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74화 (74/215)

#74. 제가 지키겠습니다

겨울밤은 홀연히 찾아왔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가 제 둥지로 돌아갔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시험을 치르던 세 간택인들도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 채 사가로 돌아가야 했다.

온종일 당긴 시위처럼 팽팽했던 전각의 공기가 느른해졌다.

현의를 만들기 위해 비단을 자르고 꿰매던 분주한 몸짓들이 사라지자 거짓말 같은 고요가 찾아들었다.

내내 영덕당 한쪽에 시립하고 있던 금정은 뻣뻣해진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고된 하루였다.

느닷없이 재간택 시험에 참여하게 되어 얼마나 긴장하였던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낮의 일을 떠올린 금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재간택인들의 이번 과제는 제례 때 주상전하께서 입으실 구장복을 짓는 것이었다.

구장복은 모두 세 벌로 이뤄져 있다.

가장 안쪽에 입는 중단과 그 위에 입는 상.

마지막으로 상 위에 걸치는 현의로 구성되어 있다.

재간택인들 모두 짓기 어려우면서도 화려한 현의를 선택했다.

상의원에서 현의를 지을 때 사용되는 순인 갑사를 내놓았다.

말썽은 비단을 치수에 따라 재단하는 마름질 단계에서 벌어졌다.

구장복의 치수는 예법에 따라 정해져 있다.

앞길과 뒷길의 길이와 너비.

도련의 너비, 고름의 위치, 그리고 섶의 길이와 너비 등등.

국조오례서례에 기록된 도설에 맞춰 의복의 색과 들어가는 자수의 문양, 치수대로 짓는 것이 법도였다.

왕마다 세세한 차이는 발생하나, 기본적인 치수는 반드시 이와 같은 예법을 따라야 한다.

또한, 임금께서 입으시는 옷이라.

구장복의 치수는 엄격히 관리되어 외부로의 유출을 차단하였다.

때문에 재간택인들에게 구장복의 치수를 전할 때에도 상의원 소속 궁녀들이 직접 말로 전했다.

금정도 배우고 외운 대로 현의의 치수를 재간택인에게 전했다.

그녀에게 치수를 전해 들은 재간택인은 곧장 마름질에 들어갔다.

옷 짓기의 기초 중의 기초인 마름질.

정해진 치수에 따라 옷감을 여러 조각으로 재단하는 과정이다.

현의를 지으려면 무려 서른 개가 넘는 조각이 필요하다.

한정된 옷감으로 작업하니만큼,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설픈 가위질로 귀퉁이가 잘리거나 균형이 흐트러지면, 이후의 과정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가볍게는 엉뚱한 곳에 주름이 생기는 정도이고, 심하면 옷이라 부를 수 없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마름질은 옷 짓기의 기초이자 제일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었다.

재간택인은 이 마름질 단계에서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금정이 불러준 치수보다 더 크게 옷감을 재단한 것이다.

특히, 앞길과 뒷길의 차이가 컸다.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금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정말 놀랄만한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상의원 소속의 침선장에 의해 재간택인의 마름질이 틀리지 않았음이 밝혀진 것이다.

재간택인은 실수하지 않았다.

틀린 것은 금정 자신이었다.

“만약 그때 그분께서 내가 알려준 치수대로 마름질을 했다면…….”

옷의 엉성함은 둘째치고, 소매와 어깨 부분이 뒤틀려 버렸을 터였다.

한 부분, 한 부분 뜯어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미세함이 겹치고 더해져 최종적으로 엉뚱한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

“그 아가씨 이름이 이레라 하였지.”

단아한 자태가 인상적인 분이었다.

특히 고인 호수처럼 차분한 눈빛이 참으로 고왔다.

그분께서 적당히 무마해주지 않았다면, 큰 곤욕을 치를 뻔하였다.

자신을 노려보던 지밀상궁의 매서운 눈초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런 실수를 하였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가다니.

아무래도 내가 간밤에 용꿈을 꾸었나 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잘 외웠는데.”

금정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현의의 치수.

분명 가르쳐주신 대로 외웠는데.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잘못 외운 부분은 없었다.

“돌아가서 적어놓은 것을 확인해 봐야겠다.”

어린 금정은 종일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바로 펴며 양덕당 대문을 나섰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걸었을까?

금정이 가는 길목을 긴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네가 금정이냐?”

검은 철릭 차림의 사내의 물음에 금정은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오늘 시험장에서 작은 실수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 그것이…….”

