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77화 (77/215)

#77. 상흔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소복소복 쌓인 눈의 희고 청량한 정취가 좋았다.

동궁전으로 향하던 형운은 그 새하얀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눈 내리는 광경일랑 수없이 많이 봤건만.

오늘따라 새롭게 느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으로 눈 다져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 또한 새삼스러웠다.

어찌 된 연유일까?

눈을 보는 것도, 그 시린 기운을 밟는 것도 처음이 아닌 것을.

무엇이 이리 새로운 것일까?

어찌하여 이토록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불현듯 그 이유가 떠올랐다.

그날이었구나.

하얀 숨결과 함께 나눈 작은 속삭임.

각오가 확신으로 변하고, 바람이 믿음으로 굳어진 날.

‘그래, 첫눈 내리던 날이었구나.’

이레와 함께 거닐자 약조한 날.

그날도 지금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처럼 마음이 들뜨는구나.’

형운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른 눈이 그의 발길에 단단하게 다져졌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 곧 탕약 냄새 진동하는 동궁전에 이르렀다.

“무슨 일이냐?”

세손의 이른 방문에 세자는 무뚝뚝한 반응을 보였다.

“밤새 강녕하시었사옵니까.”

절을 올리려는 형운을 향해 세자가 손을 들었다.

“쓸데없는 예의는 그쯤 하면 되었다.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 보아라.”

“소자, 진실로 순수한 뜻으로…….”

“여인이냐?”

“아직 정진하고 노력하여야 할 공부가 산처럼 쌓여 있음이니, 제가 감히…….”

“누구더냐?”

“간택이 진행 중입니다.”

“경기관찰사의 여식 이름이 뭐라 하였더라.”

“전 오로지 종묘와 사직을…….”

“그래, 이레. 이레라고 하였지?”

“…….”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냐?”

넘겨짚는 세자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형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바마마께선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시다.

남의 사정 따윈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니.

“대답이 없구나. 왜? 아니더냐. 하긴 세손인 네 입장으로 누구 한 사람에게 관심을 표명할 수는 없겠지. 그리하면 궁내의 많은 입들이…….”

세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갈 때였다.

“옳습니다.”

형운의 짧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른하게 보료에 기대고 앉은 세자가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아바마마께서 짐작하신 내용에 틀림이 없사옵니다.”

세자는 아들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내 짐작이 맞다?”

“경기관찰사댁의 아가씨. 이레 낭자를 마음에 품었사옵니다.”

예상치 못한 형운의 대답에 세자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놀람은 이내 너털웃음으로 변했다.

“허허허, 내 아들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내 미처 몰랐느니.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당혹스럽기까지 하구나. 그래,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그리 마음에 들었느냐?”

“소자, 이날까지 이토록 절실하게 소망하였던 일이 없사옵니다.”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고백.

아비는 즐거웠다.

좀처럼 변하지 않던 아들이 드디어 마음을 드러냈다.

영민하고 고집도 남다른 아이.

오래도록 머문 굴레를 떨치고 제 발로 걷길 결심하였으니, 긴 시간 참고 인내한 만큼 그 기세 또한 남과 다르리라.

또한, 그런 변화는 세자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것이었다.

세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참으로 이상하고 괴이한 날이로다. 언제나 시키는 대로 잠자코 따르기만 하던 세손이 제 원하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모자라 떼까지 쓰는구나.”

“소자가 어찌 아바마마께 떼를 쓰겠나이까?”

“하면, 절실하게 소망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연유더냐?”

“거듭 물으시니, 다만 제 마음 향하는 곳을 밝혔을 따름이옵니다.”

“그게 강요가 아니고 무엇이냐? 네 마음이 어디에 있음인지 훤히 알게 되었는데, 어찌 다른 여인을 권할 수 있겠느냐?”

“…….”

형운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세자는 웃음 섞인 탄식을 흘렸다.

“망가졌구나. 틀어지고 말았어. 은자원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 철부지 애송이 녀석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보고 배우라 하였더니,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음양의 조화나 탐구하고 있었어. 참으로 몹쓸 녀석이로다.”

