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세손궁, 그곳에서……
사월루는 도성에서 술맛이 뛰어나기로 유명하였다.
딱히 화려하지도, 음식 맛이 특출나지도 않았지만, 술맛만큼은 주변에 따를 자가 없었다.
천하의 술꾼들이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였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 꽃 없다 하지 않았던가.
나라에 금주령이 떨어지자 사월루의 명성도 가치가 하락했다.
감시의 눈이 사방에서 번뜩이니, 술꾼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급기야 기루의 청지기는 외등 밝히는 일도 귀찮아하기에 이르렀다.
딱히 찾아오는 객이 없으니,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 적막한 기루가 오랜만에 사람으로 북적였다.
젊은 사내와 여인이 작은 정원을 품은 별관으로 향했다.
직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기생을 찾아왔다.
그들의 요구로 주방의 숙수는 물론 심부름하던 아이까지 자리를 비웠다.
심지어 일하는 하인들도 예외가 없었다.
더러 불만의 빛을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그들이 내미는 명패에 화들짝 놀라며 순순히 명을 따랐다.
그렇게 조용하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정작 이 소동의 중심에 있는 별채 손님들은 어색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별채는 아늑하였다.
고작 큰길 뒤에 자리하였을 뿐인데, 본채가 병풍처럼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여 고요하였다.
형운은 이레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하얀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엉뚱한 곳으로 납치되었으니, 놀라 경황이 없으리라.
이레를 보는 형운의 마음도 복잡하였다.
사실, 이레와의 만남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야말로 충동을 이기지 못해 벌인 즉흥적인 사건이었다.
최 내관과 홍인모에게 뒷마무리를 맡겨두었지만, 만약 무단으로 궁을 나온 사실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아니다.’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내친걸음이다.
뒷일은 더 생각지 말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레의 물음이 들려왔다.
눈치 빠른 사람인지라.
애써 내색하지 않음에도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어냈다.
“아무것도 아니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입안이 바싹 말랐다.
따뜻한 차로 입술을 축였다.
그에 반해 이레는 좀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가마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사건이었다.
형운 스스로도 제가 저지른 일에 놀랐으니까.
재간택인들이 사가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불현듯 이리하고 싶었다.
“미안하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는 이레의 눈은 평소와 같은 반짝임이 담겨있었다.
이유라.
그녀를 불러낸 이유는 단순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레의 두 눈을 보며 정녕코 밝혀낼 진심이 있었다.
내가 세손이오.
고작 이 두 마디 말만 전하면 그만이니.
하지만 과연 전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 두 마디뿐일까.
마음 깊은 곳에 고이 갈무리한 말들을 모두 꺼내려면 몇 날 며칠 밤을 함께 지새워도 부족하리라.
“……시장하겠소.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형운은 수저를 들었다.
음식을 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할 말은 분명한데, 막상 그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뜬금없이 내가 세손이오 하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부서짐을 두려워 말라.
지난밤 백귀가 전한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간택 중에 무슨 일은 없었소?”
“별일 없었습니다.”
“날 만난 후에도 말이오?”
“물론입니다.”
이레의 태연한 대답에 형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 일 없었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깜빡 속을 뻔했다.
앞으로 그녀가 별일 없었다 하면 절대 믿지 말아야지.
“정말 아무 일 없었소? 재간택인이 밤늦은 시각, 낯선 사내와 만난 일로 궁 안이 뒤숭숭하였다 들었는데.”
형운이 정곡을 찔렀다.
“……잠시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왜 말하지 않았소?”
이레는 수저를 내려놓고 양손을 무릎 위에 곱게 포갰다.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인 듯 그녀는 단정한 눈빛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곧 해결되었습니다. 은백께서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덤덤한 대답.
되레 아픈 표정을 지은 쪽은 형운이었다.
어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소?
그런 일조차 신경 쓰지 않으면 대체 어떤 일에 신경 쓰란 말이오?
