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열흘이면 돼?
그윽한 목소리가 어둠을 흔들었다.
“많이 놀랐소?”
할 수만 있다면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놀랐습니다, 그것도 많이.
어두운 구석에서 습격하듯 불쑥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커다란 손길에 입이 막혀 말은커녕, 비명조차 흘리지 못했다.
“이런, 내가 잘못하였소.”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사내는 이레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흐릿한 유등의 빛이 사내의 반듯한 옆얼굴에 부딪혔다.
부옇게 부서지는 빛 그림자에 그리운 얼굴이 담겼다.
도톰하고 반듯한 이마.
선명하고 가지런한 눈썹.
우뚝한 콧날과 사내다움이 물씬 느껴지는 턱선.
“은백.”
“이제 마음이 진정되오?”
나직한 속삭임에 잔상처럼 남은 한 줌의 두려움마저 흩어졌다.
“여긴…… 어찌 여기 계신 겁니까?”
놀란 탓일까?
물색없이 목소리가 잠겼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설렘이 들어찼다.
심장이 빠르게 맥동쳤다.
행여 제 속내를 형운에게 들킬세라.
이레는 흠흠, 괜스레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때 형운이 다시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웠다.
“쉿!”
“……?”
“누가 오고 있소.”
형운의 말에 이레는 귀를 쫑긋 세웠다.
문밖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금정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레는 떨리는 감정을 추슬렀다.
“괜찮네. 발밑이 어두워 조금 놀란 것뿐이니. 걱정 마시게.”
“제가 함께하올까요?”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이 조금 열렸다.
“아닐세. 이젠 괜찮네. 그러니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게.”
“알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부르십시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듯하니, 어디서 잠시 쉬다 와도 될걸세.”
“네, 아가씨.”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이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칫하였으면 형운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킬 뻔했다.
“잘했소.”
머리 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잠시 망각했던 현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작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그리고 누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마주 닿는 저 탄탄한 가슴의 실체를, 어깨를 그러잡은 커다란 손의 존재감을.
캄캄한 어둠 속에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숨소리가 어느 순간 어긋나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이 느려진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누구의 숨이 가파르게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지금 당장 어찌 행동해야 하는가였다.
“떠, 떨어져 주십시오.”
고심 끝에 이레가 내놓은 해답은 밀어내는 것.
형운은 호락호락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싫소.”
“왜 이러십니까?”
“두렵소.”
느닷없는 고백.
이레는 눈을 들어 형운을 응시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가 나는 두렵소. 이렇게 놓아버리면 금세 내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질까 봐.”
“……!”
형운의 잔잔한 대답에 심장이 요동쳤다.
마치 먼 거리를 힘껏 달린 사람처럼 이상하게 숨이 차올랐다.
이러다간 숨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찌 이러는 걸까?
무에 병이라도 걸린 걸까?
불안한 마음에 괜스레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이레의 목덜미로 후, 작은 숨결이 느껴졌다.
일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파문처럼 전신으로 번져가는 전율에 이레는 목을 움츠렸다.
그저 숨결이 닿았을 뿐이거늘, 이상스레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비단 숨결만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간질간질 가려움증이 일었다.
그 생경한 감촉에서 벗어나려 이레는 다시 한번 저항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어깨를 그러잡은 그의 악력은 거세어졌다.
“은백…… 아픕니다.”
저도 모르게 왈칵 미간이 일그러졌다.
형운의 얼굴에 머쓱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이레를 옭맨 결박이 느슨해졌다.
그녀를 끌어안은 탄탄한 가슴이 간격을 벌렸다.
형운의 커다란 손에 깃들었던 집요함 역시 꼬리를 만 채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만든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혔던 이레에게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상하게 서운했다.
무언가 놓아서는 안 될 것을 놓아버린 듯 아쉽고 허전했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이레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그대가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래선 아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었다오.”
이레의 뇌리로 최치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운에게 이레의 소식을 전할 사람, 최치성뿐이었다.
“위험합니다. 이런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였다간…….”
“…….”
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레를 가만 내려다볼 뿐.
그윽한 그 시선에 사로잡힌 듯 이레 역시 입을 닫았다.
잠실의 어둠 탓일까.
아니면, 외로이 어둠을 밝힌 유등의 위태로운 흔들림 때문일까.
오늘 밤의 형운은 여느 날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신중함과 과묵함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듯 그의 얼굴에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를 향한 걱정과 근심.
무사한 모습을 확인한 이후의 안도와 격정.
그리고 말로 표현 못 할 초조함과 조급증까지.
전에 없는 모습인지라.
이레는 걱정이 앞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이라면 내가 아니라 그대에게 있질 않소?”
형운의 눈동자에 슬픔과 탄식이 빗물처럼 고였다.
그는 이레에게 벌어진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별일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표정 하지 마십시오.
“미안하오.”
