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66화 (66/215)

#66. 알려주랴?

“내가 이곳에 있었소.”

마른 바람이 후원을 쓸고 지나갔다.

장무열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뒤섞였다.

낮지만 분명한 어조는 후원에 모인 모두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지밀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의 눈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내 의기양양했던 명선의 낯빛도 창백하게 변했다.

장령. 장무열.

저 사내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명선은 사나운 눈길로 이레를 노려보았다.

‘네가 꾸민 짓이냐?’

하지만 놀라긴 이레도 매한가지였다.

당황하는 이레의 모습에 명선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것의 계책이 아니었어?’

그럼 정말로 저 사내가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왜?

그녀의 궁금증을 지밀상궁이 대신 풀어주었다.

“이곳에 계셨다 함은 이틀 전 밤에 저분께서 만나셨다는 어사가…….”

장무열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소. 바로 나였소.”

“어사대에서 야심한 시각에 양덕당 후원을 무슨 일로…….”

장무열은 대답 대신 등 뒤로 눈짓을 보냈다.

사헌부의 비방주 허상익이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펼쳤다.

“어험, 얼마 전 궁내에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소. 궁녀들과 관련한…… 어험. 하여간 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수목(樹木)에 새겨진 낙서를 확인하게 되었소. 대부분은 의미 없는 내용이나, 일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암구호임을 확인하였소. 이에 사헌부에서는 궐 내의 모든 수목을 조사하던 중이었소.”

말을 마친 허상익은 장무열에게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무열이 지밀상궁에게 물었다.

“충분한 답이 되었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수목을 조사하기 위해 양덕당 후원에 오셨다 하셨는데, 왜 하필 늦은 밤이었는지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오. 다른 수목을 확인하며 움직이다 보니, 이곳의 차례가 늦은 것뿐이오.”

“흔적을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 머문듯합니다.”

지밀상궁의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오. 보이지 않는다고 대충 넘어갈 만큼 무던한 성격도 아닌지라, 다른 곳보다 꼼꼼히 살폈소. 그리고 일이 그렇게 된 것엔…….”

장무열은 지밀상궁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전했다.

“이곳에 간택인들이 머물고 있음을 알고 혹 불미한 저의를 품은 자가 있을까, 사헌부에서 특별히 관심을 두고 주시하고 있다오.”

“그런 것이었습니까?”

“이건 기밀이오.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아니 될 것이오. 만일 누군가에게 발설하였다간, 뒷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오.”

“명심하겠습니다.”

조용한 협박으로 대답을 마무리한 장무열은 한 걸음 물러나며 넉넉한 미소를 보였다.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오.”

“저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하는 말치레가 아니었다.

지밀상궁은 장무열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사헌부의 장령이 하는 말을 어느 뉘라서 믿지 않을 것인가.

더구나 저 많은 어사를 이끌고 준엄하게 행차하니, 그 발언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지밀상궁은 이레를 비롯한 재간택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로써 오해는 모두 풀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더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거센 항의가 들려왔다.

명선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따지듯 소리쳤다.

“그날 저 간택인이 만난 사내는 분명 하급관원의 관복을 입고 있었소. 그러니 저 사내일 리 없소.”

장무열은 사헌부의 장령.

명선이 본 하급관원과는 복색이 전혀 달랐다.

“하급관원의 복색이라…….”

명선의 말에 장무열의 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날, 그는 분명 사헌부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레가 하급관원의 복색을 한 다른 누군가를 또 만났다는 의미일 터.

이레와 연관된 자 가운데, 떠오르는 사내는 오직 한 명.

‘그 밤, 날 찾아온 것이 아니었군.’

워낙 눈치가 재빠른 여인이라.

훔쳐보는 시선을 느끼고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 역시 여인의 수줍음쯤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레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를 만나러 나온 것이었다.

분명 은자원의 그 음침한 사내일 테지.

장무열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너무 시시하면 재미없지.

목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집중하고 몰입하니.

이레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실망보단 거센 승부의 욕망이 일었다.

잠깐 사이, 생각을 정리한 장무열은 태연하게 핑계를 늘어놓았다.

“원활한 수사를 위해, 간혹 하급관원으로 위장하기도 하오. 그날도 그러하였고.”