양덕당 후원에서 지밀상궁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추궁받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리 담담한 얼굴과 눈빛으로 말할 사건이 아니었다.
장 장령이 어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레는 곤란한 상황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곳에 자신이 있어야 했다.
장무열이 아닌 형운, 자신이 이레를 위해 변호했어야 했다.
자신이 지닌 거대한 권력이 되레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었다.
정작 제 여인에겐 무소용인 사내가 되게 하였다.
“화…… 나셨습니까?”
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속상하였소.”
감히 그녀를 책망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미안하오.”
“네?”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에 이레는 당황했다.
“은랑이 그런 처지에 놓인 줄 까맣게 몰랐소. 홀로 그 눈빛과 사나운 시선을 받아내게 하여 미안하오. 그 시간, 그 자리에 그대와 함께하지 못하였음이 참으로 가슴 아프오.”
“……은백.”
“은랑. 그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소. 재간택에 참여하여 고생한 그대를 위로하고 싶었소. 또한, 그대에게 꼭 전하고 싶은 비밀이 있으니…….”
형운은 이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또한 숨김없이 전하려 하오.”
“전하고 싶은 비밀이 있단 말씀입니까?”
형운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일이 은백께서 불손임을 밝히신 일보다 더 중요하고 대단한 일입니까?”
예상치 못한 물음.
형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좌우로 천천히 흔들렸다.
“그건 아닌 것 같소.”
“다행입니다.”
이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왜 그걸 물어본 것이오?”
“은백께선 불손임을 밝히실 때에도 한 점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셨습니다. 한데, 오늘은 힘들고 괴로워하시는 빛이 역력하시니. 심각한 일은 아닐까 걱정하였습니다.”
“내 표정이 그리 심각해 보였소?”
“네. 가슴 졸일 만큼.”
“허허.”
형운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렴, 귀신이라 여긴 사람이 실은 멀쩡히 살아있다는 말보다 더 놀랄 일이 있을까.
궁궐의 성벽이 제아무리 높다 하나 저승길 황도천의 검은 수심보다 깊을 리 만무했다.
‘그래. 서탁의 진실에 비하면 내 신분은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경직되었던 형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가 쓸데없는 일로 오래 고민한 모양이오.”
이레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형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하고픈 말은…….”
형운은 마지막 비밀을 입 밖으로 꺼내려 하였다.
바로 그 순간.
“은랑!”
멀리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곧 몸싸움을 벌이는 거친 소음이 들려왔다.
“은랑! 어디에 계시오.”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형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목소리는…….
곧 여러 사람이 뒤엉켜 구르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별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곳에 있었구려.”
문을 연 사내는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이곳까지 오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인지, 머리에 쓴 갓은 이리저리 휘어졌고, 입고 있는 옷 또한 엉망이었다.
이레가 놀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은협.”
불청객의 정체.
은자원의 협객, 은협 서강율이었다.
***
형운은 애꿎은 차만 벌컥벌컥 마셨다.
가슴에 불덩이가 가득했다.
‘그래. 순탄하게 흘러갈 리 없지.’
그가 이레와의 만남을 결심하였을 때, 가장 먼저 든 걱정이 바로 저자의 출현이었다.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데다, 이레와 관련한 일이면 그곳이 어디건 고개부터 들이미는 작자이니.
어쩌면 이번에도 나타날지 모른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은협,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말도 마시오. 내가 은랑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오.”
이레를 본 서강율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표정도 이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느른하게 풀어졌다.
“갑자기 사라졌다 하여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뭐요. 식사하고 계셨소? 잠깐, 그런데 이분은 은백이 아니오?”
뒤늦게 형운을 발견한 서강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형운과 이레.
그리고 잘 차려진 음식을 번갈아가며 보던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날 빼놓고 둘이서 은자들의 단합모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오?”
서강율의 엉뚱한 소리에 형운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였다.
이레가 끼어들었다.