사내의 서늘한 목소리에 금정은 와락 겁이 났다.

틀림없이 소식을 듣고 문초하는 것이리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저는 정말 알려주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상궁 마마께서 알려주신 그대로 외웠을 뿐입니다.”

“상궁 마마?”

어느새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금정은 목이 떨어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원의 옥 상궁 마마께서 보여주신 도식 그대로 외웠습니다. 정말입니다.”

***

“옥 상궁이라 하였느냐?”

홍인모의 보고에 형운은 반문했다.

“상의원에서 일한 지 스무 해가량 된 여인입니다. 장인으로 상의원에 들어와 뛰어난 수완으로 상궁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평소 노론의 대신들과 친분이 있었다 합니다.”

“그 옥 상궁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오늘 새벽, 사가에 일이 생겨 급히 궁을 나간 후로 종적이 끊겼다 하옵니다.”

형운은 생각에 잠겼다.

버릇처럼 검지로 서탁을 두드리고 있자니, 반월창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형운이 그림자를 불렀다.

“최 내관.”

“네, 세손저하.”

“이 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 내관이 아뢰었다.

“알아본바, 금정이라는 궁녀의 일은 본래 옥 상궁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하옵니다.”

“하면, 그 옥 상궁이란 여인이 자격도 없는 어린 궁녀에게 간택인 시험의 중요한 역할을 떠넘겼단 말이로군.”

“가끔 급한 일이 생길 때면 같은 방을 쓰는 어린 궁녀가 어미처럼 따르는 상궁을 대신하여 일할 때가 있사옵니다.”

“그럼 오롯이 옥 상궁과 금정이라는 궁녀 간의 사사로운 일이었다? 잘못된 치수를 넘겨준 것도 말이냐?”

“송구하오나, 금정이라는 궁녀가 옥 상궁에게서 들은 내용을 받아 적었다는 종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틀림없이 궁을 나간 옥 상궁의 소행이겠지. 이 모든 일이 금정이라는 어린 궁녀에게 뒤집어쓰기 위한 수작이렷다.”

최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사실을 확인해 줄 상궁의 종적 역시 묘연했다.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운 사건.

형운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번 일이 누군가의 사주로 벌어진 사건이라면 참으로 간악한 자들이 아닐 수 없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궁녀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시립한 최 내관이 머리를 조아렸다.

“본래 권력에 굶주린 자들은 인간의 도리마저도 헌신짝처럼 버린다 하나이다.”

형운은 허리를 바로 했다.

“최 내관, 아무래도 아바마마를 뵈어야겠구나.”

반월창 너머로 비치는 그림자가 흔들렸다.

곧이어 감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 저하께 독대를 청하란 말씀이시옵니까?”

“차질없이 준비하라.”

아버지 세자와의 만남을 반기지 않던 형운이었건만.

명을 내리는 그의 목소리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명 받잡사옵니다.”

최 내관의 그림자가 물러가자 홍인모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하.”

“말하거라.”

“은랑께서는 바뀐 치수를 어찌 아셨을까요?”

물어보는 홍인모의 눈엔 의문이 가득했다.

아까부터 궁금하여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본디 주상전하의 제례복은 그 도식을 함부로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치수에 관하여는 더더욱 비밀로 하고 있사옵니다. 오죽하면 도식에 정확한 수치를 표기하는 대신 번거롭게 궁녀들이 말로 전한다는 조건이 받아들여졌겠나이까.”

“확실히 평범한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라면 절대 알 수 없었겠지.”

형운의 입가에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에 알고 계시나이까?”

“글쎄다. 내가 무얼 알겠느냐. 다만…….”

여지를 남기는 듯한 형운의 말에 홍인모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저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무언가를 알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호기심을 보이는 그를 향해 형운이 놀리듯 말했다.

“은랑의 재주, 워낙에 비상하니. 그런 일쯤은 대충 어림짐작으로 알지 않았을까 싶구나.”

“어림짐작으로 주상전하께서 입으시는 구장복의 치수를 안단 말이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홍인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귀신이라면 또 모를까. 어찌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반박하는 홍인모를 향해 형운이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지. 어느 마음씨 좋은 백귀가 귀띔해줬을지도.”

형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내 딱딱한 근심으로 돌변하였다.

이레가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으로 충분한 바람막이가 되려나?

이레의 세손빈 간택을 원하지 않는 자들.

