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부서짐을 두려워 말라
-내가 알려주마.
자신만만하게 휘갈겨 쓴 호언장담.
형운은 찌푸린 눈으로 제멋대로 쓰인 백귀의 글을 노려보았다.
참으로 방약무인한 자였다.
백귀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
-왜? 싫으냐?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백귀가 물었다.
형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언사가 가벼운 자는 신의 또한 부족하기 나름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백귀가 아닌가.
사람도 아닌 존재의 희롱에 놀아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치워버려야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책으로 잠시나마 흐트러진 마음을 갈무리하여야 했다.
하지만 형운은 끝내 서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백귀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형운이 붓을 들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사내대장부라. 자신감 빼면 무엇이 남을까.
-어디 한 번 네 재주를 풀어보아라.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보자꾸나.
기다렸다는 듯 백귀의 대답이 떠올랐다.
-여유 부리긴. 솔직히 말해 봐. 듣고 싶어 죽겠지?
백귀의 웃음소리가 예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형운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다스렸다.
‘옛 성인께서도 말씀하였지.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허튼소리 말고 그 방도라는 것부터 말해봐라. 설마 자신만만하게 말해 놓고 이제 와 딴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까.
백귀의 자신감은 여전했다.
이쯤 되니 없던 호기심도 생길 지경이었다.
과연, 무슨 방도일까?
어쩌면 이 갑갑한 상황에서 벗어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곧 백귀의 글이 떠올랐다.
-방도를 설명하기에 앞서 미리 말해두마. 천지간에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존재가 여인이니. 그 곁으로 가는 길은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형운은 헛웃음을 흘렸다.
-시작도 하기 전에 도망갈 궁리부터 하는 것이냐?
-각오하란 뜻이다.
-각오라. 쉽구나. 난 언제나 칼날 위를 춤추니.
형운의 대답에 서탁의 백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형운이 다시 붓을 들었다.
-그 방도. 대체 언제 알려줄 테냐?
-재촉마라. 지금부터 알려줄 테니.
곧 힘있게 내려쓴 백귀의 짧은 글이 나타났다.
-하나(一).
형운은 두 눈을 부릅떴다.
과연 어떤 조언일까?
인정하기 싫지만 조금 기대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첫 번째 방도, 그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망가져라.
“……?”
형운은 미간이 구겨졌다.
망가지라니.
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리란 말인가.
혹시, 다른 설명이 더해질까 싶어 잠시 기다렸지만, 더는 설명이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희롱이었던가?”
형운은 성난 표정으로 붓을 휘갈겼다.
-망가지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잘했다.
-무슨 소리냐?
-네 글 말이다. 틀에 갇힌 듯 답답하던 필체가 자유분방해졌지 않느냐?
-자유분방?
형운은 안개처럼 흩어지는 제 글을 보았다.
삐뚤고 크기와 형식조차 제멋대로인, 급하게 써 갈긴 글.
남에게 보이기 창피할 정도로 어설픈 글이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이렇게 못쓴 글은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 글을 보고 잘했다니.
형운은 물었다.
-설마, 망가지라는 게 제멋대로 살라는 뜻이냐?
-다행히 앞뒤 꽉 막히진 않았구나.
“이따위 말이나 하려 했느냐?”
워낙 자신만만하여 조금은 기대하였건만, 정작 늘어놓는 소리라는 게 밑도 끝도 없이 망가지란다.
형운이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필체로 물었다.
-헛소리가 참으로 새롭구나.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과 내가 망가지는 게 무슨 관계란 말이냐?
-남을 이해하고 가까이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바뀌어야 하는 법이다.
“…….”
백귀의 그럴듯한 말이 이어졌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하였지. 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고민하였지? 틀에 갇힌 듯한 네 답답한 글을 보니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다. 내 너의 글을 보고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함은 네 환경이 아닌, 너의 소심한 마음이 문제일 터.
“결국, 너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네가 나의 무엇을 알겠느냐.
전신을 옥죄는 말 없는 강요를.
어딜 가나 따라붙는 눈길과 종용을.
기대 섞인 시선은 칼을 삼키는 것과 같으니.
숨죽여 소리 없이 우는 내 아픔을 어찌 백귀인 네가 알겠느냐?
형운의 말에도 백귀는 무심히 자신의 말을 늘어놓았다.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우물 속은 안전하나 세상 넓음을 깨닫지 못하니.
