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72화 (72/215)

#72. 이젠 없소

그것은 아찔한 달콤함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순간.

아득한 환의 세계가 이레의 발밑으로 펼쳐졌다.

교차하는 숨결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형운의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스르륵 눈이 감기고,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입술 끝에서 시작한 소름과 전율이 전신을 굴러다녔다.

이 차갑고도 뜨거운 생경한 느낌은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탓인가, 아니면 뺨을 타고 흐르는 그의 숨소리 탓인가.

맞닿은 입술은 불길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목을 타고 올라간 형운의 손끝이 뒷덜미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때마다 저릿저릿한 충격이 등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졌다.

심장이 둥둥 메아리쳤다.

-기벽?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와의 첫 만남도 지금처럼 색달랐다.

그는 차가웠다.

글로도 서늘한 목소리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자상한 할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얼음송곳처럼 시린 대응엔 불퉁한 답이 튀어나오곤 했다.

오죽하면 오만하고 불손하다 하여 그를 불손이라 불렀을까.

불손.

그래, 그는 그런 이름의 백귀였다.

차갑고 냉정하고, 또한 이따금 쓸데없는 질문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이상한 백귀.

그의 불퉁한 투덜거림에 마음에 가시가 돋아났고, 무심한 외면에 와락 성화가 솟구치곤 하였다.

하지만 멀리하려 하면 할수록 불손에겐 이상한 끌림이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그와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느덧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런 이레의 삶에 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동료, 의인, 은인…….

세상의 그 어떤 말과 표현으로도 그 사람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표현하지 못하리라.

은백.

그는 허망한 약조를 지키기 위해 먼길을 마다치 않고, 함께 목숨을 걸어주었다.

약조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다며 작은 선물이라도 하려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소중한 사람.

그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가슴이 설렜다.

불손과 은백.

전혀 다른 느낌의 존재들.

그런데 그 둘이 실은 같은 사람일 줄이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까닭 없이 행복하였다.

오만불손한 차가운 사내가 실은 은인이었다는 사실이.

불손이 은백이었다는 사실이.

고작 그 일이 왜 그토록 신기하고 좋았을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의 곁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이 사내와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래서 후원의 잠실 앞, 가림막 뒤에 서 있던 세손이 은백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을 때에도, 오로지 한 생각뿐이었다.

오직 한 가지 궁리뿐이었다.

마음이 자라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그 사내를.

그러기에 약조하였다.

그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전력을 다해 임하겠다고.

세손빈 간택에 성심을 다해 임하겠노라 다짐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올라보겠노라, 감히 용기 내어 말하였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당치도 않은 현실임을 알고 있으면서…….

어쩌면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

하얀 설원이 만든 환상일 수도 있었다.

설렘이 커갈수록 불안함도 몸집을 부풀렸다.

바로 눈앞에 형운이 있음에도, 제 숨결과 그의 숨결이 맞닿아 있음에도 이레는 불안하였다.

하여, 마침내 맞닿은 숨결이 떨어져 간격을 만들 때는 가슴 한복판에 격통마저 느꼈다.

그러나 속내를 들킬세라.

이레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묻는다.

“아직 남은 의문이…… 있다 하였습니까?”

여린 질문 위로 가파른 숨결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그것은…….”

이레는 발끝을 세워 형운의 말을 가로막았다.

흐릿했던 세상이 선명해졌다.

영원할 것만 같던 시간이 끝나고, 그의 숨결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수줍은 입맞춤 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직 남은 의문이 있습니까?”

형운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젠 없소.”

***

초겨울의 아침은 고요했다.

며칠을 꼬박 쉬지 않고 내린 눈이 담벼락과 지붕을 하얗게 물들었다.

무채색의 시린 계절이 성큼 다가왔건만.

창덕궁과 경희궁 사이에 위치한 용화전은 화사했다.

용화전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화완옹주였다.

옹주는 십수 년 전 일성위에게 시집갔으나, 젊은 나이에 지아비를 잃고 과부가 되었다.

옹주를 향한 임금의 총애가 남달랐으니.

왕께선 청상이 된 여식의 걱정에 눈가가 짓무를 지경이었다.

하루라도 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왕의 근심이 깊어졌다.

그런 연유로 옹주의 사가로 행차하는 일이 잦으니, 조정 대신들의 염려 섞인 상소가 이어졌다.

한 나라의 임금이 사사로이 여식의 집을 드나드는 것은 군주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충언이 담긴 상소였다.

그러나 왕께선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왕이기 이전에 아비이니.

자식을 염려하는 것은 아비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 왕의 주장이었다.

결국, 옹주는 궁의 한 전각으로 거처를 옮겨 왕과 대신들의 충돌을 잠식시켰다.

옹주로 인해 왕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다시 피어났다.

