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입지(立志)하였으면, 진성(盡誠)하라
검푸른 밤하늘에 유백색 달빛이 흐드러졌다.
형운은 서탁 앞에 앉았다.
-은랑.
형운은 조심스레 서탁의 여인을 불렀다.
유난히 달빛이 밝은 밤이다.
보통 이런 날엔 이레를 만날 수 없었다.
달무리 짙거나, 밤안개 깊은 날에만 서탁은 그와 그녀를 이어주었다.
그러나 근래엔 사정이 달라졌다.
명확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맑은 달밤에도 서탁은 이레와의 만남을 허락하였다.
형운은 오늘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스르르.
그의 글이 강물에 떨어진 먹처럼 번져갔다.
곧이어 낯선 글이 떠올랐다.
-연계(軟鷄)야. 오랜만이로구나. 그런데 넌 여전히 전전긍긍 애가 타 어쩔 줄을 몰라하는구나.
형운의 반듯한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불경한 백귀다.
그나저나 연계라니.
-연계가 누구냐?
-몸은 성장하였으나 정신은 아직 어리디어리니, 제 어미 품을 벗어나리 못하는 연계라 불러 마땅하지 않으냐?
놀리는 듯한 말투에 형운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런 고약한 자를 보았나.”
‘연계’란 병아리보다 조금 큰 닭을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다른 말로 ‘영계’라 부르기도 했다.
무어라 부르건 젊되 성숙하지 못 하다는 의미였다.
-무엄하구나.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그따위 망언을 입에 담는 것이냐?
-이 정도 말은 함부로 해도 괜찮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니. 걱정 마라.
형운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백귀다.
흥분하여 이성을 잃는 것이야말로 저 악귀가 원하는 것이리라.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백귀가 물었다.
-왜? 연계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하면, 졸부(拙夫)라 불러줄까?
백귀는 연계도 모자라 졸렬한 사내라 부르겠노라며 형운을 자극했다.
일일이 반응하지 말자.
무시하자.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형운이 붓을 세웠다.
-마음대로 불러라.
-오호, 제법이로구나. 발끈하여 달려들지 않는 그 인내력만은 칭찬하마.
-허튼소리나 하려거든 그만 가거라.
-나도 너와 딱히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나, 한 가지만은 궁금하구나.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백귀의 글이 조금 작아졌다.
그 모양새가 마치 소곤소곤 귓속말이라도 하는 듯 느껴졌다.
-연계야,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정녕 날 연계라 부를 텐가?
-마음대로 부르라 하더니. 왜? 벌써 마음이 변한 것이냐?
-말을 말자.
-지금 중요한 건 네 호칭 따위가 아니다. 잔말 말고 지난번 그 이야기나 계속해 보아라. 어찌 되었느냐?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무언가 변화가 있었겠지?
“오랜 시간?”
형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백귀와 만난 것은 어젯밤이었다.
고작해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백귀라 시간 관념이 사람과 다른 모양이구나.”
형운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 사이 백귀의 재촉은 계속되었다.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직도 방구석에 쑤셔박혀 그 여인을 그리워만 하고 있구나.
-틀렸다.
-아니라면? 설마, 찾아가기라도 하였단 말이냐?
찾아가진 않았다.
대신 그녀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였다.
-만났다.
형운의 글이 사라지기 무섭게 백귀의 질문이 종이 위를 채웠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그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전하였느냐? 연모한다 했느냐?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말도 하였겠지?
백귀의 연이은 물음에 형운은 당황했다.
연모라니.
백년가약이라니.
형운의 입장에선 감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단어들이었다.
이 백귀에겐 체면이라는 것이 없는 걸까?
어찌 이리 낯간지러운 말들을 조금의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거지?
형운의 대답이 없자 백귀가 다그치듯 다시 물어왔다.
-뭐냐? 설마, 우물쭈물하다 그냥 돌아온 건 아니겠지?
-내가 누구인지 밝혔다.
-그래도 아주 못난이는 아니었구나.
-못난이라니!
-잘하였다 칭찬한 것이다.
형운은 코웃음 쳤다.
“고작 백귀의 칭찬이나 받자고 한 일이 아니다.”
말은 불퉁했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백귀의 글이 나타났다.
-지난번엔 그 여인에게 네 정체를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더니. 마침내 밝혔으니 참으로 장하구나. 그래, 그 여인은 뭐라더냐?
-그것이…….
형운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왜? 설마, 거절하더냐?
“차라리 그랬더라면 머릿속이 이리 복잡하지도 않으련만.”