“어째서 은백께서 사과하시는 겁니까?”
“내게로 오라 하여 미안하오. 나 역시 예상하지 못했소. 내게로 오는 길이 이토록 험하고 사나울 줄은. 이런 줄 알았으면 내 그대에게…….”
차마 마음 아픈 뒷말을 하도록 지켜볼 순 없었다.
이레는 형운의 얼굴을 제 양손에 오롯이 담았다.
그러곤 말끔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형운의 검은 눈동자엔 작은 우주가 담겨 있었다.
생의 마지막을 사르며 명멸하는 하얀 별빛.
그리고 새롭게 탄생하는 생명이 잠겨 있었다.
그 찬란한 세계의 밑바닥.
어두운 구석에 홀로 신음하고 자책하는 웅크린 영혼이 보였다.
이레는 그에게 속삭였다.
그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 눈부신 광채와 그늘을 향해.
다독이듯, 달래듯, 어루만지듯…….
작게 속삭인다.
“홀로 걷는 길. 당신이 있어 제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르실 겁니다. 세상은 한없이 넓고, 무수한 것으로 가득하나 정작 저에겐 삭막하고 차갑고 비정한 곳이었습니다. 그 외로운 길에 당신이라는 동행이 생겨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은랑.”
“그간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하였습니다. 몸은 따뜻한 곳에 있으나, 마음은 언제나 공허하였습니다.”
“허면 지금은? 지금은 다르오?”
이레는 맑은 미소를 그렸다.
“네, 다릅니다. 가야 할 곳이 생겼으니까요.”
“그 길이 지극히 어둡고 험한데도 정녕 가려는 것이오?”
“어두운 그 길 끝에 언제나 당신이 계시니 두렵지 않습니다. 험한 길 너머에 당신께서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당신께서 내리신 시련이 아니니, 부디 스스로를 탓하지 마십시오.”
다정한 속삭임.
형운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달빛을 향해 내달린 들짐승처럼.
심장이 들뛰었다.
“은랑…….”
이레가 미소 지었다.
“아직도 그리 부르십니까?”
“그럼, 무어라 불러야 하오?”
“제 이름은 이레입니다.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본 제게 의원이 말했다지요. 앞으로 이 아인, 이레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하여, 할아버지가 이레만 버티라는 의미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처음 이레를 버티고, 다시 또 이레를 버티고, 그다음 이레를 버티라는 염원을 담은 이름입니다.”
“그런 의미가 있었구려.”
“그러니 은백, 은자원이 아닌 다른 곳에선 은랑이 아닌 제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그러면…….”
그 이름 대로 버티고 견디겠습니다.
그 누가 그 어떤 방해를 할지라도, 처음 이레를 버티고, 그다음 이레를 버텨내겠습니다.
끝끝내 무수히 많은 이레를 버티고 견뎌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형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알겠소. 그대가 원한다면…… 따르겠소.”
형운은 가만가만 입술을 열었다.
“이레.”
감미로운 목소리.
“네.”
“이레야.”
“네.”
“이레야.”
부를 때마다 입속에서 팔랑팔랑 봄 나비가 나부꼈다.
행여 포르르 날아갈까 두려워 형운은 힘껏 이레를 끌어안았다.
작은 몸집을 품은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생겨났다.
내내 얼음장이었던 혈관에 뜨거운 열기가 흘렀다.
처음으로 살아 있음이 행복했다.
목 밑까지 벅찬 감동이 차올랐다.
형운은 이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온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연한 복숭아꽃 향기가 그의 살갗을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갖고 싶다.
소유하고 싶다.
갈망과 집착이 그를 충동질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간택이 끝날 때까지 그저 조용히 지켜봐야만 하는 운명이 참으로 야속하였다.
하지만…….
참자.
참아야 한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 참자…….
형운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이레의 한마디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연모합니다.”
그의 품속에서 이레가 속삭였다.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거침없는 고백을 이었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때론 이유 없이 보고 싶은 것이 연모라면……. 아무래도 제가 은백을 연모하는 듯합니다.”
“…….”
“어둠이 조화를 부리나 봅니다. 어째 이런 마음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연모합니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
형운을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기어이 툭 끊어졌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형운은 이레를 향해 나아갔다.
“……이레야.”
봄꽃처럼 여리고 촉촉한 이레의 입술이 여름 햇살처럼 강렬한 형운의 숨결에 뒤덮였다.
들고 나는 숨결이 한데로 모였다.
입술을 파고드는 뜨거운 감각에 그녀의 연분홍빛 혀끝은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거칠고 집요했다.
그의 숨결에 덜미 잡힌 이레는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달래고, 재촉하고, 두드리고, 조여오는 감각.
이레는 머릿속이 아득했다.
꼿꼿하던 등줄기가 느른해진다.
밑동 잘린 허깨비처럼 자꾸만 휘청 무너져 내린다.
