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79화 (79/215)

#79. 만사여의 (中)

담벼락 위로 굼실거리는 겨울 햇살이 내려앉았다.

별채를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이레의 얼굴을 사납게 때렸다.

느닷없는 한기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댓돌 위에 얌전히 놓인 신을 신었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선명했다.

지난밤, 형운이 다녀갔다는 증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비를 찾아 마당을 쓸며 이레는 형운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네가 만사여의를 어찌 아느냐?”

“만사여의를 아십니까?”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몇 번 이야기를 들었을 뿐. 한데, 그 사람을 왜 찾느냐?”

“이번에 못쓰게 된 옷감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옷감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운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은백께선 그 여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은 모른다.”

“그럼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

이레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분의 행방을 찾게 되면 제게도 꼭 알려주십시오.”

형운은 이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다.”

뜻밖의 거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레는 의문을 떠올렸다.

“왜 싫으십니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넌 틀림없이 만사 제쳐 두고 달려갈 테니까.”

“…….”

“아니냐?”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그럴 셈속이었다.

그 속내를 뻔히 알고 있었던 터라.

형운은 알려주지 않노라 대답한 것이다.

실종된 제 오라비를 찾겠다고 남장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홀로 먼 길 떠나는 것도 마다치 않았던 여인이 아니던가.

“만사여의에 대해선 내가 알아보마.”

“…….”

“그러니 괜한 마음 품지 말고 기다려라. 절대 허튼짓하면 아니 된다.”

*

“죄송합니다. 은백.”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엔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형운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집을 나섰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안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양덕당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실망한 것은 비단 형조판서의 집안만이 아니었다.

한껏 들떴던 이레의 문중도 이만저만 낙심한 것이 아니었다.

옷감이 손상되어 시험을 치를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까닭이다.

상황을 의논하기 위해 문중은 아버지를 부르셨다.

간밤에 큰댁으로 걸음 하신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

이 와중에 외출을 청한다면 할머니께서 허락해 주실까?

고민하던 이레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문밖을 나섰다.

“할머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저만 들리도록 작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 다음 가능한 한 소리 나지 않도록 나무문을 밀었다.

삐그그극.

나무문은 눈치 없이 오래된 비명을 흘렸다.

행여 누가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이레는 살금살금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안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아.”

참고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냈다.

바로 그때.

“어딜 가시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레 놀란 이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짓궂은 표정의 사내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협?”

경직되었던 이레의 안색이 풀어졌다.

“오랜만이오. 은랑.”

은협, 서강율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은협께서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서강율은 짐짓 심각한 눈빛을 했다.

“양덕당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다오. 우리 은랑이 큰일을 겪었다 하니. 내 어찌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소.”

“위로의 말을 전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입니다.”

“나이가 들면 아침잠이 주는 법이오.”

“아침잠이 준 것이 아니라, 아예 안 주무신 건 아닙니까?”

“내가 그리 성실한 사람으로 보이시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이런 시간에 만나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혹…….”

이레는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전처럼 절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닙니까?”

“하하. 난 그저 지금까지 은랑이 한 행동을 되짚어 생각한 것일 뿐이오. 내가 아는 은랑이라면 이런 일을 가만 지켜보기만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소.”

이레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겉으론 게으르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듯 보였지만 실은 남의 속을 제 손금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데, 은랑. 어디 가는 중이었소?”

“…….”

은협에겐 말해도 될까?

“말해 보시오.”

“제가 속마음을 말했습니까?”

“얼굴에 빤히 보이오.”

이레는 마른세수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서둘러 지웠다.

풋, 서강율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은 속일 수 없었다.

결국 이레는 포기한 채 행선지를 밝혔다.

“만사여의라는 사람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만사여의라…….”

“아십니까?”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다오.”

“은협께서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군요.”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조선 팔도 안 다닌 곳 없이 두루 다니고, 이름 좀 알려진 사람 중에 안 만나 본 사람이 딱 열 하고 한 명인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만사여의라오.”

애매하게 많은 숫자 열한 명.

“표정이 왜 그렇소?”

“……아닙니다. 아무튼 은협께서도 모르신다니 아쉽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오. 한데, 은랑은 만사여의를 어찌 찾을 생각이었소? 듣자 하니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던데.”

