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많이 놀랐소?
“실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실타래를 든 금정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실이?”
이레는 타래에 묶인 실을 당겼다.
가볍게 힘을 주었을 때에는 제법 버티는 듯하였으나, 강한 힘으로 당기자 엿가락처럼 늘어지더니 이내 퉁, 끊어져 버렸다.
금정의 말대로였다.
이레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실로는 옷을 지을 수 없어.”
아무리 공들여 옷을 짓는다고 해도 금세 바느질한 곳이 터져 버릴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 것은 실을 강하게 당겨야 끊어진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금정이 세밀하게 살피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실패에 감긴 실의 모양이 어쩐지 성겨 보이질 뭐여요. 그래서 무심코 잡아당겨 보았습니다. 저도 이리 쉬이 끊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금정에게 이레가 물었다.
“실이 이리 쉽게 끊어지는 연유가 무언지, 혹여 알겠는가?”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금정은 타래의 실을 길게 풀었다.
실을 당기고, 살피는 세심한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삭은 듯합니다.”
“삭았다면 실이 오래되어 쓸 수 없단 말인가?”
“본디 대례복에 쓰일 비단과 재료들은 일찌감치 준비해두곤 합니다. 그러나 워낙 관리가 까다로운지라. 조금만 소홀히 하면 이런 경우가 생기곤 하지요. 더구나…….”
문제는 삭은 것만이 아니었다.
금정은 이레의 귓가에 바싹 얼굴을 가져갔다.
금정이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는 이레의 귓가에 바싹 얼굴을 가져댔다.
“이 실. 혼합사가 아닌 생사로 만든 듯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그것이…….”
금정의 설명이 이어지려는 찰나.
“무슨 일입니까?”
소란을 감지한 지밀상궁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레는 자꾸만 끊어지는 실을 지밀상궁에게 보여주었다.
“실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지밀상궁의 미간이 한데 모였다.
재간택 시험을 무사히 끝내길 원하는 그녀에게 ‘문제’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은 것이었다.
“실이 턱없이 약하여 쉬이 끊어집니다. 이런 실로는 온전한 옷을 지을 수 없습니다.”
“이 실은 상의원에서 내어준 것일 터인데…….”
지밀상궁은 상의원 소속의 침선장을 불러들였다.
깐깐한 인상의 침선장은 대뜸 고개부터 저었다.
“제례복에 사용되는 실은 일반 사가의 것과 다르니, 그 사용법 또한 다릅니다. 혹여, 바느질을 잘못한 것은 아닙니까?”
이레는 대답 대신 실을 잡아당겼다.
이번에도 실은 맥없이 끊어졌다.
“대체 얼마나 신비한 바느질을 하면 이런 실로 튼튼한 옷을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지밀상궁도 거들었다.
“나도 궁금하오. 상의원에선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게요?”
“그것이…….”
내내 자신만만하던 침선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의원의 바느질이 특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재료가 온전할 때의 이야기였다.
지밀상궁이 추궁하듯 침선장에게 물었다.
“이 실. 정말 제대로 된 것이 맞소?”
“……보관을 잘못하여 삭은 모양입니다.”
침선장의 입에서 무거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중요한 시험장에서 이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실을 관리하는 자는 물론이고, 그 윗선까지 책임을 추궁당할 상황이었다.
근심이 깊어지는 침선장에게 지밀상궁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른 간택인들에게 내어준 실은 괜찮은 것이오?”
“지금 살펴보겠습니다.”
침선장은 상의원 궁녀들과 함께 다른 간택인들의 실을 살폈다.
“다행히 다른 분들의 재료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지밀상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실의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실수가 일찍 발견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표정이 한결 밝아진 지밀상궁이 침선장을 돌아보았다.
“실을 다시 내오시오.”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요.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침선장은 안절부절못했다.
지밀상궁이 그런 침선장을 닦달했다.
“내 말 듣지 못했소이까. 간택인의 실에 문제가 있으니, 다시 내어주시오.”
침선장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실이 없습니다.”
뜻밖의 대답.
이레는 당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상의원에 실이 없단 말입니까?”
“아뢰기 송구하오나, 간택인들께 나눠드린 실은 주상전하의 대례복을 지을 때에만 사용하는 특별한 실입니다. 비단의 수량에 맞춰 딱 필요한 만큼만 준비해두었던 터라. 더는 여유가 없습니다.”
지밀상궁이 침선장을 사납게 몰아붙였다.
