왜? 내 말이 틀렸느냐?”
장무열과 서강율, 두 사내 사이에 오가는 눈길이 사나워졌다.
그냥 두었다간 한바탕 드잡이질이라도 할 태세라.
전전긍긍 눈치만 살피던 이레는 불현듯 길가에 늘어선 잡화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강율이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은랑, 무얼 사려 그러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레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서강율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뭐하려고?”
“전부터 마음에 걸렸습니다.”
“괜한 짓 하지 마시오. 저 독종에게 그렇게 마음 쓸 것 없소.”
서강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푸른색의 침통을 샀다.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무엇이오?”
느닷없는 침통에 장무열은 의문을 떠올렸다.
이레가 침통의 의미를 설명했다.
“예전 단옷날에 제 오라비께서 술에 취해 서로의 증표로 삼자며 은자들에게 침통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증표?”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은호께서 새로 은자가 되셨기에 저도 모르게 침통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
장무열은 말없이 이레를 바라보았다.
이상스레 가슴 한구석이 쿡쿡 아려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은 눈빛은 참으로 담백했다.
그녀가 건넨 침통엔 오라비를 그리는 마음만이 담겨 있었다.
단지…… 그뿐.
그가 바라는 그 무언가는 담겨 있지 않았다.
심장 깊은 곳에서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이 끓어올랐다.
재간택에 그리 필사적으로 임해야 하오?
그냥 포기하면 아니 되겠소?
이대로…… 그냥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면 아니 되겠소?
입속을 맴도는 많은 질문들.
하지만 결연한 이레의 눈빛 앞에 단 한마디도 내어놓지 못했다.
대신 이레가 내민 침통을 받아들며 의미 없는 말만을 내뱉을 뿐이다.
“……고맙소.”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된다는 이레의 말에도 장무열은 침통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선물, 소중히 간직하리다.”
***
수월의 깊숙한 내실.
소녀는 여전히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황 노인의 가옥에 머물고 있었다.
객은 이미 예전에 떠났지만, 그 자리엔 짙은 향기가 배어 있었다.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이로구나.”
이레를 떠올린 소녀는 말간 미소를 지었다.
설마, 한눈에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줄은 몰랐다.
만사여의라 불리는 수월의 주인.
그것이 소녀라는 것은 가까운 몇몇을 제외하고 아는 이가 없었다.
오늘 이레가 찾아온다는 전갈을 받고 여러 눈속임을 준비했다.
자신을 대신할 대역과 여러 장치까지 마련했건만.
그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소녀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그런 사람이 있음이…….
느른했던 소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들어찼다.
“안에 있느냐?”
문밖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기 있습니다. 오라버니.”
“어험.”
헛기침과 함께 어색한 가짜 수염을 단 사내가 들어왔다.
최치성이었다.
“그분께서 다녀가셨다 들었다. 네가 고생 많았구나.”
소녀는 힐끗, 무심한 눈을 들어 최치성을 돌아보았다.
최치성은 자연스레 소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분을 직접 만나 뵈니 어떻더냐?”
“고운 분이시더군요. 황 노인의 옷이 아깝지 않을 만큼.”
“그리고?”
“오라버니의 주군께선 참으로 현명한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하하, 당연하지 않으냐.”
최치성이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를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내가 왜?”
만사여의가 최치성의 가짜 수염을 손가락질했다.
“수염 말입니다.”
“티 나느냐?”
“차라리 숯으로 그려놓는 것이 더 그럴듯하게 보이겠습니다.”
“거참.”
사촌 누이의 매정한 평가에 최치성은 낮게 헛기침을 흘렸다.
“날 향한 너의 박대가 나날이 심해지는구나. 내가 수월의 호위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오라버니의 주군께서 형편없는 실력이라 하였다면서요?”
“잠시 딴 일을 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해 그런 것이다. 금세 호랑이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무인들로 거듭나게 하마.”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오라버니. 제가 한 일 중에서 유일하게 손해 보는 일이 바로 오라버니와 관련한 일입니다.”
“어허,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였거늘. 어찌 사촌 오라버니에게 손익을 따지느냐. 숙부께선 보시면 무어라 하시겠느냐?”
“오라버니의 이런 모습을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요?”
사촌 누이의 입담에 최치성은 기어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고. 아가씨 이야기나 해보아라.”
“옷감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러가셨습니다.”
“순순히 물러가셨다고?”
“네. 두말하지 않고 물러가시더이다.”
“이상하구나. 내가 아는 아가씨라면 절대 그냥 물러가시지 않을 터인데.”