장무열의 대답에도 명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관복은 그렇다 치겠습니다. 그럼 이건 어찌 설명하겠습니까? 내가 알기로 대사헌과 경기관찰사 집안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여인은 낯선 사내와 만났다고 하였으니. 안면이 없는 사람이라 한 증언과 불일치합니다.”

새로이 드러난 사실에 지밀상궁은 두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혼담이 오간 사이라니…….

명선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아니, 오히려 간택에 참여한 간택인과 사헌부 장령이 은밀한 만남을 가진 것이 된다.

지밀상궁은 초조한 눈길로 장무열을 응시했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맞소. 그런 일이 있었지.”

장무열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면…….”

“다만!”

장무열이 손을 들어 지밀상궁의 말을 잘랐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담이 오갔다 하나, 물색없는 매파가 양가를 잠시 오간 것일 뿐, 구체적으로 진행된 바는 없소. 더구나 혼담의 당사자는 내가 아닌 내 형님이었소.”

“아!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지밀상궁은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재간택인의 불미스런 사담은 그저 궁 안의 좋은 이야깃거리 정도로 끝날 문제지만, 그 대상이 사헌부의 장령이라면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다행히 본인이 부정하니, 이쯤에서 물러서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거짓말! 진실이 아닙니다. 장령께선 저 여인을 만난 적이 있질 않았습니까? 저 여인의 외가 잔치에서 저 여인을 만나러 오질 않았습니까?”

명선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장무열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맞소. 내 형님의 혼담과 관련한 사람이라 일부러 찾아간 일이 있었지. 하지만 잠시의 만남에 그친 터라, 잘 안다 말하긴 부족할 것이오. 그리고…….”

장무열이 명선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의 형형한 시선에 놀란 명선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파랗게 질린 그녀를 내려다보며 장무열이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거요.”

“하,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본 사내는 분명…….”

“그대가 무얼 보았고,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소. 그날, 난 이곳을 탐검 중이었고, 저 여인과 우연히 만난 것이오. 그것이 진실이오.”

장무열은 고개를 숙여 명선의 귓가에 속삭였다.

“좀전의 혼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작 나와 긴밀한 이야기가 오간 당사자는 저 여인이 아니라 그대가 아니던가.”

일순, 명선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본디 장무열과 명선은 태중 혼약한 사이였다.

“그, 그건…….”

“괜찮겠소?”

“네?”

“이 이야기를 지밀상궁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괜찮겠느냔 말이오? 어쩌면 오해할지도 모를 터인데.”

“……!”

명선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장무열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한 사내의 무심한 눈빛.

그 황량한 시선을 마주하자 더럭 겁이 났다.

그 순간, 명선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내가 이레의 방패막이 노릇을 자청했다.

분한 마음에 주먹을 부르르 떨던 명선은 결국 고개를 떨궜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

혼담에 관한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이레가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무어라 하였소?”

장무열이 잘 안 들렸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날 밤의 일. 내 오해라 하였습니다.”

마지못해 목소리를 높인 명선이 휙, 치맛자락을 돌려 양덕당 안으로 사라졌다.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밀상궁이 장무열에게 고개를 숙였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이오.”

지밀상궁이 재간택인과 궁녀들을 이끌고 양덕당으로 향했다.

맨 뒤에서 걸음을 옮기는 이레에게 장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음성.

“그날 밤, 낭자를 찾은 사람이 더 있었던 모양이오.”

“……!”

이레가 그를 돌아보았다.

장무열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그대를 찾은 걸음은 내가 빨랐어도, 정작 중요한 마음은 내 쪽이 조금 늦었던 모양인데…….”

장무열의 진지한 음성이 이어졌다.

“상관없소.”

“……!”

“전에도 말했듯, 이렇게 하나씩 쌓아가면 되니까.”

그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

“휴우.”

양덕당.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이레는 내내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설마, 장무열이 나타날 줄이야.

장무열을 보는 순간, 이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해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변명을 하였던 터라.

그가 자칫 엉뚱한 말이라도 할까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은백에 관해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을 장무열이 해결해 주었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수완도 훌륭하고, 언변은 그보다 더 뛰어났다.

어찌 된 이유에선지 그는 이레가 처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구해주기 위한 방도 역시 알고 있었다.

어사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것도 이레를 위한 그의 계획이었다. 이레는 그의 현명한 대처 덕에 위태로운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장무열에게 신세를 졌다.