“그 중요한 의복을 만드는 실인데, 여분의 것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오? 그러다 지은 옷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침선장이 억울한 듯 항변했다.
“여분은 넉넉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럼 실이 없다는 말은 다 무엇이오?”
“상의원에서 쓸 만큼의 여분은 넉넉하였지요. 다만, 간택에서 제례복 짓는 시험을 칠 줄 어느 누가 예측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번 시험을 위해 비축한 옷감과 재료를 모조리 풀었으니, 더는 여유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 말을 핑계라 하는 것이오?”
지밀상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의 분노에 침선장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보다 못해 이레가 나섰다.
“여분의 실이 없다면 새로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침선장이 서둘러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서둘러 실을 만들어 올리겠나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침선장은 손가락을 꼽으며 수를 헤아렸다.
“사나흘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사람이!”
일련의 사태를 묵묵히 지켜보던 최치성이 기어이 목청을 높였다.
“무슨 실 하나 뽑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린단 말이오? 일부러 늦게 주려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오?”
“수작이라니. 어디서 그런 흉측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이오?”
굽은 허리를 편 침선장은 삼엄한 눈길로 최치성과 대치했다.
“그럼 뭐요? 침선장이 직접 누에가 되어 실을 뽑는 것도 아닐 터. 고작 실 하나 뽑는 데 사나흘이나 걸린다는 게 말이나 되오?”
“모든 일엔 마땅히 거쳐야 할 단계와 절차가 있는 법이오. 우선 이 일을 윗전에 보고하고, 결과와 지시를 받아 궁인을 차출하고, 그 이후에나 직업에 들어갈 수 있으니. 사나흘이라는 시간도 급한 상황을 고려하여 최대한 짧게 잡은 것이외다.”
“무슨 놈의 절차가…….”
침선장의 뻣뻣한 태도에 최치성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보다 과정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실을 뽑아내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이레가 막지 않았다면 정말로 호통을 쳤으리라.
“달리 손 쓸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지밀상궁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옷을 짓는 일과 관련한 모든 절차는 상의원에서 도맡아 처리하고 있습니다. 저쪽의 절차가 그렇다면 따르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을 겁니다. 다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날이 밝는 대로 중궁전에 이 사실을 고하겠습니다. 아마 다른 지시가 있을 것입니다.”
지밀상궁의 달래는 듯한 말에도 이레는 마냥 이해하고 물러설 수 없었다.
일각이 아쉬운 판에 사나흘이나 기다리라니.
또한, 순순히 믿고 기다리기엔 그간 벌어진 사건들이 심상치 않았다.
이후에 또 다른 일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무언가 수를 내야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모색하기엔 문제가 산 넘어 산이었다.
상의원에서 실을 받으려면 사나흘은 기다려야 했다.
시험의 규칙상 외부에서 실을 조달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어찌해야 할까?
이레의 시름이 깊어졌다.
***
소원 문 씨의 전각에서 모처럼 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실을 구할 수 없다는 말에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어찌하였다더냐?”
문 소원의 물음에 도 상궁이 맞장구치듯 웃었다.
“낭패한 표정으로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더라 합니다.”
“어쩔 줄 몰라 해?”
“엄격한 규율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손발이 꽁꽁 묶인 것 같으렷다?”
“참담한 표정이었다 합니다.”
“그 모습을 직접 보았어야 하는데. 참으로 아쉽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양덕당에서 이레가 당한 사건은 하나 빠짐없이 문 소원에게 전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도 상궁은 물론이고 소식을 듣는 문 소원의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눈엣가시 같던 존재를 치워버릴 절호의 기회.
근심 덩어리를 내려놓은 듯 문 소원은 홀가분해졌다.
“사나흘이라 했느냐?”
“네. 새 실을 구하려면 족히 그 시간이 걸린다 하였습니다.”
“옹주께선 참으로 꼼꼼하신 분이구나. 실을 바꿔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새로 받는 기한까지 길게 잡은 걸 보면 말이다.”
“실은 바꿔치기한 것은 맞지만, 새로 받는 데 걸리는 기한은 옹주의 뜻이 아닌 모양입니다. 상의원의 법도가 원래 그렇다 하옵니다.”
“그래? 하긴, 이 궁에서 예법에 가장 철저한 곳이 상의원이 아니더냐. 마땅히 그렇겠지. 물론, 실이 다시 나온 이후에도 경기관찰사의 여식을 배려하는 일 따윈 없겠지?”