“저에게 틀을 깨고 나아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온종일 서책만 붙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바깥바람이나 쐬라 한 것이다. 내가 언제 연애놀음에 빠지라 했느냐? 근래 재간택 시험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요구가 많더니. 지금 보니 제가 점 찍은 여인을 위함이었구나.”

“하오면 아바마마께선 달리 점찍어 둔 간택인이 있사옵니까?”

세손의 물음에 세자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

형운이 긴장하여 물었다.

“누구이옵니까?”

“경기관찰사의 여식.”

모처럼 부자의 뜻이 일치하였다.

아비를 닮은 미소가 형운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소자, 아바마마께서 제 청을 들어주신다 하니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능구렁이 다 됐구나. 어림도 없다. 네 녀석의 청 들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재간택 시험이 치러지는 약덩당에 동궁전 소속 내관들이 파견되었다 들었습니다.”

“오해하고 있구나. 너의 청을 듣고 그리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 변덕으로 그리한 것일 뿐이니.”

“소자. 아바마마의 은혜, 기쁘게 받겠사옵니다.”

“고약하구나. 굽은 날개가 조금 펴졌다고, 벌써 내 머리 위를 날려 드느냐? 아서라, 고작해야 어설픈 연계인 것을.”

묵묵히 듣던 형운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무슨 말이냐?”

“제게 연계라 하시질 않으셨나이까?”

‘연계’란 부름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세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디 연계라고만 불렀느냐. 애송이, 철부지, 능구렁이라는 말은 왜 빼놓느냐?”

“……아닙니다.”

“실없는 녀석. 할 말 끝냈으면 그만 가거라. 좁은 곳에 시커먼 녀석과 함께 있으니, 답답하구나.”

세자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형운은 절을 하고 물러났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눈이 그쳤다.

동궁전을 나서는 형운의 발걸음은 들어설 때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아바마마께서 이레를 마음에 두고 있다 하시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이미 웃궐에선 대제학의 여식을 세손빈으로 낙점하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곁자리였다.

그 자리에 이레 아닌 다른 여인은 싫었다.

그렇다고 감히 주상전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그런 형운에겐 세자만이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물론 간택이 누구 한 사람의 의지로 결정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바마마께서 뜻을 세우셨으니, 적어도 평가의 공정함만은 잃지 않으리라.

‘이레야.’

그대가 내게 오기까지 불과 한 걸음 남았다.

그 한 걸음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

험난한 길이 될 테지.

다만, 그대 혼자 그 길 걷지 않게 하겠다.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내 어깨에 기대어 쉴 수 있게…….

그대의 든든한 동행이 될 것이다.

‘그러니 조심조심 내 곁에 오려무나.’

형운은 눈 그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빛이 그를 감싸 안았다.

***

이레는 대바구니 안의 고치를 살폈다.

늦은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서향각에서 가져온 누에고치는 상태가 좋았다.

현의를 만드는 순인 갑사는 날실은 생사로, 그리고 씨실은 정련사로 짜여 있었다.

그러기에 현의에 쓰이는 실 역시 생사와 정련사를 합쳐 만들어야 했다.

이레는 삶지 않은 고치에서 생사를 뽑아냈다.

그다음 고치를 삶아 불순물을 제거한 뒤 정련한 실을 뽑았다.

금정이 이레의 곁에서 매 순간 조언을 건넸다.

워낙에 규칙이 엄중한 시험인지라.

옷은 물론이고 수자를 놓거나 실을 마련하는 과정 역시 다른 사람이 아닌, 간택인 본인이 직접 해야 했다.

금정은 그 곁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나르고, 필요한 도구를 미리 준비하여 일하는 손길이 멈추지 않도록 하였다.

덕분에 고치를 삶고, 실을 뽑고, 불필요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순탄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레가 충분한 양의 실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탈진 언덕을 미끄러지고 있을 때였다.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금정은 자아낸 실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실은 확보되었구나. 하지만 이대로 쓸 수는 없겠지?”

이레의 물음에 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염색을 하여야 하고, 촛물도 입혀야 합니다.”

“서두르자꾸나.”

