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70화 (70/215)

#70.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른 아침.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번잡함이 벽을 통해 전해졌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마당을 가로지르는 분주한 발걸음.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와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귀에 익은 익숙한 소음들.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이레는 입가를 길게 늘였다.

오랜만에 내 방의 내 이부자리 안에서 보내는 포근한 시간.

아랫목은 따뜻했고, 문틈으로 파고드는 청명한 바람은 기분 좋게 서늘했다.

이레는 태어나 처음으로 게으름을 떨었다.

마음이 풀리니 경직된 몸마저도 느른해졌다.

그렇게 나른하고도 포근한 시간을 즐기고 있자니,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언니.”

해맑은 웃음으로 별채를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유경이었다.

“네가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더냐?”

이레는 유경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모처럼 집에서 쉬지 않고서?”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어요. 아침에 눈 뜨기 무섭게 궁에서 어찌 지냈는지 시시콜콜 캐묻는 바람에 도망치듯 나왔지 뭐여요.”

“그랬구나.”

“참, 그 소식 들으셨어요?”

유경은 앉자마자 종알종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무슨 소식?”

“구연재와 최미옥이 칭병을 핑계로 다음 시험을 포기한대요.”

“시험을 포기해?”

“저도 건너 들은 이야기인데, 간택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하기로 약조한 것이래요.”

“재간택에서 떨어지기로 사전에 합의하였다는 말이야?”

“이미 세손빈 자리는 내정되어 있다잖아요. 하지만 지켜보는 눈과 귀가 있으니, 명분과 구색에 맞추기 위해 재간택에 오를 사람을 미리 뽑아 놓은 것이지요.”

“이번에 포기한 두 사람이 그런 경우란 말이구나.”

“내정된 대로 대제학의 집안에서 세손빈이 나오면 그 대가로 구연재와 최미옥의 집안에 벼슬을 약조하였다 해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이레는 그들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관직과 권력은 공평하고 공정한 심사를 거쳐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앉아야 하거늘.

현실은 할아버지들에게 배운 이상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세손의 혼인조차 거래의 대상이 될 줄이야.

“정말 대단한 게 뭔 줄 아셔요? 이 모든 일이 간택령도 내리기 전에 계획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뜻대로 되겠어요?”

유경이 무에 재밌다는 듯 입가를 길게 늘였다.

“왜? 무슨 변수라도 생겼어?”

“생겼지요. 바로 언니라는 변수가요.”

“나?”

눈을 동그랗게 뜬 이레에게 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였다면, 그들 두 사람의 포기로 대제학의 여식이 홀로 삼간택에 오르는 것으로 확정되었겠지요. 그런데…….”

“나라는 엉뚱한 사람이 끼어들었구나.”

“네. 그들의 치밀한 계획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계획과 다르게 재간택 된 사람은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데?”

이레는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유경을 응시했다.

유경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야 구색이나 맞추자는 심산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아무튼, 계획에도 없던 일로 인해 그쪽에선 지금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다음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팔도에서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다 하는데, 하나같이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장인(匠人)들이래요.”

“다음 시험을 위해 미리 연습이라도 할 요량이구나.”

“언니,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 때가 아니에요.”

명선의 동태를 알린 유경은 이레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우리도 준비해야 해요.”

동의하듯 이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이미 약조하였다.

전력을 다하겠다고.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리 맥 놓고 있어선 아니 될 것이다.

“시전에 가보는 건 어떨까요? 조선 최고의 장인들을 들이진 못해도 앞으로 어떤 비단을 만지고 어떤 수를 놔야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거예요.”

***

품은 뜻은 가상하였으나.

두 여인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무얼 찾으신다고요?”

“주상전하의 구장복을 만들 비단을 사러왔네.”

이레와 유경의 당당한 주문.

주인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유, 아가씨들. 이런 면포전에 와서 어찌 그런 귀한 비단을 찾으신대요?”

“구할 수 없는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요.”

“그럼 어디에서 파는지 알려줄 순 있는가?”

“다른 분도 아닌 나라님께서 입으실 옷인데. 시전 어느 곳을 가셔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그런가?”

결국, 두 사람은 빈손으로 면포전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경은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언니, 다른 곳에 가봐요. 분명 취급하는 곳이 있을 거예요.”