-그만 되었다.
-쉽진 않겠지.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변하는 일이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까. 하지만 원한다면. 진정 원한다면…….
“시끄럽구나.”
형운은 종이를 치워버렸다.
결국, 백귀가 말한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
그야말로 남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만 번지르르한 허풍선이가 아니던가.
방도를 알려달라 하였더니, 밑도 끝도 없이 망가지라니.
그야말로 군자를 좌절과 타락의 길로 끌어내리려는 악귀의 유혹이 아닌가.
“난 또 무슨 대단한 비책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실망과 좌절이 이처럼 클 줄이야.
이레를 도와주는 할아버지들이란 백귀들을 경험하여서인지, 이 오만방자한 백귀에게도 조금이나마 기대한 모양이다.
“은랑에겐 현명하고 지혜로운 백귀들이 나타나 온갖 조언을 아끼지 않건만. 어찌하여 내겐 하고많은 백귀 중에 이처럼 불량한 잡귀가 붙는단 말인가.”
천형(天刑)이다.
쉽게 답을 구하려 한 얄팍한 마음을 꾸짖기 위해 하늘이 내린 벌이 틀림없었다.
형운은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뜨니 어두운 천장에 백귀의 글이 떠올랐다.
-변해라.
-원한다면. 진정 원한다면…….
백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하였다.
“으음.”
형운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종이를 치울 때, 마지막으로 백귀가 남긴 글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부서짐을 두려워 말라.
아무래도 백귀에게 현혹되어도 단단히 현혹된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서탁 위를 질주하던 필체를 떠올렸다.
‘한데, 그 필체. 어디선가에서 본 듯한데.’
***
형운이 새로운 백귀를 만나던 그 시각.
이레 역시 서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날이 무척 흐리구나.”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여, 달빛은 보일 듯 말 듯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밤안개까지 자욱하였다.
“이런 날은 불손께서 답하곤 하였지.”
불손을 떠올린 이레는 가만 미소를 지었다.
예전엔 오만불손한 그와 자주 다투고 급기야 멀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그의 진실한 정체를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이레는 달콤한 표정으로 그의 다른 이름을 속삭였다.
“오늘도 은백께서 답하여 주시려나.”
이레는 붓을 들었다.
-날이 흐립니다. 평온한 저녁이신지 궁금합니다.
한동안 서탁에 쓰인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레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으려나 보다.
섭섭한 마음에 붓을 내려놓으려 하였다.
그때였다.
-아이로구나. 잘 지냈느냐?
그녀의 글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리운 필체가 안부를 물어왔다.
“화할아버지?”
이레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흐린 날이다.
밤안개까지 자욱하였다.
당연히 할아버지들이 아닌 은백과 통할 줄 알았다.
한데, 정작 대답한 이는 할아버지.
가장 처음 서탁으로 가르침을 전해주신 화할아버지셨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서탁을 만난 이후 오늘과 같은 날씨에 할아버지들과 연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엔 맑은 달밤임에도 은백과 통했지. 아무래도 장소에 따라 서탁의 규칙이 바뀌는 모양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나니 반가웠다.
-화할아버지. 그간 평온하시었습니까?
-그래. 너도 잘 지냈느냐?
-다행히 무탈하였습니다.
이레의 대답에 새로운 필체가 끼어들었다.
-무탈하다니. 참으로 생소한 말이로다. 툭하면 사건에 사고를 당하던 네가 무탈하다니.
상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에 이레는 작게 미소 지었다.
“사실은 그리 무탈하지는 않았답니다.”
궐에 들어온 이후에 겪은 사건만으로도 절대 무탈하였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 아니던가. 할아버지들에게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행히 이번엔 무사하였습니다.
-사람은 그저 여전하여야 하는데. 별일 없었다니, 오히려 걱정되는구나. 아! 그러고 보니 넌 백귀였지.
이레가 빠르게 답했다.
-이미 여러 번 말하였지만, 전 백귀가 아닙니다.
“대체 언제쯤 믿어주실 겁니까?”
이레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사이 화가 나타났다.
-요즘 소식이 뜸하였구나. 그래, 무얼 하고 지냈느냐?
이레가 말했다.
-재간택에 참여 중입니다.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악필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걸 아직도 하고 있단 말이냐?
악이었다.