“준비해 두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레는 금정의 도움을 받아 실을 염색하고, 실이 엉키거나 끊어지지 않게 촛물을 입혔다.

어느새 서쪽 창으로 붉은 황혼이 새어들었다.

“이제 양초 먹인 실을 종이에 감싸고 다림질만 하면 됩니다.”

금정의 말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어려운 과정이 모두 끝났다.

노력 끝에 간신히 마련한 실을 보니 뿌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 거의 다 왔구나. 금정아, 네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야.”

“모두 아가씨께서 애쓰신 덕분입니다.”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이레는 금정의 손을 맞잡았다.

자상한 말과 손길에 금정은 발갛게 물든 고개를 푹 숙였다.

“에구머니, 내 정신 좀 봐.”

“왜?”

“촛물을 빼려면 달군 숯이 필요한 것을 깜빡 잊었지 뭡니까.”

금정은 숯을 마련해오겠다며 양덕당 뒤꼍으로 달아나듯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이레를 불렀다.

“언니.”

“유경이구나.”

유경이 한달음에 쪼르르 다가왔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실에 문제가 있어 새로 만들었다고요? 어디 좀 보아요.”

이레는 촛물 입힌 실을 유경에게 건넸다.

꼼꼼히 살핀 유경이 화난 표정으로 이레를 돌아보았다.

“언니, 정말 너무 해요.”

“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이런 일이 있었으면 제게 귀띔을 주셨어야죠. 제 실을 나눠 썼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유경은 뒤늦게 이레의 사정을 알게 된 게 속상했다.

양덕당이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간택인들 사이에는 작은 교류도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았고, 저마다 느끼는 중압감과 긴장감에 다른 곳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시험의 규칙상 다른 간택인의 실을 나눠 쓸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듣자하니 서향각, 그 끔찍한 곳에 다시 가셨다면서요?”

그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듯 유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천 마리의 벌레로 가득한 그곳은 유경에겐 악몽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이상한 곳은 아니야.”

서향각을 떠올린 이레는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곳에서 형운과 만난 일이…….

그와 나눈 속삭임과 입맞춤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이레의 달콤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유경은 여전히 볼멘소리를 냈다.

“다음엔 꼭 제게도 알려주셔야 해요.”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 말로만 대답하지 말고요. 저랑 약조해요.”

“꼭 그리하마.”

유경의 마음을 달래려 이레는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조했다.

그제야 유경은 굳은 표정을 풀었다.

“좋아요.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용서해 드릴게요.”

“다행이다. 이리 마음 풀어주니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잠시 저와 함께 있어 주시면 됩니다. 사실 그동안 언니와 수다 떨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거든요.”

유경이 수줍게 속삭였다.

이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유경의 다정한 성품 탓일까?

때때론 혈육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나도 너와 이렇게 대화하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구나.”

이레의 진심에 유경은 투명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보는 이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웃음.

긴장감이 흐르던 양덕당에 모처럼 화사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따뜻함도 찰나에 불과했다.

온화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자 한 번 좋구나. 한가하게 잡담할 여유도 있고.”

예의 표독스런 표정의 명선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명선은 이레가 만든 실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살폈다.

이내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호들갑 떨며 만든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느냐?”

이레보다 유경이 발끈했다.

“고작 이런 것이라니요. 직접 누에에게서 실을 뽑아낸 겁니다.”

“무에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요란을 떠는구나. 흥, 그깟 개나 소나 다 하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솜씨가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어디 한 번 시범이라도 보여주시지요.”

유경이 누에가 든 대바구니를 명선에게 내밀었다.

명선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되었다. 이런 유치한 짓거리, 나는 하지 않아.”

“유치한 짓거리라니요?”

“그렇지 않으냐. 이리 열심히 하는 모양새라도 보여주지 않으면 떨어질 것 같으니. 쓸데없는 짓거리를 벌인 것이지.”

“말씀이 과하십니다. 그럼 이레 언니가 일부러 실을 삭게 하여 다시 만들었단 말인가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혹 아느냐? 삼간택에 들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런 유치한 짓거리로 관심이라도 끌 심산인지.”

상황이 이쯤 되자, 이레 역시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도 안 되는 억측은 그만두시지요.”