“아마 다른 곳의 상황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좀 전에 들은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마셔요. 아마 제 점포에 물건이 없어 심통을 부린 것일 거예요.”

면포전 주인을 의심하는 유경에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말이 틀리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주상 전하께서 입으실 옷이야. 그런 비단을 쉽게 구할 수 있을 리 없어.”

상인 입장에서도 언제 팔릴지 알 수 없는 고가의 물건을 애써 들여놓을 이유가 없다.

그 돈이라면 면포를 더 들이고 말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애써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운을 돋우던 유경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레는 낙심한 유경에게 애써 미소를 보였다.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옷감만이 아니야. 바느질도 중요하고, 자수도 필요해.”

유경은 아이처럼 금세 밝아졌다.

“맞아요. 언니. 우리 다른 곳도 찾아봐요.”

두 여인은 시전 곳곳을 살폈다.

그러나 임금께서 입으시는 구장복에 관해 아는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림자가 짧아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무작정 발품을 판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아.”

이레는 이번 시험이 단순히 옷을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유경도 동의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돌아가서 부모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괜히 옷감 이야기를 꺼내서 네가 고생하였구나.”

“아니에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전 아직도 포목점만 뒤지고 있었을 거예요. 전 이만 돌아갈게요. 너무 오래 걸었더니, 다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어요.”

“그래.”

“다음에 궁에서 만나요.”

지친 유경은 유모와 함께 돌아갔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꼭 알려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홀로 남은 이레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의욕으로 가득하였는데.

반나절을 꼬박 뛰어다녔어도 정작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형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의 약조를 떠올리니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졌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얼마나 옮겼을까?

약방이 몰려있는 구리개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레의 시야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큰 봇짐을 머리에 이고 걷는 여인의 뒤태.

어쩐지 눈에 익었다.

미간을 여며 여인을 살피던 이레는 곧 한 사람을 기억해냈다.

할아버지의 제향일에 찾아간 양화사.

그곳에서 만났던 청상과부.

비에 젖은 이레를 위해 스스럼없이 제 옷과 방을 내어준 고마운 사람.

젊은 나이에 지아비와 사별하고 시부모에 의해 명예살인 당할 뻔한 기구한 사연의 여인이었다.

또한 잠시 혼담이 오간 장무열의 형, 장선제가 마음에 품은 여인이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니 참 여러 갈래로 이어진 인연이었다.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이레는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그때였다.

봇짐을 이고 걷던 청상이 몸을 휘청거렸다.

단순히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위태롭게 걷던 그녀는 끝내 풀썩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놀란 이레는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청상은 눈을 감은 채, 기식이 엄엄하였다.

“이보시오. 왜 이러는 겁니까? 정신 차리세요.”

몸을 흔들어도 혼절한 여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실신한 사람을 그리 흔들어선 아니 되오.”

낯익은 음성과 함께 훤칠한 사내가 나타났다.

“장 장령님.”

“반갑소.”

“이곳엔 어찌……. 혹여, 또 제 뒤를 밟으신 것입니까?”

장무열은 청상을 눈짓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그대가 아닌 이 여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소.”

“이분을요?”

이레는 장무열과 청상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과부가 어사의 관심을 끌 이유가 무얼까.

이번에도 속내를 읽은 듯 장무열이 대답했다.

“내 형님의 부탁이었을 뿐이오. 그보다 이 사람을 부축해야 하니, 도와주시오.”

장무열은 혼절한 청상을 등에 업고 근처의 의원을 향했다.

은인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이레도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

“회임입니다.”

의원의 말에 이레와 장무열은 동시에 멍해지고 말았다.

“회임이라면…… 아이를 가졌단 말이오?”

장무열의 물음에 늙은 의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맥의 세기로 보아 적어도 대여섯 달은 된 것 같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장무열의 입이 굳게 닫혔다.

여인의 복잡한 신세를 아는 이레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의원이 앙상하게 야윈 청상의 몰골을 보며 혀를 찼다.

“아이를 품은 여인이 어찌 이리 엉망인지.”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몸이 엉망이라 한 소리요. 회임한 여인의 맥이 끊어질 듯 약하니, 필시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인데. 쯧쯧, 이대로 무리하다간 아이도 어미도 성치 못할 겁니다.”