예상과 전혀 다른 이레의 태도.
최치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큰일이구나. 이 소식을 들으면 주군께서 가만있지 않을 터인데. 오늘도 직접 행차하신다는 것을 간신히 말렸건만.”
“그 무심하신 분께서 말입니까?”
소녀의 얼굴에 모처럼 표정이 떠올랐다.
“그분께선 영영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대체 그 아가씨께서 어떤 재주를 부리셨는지 궁금하군요.”
“나도 궁금하다. 그나저나 왜 아가씨께 황 노인의 옷을 보여준 것이냐? 도와줄 방법이 없다면 처음부터 아예 안 된다 하면 되었을 것을.”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달리 드릴 것도 없고 하여, 좋은 작품이나 보며 마음이라도 편히 가지시길 바랐지요. 그런데…….”
“그런데?”
최치성이 황소처럼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래도 그분께선 제 생각보다 더 큰 것을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이레의 눈빛.
그것은 결코 포기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소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제가 훌륭한 투자처를 찾은 것 같습니다.”
***
겨울이 깊어질수록 해 길이가 점점 짧아졌다.
저녁이 되자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명선은 피곤한 얼굴로 집으로 들어섰다.
문 소원의 부름에 입궁했다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어린 계집종이 달려왔다.
“아가씨, 어째 이제 오십니까요? 아침부터 사랑채에서 찾아 계십니다요.”
명선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버님께서 무슨 일로?”
아버지가 직접 그녀를 찾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무슨 일일까?
명선은 서둘러 사랑채로 걸음을 옮겼다.
아비인 대제학은 여느 때처럼 서책을 읽고 있었다.
“아버님.”
“왔구나. 앉거라.”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선은 아비의 앞에 앉았다.
“시험은 어찌하고 있느냐?”
여식과 서탁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대제학은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 역시 아무 감정 없었다.
하지만 명선은 알고 있었다.
무욕(無慾), 무심(無心).
목석 같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녀의 아비는 기실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욕망을 품고 있었다.
눈치 없고, 세속의 일에도 관심 없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그런 사람이 어찌 대제학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모두 가식이었다.
모략과 음모가 판치는 권력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
명선은 아비의 이중적인 민낯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식의 대답에 대제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간택이 코앞이다. 세손빈이 되려면 이후에도 배우고 익혀야 할 일이 산더미 같으니. 한시도 방심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대제학은 삼간택을 입에 올렸다.
아직 재간택의 시험을 치르는 와중이었건만.
대제학은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넘기고 있는 서책은 정말 읽고 있는 걸까?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아무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방심할까.
탁.
대제학이 보던 책을 접었다.
“요즘, 문 소원을 만난다고?”
무심한 눈이 명선을 향했다.
“이따금 만나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문 소원뿐만 아니라 화완 옹주께도 인사 올렸습니다.”
대제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화완옹주라…….”
명선이 아비의 눈치를 살폈다.
“무에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근자에 소원 문 씨와 화완 옹주가 어울러 여러 일을 함께 도모한다는 소문이 자자하구나.”
“우리 가문에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찌감치 문 소원에게 연줄을 댄 것은 대제학이었다.
그녀가 건강한 사내아이만 출산한다면 불안한 정국을 단숨에 휘어잡을 든든한 뒷배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문 소원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비천한 출신으로 인해 지지하는 기반이 너무 미약했다.
그런 그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화완 옹주와 결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리라.
“문 소원과 화완 옹주의 결탁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나, 실상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지금은 손을 맞잡았어도 곧 사달이 날 것이야.”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욕심.”
“…….”
“두 사람 모두 욕심이 많은 까닭이다. 산 하나에 맹수가 여럿일 순 없는 법이니라.”
대제학은 다시 서책을 들었다.
“내가 왜 문 소원처럼 비천한 여인과 손을 잡았는지 아느냐?”
“당연히 문 소원에게 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다 기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옳게 보았다. 그러나 명심해라. 나는 결코 문 소원이 사내아이를 낳길 원하진 않는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아라. 소원 문씨가 사내아이를 생산한다면, 그로 인해 왕실에 큰 변화가 일어날 터. 그리된다면 지금의 세자 저하와 세손은 어찌 되겠느냐? 장차 세손빈이 될 너는 또 어찌 되겠느냐?”
“그건…….”
명선은 당황했다.
