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아직 할 일이 남았소
형운은 홍인모에게 여인을 방에 눕히라 했다.
이레가 의식을 잃은 그녀를 살폈다.
이부자리를 돌본 이레가 밖으로 나오자 형운이 물었다.
“어떻소?”
“숨이 고른 것으로 보아 혼절한 듯싶습니다. 홑몸도 아닌 사람이라 걱정됩니다.”
“사람을 시켜 의원을 부르라 하였소.”
“잘하셨습니다.”
둘의 대화에 장무열이 끼어들었다.
“여인을 어디에서 찾은 것이오?”
“우연히 근처를 지나는데, 웬 사내가 커다란 자루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소. 자루의 크기와 형태가 심상치 않아 앞을 가로막고 물어보니 짐작대로 여인을 납치한 자였더군.”
“그래서 그자를 잡고 청상을 구하였단 말이로군. 하면, 범인은 어디에 있소?”
형운은 홍인모에게 고개를 돌렸다.
“곧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온 홍인모는 서른 중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장한을 끌고 왔다.
심한 매부리코를 가진 자였다.
장무열은 눈빛을 빛냈다.
“네놈이 여인들을 납치한 ‘의적’이란 괴한이냐?”
매부리코는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저는 의적이 아닙니다.”
장무열이 잡곡이 든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주머니는 뭐냐? 왜 회임한 여인을 납치하였느냐?”
“혼자 사는 처지니, 서로의 외로움을 덜 수 있을 듯하여……. 회임한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절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머니는 뭐냐?”
“누가 의심할까 두려워서. 소문으로 들으니 의적이란 자가 그런 주머니를 두고 여인을 데려간다 하여…….”
장무열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여인에게 관심이 있었으면 마음부터 얻을 생각을 하여야지. 편치도 않은 여인을 다짜고짜 보쌈하였단 말이냐? 게다가 제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울 흉계까지 짜내었으니. 네놈의 죄가 가볍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렷다.”
장무열은 홍인모에게서 매부리코 장한을 넘겨받았다.
작금의 상황이 어떻든.
도움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장무열은 형운과 홍인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수사에 협조해주어 감사하오.”
“우연이었을 뿐이니, 감사할 필요까지는 없다.”
장무열은 이레에게도 양해의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 자를 내 직접 조사해야 할 것 같소.”
“마땅히 소임을 다해야 할 테지요.”
이레의 이해를 구한 장무열은 매부리코 장한과 함께 사라졌다.
“은백.”
장무열이 사라지자 이레가 형운에게 다가갔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쳤다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형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오. 실은 그대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오.”
하나 숨김없는 진솔한 대답에 이레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 이레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환자가 누워 있기엔 냉골입니다. 군불이라도 때야겠습니다.”
부엌으로 향한 이레의 표정이 무안해졌다.
뗄 나무가 없었다.
“나무를 사와야겠습니다.”
달아나듯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녀를 형운이 잡았다.
“이미 사람을 보냈소.”
형운의 말에 이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홍인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리 보시오?”
“매사에 늘 준비하고, 철저히 대비하시는 걸 보니 제가 아는 은백이 맞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달리 누가 또 있겠소?”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근래의 은백은 이레가 알던 사람과 여러모로 차이가 있었다.
예전과 달리 과감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변했다.
언제나 어두운 은자원 구석에서 숨어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이와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은자원에 숨어 있으려 하지도 않았고,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 변화가 생경하면서도 또한, 싫지 않았다.
예전의 그 조심스러운 성격도 좋았지만, 저를 보는 부드럽고 단단한 눈빛 또한 더없이 좋았다.
그 사이, 홍인모가 나무를 구해왔다.
이레가 부엌으로 가자 형운이 따라 들어왔다.
마른 솔가지를 꺾는 이레를 보며 형운도 덩달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리 주시오.”
그는 아궁이에 솔가지를 집어넣었다.
“이런 것도 할 줄 아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형운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것도 못 하는 사내가 있소?”
***
“……사내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있구려.”
