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미틈달 스무아흐레.
재간택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
간택에 참여한 재간택인들은 사주에 따라 정해진 시간과 궁 문을 통해 입궁했다.
미시초(未時初:오후 1시).
양덕당에 모인 재간택인은 모두 셋.
이레와 유경 그리고 명선이었다.
다른 간택인들은 지병을 핑계로 불참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간택인들 사이엔 기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 고요한 적막을 가르며 지밀상궁과 궁녀들이 나타났다.
궁인들이 대청마루 한가운데 앉은 이레와 명선, 그리고 유경을 둥글게 에워쌌다.
상석에 자리 잡은 지밀상궁은 재간택인들을 향해 격식을 갖췄다.
재간택인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손해졌다.
평생 모시게 될 주인이 이들 중에 있을 터이니.
지밀상궁의 조심스러운 몸짓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지금부터 재간택의 마지막 시험 내용을 전하겠습니다.”
마지막 시험이라는 소리에 이레는 긴장했다.
“이번 시험은 주상전하께서 제례 때 입으실 옷을 짓는 일입니다.”
지밀상궁의 엄중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때를 같이 하여 대청마루와 이어진 안채의 방문이 열렸다.
늙은 환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예를 갖추시오.”
재간택인들과 궁녀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드시오.”
환관에 목소리에 비로소 이레는 고개를 들었다.
안채엔 거대한 횟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횃대에 고귀하고 화려한 자태를 자아내는 옷 한 벌이 걸려 있었다.
지밀상궁의 설명이 이어졌다.
“주상전하께서 제례 때 입으실 구장복은 흑색의 홑으로 지은 현의(玄衣), 청색의 순인으로 만든 중단(中單), 그리고 현의와 중단 사이에 두르는 붉은색의 상(裳)이 있습니다.”
구장복은 면류관과 함께 하늘과 지상의 신을 기리고 영접하기 위한 왕의 예복으로 달리 대례복(大禮服)이라 불리웠다.
구장복을 본 이레의 잇새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마주한 임금의 면복은 위엄이 넘쳤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특히나 현의의 화려한 자수는 절로 숙연함이 들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과연 저 화려한 옷을 제대로 지을 수 있을까?
제대로 만드는 건 둘째치고 어설프게나마 완성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런 생각은 비단 이레 혼자만이 아니었다.
유경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정녕 이것들을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까?”
“그렇사옵니다.”
지밀상궁의 대답에 유경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미 만들어진 구장복의 소매단과 도련, 깃과 섶단은 사람의 솜씨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바느질이 정교했다.
아마도 바느질만 업(業)으로 삼고 살아온 장인들도 저리 완벽한 옷을 만들 수는 없으리라.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지밀상궁이 말을 이었다.
“간택인들께서 구장복을 만들어야 하는 건 맞습니다. 다만, 구장복 모두를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를 지을 필요가 없다 하심은……?”
“구장복을 이루는 현의와 중단, 그리고 상.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지으시면 됩니다.”
“다행이다.”
구장복 모두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말에 유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이레가 질문했다.
“간택인들이 지은 옷이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상관없습니다. 간택인들이 지으신 옷 중 하나를 주상전하께서 선택하신다면 그것을 입으실 것이요, 그 모양새가 성심에 닿지 못한다면 상의원에서 지어 올린 것을 입으실 겁니다. 그러니 간택인들께서는 그저 성심을 다해 지으시면 됩니다.”
상의원을 비롯한 내명부는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재간택인들이 제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일평생을 바느질에 몰두한 침선장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재간택인들의 시험과 별개로 주상전하께서 입으실 구장복은 상의원에서 따로 지어 올린다는 의미였다.
이레는 작게 안도했다.
만약, 주상전하께서 입으실 옷을 제대로 만들어야 했다면, 부담감에 밤잠도 제대로 못 이뤘을 것이다.
이레는 제 손끝을 만졌다.
손끝이 거칠고 딱딱했다.
지난 며칠 동안 쉼 없이 연습한 흔적이었다.
이렇게 손끝에 못이 박일 정도로 연습했어도 구장복을 제대로 지어낼 자신은 없었다.
이레의 상념 사이로 지밀상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부터 구장복을 이루는 세 가지 옷 중 하나를 골라주십시오. 기간은 단 보름. 오직 이곳에서 간택인들이 직접 지어낸 옷만을 인정하겠습니다. 외부에서 조력자를 불러들일 수도 없고, 도구도 들여올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설명을 끝낸 지밀상궁은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간택인들을 둘러보았다.
“보름 안에 스스로 감당하여 지을 수 있는 옷을 골라주십시오.”