비록, 그 역시 이틀 전 밤, 그녀가 만난 당사자 중 하나지만 그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나저나 곤란한 사람이구나.’

장무열을 떠올린 이레는 곤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분명,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보이는 이유 모를 관심과 농담 섞인 말들은 사람을 난처하게 하였다.

어째서 그는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걸까.

“정신 차리자.”

이레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분은 천하의 은협조차도 학을 뗄 정도로 집요한 성격. 어쩌면 날 수상히 여겨 뒤를 캐기 있는 것일지도 몰라.’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장무열이 보이는 유별난 관심을 설명할 길이 없다.

‘조심. 또 조심하여야지.’

왕들의 식견을 배우고 이레였지만, 연애와 사내의 마음에 관하여는 무지하였다.

‘그래도 이렇게 마무리되어 다행이다.’

이레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제 가슴을 토닥였다.

“다행이다.”

은백.

그분께 피해 끼치지 않고 끝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

양덕당 후원.

모두가 사라지고 공허함만이 남은 그곳을 사내는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곁을 지키고 선 수하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하.”

“…….”

“……저하.”

“…….”

수하의 연이은 부름에도 형운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심각한 표정으로 양덕당의 작은 쪽문을 바라볼 뿐.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조금 전 그곳으로 가녀린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의 눈은 여전히 그녀의 자취를 그리고 있었다.

우익위 홍인모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곳은 오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형운은 하급관원의 차림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을 행여 세손을 아는 자가 보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그만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알았다.”

형운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이레의 그림자를 쫓았다.

그의 표정엔 숨길 수 없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면 진즉 내게 말하면 될 것을.’

지난밤, 이레는 서탁을 통해 은백이자 불손인 그에게 한 가지 청을 했다.

-은협을 찾아주세요. 그분께 양덕당으로 오시어 절 찾아달라고 해주십시오. 다만, 절대 절 아는 척하여서는 아니 된다 전해주세요. 누가 저와의 관계를 물으면 이틀 전 밤에 스치듯 만난 사이라 하여야 한다고 해주세요. 그분께 꼭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구체적인 요구.

형운은 이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가 도움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은협이었다.

몇 번이나 연유를 물어도 답하지 않고 은협만 찾으니.

달갑진 않아도 그리하마 하였다.

날이 밝기 무섭게 사람을 풀어 은협을 수색하고 형운 본인도 은자원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서강율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최 내관이 재간택과 관련한 소식을 물어왔다.

불길한 예감에 간택인들을 살피라 최 내관에게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최 내관이 전한 소식은 놀라웠다.

재간택에 참여한 간택인 중 하나가 대범하게도 궐 안에서 사내와 밀회를 즐겼다 하였다.

그 일로 인해 내명부가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도 있었다.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소문의 당사자가 이레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모든 사달이 자신에게 있음도 알았다.

그는 홍인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장 양덕당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게 되었다.

자신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이레의 모습을.

의심과 질투, 비웃음과 조롱이 한데 섞인 끔찍한 곳에서 홀로 선 그녀의 외로운 모습을.

“정녕 그대는…….”

형운의 잇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지난밤, 서탁에서 그녀가 한사코 자신이 아닌 은협을 찾은 이유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은백이자 불손인 그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행여 그에게 작은 불똥이라도 튈까,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힐까.

뭇 사람들의 의심과 시선을 저 가녀린 몸피로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문득 형운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을 숨긴 이레가 아닌,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에게.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것이지. 그랬다면…….’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내 그 화기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방도가 없었다.

이 사태를 해결한 방도가.

본디 혼인의 당사자인 왕세손은 간택에 관련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이 왕실의 법도였다.

일말의 반응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이레를 위해 손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법도를 어긴 것이 될 터.

자신에게도 이레에게도 큰 재앙으로 되돌아오리라.

그러니 지금과 같은 결말은 형운, 이레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최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형언할 수 없는 갑갑증이 일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준 여인이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걸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궐이라는 철창 같은 굴레가.

용포라는 족쇄가.

좁고 무겁게 느껴졌다.

힘없는 걸음으로 세손궁으로 돌아온 형운은 서탁 앞에 앉았다.

습관처럼 서책을 펼쳤다.

