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65화 (65/215)

#65. 내가 이곳에 있었소

왕세손은 언제나 순한 아이였다.

갓난아이들이 으레 하는 잠투정마저도 보이지 않으니 키우는 유모 상궁은 한결 쉬이 세손을 보살필 수 있었다.

잘 먹고, 잘 자는 순한 세손.

뒤집고, 기고, 걸음마를 떼는 것조차도 언제나 정석대로였다.

어디 그뿐일까.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취하라 하여도 고작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 것들은 주위에 고르게 나눠 주니.

그야말로 순하고 바른 아이의 표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읽고, 쓰고, 배우고, 익히는 욕심은 남달랐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붙잡고 놓지 않았으며,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배움이 끝날 때까지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습관이 되었던지라.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을 때면 버릇처럼 서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하아.”

짧은 탄식이 형운의 처소에서 흘러나왔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서탁 앞에 앉은 그는 연신 탄식 섞인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동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작 형운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참으로 요망한 물건이로다. 어이하여 매번 중요한 순간만은 전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것이 나를 희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형운은 주먹을 들었다.

그러나 차마 그 주먹으로 서탁을 내려치지는 못하였다.

이 서탁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가 적지 않았다.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차가운 밤에 온기를 불어넣어 준 유일한 존재가 아니던가.

형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탁을 내려다보았다.

“서탁아, 너는 어이하여 정작 중요한 일은 전하지 않는 것이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다시 한 번 새어나왔다.

그는 간밤에 나눴던 이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어제, 서향각에서 자신을 알아본 것은 아닐까 궁금하여 은근히 물었다.

특별한 이와 만나지 않았는지.

무에 기억할 만한 특별한 일이 없었는지.

그러나 이레는 너무도 단호히 아무일도 없었고, 특별한 이는 더더욱 만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주상전하와 함께 있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가림막 뒤에 있었던 탓에 비록 얼굴을 못했겠지만, 목소리는 듣지 않았을까?

이레라면.

그 총명한 여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 엉뚱하게도 은협을 찾는 것이겠지.

부탁할 일이 있다면서 정작 찾는 것은 은백이 아닌 은협이었다.

역시 자신은 이레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일까?

하긴, 은백이니, 불손이니.

그녀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꾸며진 거짓 이름뿐이었다.

이레가 아는 형운은 은자원의 하급관원이었다.

물론 단양에서 마패를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허상익이라는 어사에게서 가짜 판별을 받았다.

어쩌면 이레는 형운을 어사라 생각지도 않으리라.

여인의 앞에서 허풍 떠는 사내쯤으로 생각하려나?

서강율, 그 허풍선이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라 생각할지도 모르리라.

“그러고 보니 삭탈관직하여야 할 자를 하나 잊고 있었구나.”

형운은 ‘허상익’과 ‘삭탈관직’이라는 이름을 번갈아가며 되뇌었다.

그의 삭탈관직 명부에 ‘허상익’을 크게 새겨놓았다.

아무튼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레가 아는 그의 신분은 가짜 어사 행세하는 하급관원.

이레가 형운과 가까워지는 건 분명 달가운 일이나, 그 연유로 인해 간택에서 떨어질까 노력하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다.

실종된 오라버니의 행방을 찾기 위해 간택에 참여했던 이레가 아니었던가.

행방은 찾지 못했으나 김기대의 생존은 확인하였다.

더는 이번 간택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어젯밤의 일로 인해 어쩌면 그녀는 이번 재간택에서 떨어지기 위해 전력을 다할지도 모른다.

아니…….

“하고도 남지, 은랑이라면.”

형운은 주먹을 으스러지라고 쥐었다.

이레가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달려오길 바랐다.

전력으로 자신에게 오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왕세손인 걸 알면, 은랑은 어찌할까?”

분명 혼란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그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리둥절할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 한 마디에 화사한 기운이 돋아났다.

그러나 그 간질거리는 감정은 찰나에 불과했다.

“과연 내 정체를 알고도 쉬이 내 곁으로 오려 할까?”

불현듯 드는 의문에 형운은 또 한 번 한숨을 뱉었다.

자신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우려한 대로 어렵고 부담스러워 되레 달아날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그냥 보내지 않으리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곁에 두리라.

문득, 이레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일까.

여인이 사내에게 품는 마음.

그 은은한 연모의 정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오라비를 대하는 듯한 마음이려나?

아니, 아니다.

그저 은자원에서 함께 일하는 관계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그저 조금 아는 사이?

“싫다.”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무덤덤하게 아는 사이가 되는 건 싫었다.

혈육같이 설렘 없는 관계도 싫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따뜻한 사이.