행여 바닥에 넘어질세라 이레는 양손을 깍지낀 채 형운의 뒷덜미를 한껏 휘어 감았다.
마치 어미에게 매달린 어린아이처럼 형운에게 매달려 손을 풀지 않았다.
그녀의 매달림은 그의 탐닉을 부추겼다.
그의 숨결은 깊이, 더 깊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혈관의 마디마디마다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이레가 내뿜는 숨결에 자신의 것이 깃들길 염원하였다.
아득한 환의 세계가 그들을 향해 문을 열었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조금 더 아득한 곳을 향해 두 사람은 천천히 나아갔다.
***
서툴렀던 첫 입맞춤, 느닷없이 이뤄진 두 번째와 달리 세 번째 입맞춤은 조금 더 농밀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형운과 이레는 날숨과 들숨을 동시에 뱉고 들이마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길고긴 입맞춤이 끝난 후에도 둘은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이젠 가야 합니다.”
형운의 가슴에 포박된 이레가 이별을 고했다.
“그래, 가야겠지.”
말과 달리 형운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하였으면 좋겠구나.
서로에게 기대어 선 바위와 나무처럼.
체온과 숨결을 나누며.
이 안온한 시간이 영영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불행하게도 긴 기다림 끝에 간신히 얻은 행복은 찰나처럼 짧기만 했다.
“아가씨, 이레 아가씨. 아직 못 찾으셨습니까?”
잠실 밖에서 두 사람을 방해하는 금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곧 끝날걸세.”
“조금만 서둘러 주십시오.”
저리 재촉하니, 더는 머물 수 없었다.
형운과 이레는 아쉬운 마음으로 서로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마지못해 누에섶에서 누에고치 고르는 일을 시작했다.
곁에서 이레를 돕던 형운이 속닥거렸다.
“재간택인들을 돕기 위해 새로운 내관들이 배치된 것은 알고 있으렷다.”
“그렇지 않아도 최헌이란 분을 만났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말하거라. 그럼 내게 곧장 전해질 것이니.”
최헌을 떠올린 이레가 손을 멈추고 형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묘한 기색을 읽은 형운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분 말입니다.”
“최……헌 말이냐?”
“네.”
“무엇이 궁금하더냐?”
“그분께서 절 위해 그…… 큰 희생을 치르셨다 하였는데, 사실입니까?”
형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최치성. 녀석은 이레, 널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레는 작게 탄식했다.
설마 하였건만.
정말로 그런 희생까지 했을 줄이야.
미안함으로 이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가 뭐라고.
이 하찮은 사람을 위해 그런 희생까지 하였단 말인가.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상실을 경험했을 최치성을 어떻게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왜 그런 일을……. 그분의 희생을 어찌 보답해야 한단 말입니까.”
슬퍼하는 이레를 형운이 다독였다.
“그의 희생을 잊지만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분께선 사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으니…….”
“그래, 소중한 것을 잃었지. 다시 자라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레는 눈물을 멈췄다.
“다시 자라……나요?”
사내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게 그렇게 막 다시 자라나기도 하는 거였어?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의 귓가에 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마 볼 만하게 자라나려면 열흘은 족히 걸리겠지.”
심지어 열흘이면 돼?
이레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럼, 궁 안에 가득한 내관들은 대체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설마, 시시때때로 다시 자르는 건…….’
이레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손끝만 조금 베여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것을.
열흘마다 그곳을 무 베듯 잘라야 한다면, 얼마나 아플까.
‘정말 대단한 분들이었구나.’
이레는 내관들의 숭고한 희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녀석의 멋진 수염을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절로 우울해지는구나.”
형운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진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딴생각에 잠긴 이레에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
고치를 구한 이레가 양덕당으로 돌아왔을 땐, 사위가 어둠에 잠긴 늦은 시각이었다.
명선과 유경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라.
이레는 아쉬움을 삼킨 채 사가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그녀는 입궁했다.
금정과 함께 양덕당으로 들어가니 고치가 든 대바구니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최치성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이곳에서 주무신 것입니까?”
“도통 잠이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이곳에서 쉬던 중이었습니다.”
쉬던 중이라 변명하였지만, 이레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밤새 이곳을 지키고 있었음을.
“많이 힘드실 텐데. 이리 무리하시면 어찌합니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사실,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열흘 후의 일도 생각하셔야지요.”
이레의 걱정에 최치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열흘 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하하, 충분히 쉬었습니다. 그럼 전 소세나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최치성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이레가 애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저분께서 왜 저런 눈으로 바라보시는 걸까?
아마도 밤새 고치를 지켜준 것이 고마워 저러는 것이리라.
최치성은 환한 미소를 만면 가득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세손 저하와 은랑은 기필코 제가 지키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여, 그는 알지 못했다.
멀어지는 최치성을 보는 이레의 눈가가 젖어드는 것을.
그녀의 오해가 깊어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