지밀상궁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병풍처럼 선 궁녀들 몇이 재간택인들 곁에 섰다.
그녀들은 상의원에서 가려 뽑은 장인(匠人)들이었다.
구장복을 짓는데 필요한 도움과 수발을 그들이 도맡아 처리한다 하였다.
이레에게 온 궁녀는 앳된 얼굴의 유난히 눈이 큰 소녀였다.
금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궁녀는 올해로 열일곱이었다.
다른 명선과 유경의 조력자로 나선 상방의 궁인들이 서른 즈음임을 감안하면, 이레에게 온 궁녀는 유난히 어렸다.
이레는 금정과 함께 왕의 면복을 살폈다.
갑사 구장복에는 산(山), 용(龍),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彛), 조(藻), 미(米), 보(黼), 불(黻), 문등 아홉 개의 장문이 자수 놓였다.
구장복을 구성하는 옷 중 가장 화려한 것을 꼽자면 현의였다.
화려한 현의의 양어깨에는 용이 수자 놓인다.
등에는 산이 그려졌다. 또한, 소매 뒤쪽에는 세 개의 화와 세 개의 화충, 그리고 세 개의 종이가 위에서 차례로 자리했다.
공단으로 만들어진 중단은 깃에 11개의 아(亞)자형 불문을 금박하여 왕실의 위엄을 담았다.
현의와 중단의 사이에 걸치는 상은 조, 미, 보, 불의 장문이 수자 놓인 원단을 사용했다.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을 원한다면 당연 현의였다.
그러나 보름 안에 그것을 마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마름질과 바느질의 순서가 엄격한 왕실의 법도에 따라 그것을 지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현의를 할 수 없다면 중단과 상,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수자 놓는 솜씨를 보여주고 싶다면 상을 골라야 했고, 옷 짓는 솜씨를 뽐내고 싶다면 중단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상과 중단은 현의에 비하면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듯 느껴질 터였다.
이레가 금정에게 물었다.
“옷을 짓는다면 옷감을 자아내는 일부터 하여야 합니까?”
금정이 대답했다.
“구장복은 갑사라 불리는 특별한 비단을 사용합니다. 이번 시험에 사용될 갑사는 상의원에서 제공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그 이후의 일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갑사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비단이라, 이번 시험에서도 단 한 번만 제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각별하게 다뤄야 합니다.”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었다.
“현의와 중단 그리고 상을 짓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까?”
“숙련된 침선장이 철저한 법도에 따라 짓는다면, 중단은 열흘, 상은 한 달, 현의는 족히 두 달이 걸린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처럼 옷감이 제공되기에 그 기간이 상당히 줄어들겠지요.”
금정은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줄 뿐이었다.
어차피 알려준다 해도 숙련된 침선장의 경우라 이레와 비교되지 못했다.
‘무엇을 골라야 할까.’
이레의 고민이 깊어졌다.
바로 그때.
“이걸로 하겠네.”
뒤에서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명선이 오만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나는 현의로 하겠네.”
명선은 가장 어렵고 화려한 현의를 선택하였다.
돌아보는 이레를 향해 명선은 보란 듯 턱 끝을 추켜올렸다.
“너는 무엇으로 골랐느냐? 아니다. 네가 무엇을 고르건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승자는 정해진 것을.”
명선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그 빈자리를 유경이 채웠다.
“저도 이 옷으로 하겠습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유경은 현의에 시선을 던졌다.
이를 앙다문 모습에서 그녀의 다부진 결의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물러가자, 금정이 이레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현의 말씀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결국, 세 재간택인 모두가 현의를 선택하였다.
***
재간택인들의 선택이 끝나자 상의원의 내관과 궁녀들이 옷감을 들여왔다.
뒤이어 수를 놓을 자수틀과 실이 들어왔고, 바느질에 필요한 도구들도 속속 자리를 잡았다.
재간택인들은 양덕당의 마당을 기준으로 나뉘어 앉았다.
풍수와 사주에 따라 유경은 양덕당 대청마루의 동쪽에, 명선은 남서쪽에 자리했다.
마지막으로 마루의 북동쪽은 이레의 차지가 되었다.
지밀상궁은 마지막 유의사항을 잊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옷을 짓는 것은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합니다. 짓던 옷을 갖고 나가시면 절대 안 됩니다. 원하시는 만큼 궁에 머물며 옷을 지으십시오. 그러나 피곤하시거나 몸이 미욱하시면 집으로 돌아가셔도 무방합니다. 묘시(卯時)부터 해시(亥時)까지, 언제든 궁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반 시진 후부터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당부를 마친 지밀상궁은 궁인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웠다.