웃는 얼굴을 한번 보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관계.

형운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만약 형운의 향한 이레의 마음이 부족하다면…….

그 부족한 만큼 자신이 채우리라.

이레가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나 역시 나의 최선을 다하리라.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은랑의 부탁부터 전해야겠구나.”

지난밤.

이레는 형운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해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레의 부탁은 형운과 관계없었다.

“하필이면 은협, 그 작자에게 부탁해야 하는 일이라니.”

못마땅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삭탈관직’ 명부 최상단 첫 번째 줄에 자리한 인물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 일은 오직 은협,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 협잡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였으니.

“좌익위. 그곳에 있느냐?”

형운의 부름에 이내 답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인. 이곳에 있습니다.”

형운은 최치성에게 물었다.

“은협, 그 작자의 행방은 찾았느냐?”

“우익위가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찾고 있사오나,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사옵니다.”

최치성의 보고에 형운은 작게 투덜거렸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이레가 자신이 아닌 그자에게 부탁하는 것도 못마땅할 노릇인데.

정작 그 부탁을 전하지도 못할 상황이라니.

“늦지 않게 꼭 전해야 한다 하였는데.”

전해야 할 말은 오직 하나.

양덕당으로 이레를 찾아와 달라는 내용 하나뿐이었다.

구체적인 이유와 해야 할 일은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찾아와 달라고만 하였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군. 아무튼, 더는 못 기다리겠구나. 혹시 모르니 은자원으로 직접 가 봐야겠다.”

형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환복하라.”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조용한 세손궁에 파문을 일으켰다.

***

서대문 밖.

보부상들이 자주 사용하는 봉놋방 한구석에 남루한 차림의 선비가 누워 있었다.

무에 고단한 밤이라도 보낸 듯 그는 드렁드렁 코를 골았다.

그러다 불현듯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왜 이리 귀가 가려?”

서강율은 손가락 끝으로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그러다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밤새 먼 곳까지 다녀온 터라 여간 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잠꼬대까지 했다.

“드디어 잡았다. 십학사, 이 괘씸한 놈들. 이제야 네놈들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구나. 어디 어떤 놈들인지 한 번 보자꾸나. 아니, 당신은…….”

누군가 자신을 절실히 찾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서강율은 달콤한 꿈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

아침상을 물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양덕당으로 지밀상궁을 비롯한 궁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재간택인들을 양덕당 마당으로 나오게 하였다.

지밀상궁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다음 시험에 관한 내용을 전해야 하겠지만, 그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밀상궁의 시선은 자연스레 이레에게로 향했다.

“재간택이 시작되고 두 번째 밤. 후원을 산책하다 낯선 사내를 만났다 하였습니까?”

“네, 그리 말했습니다.”

“그 사내가 어사이며, 후원 인근을 조사하였다 하였고요.”

“틀림없습니다.”

“그 만남은 어디까지나 우연한 것이며,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맞습니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밤의 일을 확인한 지밀상궁이 한층 삼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과 관련하여 웃전에 의견을 올렸습니다. 웃전에선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손빈이 되실 분을 고르는 자리인 만큼 그 과정과 절차에 있어 단 한 점의 오점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레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지밀상궁의 말이 이어졌다.

“하여, 이번 사건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터럭만큼의 의문도 남겨선 아니 된다고 하시었나이다.”

지밀상궁은 이레에게 다가갔다.

“그러니…… 입증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날 밤, 후원에서 만난 사내와 우연히 만났다는 것을.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라는 것을.”

이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볍게 넘어가 주길 바랐지만, 상황은 최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은백을 통해 나름 손을 써두었으나, 아무래도 늦는 모양이다.

‘워낙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은협이시니. 원한다고 하여, 쉬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지.’

은협의 자리는 자주 비어 있었다.

길게는 여러 달, 은자원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임기응변에 능한 은협이라면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이레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리한 요구를 강요받고 있으며, 더구나 도움을 기대했던 은협은 곁에 없는 상황.

이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앞서 말했듯, 그 밤의 일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불가능한 요구였다.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을 어찌 입증할 수 있을까.

흘러간 물을 되돌릴 수 없듯, 이미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낯선 자와의 관계를 입증하라는 지밀상궁의 말은 애초에 불가능한 요구였다.

‘이를 어쩐다.’

이레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

‘저 얼굴이 저리 굳어지기도 하구나. 일그러진 꼬락서니를 보니, 막힌 체증이 뚫리는 기분이네.’

심각해진 이레의 표정과 달리 재간택인 중 한 명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명선이었다.

‘과연, 문 소원이로다. 그쪽에서 분명 손을 쓴 것이렷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입증하라니.