그들의 집요한 방해와 위험한 술수가 언제 어느 때 그녀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이번은 운 좋게 넘어갔지만, 다음에도 이러리란 보장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곁에서 지켜보고 싶구나.”

형운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깊은 탄식이 처소를 가득 채웠다.

그 숨김없는 마음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좌익위 최치성이 어느샌가 형운의 앞에 부복했다.

“무엇이냐?”

“제가 해보겠습니다.”

“……무얼 하겠단 말이냐?”

“그분의 곁을 지키는 일.”

최치성의 눈동자에 결연함이 맺혔다.

그는 불끈 주먹을 쥐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일을 해보겠사옵니다.”

형운의 눈썹이 휘어졌다.

“네 마음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다. 허나, 무슨 수로 그 사람의 곁을 지킨단 말이냐?”

“그것은…….”

최치성은 낮은 목소리로 제 생각을 밝혔다.

이윽고 형운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치성아,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홍인모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분을 지키기 위함이라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겠다니. 말도 안 된다. 그만둬라.”

“인모의 말이 옳다. 뜻은 가상하나 받아들일 수 없구나.”

형운과 홍인모는 한목소리로 반대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최치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짐하였사옵니다. 하온데 무엇을 더 아까워하겠나이까.”

“허나, 그것은…… 한 번 잃으면 돌이킬 수 없다.”

“알고 있사옵니다.”

“치성아.”

“저하, 허락해주시옵소서.”

“할 수 없다.”

“하오면 소신, 이대로 궐 밖으로 나가 평생 돌아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어찌하여 이리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저하야말로 어찌하여 소신의 마음을 몰라주시나이까. 저하의 근심은 곧 소신의 불충이옵니다. 모시는 주군의 근심조차 털어내지 못하는 신하를 어찌 신하라 부르리까.”

“…….”

“저하, 부디 소신이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결연한 최치성의 모습.

저리 고집을 피울 땐 절대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운과 홍인모는 긴 탄식을 금치 못했다.

***

새로운 날이 밝았다.

궁 문이 열리기 무섭게 재간택인들을 태운 가마가 양덕당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앳된 얼굴의 궁녀가 밝은 목소리로 이레를 맞이했다.

금정이었다.

“어제 일은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자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아닙니다. 상의원으로 돌아가 자세한 내막을 확인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아가씨께서 돌봐주시지 않았으면 소인은…….”

금정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레는 손수건을 꺼내 어린 궁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으이.”

그 자상한 손길이 오히려 금정의 울음을 부추겼다.

어미처럼 따르던 옥 상궁의 배신에 크게 상심하였던 터라.

급기야 금정은 흑흑,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런…….”

이럴 땐 그저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레는 묵묵히 금정의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눈물을 그친 금정은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앞으로 뭐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제 목숨은 이미 아가씨께서 새로 주신 것이나 다름없으니, 온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네.”

금정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 준 이레는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유경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끝맺지 못한 일감이 어제 모습 그대로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섬세한 현의 조각들을 들여다보자니, 아찔했던 순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제 일은 참으로 운이 좋았었다.

재간택 최종 시험.

이미 내정된 사람이 있는 시험이니.

마땅히 견제와 방해가 있을 거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설마 시작부터 그렇게 치졸한 수작을 부릴 줄이야.

‘할아버지들의 조언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겠구나.’

이레는 며칠 전 서탁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이레의 글에 화가 물었다.

-그게 무어냐?

상의 글도 나타났다.

-이제라도 성불할 마음이 든 게냐?

이레는 차분히 붓을 놀렸다.

-보기 싫은 사람을 시험에서 떨구고 싶다면 무슨 일을 할까요?

화가 물었다.

-아이야. 그 시험, 이번 재간택 시험을 뜻함이냐?

-네. 할아버지.

상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했다.

-한마디로 악인, 그것도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달란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악이 껄껄 웃었다.

-재간택에 붙을 비법을 물어볼 줄 알았더니, 상대의 음모가 궁금하다? 참으로 특이한 발상이로구나.

예의 글이 나타났다.

-내정된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다른 간택인들을 떨구기 위한 구실도 마련할 터. 현명한 판단이다.

이레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서탁에 돌연 정적이 감돌았다.

무거운 고요를 깨고 포문을 연 이는 상이었다.

-나라면 초장에 싹을 잘라 버릴 것이다.

-싹을 자른다고요?

-구장복을 만든다 하였더냐? 나라면 애초에 잘못된 치수를 알려줄 것이다. 그럼 제아무리 빼어난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옷을 짓지 못할 것이다.