“배려라 하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늦게 시작하였으니, 옷 짓는 시간을 더 준다거나 하는…….”
문 소원의 염려에 도 상궁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심려 놓으소서, 소원 마마. 다른 일도 아닌 세손빈을 간택하는 시험이 아닙니까? 사주와 관상을 헤아리고, 천지 간의 흐름마저 살펴 어렵게 정한 일정인데, 어찌 예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소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겠지만,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옵니다.”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문 소원의 표정이 느른해졌다.
“지난번엔 요행히 빠져나갔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을 것이야.”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마름질을 제대로 해냈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잘못된 치수대로 엉뚱한 옷을 짓고 있어야 했다.
‘분명 뒷배가 있음이야.’
문 소원은 세자를 떠올렸다.
자격도 없는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재간택에 오르는데 가장 큰 관여를 한 이, 바로 세자였다.
무엇이 세자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하등 이용가치가 없는 가문이거늘.
그렇다면…….
‘혹여 세손이 원한 것이려나?’
세손궁에서 본 형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뜨거운 불길.
여인을 마음에 품은 사내의 눈이 분명했다.
문 소원은 입가에 요사스런 미소를 그려 넣었다.
‘그 계집의 뒷배에 누가 있건 상관없다. 내 이미 화완옹주의 손을 빌려 큰 그림을 그려놓았으니.’
이미 강물이 범람하여 들과 숲을 모조리 잠식했다.
궁지에 몰린 젊은 범과 굴속에 박힌 어린 범이 울부짖는다 하여 무에 달라질까.
비스듬히 보료에 기대 누운 문 소원의 손이 자연스럽게 배를 향했다.
조심조심.
부풀기 시작한 배를 어루만졌다.
매화꽃 수 놓인 당의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사각사각, 고운 비단 소리를 자아냈다.
참으로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몇 해 전만 해도 배불리 먹고, 따스한 잠자리를 갖는 것이 그저 유일한 소망이었더랬다.
그러나 늙은 왕의 후궁이 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이 뒤바뀌었다.
매일같이 산해진미가 밥상 위에 올랐고, 일평생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귀한 비단을 입고 걸쳤다.
어디 그뿐일까?
저 비녀가 좋다 하면 그 비녀가 손에 들어오고, 저 노리개가 곱다 하면 그보다 더 고운 노리개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
원하면 원하는 대로, 취하면 취하는 대로 눈앞에 놓이니.
권력이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대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더럭 겁심도 났었다.
이래도 되려나, 두려움도 일었다.
그러나 불러오는 배만큼 왕의 도타움도 깊어졌다.
그녀의 사가는 왕의 애첩에게 아첨하기 위한 자들의 발길로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곳간이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그녀의 욕망과 허영도 몸집을 부풀렸다.
남들에겐 호랑이보다 무서운 왕이라 하나, 회임한 문씨의 앞에선 언제나 전전긍긍하시니.
그녀에게 왕이란 그저 변덕 심한 늙은 사내일 뿐이었다.
자신과 장차 태어난 제 아이의 손아귀에 천하를 쥐여줄 사내.
“너는 사내여야 한다. 아무렴. 꼭 사내여야 하느니.”
문 소원은 오늘도 어김없이 집요한 소망을 되뇌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 보위에 오르면 그야말로 살아있는 생에선 누리지 못할 아득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꿈결 같은 나날이리라.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나른한 상상에 취해 까무룩 잠이 들려는 찰나.
“소원 마마.”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가 미몽을 깨웠다.
“무슨 일이냐?”
“양덕당에서 궁녀가 왔사옵니다.”
“양덕당에서?”
문 소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곁을 지키던 도 상궁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밖으로 나간 도 상궁은 잠시 후,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왔다.
“양덕당에서 무슨 일로 연락이 왔느냐?”
“경기관찰사의 여식에 관한 소식입니다.”
“경기관찰사?”
문 소원의 반듯한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 계집이 또 무슨 수작을 벌였다더냐? 설마, 다른 간택인들의 실을 나눠달라 억지를 부린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하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
초조한 마음에 문 소원은 도 상궁을 다그쳤다.
힐끗,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도 상궁이 입을 열었다.
“직접 실을 구하겠다고 합니다.”
“실을 직접 구해?”
문 소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터무니없는 소리.
상의원에서 실을 내어주지도 않을 터이고, 외부에서 실을 들일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실을 직접 구한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그런데 왜일까?