지금껏 든든한 뒷배라 생각한 문 소원이 알고 보니 장차 가장 큰 적이 될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아버님께선 왜 하필 문 소원과 손을 잡으신 겁니까?”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선 때때로 작은 적과 손잡는 법도 알아야 한다. 네가 세손빈이 되는데 문 소원이 많은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느니.”
대제학의 입가에 웃음이 달렸다.
“내 예상대로 문 소원은 널 세손빈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더냐?”
명선은 오랫동안 의아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문 소원은 왜 저를 세손빈 자리에 올리는 데 힘을 쓰는 걸까요? 왕의 후궁과 세손빈의 관계란 그리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아닙니까.”
“적의 동정을 살피고 싶은 게지. 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을 세손빈 자리에 올린다면, 장차 세자와 세손의 동정을 한 눈에 살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럼…….”
미처 짐작하지 못한 문 소원의 속내.
명선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낱 미천한 궁녀 출신이라 무시했던 문 소원이 아니던가.
그런 계집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 판단할 만큼 자신이 어리숙해 보였단 말인가?
적당히 이용하다 버릴 생각이었건만.
지금 보니 이용당하는 쪽은 문 소원이 아닌 명선 자신이었다.
“아버님,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라도 문 소원과 관계를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네?”
“모두가 간단한 이치를 잊고 있어. 왜 다들 문씨가 아들을 낳을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이냐? 딸을 낳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대제학의 말이 옳았다.
문 소원의 아이가 사내라는 가능성이 절반이라면 여아를 낳을 가능성 역시 절반이었다.
만약, 딸을 낳는다면…….
지금까지 문 소원이 계획했던 모든 야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리라.
하지만 정작 그때의 명선은 이미 세손빈이 되어 단단하게 기반을 다지고 있을 터.
“하지만 정말로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전 어찌해야 합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다. 넌 그저 적당히 이용당하는 척하며 역으로 이용하면 될 것이야.”
“아버님의 말씀, 가슴에 담겠습니다.”
“명심해라. 후궁 문 씨와 너무 가까워도 아니 되고, 너무 멀어서도 아니 된다. 알겠느냐?”
“……네.”
명선은 아비가 자신을 두고 도박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대제학의 머릿속엔 문 소원이 낳을 사내아이 같은 건 없었다.
마치 문 소원이 철석같이 아들을 낳을 거라 확신하듯, 아비 역시 문 씨의 소생을 여아라 확신했다.
아비의 비정한 계획에 명선은 한기를 느꼈다.
그럼에도 감히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과 야망 또한 아비의 뜻과 일치하였던 까닭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밤이 늦었구나. 그만 쉬어라.”
명선은 사랑채를 나섰다.
문 소원의 욕망과 아비의 계획.
서로 물고 물리는 권력의 복잡한 이해관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소원 문 씨의 아이가 태어나는 날, 이 나라 조선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서늘한 미래를 예감하며 명선은 댓돌 위에 벗어둔 신을 신었다.
그때였다.
“아야.”
갑작스러운 고통.
명선은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낮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왼쪽 발등에서 진득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린 계집종이 놀라 토끼 눈을 했다.
“아가씨, 왜 그러셔요?”
“아무것도 아니다.”
명선은 아비가 있는 사랑채의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대제학은 밖의 소란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수선 떨지 말라는 듯 계집종을 향해 눈빛을 세웠다.
그러곤 서둘러 제 방으로 돌아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몇 번이나 확인한 명선이 왼쪽 버선을 벗었다.
내내 버선에 옥죄인 왼발이 드러났다.
“이런…….”
왼발의 엄지발가락과 발등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난번 금정이 숯 단지를 놓았을 때 생긴 상처였다.
달아오른 숯이 자신에게도 날아들 줄 상상이나 했을까.
“처음엔 손톱만 하던 것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명선이 입은 화상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흔적이 두어 개 생겼을 뿐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흉 하나 없이 사라질 그런 상처.
한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화상이 좀처럼 낫지 않았다.
덧나길 반복하더니 엊그제부턴 퉁퉁 부어올랐다.
명선은 비단 손수건으로 상처를 꾹 눌렀다.
손수건에 누런 고름이 배어 나왔다.
뜨끔한 고통으로 머릿속이 송연했다.
명선은 잇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얼마 안 남았어. 그러니 며칠만 참자. 며칠만 참으면 돼.”
유경은 자격을 잃었고, 이레는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명선은 조심조심 버선을 다시 신었다.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버선에 쓸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난 세손빈이 될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며칠만 버티면 그토록 바라던 세손빈의 자리가 자신의 품으로 들어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