“강현보란 사람에게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

“강현보라면…… 팽례?”

“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서강율은 손뼉을 마주치며 탄성을 흘렸다.

“팽례라. 참으로 묘안이오. 서신을 전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누군가를 찾는 일도 당연히 잘하겠구려.”

“그 사람이라면 만사여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생각이오. 하나, 이번만큼은 팽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소.”

이레는 서강율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서강율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만 믿고 따라오시오.”

***

“그래서 날 찾아왔단 말이냐?”

물어보는 은호, 장무열의 목소리에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서강율은 어색한 분위기를 호탕한 웃음으로 털어냈다.

“하하하, 감추지 말게.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 없어. 사람 찾는 일엔 독종, 그대가 천하에서 제일이 아닌가.”

칭찬인 듯싶어 듣다 보면 욕 같기도 하고.

욕 같아 화를 내기엔 칭찬인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장무열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레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장 장령님을 찾아올 줄이야.’

사실, 조금은 기대했었다.

서강율이 워낙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기에 숨겨둔 한 수가 있는 줄 알았다.

면사를 씌워주고 은자원으로 향할 때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서강율의 선택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서강율의 뒤를 쫓았던 유일한 사람.

바로 장무열이었다.

그러기에 이를 갈면서도 서강율은 장무열을 인정했다.

문제는…….

“내가 왜 혼인을 약조한 여인의 재간택을 도와야 한단 말이냐?”

이레는 말간 시선으로 장무열을 응시했다.

장무열이 이레에게 혼인을 청한 일은 사실이다.

그러나…….

‘혼약한 적 없습니다만.’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무열은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로 서강율의 뻔뻔한 대답이 들려왔다.

“천하에 오직 독종,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고 싶지 않다.”

“어허,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란 말이다. 큰일 앞에서 관인이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는가.”

“관인이기 이전에 나도 사람이고 사내다. 무슨 핑계를 댄다 해도 협조할 생각 없다.”

“그러지 말고 협조해주게. 우리가 어디 남인가?”

“남이 아니면?”

은협이 쥘부채를 펼치며 눈웃음을 쳤다.

“우린 은자원의 은자 아닌가. 동료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안 그런가?”

“너와 동료가 될 생각 없다.”

“어찌 이리 매정한가? 내, 이렇게 부탁하네.”

“남의 손 함부로 잡지 마라.”

“이리 손도 잡고 부대끼다 보면 매정한 사이도 다정한 사이가 되는 법이지. 어떤가? 정녕 아니 되겠는가?”

“싫다고 말했다.”

두 사내의 대치가 이어졌다.

보다 못한 이레가 서강율을 말렸다.

“은협, 은호께서 곤란해 하지 않습니까. 그만하십시오.”

이레는 장무열에게도 사죄했다.

“일을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레는 서강율을 끌고 은자원을 나가려 했다.

“잠깐.”

장무열의 목소리가 이레의 발을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어딜 가는 것이오?”

이레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은협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걸 몰라서 묻는가? 당연히 만사여의를 찾으러 가는 길이지.”

“만사여의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찾는단 말이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한양 구석구석을 다 뒤지고 다녀야지.”

“마음만으로 될 일이 아니오.”

“그건 자네가 우리 은랑을 몰라서 하는 말일세. 우리 은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불굴의…….”

“네게 묻지 않았다.”

장무열은 서강율의 말허리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레를 바라보았다.

“은랑, 그대가 대답해주시오. 꼭 만사여의를 만나야겠소?”

이레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

“네.”

“…….”

정적이 흘렀다.

부산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떨쳐 내며 장무열은 몸을 일으켰다.

서강율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봐, 독종. 뭘 하나?”

장무열은 대꾸하지 않았다.

횃대에 걸어두었던 두루마기와 답호를 겹쳐 입고, 갓을 바로 썼다.

그리고 은자원을 뚜벅뚜벅 나섰다.

문득 그가 이레를 돌아보았다.

“뭐 하시오? 갑시다.”

장무열은 얼굴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만사여의가 있는 곳, 내가 안내하겠소.”

***

한양에서 가장 사람이 많고 가장 번화한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첫손에 육의전이 들어선 운종가를 꼽을 것이다.

한양의 운종가.