악이 상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공개적인 시험이다.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왕실에서 설마 그런 치졸한 짓을 할까?

-재간택에 오른 간택인을 부러 떨어트리려 하는 발상부터가 이미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니냐?

-생각해보니 그렇군.

상과 악의 대화에 이레가 끼어들었다.

-그런 경우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습니까?

화가 말했다.

-치수 자체를 잘못 전해주는 경우라면, 대응하기 어렵겠구나.

예도 동의했다.

-치수를 정확히 알기 전에는 불가능하겠지.

이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치수는커녕 구장복에 사용되는 비단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그런 처지에, 대체 어디에서 정확한 치수를 알아낸단 말인가.

난감해 하는 그녀의 눈앞에 악의 글이 나타났다.

-다들 뭘 그리 어려워해? 정확한 치수를 알려주면 그만인 것을.

상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왕이 입을 제례복의 도식과 치수를 함부로 아이에게 알려주라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흥분한 상에게 악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백귀라며? 사람도 아닌 백귀에게 알려주는 게 무슨 상관이냐.

-……그건 그렇지.

-그리고 누가 너에게 알려주라 하였더냐? 내가 알려준다 하였지.

-백귀야, 어설픈 백귀야. 네가 무슨 수로 왕이 입는 제례복의 도식과 치수를 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허풍은 그만 떨어라.

악은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직접 그린 세밀한 도식과 치수가 서탁 위로 떠올랐다.

도식과 치수를 본 상이 급히 글을 달았다.

-너, 너 이놈. 백귀 주제에 어떻게 이걸 아느냐? 너 누구야?

-허허. 이쯤 되면 내가 누구인지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수상한 녀석. 아무래도 넌…….

-허허허. 그래, 네 생각대로다.

-왕실의 옷을 만들던 자냐?

-…….

서탁 위로 헛헛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악의 분노가 백지 위를 가득 채웠다.

-이런 망할 자식이 어디서 헛소리냐? 네놈 누구냐? 아니, 부모 이름부터 대라.

-대면?

-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네놈을 족보에서 지워버리마. 아니, 애초에 족보에 네놈의 어설픈 이름을 새기지도 못하게 조처를 하고 말겠다!

-하하하, 웃기는 놈일세. 네놈이 무슨 재주로 날 족보에서 지워버린단 말이냐? 내가 네 손주라도 된단 말이냐?

-잔말 말고 이름이나 대!

두 할아버지의 싸움은 그 후로도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이레는 악이 전해준 도식과 치수를 옮겨적는 데 여념이 없었다.

*

서탁의 대화를 떠올린 이레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례복의 치수가 악할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내용과 일치해서 정말 다행이야.’

금정이 불러준 치수는 악할아버지께서 전해준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임에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레는 받아적은 내용을 세세히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미묘한 부조화를 찾아냈다.

미리 숙지하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레는 심호흡을 하며 성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분께 가는 길까지 아직 한참 남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잠시도 방심해선 안 된다.

이레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였다.

양덕당의 솟을대문이 열리고 지밀상궁이 들어섰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 명의 젊고 늙은 내관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내관들의 출현에 양덕당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특히, 재간택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관.

사내도 여인도 아닌 자들.

지밀상궁의 설명이 들려왔다.

“이분들은 이번 시험의 진행을 돕기 위해 특별히 동궁전에서 나오신 분들입니다.”

지밀상궁의 말에도 들불처럼 일어난 술렁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레 역시 궁금했다.

재간택을 돕는 궁인이라면 지금도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그런 마당에 동궁전의 내관들을 보탠 연유가 무엇일까?

주위를 살피는 이레의 눈에 금정이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동궁전이라면 역시 어제 일과 관련 있는 모양입니다.”

“일이라니? 무슨 일이었는가?”

이레의 물음에 금정은 자신이 아는 일을 숨김없이 전했다.

“간밤에 재간택 시험을 두고 궁이 소란스러웠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시험의 진행을 두고 불만을 표하셨다 하시던데. 동궁전의 내관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아마 그 일과 관련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 세자 저하께서 보낸 사람들이구나.

이레는 세자 저하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때, 지밀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의원의 궁녀들과 더불어 내관들 역시 재간택인들을 직접 보필할 것입니다.”

지밀상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관들이 재간택인에게 다가갔다.

명선에겐 나이 지긋한 환관이, 유경에겐 중년이 환관이 그리고 이레에겐 젊은 환관이 붙었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실 최헌이라 합니다.”