“단합이라니요. 은자들의 모임이면 마땅히 은협께서 계셔야지요.”
“하하, 당연한 말씀이오.”
호탕하게 웃은 서강율이 슬그머니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형운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강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음식이 참 맛나게 생겼구나. 이런, 이게 무언가? 내가 좋아하는 육전이로구나.”
그가 상 위의 음식을 보며 군침을 삼킬 때였다.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며,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났다.
벌컥 문을 연 그들은 은협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입안으로 음식을 욱여넣던 서강율이 그들을 돌아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아! 자네들인가? 알고 보니 나도 이 자리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이었네. 그러니 구태여 날 잡아가려 애쓰지 않아도 되네.”
무인들은 형운의 눈치를 살폈다.
형운은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무인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뒤탈을 우려한 듯 서강율은 구태여 다시 문을 열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서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니. 몇 대 얻어맞은 일은 없는 일로 치세나. 아이쿠, 그러고 보니 내 갓이 엉망으로 망가졌군. 이게 알고 보면 뛰어난 장인이 손수 만든 몇 안 되는 작품인데. 이거 내가 도리어 손해를 보게 생겼군.”
너스레를 떠는 서강율에게 이레가 물었다.
“은협. 이곳엔 무슨 일입니까? 혹여, 절 찾아오신 것입니까?”
“왜 아니겠소. 우리 은랑께서 갑자기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내 이리 허겁지겁 달려오지 않았겠소.”
“제가 실종되었다고요?”
“오래전에 사가로 돌아갔어야 할 사람이 기별도 없이 사라졌으니, 그게 실종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설마…….”
서강율은 형운을 슬쩍 눈짓했다.
“그 범인이 은백인 줄은 까맣게 몰랐구려.”
이레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절 찾아주신 거로군요.”
“얼마 전, 은랑이 날 긴히 찾고 있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안타까워하던 참이었다오. 그 후로 내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 의적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만 아니었어도. 아무튼, 결과적으로 이렇게 다시 은랑을 만나게 되었으니 다행이오. 참, 그때 일은 잘 처리되었소?”
이레는 양덕당 후원에서 형운과 만난 일을 무마하기 위해 서강율을 찾았었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심려 끼치게 하여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 일도 아닌, 우리 은랑 일인데. 당연히 발 벗고 나서야지.”
서강율이 이레에게 친근함을 표시했다.
맞은편에 앉은 형운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떠올랐다.
특히 ‘우리 은랑’이라고 말하는 지점에서는 원수라도 만난 듯 눈빛을 세웠다.
“정말 은랑을 찾아온 것이 맞느냐?”
“그럼, 내가 이곳에 왜 왔겠나?”
“배가 고파 왔겠지.”
“오해요!”
형운의 말에 서강율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람쥐처럼 양 볼을 동그랗게 부풀린 터라, 그의 항변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보다 은백.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말도 없이 은랑을 납치한 것이오?”
“납치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말없이 사람을 채가는 행위를 전문용어로 납치라 부른다오.”
“긴히 할 말이 있어…….”
형운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더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서강율은 이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납치라 하니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나는군. 혹시, 내가 오기 전에 다른 사내가 찾아오지 않았소?”
“다른 사내라니요?”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우리 은랑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분명 살벌한 얼굴로 뛰어 나갔다 하던데. 그 집요한 인간이 나도 찾은 이곳을 못 찾았을 리도 없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뒤엉켜 싸우는 소리에 서강율은 히죽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곧 별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장무열이었다.
“여기 있었군.”
날카로운 시선으로 실내를 훑어본 그는 마치 초대받은 사람처럼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서강율의 맞은편.
그리고 형운과 이레의 사이었다.
곧이어 무인들이 다시 뛰어왔는데, 좀 전과 달리 행색이 엉망이었다.
얼굴에 멍이 든 자도 있었고, 봉두난발에 옷 여기저기가 찢긴 자도 있었다.