마음이 번잡하니, 옛 성현의 고귀한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지고 황혼이 찾아왔다.

그 황혼조차 짧은 만남을 붉게 터트려 작별을 고하니.

천하는 이내 어둠의 장막 속에 휩싸였다.

창을 열었다.

하늘은 온통 어둡고, 산하는 안개로 가득하였다.

“야무(夜霧)로구나.”

밤안개.

그는 유독 밤안개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엔 매일 밤안개와 만나길 고대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밤안개는 외로운 그에게 한 가닥 숨구멍을 열어주었다.

생애 다시 없을 친구이자 여인을 만나게 해주었다.

“어서 오시게. 오랜 벗이여.”

형운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희뿌연 안개가 계곡을 넘는 용처럼 느릿느릿 창을 넘어왔다.

“마치 그날 같구나.”

형운은 이레를 처음 만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간신히 마음을 누르며 그는 천천히 먹을 갈았다.

소매를 걷고 붓에 먹을 담아 종이 위에 세웠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한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은랑

글을 마치고 붓을 드니, 이내 종이가 글을 삼켰다.

형운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글이 사라졌음은 분명 누군가 읽었다는 뜻인데.

정작 답은 없다니.

형운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이레야.

그리운 부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흩어지고 사라졌다.

답은 오지 않았다.

형운은 여러 번 그녀를 불렀으나, 끝내 그녀의 글을 접할 수 없었다.

“참으로 답답하구나.”

애타게 부르는 자신과 불러도 대답 없는 서탁의 그녀.

마치 양덕당에서의 일이 재현된 것만 같아, 마음이 울적하였다.

우울한 마음을 한 자 한 자 서탁에 써내려갔다.

-너에게 다가가려 하나, 도무지 갈 수 없구나. 내 진실한 모습마저 함부로 전하지 못하니. 슬프고 우울하도다. 너 있는 곳, 고작 지척인데. 큰소리 외치면 들릴 듯한데. 죄지은 사람마냥, 제 모습 보이지 못하고, 큰 병 걸린 사람마냥, 제 목소리 내지 못하니. 진정 진실한 모습으로 너와 함께 할 방도가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없단 말이냐.

마음을 쏟아낸 글이 번지고 흐려지며, 끝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변화를 묵묵히 지켜본 형운은 쓰게 웃었다.

“내 글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인생사 덧없다 함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그의 입가에 서린 허탈한 웃음마저 지워질 무렵이었다.

-.

서탁에 큰 점 하나가 나타났다.

형운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이 점은 분명 그가 새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레일까?’

설마, 그녀가 뒤늦게 글을 본 것이려나.

머쓱한 마음에 불현듯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허험.”

과연, 곧 서탁 위에 글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글은 형운이 기다리던 필체가 아니었다.

-겨울이 코 앞이거늘. 화풍(花風) 앓는 어린 고양이가 요란하게도 우는구나.

크고 힘 있는 필체로 쓰인 조롱.

아무리 봐도 이레의 필체가 아니었다.

이레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할아버지들과도 달랐다.

“……새로운 백귀다.”

미간을 모은 형운이 글을 썼다.

서슴없이 써내려간 백귀의 것과 달리 반듯한 정갈한 서체였다.

-너는 누구냐?

-알 것 없다.

“허.”

새로 등장한 백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무척 무례한 자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례하구나. 꺼져라.

형운의 거친 반응에 백귀는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했다.

-꺼져? 겁에 질린 어린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법 사내다운 기색이 티끌만큼이나마 있구나.

-네 칭찬이나 듣자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그만 가라.

거듭된 축객령에도 백귀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 아! 죄짓고 병 걸린 사람 같아, 차마 바라보지도, 부르지도 못한다는 그 여인 말이냐?

“정말 못되고 괘씸한 백귀로다.”

기품있는 이레의 할아버지들과 다르게 새로 등장한 백귀는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자의 글을 더 읽었다간 눈이 썩겠다.”

형운은 백귀의 글이 담긴 종이를 치워버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백귀의 짧은 글이 떠올랐다.

-알려주랴?

종이를 치우려던 형운은 순간 멈칫했다.

-무엇을 알려준단 말이냐?

-방도 말이다. 네 어려운 사정을 극복하고 그 여인에게 다가갈 방도.

백귀의 글이 힘있게 이어졌다.

-내가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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