형운은 붓을 내려놓고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뇌리로 불과 두 시진 전, 사월루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
“정말 고맙습니다.”
가마 앞에서 이레는 감사를 표했다.
다소곳한 그녀의 인사에 형운은 마음이 무거웠다.
서강율과 장무열.
원치 않은 불청객들의 난입으로 이레에게 해야 할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결국, 그의 진심을 그녀에게 전하지 못했다.
억울하고 갑갑한 마음에 형운은 맨주먹을 으스러지게 말아쥐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쉬움 가득한 그를 뒤로 한 채 이레는 몸을 돌려 가마에 타려 하였다.
그 순간.
묘한 충동이 형운을 사로잡았다.
지금이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알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찬물이라도 맞은 듯 형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가?
그는 작금의 목적을 되새김질했다.
무리하여 궐 밖으로 잠행을 나온 이유.
이레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
은협과 은호의 방해?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언제까지 남 탓, 운명 탓이나 할 것인가.
지난밤, 백귀의 말이 벼락처럼 그의 뇌리를 스쳤다.
-부서짐을 두려워 말라.
“은랑.”
형운은 저도 모르게 이레를 불렀다.
가마에 타려던 이레가 고개를 돌렸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 의아함이 우물처럼 고였다.
형운은 홀린 듯 그녀에게 걸어갔다.
전해야 한다.
이대로 허무하게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한 걸음, 성큼 다가선 그가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
이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형운은 속삭였다.
“전력을 다해 주시오. 세손궁, 바로 그곳에서 그대를 기다리리다.”
*
-고작 귓가에 속삭였다고?
형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귀는 흥분했다.
-이런 못난 사내를 보았나. 귓속말이 다 무어냐. 그런 분위기면 당연히 입이라도 맞췄어야지.
-무어라?
백귀의 거침없는 발언에 형운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 백귀가 육체를 잃더니 정신도 잃었구나.
어디서 입맞춤을 하라는 것인가.
제정신 박힌 사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형운은 훈계하듯 적었다.
-사내가 성혼도 치르지 않은 여인의 몸을 어찌 함부로 만진단 말인가. 무릇 사내와 여인에겐 각자의 위치에 합당한 도리와 행동이 있거늘. 어찌 허락 없이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 있겠느냐.
-답답하구나, 답답해. 이 못난 사내야. 진정한 사내라면 그 분위기에선 응당 입맞춤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내의 행동이자 도리란 말이다.
-지켜보는 눈도 많았느니.
-그따위 것, 알게 뭐냐?
“참으로 무례하구나.”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맞상대해선 안 될 백귀다.
예의와 품격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아까운 기회를 놓쳤구나. 아무튼,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생각과 고민은 나중에 해. 일단 입부터 맞춰라. 너는 내 것이다, 하고 찜부터 하는 거다.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딱 찍으란 말이야.
-…….
-왜 답이 없어? 아직도 망설이는 모양이군. 하긴 타고난 천성을 어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을까.
-네가 내 사정을 어찌 알겠느냐.
-그래, 내가 네 사정을 알 리 없지. 그보다 이야기나 계속해 봐라. 그래서 그 여인이 뭐라더냐? 네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니. 네게로 오라 하니 뭐라 대답하더냐?
“내 정체를 모른다고? 내 분명 좀 전에 세손궁으로 오라 했다 말하였거늘.”
백귀의 무성의함에 혀를 차던 형운은 서탁에 남은 글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모든 글 중에 유독 세 글자.
세손궁.
이 세 글자만은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글이 사라지지 않았음은 전해지지 않았음이니.”
결국, 백귀는 형운이 ‘세손궁으로 오라’ 한 말은 보지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백귀의 물음은 계속되었다.
-너의 고백을 들은 여인이 무어라 답하더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더냐? 아니면 뒤돌아서서 고개만 끄덕이더냐. 그도 아니면 정색하며 거절하였느냐?
-그건…….
형운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바로 이레의 대답 때문이었다.
세손궁에서 기다리겠다 한 그의 말에 그녀는…….
*
이레가 입을 열었다.
“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단호한 음성으로.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짧고 담백한 답을 끝으로 이레는 가마에 올랐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답에 굳어버린 형운은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가마를 지켜보기만 하였다.
*
-네. 알겠습니다?
-그리 대답하였다.
-거 참 희한하구나. ‘네, 알겠습니다.’ 라니. 그런 마치 당연한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태도인 것 같은데. 너, 제대로 마음을 전한 건 맞느냐?
-분명히 전했다.