연기 자욱한 아궁이 앞에서 형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궁이에 엎드려 열심히 입바람을 불어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매운 연기만 풀풀 일어날 뿐이었다.
“재가 쌓인 모양입니다.”
아궁이 안을 살핀 이레가 부삽으로 재를 끌어냈다.
청소가 끝난 아궁이에 다시 불을 지피자, 내내 매운 연기만 내뿜던 솔가지에 불길이 활활 살아났다.
“어찌한 것이오?”
“아궁이를 오래 쓰지 않아 안쪽에 재가 많이 찼습니다. 그것을 끌어내지 않고 불을 지피면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되레 불을 지피는 곳으로 나오기도 하지요.”
노랗게 타오르는 불을 보며 형운은 생각에 잠겼다.
‘아궁이에 불을 일으키려면 먼저 쓸모없어진 재부터 긁어내야 한다.’
어딘지 모르게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먹을 걸 만들어봐야겠습니다.”
이레는 여인에게 무언가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부엌을 살폈다.
항아리와 광을 열어보았지만, 딱히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잡곡으로 미음을 끓였다.
구수한 음식 냄새가 퍼지자 이레는 형운 곁에 앉았다.
형운은 제 곁에 얌전히 앉은 이레를 힐끗 곁눈으로 응시했다.
아궁이 앞에 나란히 앉아 있자니, 지난 추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단양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
나룻배의 좁은 난간에 나란히 앉아 풍광을 즐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짧은 여행이었지만, 형운의 삶을 통틀어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에 이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왜 그리 웃으시오?”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묻었습니다.”
불을 피우는 데 열중한 나머지 얼굴에 재가 묻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형운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닦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재는 점점 더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렇게 하면 더 번집니다. 거기 말고 그 아래쪽을 닦아야…….”
보다 못한 듯 이레가 제 소맷자락으로 형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뒤늦게 급히 손을 거뒀다.
“송구합니다.”
서둘러 자리에 앉은 이레는 부지깽이로 불을 뒤적거렸다.
붉은 불티가 파르르 허공으로 솟구쳤다.
불씨를 쫓던 형운이 이레를 돌아보았다.
노란 불길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차마 감당하기 힘든 뜨거운 시선에 이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뒷덜미로 그의 목소리가 굴러떨어졌다.
“실은 오늘 그댈 찾아갔었다오.”
“어디로요? 우리 집으로 왔었단 말입니까?”
“그렇소. 하필이면 그대가 출타하였다는 말에 시전을 헤맸지.”
“…….”
“그러다 우연히 보았소. 의원에서 장 장령, 아니 은호와 함께 나오는 그대를.”
“……!”
이레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내와 단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
저 마음에 섣부른 오해라도 깃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장무열과 함께였으니.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형운의 이야기에 이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의원에서 들은 이야기는 더 놀랄 일이었소. 여인이 회임하였다 하지 않겠소?”
귀 기울이던 이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참으로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무엇 때문에 의원을 찾아왔느냐는 물음에 여인의 회임 때문이었다고 답하였겠지.
그러나 정작 그 여인이 누군지는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였다.
사정이 어떻건 간에 형운의 입장에선 오해하기 좋을 상황이었다.
이레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닙니다. 전 절대…….”
“알고 있소.”
형운은 낮은 목소리로 이레의 놀란 가슴을 다독였다.
“처음엔 놀라긴 했소. 하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 생각하였지.”
형운은 이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은랑은. 이레라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 믿었소.”
잔잔한 목소리로 건넨 형운의 속내에 이레는 가슴이 짜르르했다.
“……그래서 이곳에 앞서 오신 거로군요.”
“의원을 찾아가 제대로 물으니, 치료한 여인이 따로 있다고 알려주었소. 다행히 사는 곳을 알게 되어 질러올 수 있었소.”
“그리고 마침 큰 자루에 사람을 담아가는 괴한을 발견하였고요?”
“그런 셈이오.”
실은 그 자루에 든 사람이 이레인 줄 알았다.