지밀상궁은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문 소원의 입김이 들어갔음이 틀림없었다.

소원이라는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놀라울 만큼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신료들은 물론이고 내궁의 궁인들까지, 그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왕의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것.

그것은 거대한 권력을 잉태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만약, 태어난 아이가 사내라면 위태로운 세자의 지위마저 단박에 흔들릴 것이다.

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들에겐 엇나가는 왕세자보단 후궁의 어린 아들이 더 만만할 터.

그러니 궐 안의 그 누구도 문 소원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레에게 떨어진 무리한 요구.

아마도 그런 권력 구조를 이용한 문 소원의 수작이리라.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명선이 바라고 원했던 상황이었다.

‘어디 한 번 변명해보아라. 당연히 어려울 터. 아무렴, 그 밤의 일을 어찌 증명할 수 있겠느냐?’

명선은 확신했다.

이레가 이대로 무너질 것임을.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예측대로 흐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레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 담담한 모습에 명선은 기가 막힌 듯 헛숨을 내쉬었다.

알겠다고?

설마,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그저 머릿속에서만 생각했던 말이 명선의 입을 뚫고 튀어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러나 흥분한 명선은 저에게로 쏟아진 눈총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이레를 노려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날 밤, 낯선 사내와 만났음을 네가 어찌 증명한단 말이냐? 증인도 나밖에 없는데 말이다.”

명선의 말에 주위 사람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명선의 말이 옳다.

증인이 없는 이상 입증할 방도는 없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범상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명선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이레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명석하였고,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번 일 역시 이레가 예측했던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와 관련한 대책 또한 마련해 두었다.

이레가 명선을 보며 짧고 힘 있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때의 일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

이레는 양덕당의 작은 쪽문을 통해 후원을 나갔다.

초겨울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길을 따라 걸었다.

아기자기한 연못을 끼고 반원을 그리듯 나아가자 마침내 홍매화 나무 아래에 이를 수 있었다.

불손과의 만남을 약조했던 곳.

그러나 정작 이곳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곳에 무슨 증좌가 있단 말이냐?”

명선이 싸늘한 목소리가 이레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레가 하도 자신만만하게 굴기에, 무에 뾰족한 수라도 있는 줄 알았건만.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앙상한 가지를 늘어뜨린 홍매화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증거랄 만한 물건도 없고, 그날의 일을 증언해 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이 심각한 상황에 산책이나 하자고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겠지?”

명선의 음성이 카랑카랑했다.

그녀는 다그치는 듯한 눈빛으로 이레를 쏘아보았다.

이쯤 하였으면 양손 싹싹 빌며 잘못하였다, 용서해다오 애원이라도 하련만.

이번에도 명선의 예측은 무너졌다.

이레는 빌지 않았다.

잘못하였다, 용서해달라고 애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선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안 보이십니까? 바로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무어라?”

명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

“흥, 너에게만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귀신에 들린 모양이구나.”

명선의 비아냥에 궁녀 몇 명이 숨죽여 웃었다.

비록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들 또한 명선과 생각이 같았다.

비웃고 조롱하는 눈길이 이레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이레는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과 다름없이 잔잔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보려 하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무어라?”

명선의 눈가에 찬 기운이 들어찼다.

“네가 지금 나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구나. 확실한 증좌가 있다 하더니. 보이지 않는 증좌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냐?”

“억지가 아닙니다.”

“그럼 당장 증좌를 보여라.”

“……그러지요.”

이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매화 나무 곁으로 걸어간 그녀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나무 아래를 가리키는 일이었다.

“보이십니까?”

명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뭘 보란 말이냐? 헛소리는 이쯤하고, 그만…….”

이레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발자국.”

“……!”

사람들의 시선이 비로소 보아야 할 대상을 확인했다.

홍매화 나무 아래 깊게 파인 발자국이 여럿 있었다.

명선이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무슨 대단한 소릴 하는가 했네. 고작 발자국을 증좌라고 말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라면 어디서든…….”

이레는 명선의 훼방을 묵묵히 들어주지 않았다.

“후원 어디에도 이처럼 많은 발자국이 있진 않을 것입니다. 유독 이곳에만 이렇지요.”

“그건 이곳에 나무가 있으니, 쉬기 위해 걸음한…….”

“단순한 발자국이 아닙니다. 발자국의 깊이가 제법 됩니다. 굳은 날이 있어 땅이 물렀다 해도 상당히 깊은 자국이지요.”

“하지만 그 발자국이 네가 입증해야 할 상황의 증좌가 되는 건 아니다.”

명선은 이레의 말에 꼬투리를 잡았다.

지나친 간섭인지라.