형운은 한숨을 쉬며 무인들을 물렸다.
‘좌익위. 그 녀석이 직접 가르쳤다며 실력을 장담하더니. 실은 엉망이로구나.’
서강율에 이어 장무열에게까지 뚫리다니.
더구나 장무열에겐 일방적으로 당한 모습이었다.
‘돌아가면 좌익위에게 제대로 교육하라고 단단히 일러두리라.’
형운은 좌익위 최치성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그때, 장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이레의 안부를 묻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하필 이곳에서 장무열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는 자신을 경기관찰사의 여식이자 세손빈 재간택에 참여한 재간택인 정도로 알고 있다.
더불어 그의 집안과 혼담이 잠시 오고 간 사이.
하지만 이레에겐 또 다른 신분이 있었다.
은자원의 은랑.
궁녀들에게 벌어진 불미스런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레는 면사를 쓴 모습으로 장무열을 만났다.
당연히 장무열은 이레가 은랑인 줄 모른다.
몰라야만 했다.
세손빈 간택에 참여한 여인이 실은 몰래 궁을 드나들었음을 그가 알게 된다면 사정이 무척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요. 무안하여 그러는 것이오, 아니면…….”
장무열의 무뚝뚝한 물음이 이어졌다.
“그대가 은자원의 은랑이라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 그러는 것이오?”
“……!”
장무열의 물음에 이레는 휘둥그레 눈을 치떴다.
“아, 알고 있었습니까?”
“그럼,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하였소?”
되묻는 장무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눈치채신 겁니까?”
“그대가 궁녀에게 습격당한 다음 날.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른척하고 계셨습니까?”
“그대가 숨기고 싶어하는 듯하여, 구태여 묻지 않았소.”
장무열은 그윽한 눈으로 이레를 보았다.
단서 찾듯, 흔적을 쫓듯.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이레에 관한 비밀을 하나씩 캐내고 있었다.
“그대와 관련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작은 것이라도 하나 놓치지 않고 알고 싶다오.”
***
서강율에 이어 장무열의 등장까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연이은 출현에 이레는 당혹스러웠다.
은랑이라는 정체를 장무열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현기증 일 지경이었다.
그런 이레의 귓가에 장무열의 딱딱한 음성이 전해졌다.
“낭자가 돌아오지 않아, 집안의 어른들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무슨 볼일인지 모르나,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내 집까지 바래다주리다.”
형운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내가 초대한 분이다. 볼일이 끝나면 어련히 알아서 돌려보낼까.”
“허락은 받고 하는 일이오?”
“누구 허락 말이냐?”
장무열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당연히 본인의 허락이지.”
“…….”
“보아하니 물어보지도 않았군. 하긴, 허락을 받았으면 사가에서 행방을 몰랐을 리 없을 테니.”
날카로운 분석에 형운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대는 어찌 이곳을 알고 왔는가?”
“말하지 않았소. 사가에서…….”
“사가에서 사람을 풀어 궁궐에 소식을 전하기에는 적어도 두서너 시진은 족히 걸릴 터. 아직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
장무열의 어색한 침묵에 형운은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기다리고 있었군.”
“혼담이 오고 간 사람이니, 당연히 무사히 귀가하였는지 궁금하였소.”
“단 한 번 매파가 오고 갔을 뿐이라 하던데.”
“남녀 간의 만남은 으레 그처럼 가벼운 인연으로 시작되는 법이오. 그러는 은백께선 무슨 권리로 낭자를 납치한 것이오?”
“긴히 할 말이 있어서다.”
장무열이 눈을 부릅뜨고 형운을 응시했다.
“긴히 할 말. 그게 대체 무엇이오?”
형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죄인을 추궁하는 듯 경직된 말투.
당장에라도 큰소리로 정체를 밝히고, 서강율과 장무열 두 사람에게 통쾌한 삭탈관직 네 글자를 이마에 새겨주고 싶었다.