젊은 환관은 이레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를 유심히 살피던 이레가 뒤늦게 반응했다.

“……잘 부탁합니다.”

“부탁이라니요. 하하하.”

무심코 호탕한 웃음을 흘리던 최헌이 급히 자라처럼 목을 접으며 간드러진 소리를 뽑아냈다.

“흠흠, 저야말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네.”

이레는 묘한 표정으로 최헌을 보았다.

그러다 찌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앙칼진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명선과 눈길이 맞닿았다.

질투와 시샘으로 가득한 그녀의 모습에 이레는 의아했다.

‘저 사람, 또 무슨 일로 저러는지 모르겠군.’

이유는 모르지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다.

사사건건 저런 반응인 걸 보면.

이레는 명선에 관한 관심을 접었다.

남의 일에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없었다.

이레는 서둘러 일감을 손에 쥐었다.

마름질을 끝낸 현의 조각 중 등솔 두 장을 맞대었다.

그러곤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시침으로 조심스레 고정하였다.

이후 끝을 매듭지은 실로 등솔은 쌈솔 바느질하고, 등바대는 너무 당겨지지 않도록 곱게 감침질했다.

차분한 마음에 야무진 정성을 덧칠하니, 옷이 조금씩 모양을 찾아갔다.

현의를 이루는 여러 조각 중 고작 등솔을 바느질한 것뿐인데, 일을 마치고 보니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처음 하는 일인 데다 긴장하였더니, 일의 진행이 더뎠다.

그나마 어제 사가로 돌아가 수모에게 따로 배우지 않았다면 온종일 허둥대기만 하였을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금정이 물그릇을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마른 참이라.

“고맙네.”

이레가 물그릇을 받아 마시려 하였다.

순간, 최헌이 냉큼 그것을 가로채 자신이 마셔 버렸다.

“무슨 짓입니까?”

금정의 항의에도 최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양치하듯 물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고 맛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한 물이군요. 안전합니다.

그가 마신 그릇을 이레에게 내밀었다.

“안심하고 드십시오.”

“…….”

이레는 말없이 최헌이 내민 물그릇을 바라보았다.

최헌이 순진하게 두 눈을 끔뻑였다.

“왜 아니 드십니까?”

보다 못한 금정이 최헌의 손에서 물그릇을 가로챘다.

“다시 떠오겠습니다.”

최헌을 노려본 금정이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허, 안전을 확인한 것뿐인데,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군.”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이레가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어도 되겠습니까?”

최헌이 반색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무얼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레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손 저하께서 보내셨습니까?”

“헛!”

최헌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못마땅한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한 최헌이 속삭이듯 되물었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다른 무사님과 함께 그분의 뒤를 따르셨지요?”

“……!”

최헌은 급히 제 입을 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우익위 홍인모의 변장과 은신을 이분께서 매번 눈치챈다 하더니. 홍인모 그 친구가 허풍을 떤 게 아니었구나.’

이쯤 되면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맞습니다. 용케 아셨군요.”

“내관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레의 말에 최헌, 아니 최헌으로 위장한 최치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처음부터 내관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 큰 희생을 치러야 했지요.”

이번엔 이레가 놀랄 차례였다.

“큰 희생이라 하심은…… 설마.”

최치성의 얼굴에 서글픈 표정이 떠올랐다.

“그분께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인들 마다하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의 비장함에 이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내관이 아니었던 사람이 큰 희생을 치르고 이곳에 왔다면…….

때마침 금정이 돌아왔다.

금정이 건넨 물그릇을 받았지만, 이레는 차마 물을 마시지 못했다.

이레가 최치성에게 말했다.

“충심이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절 위해 지나치게 큰 희생을 하셨습니다. 어찌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보잘것없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분께서 소중히 여기는 분이시니. 제게도 소중한 분입니다. 목숨인들 아니 바치겠습니까.”

세손을 향한 최치성의 충심은 그의 음성만큼이나 묵직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이레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최치성이 든든한 미소를 보였다.

“앞으로는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곁에 있는 한 그 어떤 사악하고 비열한 수작도 가능하지 못할 겁…….”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에구머니나.”

금정의 당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레와 최치성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금정이 울상을 지으며 바느질하던 실을 들어 보였다.

“실이 자꾸만 끊어집니다. 이게 왜 이럴까요? 이래서는 바느질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최치성은 급히 제 말을 수정했다.

“어떠한 수작도 가능한 한 막아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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