온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화려한 시전.

그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좁은 골목이 나온다.

높은 담, 낮은 지붕의 가옥들로 이루어진 골목.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 어귀마다 다양한 소리와 냄새들이 저마다 판을 벌였다.

가죽을 두드려 펴는 소리.

옷감 짜는 베틀 소리, 빨래 치대는 소리.

깡깡, 마른 쇠망치 내리치는 소리와 대장간 풀무 소리.

험한 욕지기.

까르르 간드러진 웃음소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쓰임을 짐작하기 어려운 쇠뭉치와 나무를 옮기는 사내들.

연신 땀을 훔치며 솥을 들여다보는 아낙네들.

담을 넘어온 다양한 소음과 냄새가 좁은 골목길을 두드리고, 내달리고, 뒹굴었다.

그런 뒷골목으로 세 사람이 들어섰다.

“한양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이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공방들이 있는 곳이오. 값비싼 비단부터 헐값에 파는 돗자리에 이르기까지. 시전에서 파는 다양한 물건들 대부분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오.”

서강율은 이레에게 공방거리를 설명했다.

그러다 앞서 걷는 장무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이곳에 만사여의가 있단 말이냐?”

제법 친근한 말투.

나긋한 물음이었건만, 장무열은 고갯짓 한 번 하지 않았다.

“사람 참 뻣뻣하기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서강율은 이레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깜빡깜빡 요란한 눈짓을 보냈다.

바라는 바는 뻔했다.

‘나 대신 물어봐 주시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럼, 이대로 정처 없이 끌려다니기만 할 생각이오?’

서강율의 재촉에 이레는 하는 수 없이 장무열에게 눈을 돌렸다.

은자원을 나선 이후, 장무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문득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무슨 생각으로 앞장선 것일까?

서강율이 간청했을 때 그리 단호히 거절하지 않았던가.

공무도 아니고, 의리는 더더욱 아닐 텐데.

이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 만사여의가 있는지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장무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2년 전, 한양에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소.”

서강율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당연히 만사여의에 관한 소문이었겠군.”

장무열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나이도 출신도 알 수 없는 여인이 사내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시전의 상가들을 하나둘 차지한단 소문이었소.”

“예나 지금이나 시전은 큰 이득이 오가는 곳이라. 자연 조선 팔도의 힘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곳에 한 다리 걸치고 싶어 안달했지. 그런 험한 바닥에서 여인이 이만한 위업을 달성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

사람이 모이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자연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그 내면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꿈틀거렸다.

욕망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잔혹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

시전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서강율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험한 곳에 여인이 나타났으니, 다들 놀랄 수밖에. 처음엔 잠깐 반짝하고 말겠지 했는데, 이게 웬걸. 놀라운 수완과 탁월한 안목으로 순식간에 시전상가의 삼 할을 차지하였소. 허, 그 소문을 들었을 땐 정말 대단한 여걸이 나타났다 하였지.”

한바탕 너스레를 떨던 서강율이 장무열에게 물었다.

“그런데 독종, 넌 어쩌다 만사여의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

“…….”

장무열은 이번에도 그의 질문을 무시했다.

결국, 서강율의 눈짓을 받은 이레가 같은 질문을 다시 한 후에야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소.”

“호기심요?”

“순식간에 시전의 상권 일부를 장악한 여인.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였소.”

“그래서 만나보셨습니까?”

장무열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노력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소.”

믿을 수 없다는 듯 서강율이 소리쳤다.

“너처럼 독하고 끈질긴 놈도 결국 만나지 못했단 말이냐?”

“만사여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지만, 정작 그 사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소. 이름, 나이, 출신.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소.”

장무열의 설명에 서강율은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그리고 이레에게 소곤거렸다.

“은랑, 그만 돌아갑시다. 아무래도 저 독종도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오.”

이레는 서강율의 말을 무시한 채 장무열에게 물었다.

“정말 만사여의에 관해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였습니까?”

“만사여의 본인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소.”

서강율이 다시 귓속말을 해왔다.

“모른다 하는데 무얼 자꾸 물어보시오. 저 사람도 자존심이 있으니, 그만 물어보고 돌아갑시다. 오는 길에 보니 파전 냄새가 기가 막힌 곳이…….”