심성 곱고 음전한 옹주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궁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머무는 주인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옹주의 전각은 화사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그런 전각이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특별한 손님이 방문한 까닭이다.

“문 소원이 아니시오?”

소원 문씨의 이른 방문에 용화전의 궁인들은 허둥거렸다.

미천한 궁녀의 신분이었으나 주상전하의 성은을 입고 회임까지 하니.

궐 안팎의 관심이 이 여인에게로 쏠려 있었다.

옹주는 문 소원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인이 옹주마마의 귀한 아침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방해라뇨. 그 무슨 말이시오.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던 참이었소.”

두 여인 사이에 다정한 인사말이 오갔다.

곧 간단한 다담상이 옹주와 문 소원 앞에 놓였다.

그러나 문 소원은 찻잔 대신 옹주가 놓고 있던 수틀로 시선을 던졌다.

“참으로 곱습니다.”

문 소원은 옹주가 놓은 자수를 들여다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정녕 그리 보이오?”

“그럼요.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리까. 꽃은 향기를 담은 듯하고, 나비는 당장에라도 날아오를 듯하니. 참으로 대단한 작품입니다.”

베갯잇을 만들기 위해 수자 놓은 국화꽃과 나비는 사실 칭찬한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평범함을 넘어서진 못했다.

그러나 문 소원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식 가득한 칭찬에 화완옹주는 기쁜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문 소원의 과한 칭찬에 부끄러워 내 얼굴이 다 붉어지오.”

연신 차를 마시며 나름 품위를 지키려 해도 붉어진 두 볼은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되려 표현이 부족하여 제가 느낀 감동을 만분지 일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문 소원이 제 가슴을 콩콩 쳐댔다.

옹주는 서둘러 그 행동을 말렸다.

“저런. 지나친 흥분은 자제하세요.”

“아닙니다. 용화전을 찾을 때마다 이처럼 식견을 넓히게 되니, 제가 느낀 벅찬 감흥에 분명 태중 아기씨도 크게 기뻐할 겁니다.”

“빈말이라도 그리 해주니 참으로 고맙소.”

“빈말이 아닙니다. 제가 품은 아이이니, 어미인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지요.”

문 소원은 뿌듯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화완옹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부디 무탈하게 태어나야 할 터인데.”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미욱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뿐이니. 기필코 강건하고 지혜로운 분을 낳을 것입니다.”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온데…….”

문 소원의 이마에 불현듯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화완옹주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낯빛이 좋지 않아요. 어디 불편한 일이라도 있소?”

문 소원은 대답 대신 한숨부터 쉬었다.

“그것이…… 하아.”

“대체 무슨 일인데, 그리 큰 한숨이오?”

“누군가 궁을 황금으로 만든 새장이라 하였다지요. 겉으로 보기엔 사방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사실은 날갯짓할 수 없는 새장 같은 곳인지라. 때때론 마음이 답답하답니다.”

“무에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소?”

“하고 싶은 일이 딱히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자꾸만 될 듯 될 듯 아니 되니. 조금 갑갑합니다.”

“혹여 세손빈 간택 때문이오?”

문 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정된 분이 계시어 금방 끝이 날 거라 들었거늘. 그것이 이번에 또 꼬여버린 모양입니다.”

“꼬이다니?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그것이 말입니다.”

문 소원은 주상전하께서 재간택인들에게 내린 어명에 관해 설명하였다.

화완옹주의 얼굴에 놀람이 들어찼다.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문 소원을 바라보았다.

“제례 때 입을 구장복을 재간택인들에게 짓게 하였단 말이오?”

“상의원에서 반대하였으나, 주상전하의 뜻이 워낙에 완고하시니. 끝내 막지 못한 모양입니다.”

“저런…….”

화완옹주의 눈가에 황망함이 서렸다.

그러다 이내 작게 혀를 찼다.

“그 막중한 일을 바느질에 익숙하지 못한 재간택인에게 맡기겠다 하셨단 말이오?”

“네, 그렇답니다. 전하의 심중일랑 어찌 제가 짐작을 못 하겠나이까. 장차 세손빈이 될 간택인이 지은 옷을 입고 인사를 드리고 싶으신 것이겠지요. 하지만 자칫하다간 엉뚱한 사람이 빈씨의 자리에 앉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것이 근심이랍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손빈을 들이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의 마음으로 되는 일이랍니까. 이미 조정 대신들의 논의가 있었고, 또한 중전마마를 비롯한 내명부 어른들의 의중이 명확하거늘.”

“하오나 옹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주상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품으시면 끝내 원하는 대로 하시는 것을요. 그러나 정작 문제는 전하가 아니옵니다.”

“전하가 문제가 아니다? 그럼 다른 문제가 또 있단 말이오?”

“그것이…….”

문 소원의 음성이 낮아졌다.