그래서 불문곡직한 채 납치범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까지는 이레에게 전하지 않았다.
형운은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간혹, 혼자 사는 과부를 딱하게 여겨 보쌈이라는 형태를 빌어 재가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벌건 대낮에 혼절한 여인을 납치할 정도인 줄은 몰랐구려.”
“그 사람이 이상하고 과격한 것이었겠지요. 그래도 은백께서 계시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 서로의 간격이 너무 가깝다는 사실을 느끼고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미묘한 정적이 얼마간 이어졌다.
“음…….”
방안에서 희미하게 신음이 들려왔다.
“정신이 든 모양이오.”
형운의 말에 이레가 몸을 일으켰다.
작고 가녀린 몸피였건만.
그녀가 일어서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형운은 제 옆자리를 뜨는 이레를 잡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살피러 가는 사람에게 차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텅 빈 곁자리를 보았다.
불 피운 아궁이가 전해주는 온기는 여전하기만 한데,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
“제 신세가 어찌 이리 박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레가 준 미음을 먹고 정신을 수습한 청상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입에서 서러운 사연이 흘러나왔다.
지아비가 죽고 시댁에선 열녀문을 받기 위해 명예 살인을 시도했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졌지만, 집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출가외인이라며 친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량한 신세.
이 와중에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 피붙이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잉태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했다.
하지만 과부가 홀로 살아가기엔 세상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문밖 툇마루에 앉아 청상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형운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실은 형운도 청상을 알고 있었다.
실종된 이레를 찾기 위해 양화사로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난 인연이 있었다.
명예 살인과 관련한 처리와 보고 또한 그가 맡아서 했다.
당시 그는 열녀문을 받으려 며느리를 죽이려 한 가문의 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만천하에 공개했다.
또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각별한 관심을 당부하였다.
비록 하급관원의 신분으로 올린 보고라 하나, 그 일을 뒤처리가 이토록 엉망이었을 줄이야.
“돌아가면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겠구나.”
형운은 씁쓸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은백.”
부르는 소리에 형운은 고개를 돌렸다.
홍인모였다.
그가 낯선 사내 하나를 끌고 나타났다.
“웬 자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이곳의 동태를 살피는 자였습니다. 거동이 수상하여 일단 잡아들였습니다.”
형운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넌 누구냐?”
“그러는 그대야말로 누구요?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 이곳의 주인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생각이오?”
팔이 꺾인 상황에서도 사내는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적의를 드러냈다.
예의 납치범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형운은 흥미가 생겼다.
“너도 이곳의 여인을 보쌈할 생각이었는가?”
형운의 물음에 사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얼굴에 무서운 분노가 깃들었다.
“보쌈이라니!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사내의 진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척하며 형운은 다시 물었다.
“보쌈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째서 이곳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냐?”
“그것은…….”
사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홍인모가 칼을 뽑아 목에 겨눴다.
“뉘 앞이라고 감히 답을 숨기느냐? 바른대로 말하지 못할까.”
“여, 연모하고 있소.”
“연모?”
형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렇소. 연모.”
“연모한다는 자가 주위를 서성인단 말이냐? 필시 딴마음이 있어 그리했으렷다?”
“아니오. 저 여인과 어찌해보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소. 다만…….”
“다만?”
“집안의 반대가 워낙 심하여……. 실은 조금 전까지도 갇힌 신세였소. 저 사람이 너무도 보고 싶어 갖은 수를 짜내어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오.”
사내는 다름 아닌 장무열의 형, 장선제였다.
장선제의 대답에 형운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빠져나와서 한다는 짓이 고작 훔쳐보는 것이냐?”
“그대가 내 답답한 사정을 어찌 알겠소. 내 가문의 체면과 위신이 내 두 어깨에 걸려 있으니. 입이 있어도 함께 하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다가가지 못하며, 팔이 있어도 보듬어주지 못하오.”
사내의 애끓는 속내에 형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체면과 위신이라…….”