“만사여의 본인을 제외한 것이라면 어떻습니까? 가령, 만사여의는 만나지 못했지만, 만사여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던가요.”

장무열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기이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레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만사여의가 있는 곳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소.”

“그곳이 어딥니까?”

“저곳이오.”

장무열이 골목 끝을 턱짓했다.

“저곳…… 이라고요?”

장무열이 가리킨 곳은 전혀 뜻밖의 장소였다.

“저긴 비단 파는 곳이 아닌가?”

서강율의 놀란 음성이 이레의 마음을 대신했다.

“저곳에 만사여의가 있단 말인가?”

***

공방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입전 수월(水月)은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날개처럼 유연하게 휘어진 용마루, 연꽃처럼 펼쳐진 오색 처마, 여인의 속눈썹처럼 차분하게 내려앉은 기와.

화려한 지붕과 달리 그 아래에 위치한 단단한 벽체와 각지고 굵은 기둥은 웅장하고 진중하였다.

그 규모와 형태가 시전에 있는 다른 점포들은 초라해 보일 정도로 대단하였다.

“이런 곳에 저리 대단한 입전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공방거리 골목 끝에 위치한 휘황한 입전의 위용에 이레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입전을 뜻하는 편액이 아니라면, 고관대작들만 드나드는 기루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론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외진 곳까지 비단을 사러오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레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했다.

입전 문앞에선 중년 여인과 어린 소녀의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대체 왜 들여 보내주지 않는단 말이냐?”

중년 여인이 소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여인의 입성이 범상치 않았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진주가 박힌 금비녀.

산호와 금으로 치장한 삼작노리개와 손가락에 끼고 있는 가락지 역시나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 그뿐일까?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를 정교하게 수놓은 붉은 치마, 그리고 비상하는 새가 수 놓인 저고리는 옷이 아니라 한 폭의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여인이 입고, 걸치고, 치장한 모든 것이 장인의 손을 통해 탄생한 명품(名品)이 분명했다.

그러나 여인의 언행은 대단한 입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소녀를 향한 여인의 눈빛엔 분노와 성화가 가득했다.

윽박지르는 목소리엔 앙칼진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송구하오나, 허락된 분이 아니면 들일 수 없습니다.”

“허락?”

중년의 입꼬리가 뒤틀었다.

그녀는 묵직한 전낭을 소녀의 발밑에 툭 던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전낭의 입구가 열리며 촤르륵 엽전이 흘러나왔다.

“사계 노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이곳에 들어가는데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몰라도 그 전낭 속에 든 것을 보면 마음이 바뀔 것이다.”

소녀는 조용히 땅에 떨어진 전낭을 들었다.

“백스물다섯 냥.”

“무어? 어떻게…….”

소녀는 일일이 세보지 않고도 전낭 안의 금액을 정확히 맞췄다.

중년 여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송구합니다만, 이 정도 돈으로 자격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 돈이…… 적다고?”

“부족합니다.”

여인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간신이 평정을 되찾은 여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좋다. 그럼, 얼마면 되겠느냐?”

“그 전낭에 든 금액의 열 배 정도가 필요합니다.”

소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중년 여인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너, 그게 얼마나 큰 액수인 줄이나 알고 주둥이를 놀리느냐?”

“일천이백오십 냥입니다.”

“고작 옷 한 벌에 그게 가당키나 한 돈이더냐?”

“옷 한 벌의 값이 아니라, 그분을 뵙는 데 드는 금액입니다.”

“네년이 미쳤구나.”

“송구하옵니다.”

“너, 내가 뉘인지 아느냐? 우리 서방님이 아시는 날엔 이런 점포 하나쯤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그때가 되어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길을 비켜라.”

“송구하옵니다.”

“이름 좀 알려져 유명세를 치르더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가 보구나. 이제는 하다하다 잔심부름이나 하는 미천한 것까지 당돌하게 구니. 네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당장 나오라 해라!”

중년 여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녀는 더는 대거리조차 하지 않았다.

“네년이 나를 무시해? 감히 천한 것이 어디서!”

제 성화에 못 이긴 여인은 기어이 소녀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어떻게든 화풀이를 하려는 심산이었다.

순간, 점포 안에서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어느 사이 무사들에게 빙 둘러싸인 여인은 그제야 조용해졌다.