의원은 힐난 담긴 눈길로 장무열을 응시했다.

아마도 그를 여인의 지아비로 착각한 모양이다.

“나는…….”

장무열이 반박하려 했지만, 의원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우선 이 약방문에 적힌 약초를 구해 푹 달여 드시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쇠잔한 기력을 조금이나마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됩니다. 먹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약방문을 장무열의 손에 올려준 의원은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하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요를 깨고 장무열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재차 변명하는 그에게 이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형님께선 어찌 아니 보이십니까?”

청상의 곁엔 언제나 장무열의 형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았지만,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던 사내였다.

“……사정이 있소.”

그의 표정에서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딜 가려 하오?”

“약방문에 적힌 약초를 구해야지요. 그리고 뭐든 먹게 해야지 않겠습니까.”

힘들게 사는 줄은 알았지만, 끼니마저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줄은 몰랐다.

“함께 갑시다.”

이레와 장무열은 의원 집과 이웃한 약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방문에 적힌 약재와 기력 회복에 도움되는 약초 몇 가지, 그리고 음식재료를 구해 의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청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환자를 살피던 의원은 여인이 사라진 줄 모르고 있었다.

허드렛일을 돕던 어린아이에게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젠 괜찮아졌다며 댁으로 돌아간다 하셨습니다. 두 분께 남긴 말도 있습니다. 뉘신지는 모르나, 돌봐주어 고맙다고. 사는 곳을 남겨놓고 가시면 훗날 은혜를 꼭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레는 여인이 누웠던 곳을 보았다.

기력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을까.

머리에 이고 있던 커다란 보따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힘든 와중에도 일감을 챙겨간 것이다.

***

장무열과 의원을 나서니, 해가 서쪽으로 제법 기울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청상의 집으로 걸음 방향을 잡았다.

여인의 상태도 걱정되었고, 약방에서 구한 약재와 약초도 건네야 했다.

가는 동안, 장무열에게서 그의 형과 관련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형님께선 감금되었소.”

청상의 일로 방황하는 형의 모습이 끝내 부모의 눈에 띈 모양이다.

대를 이을 장남이 과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전전긍긍한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대로했다.

그 일로 장선제는 광에 갇히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의 아버지는 물 한 모금 주지 말라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장 장령님께서…….”

“형이 간절히 부탁하더이다.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동정을 살펴봐 달라고. 그 지경이 되어서도 여전히 미련을 거두지 못한 모양이오.”

직접 듣지 않아도 장선제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동조하기도, 그렇다고 옳지 않다 말하기도 어려워 이레는 아픈 얼굴로 묵묵히 걸었다.

시전의 좁은 뒷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따개비처럼 따닥따닥 붙어 있는 낮은 지붕의 초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상의 집은 그중 가장 외진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계십니까?”

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의 사립문 밖에서 이레가 주인을 불렀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방 두 개가 달린 초가는 고요하다 못해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집에 오지 않고 딴 곳으로 간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던 이레의 눈에 툇마루 아래에 아무렇게나 놓인 짚신 한 짝이 보였다. 나머지 한 짝은 마당 한구석을 뒹굴고 있었다.

어쩌다 신이 저곳까지 굴러간 걸까?

홀로 앓느라 신을 챙길 여력도 없었던 것일까?

그때 장무열이 사립 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거침없이 달려간 그는 비스듬히 열린 방 문고리를 잡고 큰 목소리로 물었다.

“계시오? 급한 용무로 찾아왔으니 계신다면 대답해 주시오.”

여전히 답이 없었다.

장무열은 이레를 돌아보았다.

홀로 사는 여인의 방이다.

아무리 어사라 하지만, 외간 사내가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이레가 장무열을 대신하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의 방은 궁핍한 삶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세간살이라고는 나무로 만든 낡은 옷장과 허름한 이부자리뿐이었다.

등잔의 기름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한때는 귀한 집안의 금지옥엽으로,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살았던 인생이었을 터인데.

방 한쪽에 놓인 고급스러운 연분홍빛 자개경대가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여 더욱 서글펐다.

여식이 시집을 갈 때 어머니가 선물하는 것이 자개경대라 하였던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비단옷을 팔고, 땔감을 사기 위해 패물을 팔아도 저 경대만은 팔지 못한 것이리라.