“억측? 오호라. 운 좋게 재간택에 들더니 기세가 제법 대단하구나. 하나,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걸 말이다.”

유경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나섰다.

“일은 사람이 도모하여도,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 하였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과연 누구의 옷을 선택할지 자신하지 마시지요.”

“그걸 꼭 두고 봐야 알까?”

“당연히 두고 봐야지요. 뉘라서 주상 전하의 마음을 안단 말입니까.”

명선은 작게 혀를 찼다.

“쯧쯧,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거늘.”

그녀는 싸늘한 냉소를 날렸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기대하건, 마지막 발악을 하건, 나는 상관하지 않을 터이니. 그런데…….”

명선이 유경을 내려다보았다.

“네 어머니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더냐? 친구는 가려 사귀는 법이라고. 괜히 사나운 인생 곁에 알짱대다간 네 인생도 사나워질지 모른다고 말이다.”

마지막까지 악담을 날린 명선이 몸을 돌렸다.

명선의 뒤통수에 대고 혀를 날름 내민 유경은 이레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언니! 우리 꼭 제대로 된 옷을 지어요. 전 저 아가씨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꼭 보고야 말겠어요.”

유경의 진심이 느껴졌다.

간택이 시작된 이래, 유경만은 언제나 한마음이었다.

언제나 순수하고 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이레를 반겨주었다.

그 변함없는 모습이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웠다.

이레는 유경의 손을 한껏 그러잡았다.

“그래, 그러자꾸나.”

간택인들 사이에 오가던 치열한 신경전이 갈무리될 때쯤이었다.

벌겋게 달군 숯 단지를 들고 금정이 나타났다.

“아가씨, 숯입니다. 조심하셔요. 행여 델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큰소리로 경고한 금정이 조심조심 마루 위로 올라왔다.

때마침 명선이 금정의 곁을 지나쳤다.

바로 그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명선과 금정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금정이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앗!”

균형을 잃은 금정은 바로 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양덕당 대청마루 한가운데로 꼬꾸라졌다.

뎅그렁.

숯 단지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금정이 든 숯 단지가 엎어지며 뜨거운 숯이 사방으로 튀었다.

“언니!”

유경은 반사적으로 이레의 몸을 감쌌다.

“아아악!”

매운 냄새와 연기, 그리고 유경의 비명이 한데 뒤섞였다.

“유경아!”

이레는 유경의 몸에 묻은 숯을 황급히 털었다.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행여 유경이 다쳐선 안 된다.

아무 탈 없어야 한다.

재간택인에게 조금의 흉이라도 생겼다간 더는 시험에 참여할 수 없으리라.

아니, 재간택인이 아니더라도 유경은 아직 어렸다.

그런 유경의 몸에 흉터를 남게 할 순 없었다.

이레는 황급히 유경을 살폈다.

“……언니.”

“유경아. 괜찮아?”

유경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괜찮아요?”

“난 상관없어. 넌 어때? 어디 다친 데 있어?”

“모르겠어요.”

유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다리가…….”

유경이 제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붉은 비단 치마 한가운데에 숯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유경의 맨살이 드러났다.

“이걸, 이걸 어쩌면 좋으니.”

화상 입은 유경의 허벅지는 어느 사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놀란 이레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속상하고 미안함에 눈가가 붉어졌다.

이내 눈동자에 습윤한 막이 생겼다.

떨리는 음성으로 이레가 유경에게 물었다.

“왜, 왜 그랬어? 어쩌자고 날 보호해?”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숯이 날아드는 걸 본 순간…… 언니를 감싸 안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말을 하던 유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허벅지가 타는 듯이 뜨거움.

심약한 어린 여인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언니, 전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이레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말끔하게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언니, 언니 하며 먼저 말 걸어준 아이였다.

언제나 귀여운 동생 같았던 유경이 이레를 보호하다 상처 입었다.

이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가씨.”

최치성의 신음이 들려왔다.

탁자 위를 보는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숯은 사람에게만 상처를 낸 것이 아니었다.

탁자 위에 펼쳐둔 마름질 끝난 이레의 비단 조각.

그곳에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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