“나는…….”
그때였다.
“하하하.”
서강율이 음식상을 두드리며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긴히 할 말이 무엇이겠소. 이곳으로 구태여 부른 것을 보면 뻔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소? 재간택으로 심신이 피곤하였을 우리 은랑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른 것이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게도 알리지 그랬소? 그랬다면 당연히 참석하였을 터인데. 안 그렇소? 은호(隱毫).”
형운과 장무열이 동시에 물었다.
“은호?”
“그게 누구냐?”
이레가 흥미를 보였다.
“장 장령님의 별호입니까?”
“과연 우리 은랑. 어찌 그리 내 속을 잘 아시오.”
“무슨 뜻인지요?”
“집요하고 세심하여, 바닥에 떨어진 터럭 한 올 놓치지 않을 것이기에 은자원의 터럭 같은 존재. 이름하여…… 은호요.”
놀리는 뜻이 다분한 이름에 장무열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내 이름을 네 멋대로 정하지 마라.”
섬뜩한 눈빛에 밀린 서강율이 이레에게 물었다.
“은랑이 보시기엔 어떻소?”
잠시 생각한 이레가 입을 열었다.
“호라는 말에는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다는 호걸(豪傑)의 의미와 남을 지키고 보호한다(護)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범과 같이 용맹(勇猛)하다는 뜻도 있으니. 호걸이라는 뜻의 은호(隱豪)나 용맹하다는 뜻의 은호(隱虎)가 어떨는지요.”
“내가 지은 호는 그런 뜻이 아닌데.”
서강율은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반대로 장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미로 은호(隱護)라 함이 좋을 듯하오.”
결론을 내린 장무열은 뜨거운 시선으로 이레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른 두 사내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형운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난 받아들일 수 없다.”
장무열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대의 의견, 물은 적 없소.”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리 함부로 말하는가?”
“이곳은 은자원의 은자들이 모인 자리. 그대가 누구인지 꼭 알아야 하오?”
두 사람이 팽팽히 맞서자 서강율이 중재에 나섰다.
“오늘은 은랑을 위한 자리이니, 불편한 말은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둘만의 오붓한 자리를 어느새 은자들의 모임으로 둔갑시킨 그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구려. 단옷날이었지. 애석하게도 그때와 달리 은자 한 명은 함께 자리하지 못하였으나, 대신 새로운 은자가 그 빈 구석을 채웠으니. 이날을 어찌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한 잔 술로…….”
형운이 그의 실수를 짚었다.
“금주령이다.”
“그렇지. 아쉽지만, 한 잔의 차로 오늘의 모임과 만남을 기념합시다.”
그의 강요에 은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찻잔을 들었다.
서강율은 은자들의 시선을 일일이 찾아가 마주했다.
“또 언제 이런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소. 예전에 은랑이 하였던 말을 내가 대신 전하겠소. 언젠가 우리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더라도, 그 근본이 이곳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말을 마친 그는 술을 마시듯 찻잔을 들이켰다.
은랑, 은백, 은호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은협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참으로 보기 좋구나.”
***
어수선한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났다.
이레는 가마 앞에 섰다.
뒤를 돌아보니 형운, 서강율, 그리고 장무열이 나란히 선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레는 공손히 감사를 표했다.
서강율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뭘 이런 일로 감사까지야. 앞으로도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하리다. 안 그렇소? 은백.”
서강율은 은근한 눈으로 형운을 보았다.
형운은 간절히 바라는 그의 눈빛을 무시했다.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에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은랑.”
형운이 이레를 불렀다.
막 가마에 오르려던 이레가 고개를 돌렸다.
성큼 다가온 형운이 그녀에게 말했다.
“부디 전력을 다해 주시오.”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요청.
이레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잠시 제 뒤에 선 서강율과 장무열을 돌아본 형운이 이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손궁, 그곳에서 내가 그대를…… 기다리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