“사실, 하궐에서 이번 세손빈 간택에 유난히 관심을 기울이신다 합니다.”

“세자저하께서 말이오?”

“네.”

“소원의 낯빛이 좋지 못한 게 그 일 때문이었소?”

“아무렴요. 옹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낯선 궁에 소인에게 뉘가 있겠나이까. 옹주께서 아니 계셨다면, 외로움을 차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그런 차에 간택이 있고, 마침 빈씨로 내정된 분과 오랜 친분이 있어 내심 기뻐하였는데. 이러다 엉뚱한 사람이 빈씨가 되어 혹여 우리 모자를 눈엣가시로 생각할까, 두렵고 또 두렵습니다.”

문 소원의 눈가로 거짓 눈물이 흘러내렸다.

화완옹주는 그 뻔한 거짓에 화들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지. 소원이 품은 아기씨가 어디 보통 아기던가? 어미의 근심이 아이에게도 전해질 것인데. 근심이라니. 그런 소린 입에 담지도 마오.”

“제 생각을 해주시는 분은 옹주마마뿐이시옵니다.”

문 소원은 소매로 눈 아래를 찍어냈다.

소맷자락으로 가려진 입술이 앙큼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화완옹주의 다급한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 내가 무얼 하면 되겠소?”

“큰일은 아닙니다. 그저 이번 시험에서…….”

문 소원은 화완옹주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귓속말을 전해 들은 화완옹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이오?”

“어렵겠나이까?”

“내 이미 한 번 은밀히 손을 쓴 일도 가벼운 것이 아니거늘. 이번에 다시 그리한 것이 밝혀진다면 아바마마께서 용서치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겠지요. 저도 무리한 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못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옹주를 찾아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괜한 말로 옹주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였나이다.”

다시 눈물을 찔끔거리는 문 소원은 보니 화완옹주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 울면 어찌하오.”

“송구합니다. 안 울려고 하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이런, 딱한 사람을 보았나.”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문 소원을 보며 옹주는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 문 소원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무슨 일을 못 할까. 걱정 마오. 내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니.”

문 소원의 낯빛이 금세 밝아졌다.

“정녕 그리해 주시겠습니까?”

“내 그간 소원에게 받은 정성과 마음이 얼마인가.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지. 안 그렇소?”

“아무렴요. 전 옹주마마만 믿고 있나이다.”

“시간이 부족하니, 내 서둘러 움직여야겠소.”

화완옹주를 바라보는 문 소원의 눈가가 길게 늘어졌다.

***

원하는 바, 목적을 이룬 문 소원은 거만한 자태로 용화전을 나섰다.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도 상궁이 조용히 물었다.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아무렴.”

문 소원은 교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남에게 떠받들어지기만 한 어리숙한 여인의 마음 하나 휘두르는 건 내겐 일도 아니니라.”

그녀는 내궁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내 지금은 하찮은 소원에 불과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곧 내명부의 가장 높은 자리가 내 치마폭으로 떨어질 것이니라.”

숨을 깊게 들이마신 문 소원은 교만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문 소원이 떠나고 얼마 후.

용화전 소속의 어린 궁녀가 밖으로 나왔다.

전각의 대문을 지키고 선 군졸이 궁녀가 들고 나온 보따리에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뭐냐?”

어린 궁녀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낯빛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옹주마마께서 보기 싫다 하시며 당장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보자기 속엔 국화꽃과 나비가 수자 놓인 베갯잇이 들어 있었다.

***

밤이 깊었다.

저녁 내내 퍼붓던 눈은 어느덧 그쳤다.

창을 열어보니 푸른 달밤이라.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어떤 분을 만나게 되려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서탁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신비한 힘을 품은 서탁은 밤이 되면 다른 세상을 여는 통로가 되었다.

이레는 그곳에서 다양한 존재를 만났다.

정성 들여 먹을 갈고 붓을 세웠다.

-맑은 달밤입니다.

그녀의 글이 살결에 닿은 눈송이처럼 백지에 녹아들었다.

곧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아이야, 잘 지냈느냐?

이레의 안부를 묻는 인자한 글.

“화할아버지.”

화는 이레가 가장 처음 서탁을 통해 만난 백귀였다.

친할아버지를 잃고 슬피 우는 이레를 다독여주신 할아버지.

이레를 ‘아이야’라며 자상하게 불러주시곤 하였다.

화할아버지는 언제나 아늑했다.

추운 겨울,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아랫목의 따뜻한 이불 속처럼 포근한 분이셨다.

화할아버지는 또한 신중하셨다.

온화하지만 도리를 중시하고, 너그럽지만 위엄을 잃지 않았다.

-아직도 성불하지 않았느냐?

퉁명스레 물어보는 백귀는 상할아버지였다.