그런 자개경대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부자리는 베개와 더불어 제멋대로 바닥에 펼쳐졌고, 낡은 장롱의 문도 활짝 열린 채 그 속내를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문밖에서 장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소?”

“옷장은 활짝 열려있고, 펼치다 만 이부자리가 어수선하게 널려있습니다. 곳곳에 누군가 급하게 뒤진 흔적이 있습니다.”

“도둑의 소행 같아 보이오?”

이레는 꼼꼼하게 실내를 살폈다.

우선 눈에 띈 건 일감 보따리였다.

몸이 불편한 와중에서도 꼼꼼하게 챙긴 일감.

그 옷 보따리가 풀려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일을 하려 했다. 하지만 어지럼증이 나서 일을 할 수 없었겠지. 그래서 잠시 누우려고 이불을 폈고, 그 와중에…….’

이레는 부서져서 제대로 닫히지 않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도둑이나 낯선 사람의 침입이 있었을 것이다.

방 이곳저곳에서 몸싸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으리라.

홑몸도 아닌 데다, 몸도 정상이 아니었으니…….

만약,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전신에서 경련이 일 정도로 두려웠다.

저도 모르게 몸을 떨던 이레는 문득 눈매를 매섭게 여몄다.

‘저건?’

방문 근처에 놓인 작은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주먹만 한 주머니 안엔 잡곡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상하네.’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사람이 귀한 곡식을 아무렇게나 보관하다니.

자연스럽지 않았다.

“잡곡이 든 주머니가 놓여 있습니다.”

“……의적!”

장무열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이레가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 주머니에 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장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해 전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몰래 곡식을 나눠주는 자가 있었소. 사람들은 그의 은혜를 칭송하며 의적이라 칭하였소.”

“의적이라면, 도적질로 남을 돕는다는 의미일 텐데.”

“도적 맞소.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곡식을 주로 탐관오리나 부덕한 상인의 창고를 털어 마련하였으니 말이오.”

“그렇군요.”

도적질한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니, 의적이라 불리는 것도 이해되었다.

장무열의 설명이 이어졌다.

“관청에서도 오래전부터 이 자의 행실을 알고 있었소.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었다곤 하지만, 남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니. 이는 명백히 국법을 어긴 것이오.”

“…….”

“하나, 이 자의 움직임이 워낙 재빠르고 신출귀몰하여 좀처럼 꼬리를 잡지 못하였소. 그러던 차에 두 달 전부터 의적이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소.”

“기이한 행동이라니요?”

“의적이 곡식을 나눠주는 대신, 한 가지를 훔쳐 가기 시작했소.”

“무얼 훔쳐 간다는 겁니까? 혹시…….”

장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 그것도 회임한 여인들을 납치하기 시작했소.”

장무열은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데, 이 주머니는 내가 아는 의적의 것과 다르오. 의적은 주로 비단 주머니를 사용하는데, 이 주머니는…….”

장무열의 설명을 들은 이레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튼 누군가 이분을 납치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찾아야 한다.

“감찰대에 연락하여 주변을 수색하라 하겠소.”

두 사람의 몸짓이 분주해졌다.

이레는 사라진 여인을 찾기 위해 잰걸음으로 초가를 나섰다.

바로 그때.

“그럴 필요 없다.”

한 사내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순, 청아한 숲의 향기가 이레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해를 등지고 선 사내의 긴 그림자가 이레를 뒤덮었다.

이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려한 턱선.

오뚝한 콧날과 보기 좋은 귓불.

미려한 눈동자가 이레를 향해 다가왔다.

형운이었다.

“은백.”

이레의 얼굴에 반색하는 빛이 떠올랐다.

반면, 장무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있어 가장 달갑지 않은 상대가 있다면 다름 아닌 은백이리라.

형운을 향한 장무열의 말투가 불퉁한 것은 당연했다.

“그럴 필요 없다니.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

형운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엔 검은 무복 차림의 홍인모가 서 있었다.

홍인모는 여인을 등에 입고 있었다.

사라졌던 청상이었다.

형운은 장무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뒷말을 이었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

“저 여인을 위해. 그리고 내 사람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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