뒤질세라 상의 어깃장이 이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세손빈 간택을 그따위로 길게 해?
이레와 다른 할아버지들은 상의 물음을 애써 무시했다.
악이 물었다.
-평범한 일은 아니구나. 필시 사정이 있으렷다?
-네.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레는 잠실과 예기치 못한 주상전하와의 만남에 관해 설명했다.
상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번부터 말하였지만, 네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금은 할 일이 무척 없는 모양이구나.
이레의 말을 백귀의 허언쯤으로 받아들인 상과 달리 악과 예는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악의 글이 떠올랐다.
-제례 때 착용할 대례복인 면복. 구장복을 만드는 시험이라.
예가 악의 글을 받았다.
-쉽지 않은 일이로구나. 언뜻 보기에 허술해 보이는 옷이라 해도, 상의원에서도 심의를 거듭하여 길일을 잡고, 뛰어난 자들의 협의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재간택인의 재주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해도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을 터인데.
이레가 할아버지들의 의문에 답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많은 진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레는 지밀상궁이 전한 이야기를 할아버지들에게 전했다.
*
양덕당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험과 관련한 통보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곧 지밀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이 양덕당을 찾았다.
이레를 비롯한 재간택인들은 언제나처럼 양덕당의 대청마루로 모였다.
“주상전하께서 하명하신 이번 시험에 관해 공조를 비롯한 조정 각부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손빈을 정하는 시험이었다.
객관성이나 공평함을 갖추기 위한 준비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주상전하의 지엄한 어명까지 덧붙여지니.
그야말로 시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명대로 행하지 못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상전하께서 제례 때 입으실 면복인 구장복은 현의와 중단, 그리고 현의와 중단 사이에 걸치는 상과 폐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정해진 법도와 규율에 맞춰 산, 용, 화, 화충, 종이, 조, 미, 보, 불문등 아홉 개의 장문을 수자 놓아야 합니다. 현의는…….”
지밀상궁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간택인들의 표정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저 간단한 일이라 생각했건만.
실상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한 가문의 수장이 입을 제례복 짓는 일도 어렵건만.
하긴, 세손빈을 가리는 어려운 자리에 쉽고 단순한 문제가 나올 리 만무했다.
한 가문의 수장이 입을 제례복 짓는 일도 어렵건만.
나라의 가장 귀하고 높은 분께서 걸칠 면복을 짓는 일이니.
상의관 소속의 장인(匠人) 중, 오직 주상전하의 옷 짓는 일에만 일평생을 바쳐온 어침장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니…….
아직 바느질은 물론이고 수자 놓는 것도 서툰 어린 간택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이 때문에 상의원 내부에서도 의견이 충돌하였다.
다행히 하루 밤낮의 격론 끝에 이번 시험의 방향성만은 조율되었다.
“주상전하께서 입으실 옷은 상의원에서 따로 준비할 것입니다.”
지밀상궁이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경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린 옷을 지을 필요가 없질 않습니까.”
지밀상궁은 고개를 저었다.
“마땅히 지어야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주상전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이다. 예외가 있을 순 없었다.
상의원에서는 어명과 직면한 상황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제시했다.
옷은 상의원에서 짓는다.
다만, 주상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재간택인들에게 옷 짓는 시험을 치르게 한다.
주상전하께서 재간택인들이 직접 지은 옷 입길 원하시니.
제례복에 들어가는 의복 중 하나를 짓게 하거나, 수자 일부를 재간택인이 놓게 하면 될 터였다.
“다만, 어느 부분을 재간택인들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명이 지엄하니.
제례 때 입을 면복인 구장복 모두를 짓게 하자는 의견과 자수를 비롯한 일부만 하게 하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두 의견 모두 나름의 논리와 당위성을 지니고 있어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시험방식이 분명하게 결정되기까지 재간택인들의 귀가가 허락되었습니다. 사가로 돌아가 결정을 기다리십시오.”
*
이레의 이야기가 끝났다.
화의 글이 백지 위에 꽃을 피웠다.
-귀가라.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구나.
-네.
예가 물었다.
-낯선 곳에서 참으로 힘들었겠구나. 며칠 만이냐?
이레가 답했다.
-닷새입니다.
이레는 궁에 온 날을 헤아려보았다.
“결코, 긴 기간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무척 오래 지낸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색할 만큼.