-그렇다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구나. 무릇, 사내의 고백을 받은 여인은 몹시 기뻐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거나, 질색하는 것이 평범한 반응일진데. ‘네, 알겠습니다.’ 라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종잡을 수 없구나.
-나도 그 여인의 속내를 몰라 고심하던 차였다.
잠시 서탁에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깨고 백귀가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아무래도 네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 말했는데도 전해지지 않았단 말이냐?
-뜻이 잘못 전해졌거나, 오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모호한 대답이 나올 리 없지 않으냐?
“……그런 건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형운이 생각해보아도 이레의 모습은 고백을 받은 여인의 것이 아니었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은자원에서 풀리지 않는 사건을 대할 때와 같은 모습이랄까?
-그래, 그런 게 분명하다. 너의 뜻과 각오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 여인은 눈치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남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눈치 없는 여인은 절대 아니다.
-다른 일엔 능수능란하여도 유독 남녀 간의 일엔 촉이 느린 사람이 있느니.
-하면, 어찌해야 하느냐?
형운이 물었다.
조용하던 서탁에 묵이 번져나갔다.
흩어졌다가 모이길 반복하던 검은 그림자가 이내 글자를 만들었다.
-입지(立志)하였으면, 진성(盡誠)하라.
백귀의 조언을 형운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뜻을 세웠다면, 정성을 다하라.”
***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형운은 최 내관을 불렀다.
“재간택이 중단되었다 들었다. 이후의 일정에 관하여 아는 바가 있느냐?”
형운의 관심에 최 내관은 반색했다.
우리 저하께서 어쩐 일이시려나.
그간 여인과 관련한 일이라면 허튼 눈길 한 번 내어주지 않던 분이 아니시던가.
신이 나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최 내관은 알고 있는 바를 아뢰었다.
“재간택인들의 제례복 짓는 시험으로 인해 조정 신료들의 격론이 이어지고 있다 하옵니다. 하오나, 길게 끌 수 없는 결정이오니. 정확하지는 않으나 수일 내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시험이 하루이틀사이에 재개되지 않음을 확인한 형운은 이번엔 최치성과 홍인모를 불러들였다.
“잠시 외유할 일이 있다. 준비하라.”
두 익위사는 어리둥절하여 제 주인에게 물었다.
“어느 곳으로 가시려 하옵니까?”
“알 것 없다. 어쩌면 많이 늦을 수도 있으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뒷걸음으로 물러가는 최치성을 형운이 붙잡았다.
“치성아.”
“네. 저하.”
“어제 네가 붙여준 자들 말이다.”
느닷없는 말에 최치성은 긴장했다.
“그들이 불충한 소행이라도 하였나이까?”
“그들을 네가 직접 교육한 것이 맞느냐?”
“소일 삼아 몇 수 지도하였사옵니다.”
“실력이 형편없더구나. 다시 점검하여라.”
“네?”
“장무열 그 늑대 같은 자에게도 허무하게 뚫리고, 서강율 그 여우 같은 자도 제 마음대로 내가 있는 곳을 드나들더구나.”
“……!”
최치성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호위가 실패하였다 함은 곧 세손 저하의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다.
최치성은 곧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되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교육하여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최치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최치성이 가르친 무사들의 형편이 부족하여 당한 것이 아님을.
장무열과 서강율의 무위가 그만큼 대단하였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채 수하들의 훈련 강도를 높여야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최치성에 뒷일을 맡긴 형운은 곧 홍인모와 함께 잠행에 나섰다.
궁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장 이레의 사가로 말을 달렸다.
무작정 나선 길이라.
찾아가서 어찌 그녀를 만날지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의 형운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충동적인 행동이었고, 파격이었다.
하지만 이레를 본다는 생각만으로 형운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걱정과 근심은 잠시 뒤로 밀려났다.
어찌 말을 달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이레의 집 근처였다.
‘이레를 어찌 만난다?’
뒤늦게야 아차 한 듯 형운은 고심했다.
눈치 빠른 홍인모가 묘안을 짜냈다.
“소신이 살펴보겠사옵니다.”
“마땅한 명분이 있느냐?”
“은자원의 일로 왔다 하면 될 듯하옵니다.”
홍인모의 대답에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묘한 방법이었다.
재간택에 들기 전, 은자원을 무시로 드나들던 이레가 아니던가.
집안 어른들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운의 허락을 구한 홍인모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홍인모의 표정이 그리 썩 명쾌하지 않았다.
“은랑께선 지금 댁에 없다 하옵니다.”
“집에 없어?”
형운의 물음에 홍인모는 무에 죄라도 지은 듯 대답했다.
“아침 일찍 형조판서의 여식이 찾아와 함께 나가셨다고 합니다.”