잠시의 짬이 생기자, 유경이 이레의 옆자리에 바싹 다가앉았다.
“아무래도 너무 어려운 걸 고른 듯합니다.”
현의.
화려하여 쉽게 눈에 띄는 만큼 짓기 까다로운 옷이었다.
“지기 싫다는 마음에 덜컥 고르긴 했지만, 막상 해보려 하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언니, 언니는 어떠세요? 준비는 했어요?”
이레는 흐린 미소를 지었다.
“몇 가지 조언을 구하긴 했지만, 이번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구나.”
“그래도 언니, 우리 힘껏 노력해봐요.”
유경의 말에 이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과연 노력으로 가능할까?”
명선이 예의 도도한 낯빛으로 이레와 유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경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너희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지엄하신 주상전하께서 입으실 옷이다. 감히 어설픈 솜씨로 뛰어들었다가 집안과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렵지 않으냐? 이쯤에서 적당히 하고 물러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지 않을까요?”
“그런 이야기도 고만고만한 상대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지. 한 바가지의 우물물과 너른 강물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느냐? 알았다. 굳이 하겠다면 내 구태여 말리지 않으마. 꼭 부딪혀 깨져봐야 깨닫는 미련한 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이미 시험이 끝나기라도 한 듯 명선은 오만 도도한 모습으로 양덕당 대청마루를 내려섰다.
자신의 처소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향해 유경이 분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사람은 왜 저리 얄밉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어요.”
약이 잔뜩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유경과 달리, 이레는 시종일관 차분하였다.
이레는 시험내용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첫째, 주상전하께서 제례 때 입으실 옷을 짓는 게 이번 시험의 목표.
둘째, 구장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며, 재간택인들은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짓는다.
셋째, 기간은 보름.
넷째, 옷을 짓는 재료와 도구는 궁에서 제공한 것만 사용할 수 있고, 외부에서 들여온 사람과 물건은 불허 한다.
다섯째, 상의원에서 나온 장인과 궁녀에게 질문하거나 단순한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다만, 옷의 제작과 관련한 직접적인 도움은 받을 수 없다.
여섯째, 구장복을 지을 때 사용되는 갑사는 제작이 무척 까다롭다. 때문에 재간택인들에게 제공되는 비단은 단 한 번뿐이다.
일곱째, 재간택인은 성안에 머물거나 사가로 돌아갈 수 있다. 묘시부터 해시까지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스스로 옷을 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규칙 안에서도 명선은 다른 재간택인들보다 월등히 유리한 위치였다.
그녀의 가문은 이번 시험을 위해 조선 팔도에서 내놓으라 하는 장인들을 죄 끌어모았다.
집과 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막힐 때마다 사가로 돌아가서 장인들의 조언을 마음껏 들을 수 있으리라.
명선의 콧대가 유난히 높은 이유,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전 제 능력 이상의 것을 택한 모양이에요.”
유경은 시험이 시작되기 전부터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레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넌 틀림없이 잘해낼 거야.”
“역시 그렇겠죠? 고마워요. 언니도 힘내세요.”
유경이 양손을 불끈 쥐었다.
이레 역시 소맷자락 안에 숨어 있는 주먹을 동그랗게 말았다.
한 발짝.
형운에게로 향한 그녀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밀상궁의 목소리가 양덕당을 울렸다.
상의원에서 나온 상궁이 간택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었다.
“현의를 지을 비단과 실, 그리고 수자에 필요한 도안과 수실입니다.”
각종 재료와 도구, 더불어 간택인들 한 명당 하나씩 큰 나무함이 지급되었다.
그 속엔 검은색 비단과 형형색색의 수실과 바늘, 그리고 실이 담겨 있었다.
또한, 구장복의 전체적인 도식화가 들어있었다.
현의를 만드는 과정은 마름질한 옷감을 시침, 바느질하고, 고름과 단추, 동정을 달고 마지막으로 장문을 그리는 과정을 거쳤다.
언뜻 단순해 보일지 모르는 이 과장은 사실 복잡하고도 세심했다.
마름질하여 잘라낼 비단 조각이 무려 서른 개가 넘는다.
각각 시침과 바느질 방법이 모두 다르니 작업이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 복잡한 과정의 첫 번째가 바로 마름질.
정확한 치수에 맞게 재고 자르는 작업이었다.
금정이 이레에게 치수를 전했다.
“길에서 앞길까지 1자(尺) 8치(寸). 아래 너비는 2자 2치 7푼. 윗너비는…….”
이레는 묵묵히 그녀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었다.
“이대로 재단하시면 됩니다.”
금정의 설명이 끝났다.