사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집안의 사정과 여인을 향한 연모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을지, 직접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문득, 백귀의 말이 떠올랐다.
“뜻이 있으면 정성을 다하라. 결코, 부서짐을 두려워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형운은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를 얼마나 원하는가?”
사내가 불타는 눈으로 투쟁하듯 대답했다.
“저 사람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소!”
“저 여인을 잃으면 천하를 잃음과 같을진대.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무엇인가?”
“……!”
사내의 눈이 커졌다.
형운의 말은 그의 가슴에 큰 울림을 전해주었다.
마지막 미련을 털어내듯 주먹을 으스러지라 쥔 그가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지 마라.”
홍인모가 위협의 의미로 목에 가벼운 자상을 만들었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큰 가르침 감사합니다.”
사내가 형운에게 허리를 숙였다.
고작 몇 마디 말에 불과하였지만,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달리 무엇이 두려울까.
사내는 여인이 있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형운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 여인, 아이를 잉태 중이다.”
“알고 있습니다.”
답하는 사내의 표정엔 한 줌의 거리낌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 청상의 방에서 나오던 이레가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무심한 얼굴로 이레를 지나쳤다.
그러곤 문앞에 섰다.
이윽고 당당한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흔들었다.
“계시오. 나는 장선제라 하는 사람이오. 오늘 그대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찾아왔소.”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무거운 침묵 끝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볼일이신지는 모르나, 남녀가 유별하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거부의 뜻에도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몸이 편치 않다는 건 알고 있소. 하나, 오늘이 아니면 다시 못할 이야기가 있소. 그러니 불편하고 불쾌하더라도 들어주시오.”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레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굳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형운이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장 장령님의 형님께서 이곳엔 어찌 계시는 겁니까?”
“긴요하게 꼭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오. 그러니 우린 자리를 피해줍시다.”
형운은 이레의 손을 꼭 잡고 청상의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의 귓전으로 사내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 어린 표정의 이레와 달리 형운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
나란히 길을 걷던 이레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눈이 내립니다.”
하늘에서 하얀 꽃가루가 떨어졌다.
올해 첫눈이었다.
내리는 눈이 이레의 머리 위에서 봄꽃처럼 나붓거렸다.
형운은 하얀 눈과 어우러진 그녀의 하얀 얼굴을 보았다.
선명한 검은 눈썹.
맑고 투명한 숲 속에 잠긴 별.
콧등에 떨어져 내리는 눈에 시샘이 난다.
형운은 걸음을 멈췄다.
두 걸음 더 앞서 걷던 이레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유를 묻는 시선에 형운이 입을 열었다.
“은랑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었소.”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지난밤, 그대의 대답.”
“…….”
“세손궁에서 기다리겠단 물음에 그댄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소.”
“……그리하였지요.”
“실은 그 말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몰라 밤잠까지 설쳤다오.”
“……아직도 모르십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잘 모르겠소. 하나, 아무래도 상관없소. 내가 분명히 하면 될 터이니. 내가 누구인지, 그 진실한 모습을…….”
형운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레가 성큼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녀의 고개가 가까워졌다.
갸름한 얼굴이.
눈이.
코가…….
마침내 포개지듯 가까워진 입술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력으로 임하겠습니다. 세손…… 저하.”
형운의 눈이 커졌다.
“이제 모든 의문이 풀리셨습니까? 은백.”
향기로운 속삭임을 담은 그녀의 입술이 멀어져간다.
어딜 감히!
형운은 왼팔로 수줍음 가득한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아직 의문이 남았소.”
형운의 오른손이 이레의 작은 얼굴을 받쳐 들었다.
거친 손길에 머리를 덮은 쓰개치마가 아래로 떨어졌다.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 이레의 입술 위로 형운의 고개가 미끄러져 내렸다.
부드러운 감촉 사이로…….
아릿한 전율이 일었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은밀한 숨결이 오고 갔다.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우수수 하얀 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시리도록 하얀 설원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박제된 세상에 존재하는 건 오직…….
이레와 형운, 두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