형조판서의 여식이라면…….
형운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 재간택에 이름을 올린 여인 중 하나였다.
홍인모의 보고가 이어졌다.
“이번 재간택 시험과 관련하여 알아볼 것이 있다며 외출을 허락받았다고 하옵니다.”
“참으로 공교롭구나.”
하필, 이때 출타하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레의 행방이 어디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시험이 구장복을 짓는 일이니. 필시 그와 관련한 곳으로 향하였겠지.’
형운은 말머리를 돌렸다.
넓은 한양땅에서 옷과 관련한 점포를 찾자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 곳은 족히 나올 것이다.
입전, 면포전, 침자전, 진사전를 비롯하여 시전의 많은 점포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그 옷을 입을 사람이 왕이라면, 그것도 제례복 때 입을 구장복을 짓는 일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천하의 주인이 입을 옷이니.
당연히 특별하고 귀한 옷감이 사용될 것이고, 옷 짓는 법과 그 옷에 새겨질 자수도 평범할 수 없었다.
‘대례복을 짓는 법은 궐 안에서도 한 손에 꼽는 어침관만이 가능한 일.’
당연히 궐 밖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재간택인들이 시험과 관련하여 알아볼 것은 오직 하나.
옷감뿐이었다.
형운의 그런 생각은 적중하였다.
시전상가 중 청나라에서 들여온 진귀한 비단만을 취급하는 입전에서 두 여인을 보았다는 목격자를 찾았다.
“반 시진쯤 전에 젊은 아가씨 두 분이 특별한 비단을 찾으러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가?”
“나라님께 올릴 옷감을 찾으신다기에 천하를 다 뒤져도 그런 옷감은 구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대답에 실망하신 표정을 나가셨는데…….”
말끝을 흐리던 입전의 주인은 형운의 눈치를 살폈다.
“이 뒤쪽 골목으로 가셨으니, 살펴보십시오.”
형운은 홍인모와 수하들의 도움을 받아 이레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시전상가와 주변을 뒤지길 한 시진이 훌쩍 지났다.
간간이 이어지던 이레의 흔적이 뚝 끊겼다.
다리 근처의 난전 상인을 끝으로 어느 곳에서도 이레를 보았다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낙심하는 형운에게 홍인모가 말했다.
“혹여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요?”
“글쎄다.”
출타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어쩌면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말머리를 다시 돌리려는 찰나.
“가만…….”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형운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 여인, 은랑이 아니더냐?”
멀지 않은 곳.
시전의 뒷골목, 허름한 약초방에서 젊은 남녀가 걸어 나왔다.
“은랑이 틀림없습니다.”
홍인모가 쓰개치마를 깊게 눌러쓴 이레를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정작 형운은 이레가 아닌 그녀의 곁에 선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자는…….”
훤칠한 키에 장부다운 풍모의 사내.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형운의 낯빛이 서늘해졌다.
‘형판의 여식과 함께 나간 은랑이 어찌 저자와 함께 있단 말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생소한 감정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함부로 넘겨짚지 말자.
틀림없이 우연히 만난 것이리라.
그는 이레의 뒤를 따르는 대신 약초방으로 향했다.
우선 자세한 내막부터 알아보기 위한 심산이었다.
약초방의 사립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 탕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형운은 마당을 바쁘게 가로지르는 젊은 사내를 불러세웠다.
“여기 주인이 누구냐?”
“주인어른은 잠시 출타 하였는뎁쇼. 무에, 찾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약초는 되었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방금 나간 두 사람, 무슨 일로 여길 찾았느냐?”
형운의 물음에 젊은 사내는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초방을 찾을 일이 약초를 구하는 일 말고 또 무슨 볼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남의 일은 왜 물으시는지…….”
수상히 여기는 사내의 눈빛에 형운은 마패를 꺼내 보였다.
“아, 암행…….”
“쉿! 은밀히 조사할 것이 있다. 그들이 왜 이곳을 찾았는지 한 점 거짓 없이 고하라.”
젊은 사내의 태도가 일변했다.
어느새 양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은 사내는 형운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두 분은…….”
“그래, 무슨 일이었느냐?”
주위를 살피던 젊은 사내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전했다.
“여인의 회임 때문에 왔습지요.”
“지금 뭐라 하였느냐?”
형운은 제 귀를 의심했다.
미간을 한데 모은 채 그는 재차 확인했다.
“분명 회임이라 하였느냐?”
“네. 틀림없이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
쿵!
형운의 심장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진심을 전하기 위해 설레었던 그의 마음은 다른 의미로 날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