화, 상, 악의 글이 차례로 나타났다.
-고생 많았다. 아이야. 너와 오랜만에 만나 묻고 싶은 산처럼 말이 많으나,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쉬어라.
-무작정 쉰다 생각하지 말고,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여기어라.
악의 말에 상이 꼬투리를 잡았다.
-떨어지려 애쓰는 아이다.
-아! 그러하였지.
마지막으로 예가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보자꾸나.
이레도 붓을 들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집으로 돌아간 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들과의 필담을 마친 이레는 이부자리에 누웠다.
“다음 시험을 위한 대비라…….”
할아버지들께선 아직 모르고 계신다.
더는 떨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음을.
이제 삼간택에 오르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노라 다짐한 것을 아직 몰랐다.
이레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탓일까.
밤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오라버니와 재회하였고, 어머니를 뵈었다.
은자원으로 달려가 희미한 어둠 속에 웅크린 사내와도 만났다.
은협도 보았고, 어두운 구석에 자리 잡은 키 큰 사내도 보았다.
이제는 만나려 해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
새벽녘에 잠에서 깬 이레는 볼을 만졌다.
손바닥으로 물기가 묻어나왔다.
꿈을 꾸며 울기라도 한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 홀로 잠드는 밤마다 눈시울을 적시곤 하였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선 더는 울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꿈속의 그녀는 아직 어린 모양이다.
촉촉하게 젖은 제 손끝을 바라보던 이레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찌 이리 쉽지 않은 운명일까. 그저 혼자가 싫은 것뿐인데. 그저……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뿐이데.”
다른 사람에겐 쉽고 일상인 그 일이…….
이레에겐 너무도 힘들었다.
운명이 쉬이 허락하지 않은 탓이다.
***
푸른 새벽이 걷히고 황금빛 태양이 양덕당 마당을 적시었다.
전각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재간택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각오를 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냥 즐거워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구연재와 최미옥.
두 여인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아마도 잠실에서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린 듯하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이레도 담담한 얼굴로 짐을 꾸렸다.
그리 오래 머물지도 않았건만.
챙길 물건은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이미 옷과 패물은 수모가 정리하였음에도 구석구석 갈무리해야 할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재간택인들과 함께 아침상을 받았다.
식사가 끝나자 비로소 돌아가도 좋다는 지밀상궁의 말이 떨어졌다.
궁으로 들어오는 절차가 까다로운 만큼, 나가는 절차도 단순하지 않았다.
묘시(卯時)부터 한 명씩.
관상감에서 알린 적절한 시간에 맞춰 재간택인들은 궐 밖으로 향했다.
신시말(申時末:오후 5시)
이레는 가장 마지막으로 궐을 나갈 수 있었다.
궁문 밖엔 친근한 얼굴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천호와 백호였다.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이레가 가마에 올랐다.
가마 안에 세 권의 책이 놓여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가마 안엔 늘 새로운 서책이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배려에 이레는 살그머니 미소를 그렸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네.”
천호의 물음에 답하자 비로소 가마가 움직였다.
이레는 서책을 펼쳤다.
새로운 내용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제법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야 주위를 살펴볼 여유를 되찾았다.
가마는 여전히 이동 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적어도 반 시진은 흐른 것 같았다.
평소라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
창문을 열어보니 낯선 풍경이 지나갔다.
“어디쯤 왔습니까?”
“조금 돌아오느라 지체되었습니다. 곧 도착하니 안심하십시오.”
천호의 단단한 목소리에 이레는 창문을 닫았다.
집이 가깝다는 소리를 들으니 할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들께서 뭐라 하실까.
또, 그분들께 이번 일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행랑 할멈도 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니, 흔들리던 가마가 드디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수모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레는 여울네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 밖으로 몸을 뺐다.
“여긴…….”
높고 긴 담벼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상수리나무 숲이 보이고, 실개천도 눈에 들어왔다.
실개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돌다리 끝에 둥근 반월문(半月門)이 보였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장소.
이레는 천호와 수모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곳은 어디인가요?”
그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허리를 숙인 채 침묵했다.
왜 이럴까?
지금껏 지켜본바, 두 사람은 절대 자신에게 위해가 될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죄 없소. 내가 시켜서 그리한 것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뜻하지 목소리에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반월문 앞.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햇살을 병풍처럼 두른 채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사내.
“기다렸소.”
형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