불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지밀상궁이 놀란 표정으로 이레에게 되물었다.
“어딜 가고 싶다고요?”
“서향각에 가고 싶다 하였습니다.”
대답하는 이레의 목소리는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차분했다.
그 차분한 태도에 오히려 지밀상궁을 비롯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서향각엔 무슨 일로…….”
“궁에서 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니까요.”
궁의 잠실(蠶室)이 있는 곳, 바로 서향각이었다.
“그 일이라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중궁전에 사정을 아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밀상궁의 말에 최치성이 나섰다.
“실 하나 얻는데도 사흘이나 걸릴 정도로 절차를 중시하는 시험이 이번 재간택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일정이 변경되지 않는다면, 여기 계시는 간택인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험과 관련 없는 엉뚱한 일을 벌이겠단 말입니까?”
이레는 팽팽히 맞서는 두 사람을 말렸다.
“옷감과 재료에 관련한 규칙은 궁 밖에서 물건을 들일 수 없으며, 옷을 짓는데 타인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향각에서 제가 직접 실을 구하면 이 두 가지 규칙에 어긋남이 없을 겁니다.”
“규칙은 그렇습니다만, 보다시피 이번 재간택과 관련한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
지밀상궁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워낙, 특별한 상황이라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잠시 물러났던 최치성이 다시 의견을 내놓았다.
“세자 저하께서 이번 재간택 시험에 가능한 협조 하라 명하셨습니다. 단순히 서향각을 이용하는 일이라면, 허락을 받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지밀상궁이 반색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최치성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세자 저하께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양덕당을 떠났다.
그리고 한 시진 후.
최치성이 돌아왔다.
“하궐의 윤허를 받았나이다.”
최치성은 이레에게 시선을 건넸다.
“서향각을 사용하셔도 좋다 합니다.”
***
“정말 여길 들어가시겠단 거여요?”
조족등을 밝힌 채 이레를 따라온 금정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서 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잠실이라는 걸 알지 않는가?”
“하지만…….”
머리 위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금정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서향각.
이곳에 무엇이 있는 줄 궁 안의 궁녀라면 모르지 않았다.
금정은 창백한 낯빛으로 이레를 곁눈질했다.
벌레를 달가워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 마음 충분히 알고도 남기에 이레는 금정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여기서 기다려주겠는가. 잠실 안엔 나 혼자 다녀올 것이니.”
“그래도…….”
“가서 누에고치만 추려 나오면 되네. 굳이 두 사람 품을 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레는 금정을 뒤로 한 채 서향각의 돌계단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전각 안은 어두웠다.
덧창을 내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휘장까지 내린 실내는 검은 먹물이라도 뿌린 듯 온통 캄캄했다.
짙은 어둠에 물든 서향각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탐욕스럽게 빛을 지워낸 어둠이 검은 파도처럼 머리 위를 덮쳐왔다.
수렁처럼 전신을 휘감는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레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둠은 익숙했다.
서탁, 은자원, 할아버지들, 은백.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들은 언제나 어둠과 함께였다.
그러니 밝은 낮보다 밤이 친근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이곳에 둥지를 튼 작은 친구들에게 적응할 시간이다.
이레는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아.
누에가 나뭇잎 갉아 먹는 소란스런 소리가 한여름밤의 소나기처럼 느껴졌다.
긴장이 풀어졌다.
그제야 감은 눈을 뜨고, 유등을 밝혔다.
희미한 잠실의 풍경이 하나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전각의 입구에 1령의 누에가 무리를 지어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다음은 2령의 누에가, 그리고 3령, 4령, 5령…….
마침내 전각 가장 안쪽에 누에고치로 가득한 누에섶이 보였다.
이레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제 저 누에섶에서 적당한 누에고치를 고르면 된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좋은 누에가 있어야 할 텐데.
겨울이 가까운 시기라, 속이 옹골찬 고치를 구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이레는 대바구니를 꼭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한순간.
우뚝, 그녀의 걸음이 멈춰졌다.
등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
이레가 고개를 돌리며 물으려 할 때였다.
거친 손길이 그녀를 와락 휘감았다.
놀란 잇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급한 숨결은 커다란 손에 막혀버렸다.
코끝으로 진향 묵향이 밀려들었다.
“쉿!”
낯선 손의 주인이 달래듯 속삭였다.
이레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많이 놀랐소?”
이레는 떨리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은…… 백.”
잇새로 그리운 이름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