지켜보던 사람들이 짜증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한창 궁금한 대목에서 맥을 끊는 명선이 달갑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가운데, 이레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렇게 깊은 흔적이 새겨지려면 상당히 무거운 물건을 든 채 움직였거나…….”

유경이 손뼉을 치며 한마디 거들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될 것 같아요.”

“그렇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이런 흔적이 남겠지. 가령…….”

이레가 홍매화 나무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홍매화 위에서 뛰어내려도 이런 자국이 남을 터.”

“……!”

그제야 이레의 말뜻을 깨달은 여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나무 아래의 깊은 발자국들이 범상치 않게 보였다.

“살펴보거라.”

지밀상궁의 명을 받은 궁녀들이 홍매화 나무로 몰려갔다.

날랜 궁녀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곳에 사내의 것으로 보이는 큰 발자국이 여럿 있습니다. 더러 껍질이 벗겨진 곳도 있습니다.”

“언제 생긴 듯 보이느냐?”

“발자국이 선명하고, 껍질 벗겨진 곳에 아직 진액이 묻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지밀상궁은 이번엔 키 큰 궁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난밤, 이레의 방문 앞을 지킨 궁녀였다.

굳이 묻지 않았건만, 궁녀는 지밀상궁이 원하는 답을 내어놓았다.

“그분께선 밖으로 나간 적도,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은 일도 없습니다.”

마지막 의문까지 확인한 지밀상궁이 이레에게 다가왔다.

“이곳에 발자국이 있음을 어찌 알았습니까?”

“그 낯선 분께서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셨으니까요.”

“아! 그렇게 된 것이로군.”

내내 굳어 있던 지밀상궁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말씀하신 대로 이곳에 낯선 흔적이 있군요. 이 흔적들을 살피니 낯선 사내와 우연히 만났다는 말씀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곳에 사내가 오래도록 머물렀음은 증명되었다.

만약, 사전에 약조한 만남이었다면 이처럼 많은 흔적이 남지는 않았으리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레는 안도했다.

어찌어찌 은협의 도움 없이도 무사히 넘어가는구나.

사실 이 발자국은 장무열이 남긴 것이었다.

나무에 남은 흔적도 그가 제 마음을 알리기 위해 이레에게 귀띔한 것이었다.

이레는 그 흔적을 낯선 사내의 증좌로 삼았다.

모두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명, 명선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잠깐. 이 발자국이 사내가 머문 증좌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사내와의 관계까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지밀상궁이 눈을 찌푸렸다.

“이쯤 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 난 더더욱 의심되오.”

명선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지독한 독기를 내뿜었다.

***

“그 사내, 탐검하던 어사라 하였지?”

명선이 눈을 빛냈다.

“그 어사를 찾으면 되겠구나.”

이레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짐승 간의 대치에도 기세 싸움이 있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기세라는 게 있다.

이레는 불가능한 증명을 해냈다.

그 사실에 감복한 사람들은 그녀의 무죄 또한 납득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명선의 말이 옳았다.

발자국은 누군가 이곳에 오래 서성였음을 증명할 수는 있어도, 이레의 결백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레가 사내와 만났다는 증좌로 악용될 수도 있었다.

그 약점을 명선은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어떻게든 이레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집요함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명선은 지밀상궁을 돌아보았다.

“어사입니다. 사헌부의 협조를 구해 모든 어사를 조사하면 됩니다. 만약, 어사 중 그 누구도 이곳에 있었다 하지 않는다면…….”

명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주장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질 것이다.”

“그것은…….”

의기양양한 명선과 달리 지밀상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사헌부엔 이미 확인 요청을 넣었던 터였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답신은 ‘확인해 줄 수 없음’이었다.

당연했다.

사헌부 어사들의 임무란 공식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찰은 물론이고 비밀스럽게 수행되는 업무도 많았으니.

아무리 내명부의 요청이 있다 하여도 어사들의 행적을 노출할 순 없으리라.

“왜 그러십니까? 사헌부에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궁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명선은 지밀상궁을 재촉했다.

이 집요한 간택인에게 어찌 대답해야 하나.

지밀상궁이 적당한 대답을 궁리할 때였다.

“구태여 사헌부까지 갈 필요 없소.”

감정이 담기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양덕당 후원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검은 철릭 차림의 무사들.

사헌부 소속의 어사들이었다.

명선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내였다.

훤칠한 키에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선연한 이목구비.

그들이 다가오길 기다린 지밀상궁이 물었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 일을 물으러 굳이 사헌부까지 걸음 할 필요 없다 하였소.”

“그 말씀은 혹…….”

뒷말을 흐리는 지밀상궁에게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나요.”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 이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었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