글도 급하고 성격도 직설적인 분.

얼핏 까다로운 성정 같아 보이나, 불퉁한 말투와 달리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상할아버지는 자칫 감성에 치우칠 수 있는 대화에 냉정한 시각과 객관적인 균형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특히, 인간관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은 이레에게 사람의 내면을 살피는 깊은 통찰력을 심어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차구나.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예할아버지.”

화가 자상한 할아버지이고, 상이 엄한 할아버지라면, 예는 잠들기 전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셨다.

옛 성현의 좋은 말씀과 조언은 언제나 예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 예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따라 이레는 수많은 세상을 넘나들었다.

천하를 호령한 영웅과 슬픈 운명의 가인, 위대한 왕의 포부를 예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대신 경험할 수 있었다.

-오늘도 내가 마지막이로군.

마지막으로 나타난 백귀의 글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악할아버지.”

악은 이레가 가장 최근에 만난 분이었다.

명필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다른 분들과 달리 악할아버지의 글은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악필이었다.

지금은 적응하였지만, 처음엔 글을 읽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엉망인 글씨와 달리 악할아버지는 다재다능했다.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고, 어떤 주제로 대화해도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악할아버지의 호기심은 무한하였다.

세상의 크고 잡다한 모든 일은 물론이고, 세상 밖의 일까지 모든 것을 궁금히 여겼다.

덕분에 이레가 갈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전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시곤 하였다.

이레는 고마움과 존경을 붓끝에 실었다.

-저는 무탈하였습니다. 할아버지들껜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짧은 말에 곧 다양한 반응들이 돌아왔다.

화는 언제나 그랬듯 인자하게 답했다.

-듣고 있단다, 아이야.

상은 의심부터 했다.

-뜬금없이 웬 감사 인사냐?

예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무탈하였다니 다행이구나.

악의 대답은 예리했다.

-너의 글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지는구나.

“떨림이라…….”

악의 말에 이레는 낮의 일을 떠올렸다.

온종일 바쁘고,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일뿐이었다.

이 많은 사건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이레는 고민했다.

그녀의 침묵에 상이 호기심을 보였다.

-조용한 걸 보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악의 추론이 이어졌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재간택과 관련한 일일 테지. 떨어지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더니, 요즘엔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 같더구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신 것 같구나.”

이레는 붓을 들고 오늘 겪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재간택 시험에 대비하려 유경과 시전을 헤맨 일.

명예살인으로 희생될 뻔한 과부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킨 한 사내의 이야기.

할아버지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청상의 이야기엔 분노와 탄식을.

그녀의 곁을 지킨 한 사내의 이야기엔 그의 고지식함을 질타하고, 현실적인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이레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했다.

불손이 실은 은자원의 은백이었으며, 또한 세손이었음을.

또한, 그분께 전력으로 간택에 임하겠노라 다짐한 일을.

속삭임으로 전한 다짐,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차마 수줍어 전하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특정한 내용이 할아버지들께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세손. 그리고 세손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덕분에 이레의 말을 오해한 백귀도 있었다.

상의 반응이 그러했다.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린 그만둬라.

“역시 안 믿어주시는구나.”

이레는 상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도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었으면 믿으려 하지 않았을 테니.

다행히 이레의 말을 의심하는 분은 상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심지어 악은 서탁이 전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미루어 짐작하였다.

-은백이라는 녀석의 정체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구나. 필시 네가 간택에 전력으로 임하려는 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터.

상이 악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악. 설마, 아이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못 믿을 건 또 뭐냐.

-말이 안 되는 소리. 불손이라는 백귀가 사람이면, 그럼 너와 다른 녀석들도 모두 진짜란 말이냐? 여기 있는 모두가 왕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악이 상에게 물었다.

-그럼, 넌 아이가 잘못되길 바라느냐?

상이 버럭 했다.

-잘못되긴 누가 잘못돼? 감히,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이름만 대라. 내 풍비박산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마.

어지러운 논쟁이 가라앉자 악이 다시 말했다.

-간택은 보통 내정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네 말을 들으니, 이미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하던데. 쉽지 않은 길이 되겠구나.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와 화의 글이 이어졌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뛰어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큰 결심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번민이 있었을 터. 자신을 가져라. 아이야, 넌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어여쁘고 현명하니.

할아버지들의 응원과 격려에 이레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모두 이분들께서 지탱해주셨던 덕분이다.

할아버지들께서 아픔을 위로해주시고, 상처를 다독이며, 아낌없이 지혜를 나누어주셨기에 가능했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할아버지들을 믿기에 감히 세손빈이라는 염원을 품어볼 수 있었다.

화의 글이 떠올랐다.

-아이야, 우리가 도와줄 일이 없느냐?

결의를 다진 이레는 붓을 세웠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정성 들여 글을 썼다.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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