이레는 도식화에 적은 치수를 근거로 마름질에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터라.
자신을 지켜보는 눈길이 있는 것을 이레는 까맣게 알지 못했다.
그녀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가위를 드는 이레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시선이 있었다.
다름 아닌 명선이었다.
이레를 곁눈질하던 명선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그래. 그대로 가위질해라.’
***
금정이 이레에게 불러준 현의의 치수는 잘못되었다.
그대로 옷감을 자르는 순간, 이레의 시험은 끝이 난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잘못된 치수는 본래의 치수와 미묘한 차이인지라, 처음엔 표가 나지 않는다.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시기는 아마도 보름 후.
온갖 정성을 들여 간신히 옷을 완성하고 난 후 알게 되리라.
하지만 그때 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치수를 알려준 궁녀는 제대로 알려주었다며 발뺌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새로 옷을 지을 여유도 없으리라.
유일하게 참극을 막을 기회는 바로 지금뿐.
안타깝게도 이레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도 놓치고 말았다.
서걱.
이레의 거침없는 가위질에 옷감이 잘려나갔다.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비단을 보며 명선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결국, 그녀의 말대로 되었구나.’
명선은 문 소원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모든 계획.
문 소원의 작은 머리에서 나왔다.
단순히 치수를 잘못 전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원래 상의원에서는 치수를 종이에 적어 재간택인 모두가 자유롭게 오가며 살필 수 있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문 소원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정확하게는 문 소원의 청을 화완옹주가 들어주었기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구장복의 치수는 궁녀들의 입을 통해 재간택인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 약간의 수작을 부리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구나.’
소원 문씨.
알면 알수록 교활한 여인이었다.
머리는 비상하고, 수단은 비정했다.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눈엣가시 같던 것을 털어내게 되었구나.’
이레의 재간택은 이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력을 다해 옷을 짓는다고 해도 그녀를 기다리는 건 항거할 수 없는 깊은 절망뿐.
명선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였다.
“서, 설마 이렇게 자른 겁니까?”
누군가 놀란 비명을 질렀다.
금정이었다.
어린 궁녀는 사색이 된 낯빛으로 도식화를 내려다보았다.
이레가 현의의 치수를 받아적은 바로 그 도식화였다.
우연히 도식화에 적힌 수치를 확인한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비명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밀상궁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금정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도식화를 가리켰다.
“간택인께서 치수를 잘못 써넣으셨습니다.”
“무엇이?”
지밀상궁이 도식화를 내려다보았다.
금정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를 어쩐답니까. 이미 옷감을 다 잘랐으니……. 다시 드릴 여유도 없다 들었는데, 이 일을 대체 어쩐답니까.”
안절부절못하는 금정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허공을 뒤덮었다.
이레의 도식화는 지밀상궁을 거쳐 상의원의 침선장에게로 전해졌다.
도식화에 적힌 치수를 확인한 중년의 침선장이 고개를 들었다.
“재간택인께서 이 도식화에 적힌 대로 마름질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이미 재단을 끝냈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동동 발을 구르는 금정을 침선장이 의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네?”
침선장의 물음에 금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중년의 침선장은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이 수치 말이다.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틀, 틀리지 않았다고요?”
당황한 금정이 다시 한 번 치수를 확인했다.
그럴 리 없다.
분명 상의원에서 외운 치수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그 수치들을 외우느라 지난 사흘간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자다가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외웠건만.
그런데 엉뚱하게 적은 재간택인의 치수가 틀리지 않는다니?
“틀림없다. 제대로 되었어. 대체 넌 왜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저, 전…… 저는…….”
금정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모두의 매서운 눈길이 금정에게로 향했다.
누군가의 음성이 그 사나운 시선들을 말렸다.
“잠시 착각한 모양입니다.”
이레였다.
지밀상궁이 그녀에게 다시 확인했다.
“착각한 거라 하셨습니까?”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정의 손을 잡았다.
“이분께선 제대로 치수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식화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아마 긴장하여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사람들은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금정을 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중요한 시험이 치러지고 있다. 괜한 일로 소란 떨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지밀상궁의 엄한 훈계를 끝으로 소동은 정리되었다.
흥이 식은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소란했던 양덕당은 다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명선만은 진정할 수 없었다.
‘치수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문 소원의 말대로라면 이레는 상의원의 궁녀에게서 잘못된 치수를 전해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이레는 궁녀에게서 받아 적은 치수에 이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레에게 배정된 궁녀의 반응이 기이하긴 하지만, 상의원 침선장의 확인으로 분명해졌다.
이레의 마름질은 완벽했다.
단 하나의 실수 없이.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이레를 보는 명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