“어디 두고 보자. 여기서 계속 장사할 수 있는지. 내 서방님께 아뢰어 이 망할 놈의 점포를 조각조각 내고 말 것이야.”

중년 여인은 이를 갈며 물러갔다.

소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배웅했다.

***

이레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장무열에게 시선을 던졌다.

“혹시 만사여의의 뒤를 캐지 못한 이유가…….”

장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간신히 만사여의와 연결되는 곳을 찾았으나, 저곳을 들어갈 수가 없었소.”

서강율이 끈질기고 독종이라며 혀를 내둘렀던 장무열조차도 만사여의를 뒤쫓는 데 실패한 원인.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장무열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월은 한양의 모든 입전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이오. 모든 여인들이 수월을 구경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못한다 들었소.”

값비싼 비단을 파는 입전, 수월은 철저하게 사람을 가려 받았다.

또한 비단을 취급하는 점포이기에 사내가 발을 들이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어찌한다?’

만사여의와 연결되는 단서를 발견했지만, 정작 그곳에 발을 들일 방법이 없었다.

“은랑, 무얼 그리 걱정하시오? 내가 있는데 말이오.”

서강율이 부채를 팔랑팔랑 부치며 자신만만하게 수월로 향했다.

‘그래, 은협이 계셨구나.’

세 치 혀로 세상을 희롱할 수 있는 위인.

단양.

그 낯선 곳에서도 관청의 관인들은 물론 마을 백성 모두를 수발들게 한 사람이 바로 서강율이었다.

‘은협이라면…….’

이레는 가슴에 작은 기대가 돋아났다.

잠시 후.

서강율이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실패했소.”

“돈이 없으면 안 된다 합니까?”

서강율은 고개를 저었다.

“명단에 이름이 없어 안 된다 합디다. 그래서 전략을 바꿔 나의 이 황홀한 미모로 소녀를 유혹해보려 하였는데…….”

“사내에게 관심이 없다 합니까?”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소.”

“그럼, 나이 차가 많아 싫다 합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소.”

“하면…….”

서강율이 원망스런 눈으로 부채를 노려보았다.

“한겨울에 부채라. 송구하다 하더이다.”

“…….”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만 돌아갑시다.”

복귀를 주장하는 서강율은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이레는 입전 앞을 지키고 있는 소녀를 건너다보았다.

“제가 한번 부탁해 보겠습니다.”

“소용없을 것이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말 한마디 붙여보지 않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말리는 서강율을 뿌리친 채 이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보십시오.”

이레의 부름에 소녀가 반응을 보였다.

“비단을 보러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소녀는 찬찬한 눈빛으로 이레를 살폈다.

“누굴 만나고 싶으십니까?”

“이 비단 점포의 주인을 뵙고 싶습니다.”

소녀가 눈가를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게 여몄다.

“주인께선 아니 계십니다.”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는데. 언제쯤이면 돌아오실까요?”

“글쎄요. 오늘 오실 수도 있고, 내일 오실 수도 있습니다. 어느 땐 열흘에 한 번씩 오시기도 하지요.”

“그래요?”

“대신 비단은 마음껏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네?”

느닷없는 말에 이레는 어리둥절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믿기지 않아 이레는 재차 물었다.

바로 직전, 중년 여인과 실랑이하던 소녀의 모습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월의 문을 열었다.

상황이 어쩌다 이리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디냐 싶은 마음에 이레는 서둘러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뒤를 쫓아 장무열과 서강율이 따라 나섰다.

소녀가 두 사내의 앞을 막았다.

“송구하오나, 사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의 옷을 만들려면 많은 일이 벌어진답니다. 예를 들면 정확한 치수를 재기 위해서는 옷을 벗기도 하고…….”

슬쩍 두 사내의 반응을 살피던 소녀가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장무열은 물러서지 않았다.

서강율 역시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힘들겠지만, 한번 감당해 보겠소.”

소녀가 예의 얼굴 가득 해사한 미소 지어 보였다.

“송구합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사들이 장무열과 서강율의 앞을 막아섰다.

그사이 소녀는 문 안으로 사라졌다.

소녀와 이레를 삼킨 문은 이내 안으로 굳게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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