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전력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양덕당.
재간택인들이 모인 그곳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주상전하께서 하명 하신 새로운 과제에 관한 내용과 결정을 전달하는 자리.
하지만 명선의 한 마디로 인해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득해야 할 그곳에 서먹한 정적이 들어찼다.
지밀상궁이 명선에게 물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질문은 명선에게 하고 있지만, 정작 중년 상궁의 눈은 이레를 향해 있었다.
이레를 보는 눈길이 얼음 칼처럼 시리고 날카로웠다.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은 간택인이 있다 했습니까?”
명선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누구요?”
지밀상궁의 물음에 명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레 앞에 서 있었고, 두 눈은 이레에게 고정되었다.
그녀의 세 치 혀가 누굴 표적으로 삼았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지밀상궁은 주위를 얼려버릴 듯 차가운 표정을 한 채 이레에게 재차 확인했다.
“이 말이 사실입니까?”
명선의 말이 사실이라면, 재간택이 문제가 아니었다.
세손빈을 정하는 신성한 자리.
그런 자리에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은 것도 모자라 몰래 밀회를 하였다는 건 단순한 결격사유가 아니었다.
가장 큰 죄는 왕실을 능멸한 죄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간택의 심사에 관여한 대신들은 물론이요, 이레를 천거한 문중에까지 책임을 물을 중대 사안이었다.
그저 이레 한 사람의 책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관련한 모든 사람이 큰 피해를 볼 심각한 사태였다.
자칫하면 공든 탑이 무너지고, 가문의 명예마저 무너질 위기.
이레는 명선을 바라보았다.
명선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를.
눈가에 서린 달콤한 승자의 미소를 응시했다.
이레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다니.”
“모른단 말인가?”
“대체 무얼 말하는지 알아야 답할 게 아닙니까?”
“시침을 떼겠다는 게로군.”
명선의 붉은 입술이 갈라지듯 가늘게 열렸다.
“지난밤. 그대가 후원에서 낯선 사내와 만나는 것을 보았다.”
명선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래도 발뺌할 셈인가?”
“감히, 궐 안에서. 그것도 재간택이 진행되는 와중에 낯선 사내라니…….”
눈을 휘둥그레 뜬 지밀상궁이 이레에게 다가와 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명선 아가씨가 하신 말씀, 사실입니까?”
이레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난밤의 일을 누군가에게 들킬 줄 몰랐다.
게다가 그것이 하필이면 명선이라니.
과연 그녀는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비틀거리는 이레의 말허리를 자르며 명선이 끼어들었다.
“나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소.”
명선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
이상하게 자신의 속을 긁는 이레를 치워버릴 절호의 기회.
“어제 내가 몸이 불편하여 약방에서 쉬었음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오.”
잠시 말을 끊은 명선은 주위를 한차례 휘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재간택인들은 숨은 죽인 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하던 바였다.
명선은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리며 애석한 표정으로 지난밤의 상황을 설명해나갔다.
“영빈 마마의 부름이 계시었지만, 지독한 열병에 송구하오나 약방에 갈 수밖에 없었소. 온종일 앓아누웠다가 일어나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있질 뭐요. 그래도 조금은 차도가 있었던 터라. 더 쉬어야 한다는 의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양덕당으로 돌아왔소. 그리고 보게 되었소.”
명선은 이레를 눈짓하였다.
“저 여인이 늦은 밤 사내와 만나는 광경을.”
“이레 언니가 확실한지요? 그리고 이곳은 지키는 관졸들이 사방에 있는데, 어찌 외간남자를 만날 수 있단 말이어요? 혹, 순찰하는 군졸과 혼동한 건 아니어요?”
유경이 이레를 역성들며 볼멘소리를 냈다.
명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내가 순라군과 관원의 관복도 구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이오?”
확실한 증언에 궁녀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간택인이 궐 안에서 밀회라니.
그 혼란스런 와중에도 유경은 마지막까지 이레를 위해 나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아직 그 여인이 이레 언니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설사 그렇다 한들, 그 만남이 꼭 남녀 간의 은밀한 만남일 거라고 어찌 확신할 수 있겠어요?”
명선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유경을 내쳐두고 이레에게 화살촉을 돌렸다.
“그 부분은 나 역시 궁금하던 참이었느니. 어찌하여 그 야심한 시각, 양덕당의 후원에 있었는지. 그 사내는 누구인지.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어설픈 변명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대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으니.”
명선을 비롯한 여인들의 시선이 이레를 향했다.
이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심과 호기심으로 점철된 눈빛을 전신으로 받아내던 이레가 감은 눈을 떴다.
주위의 소란이 일시에 멎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은 정적.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이레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밤. 늦은 시각 전 후원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레의 말이 끝나자 주위가 들썩였다.
유경과 수모 여울네는 눈에 띄게 당황하였고, 궁녀들은 엄숙한 자리임에도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명선은 턱을 추켜세우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 것만은 잘한 선택이다. 만일 그대가 변명하면, 피할 수 없는 증인을 세우려 하였으니. 그래, 그 후원에서 무얼 하고 있었지?”
“궐에 들어온 이후로 몸도 마음도 고단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나, 모든 것이 낯선지라 낮에도 밤인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밤이 되어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자꾸만 목이 마르고, 입술은 하얗게 타들어 가며, 온갖 불안과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지요.”
이레의 말에 재간택인 유경과 최미옥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이레가 말하는 압박과 불편함을 고스란히 느꼈던 까닭이다.
이레의 말이 이어졌다.
“잠은 오지 않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니, 답답한 마음에 결국 후원으로 나섰지요.”
참다못한 명선이 나섰다.
“무슨 잡소리가 그리 길단 말인가? 힘들고 불편한 사람이 어디 그대 하나뿐일까? 설마, 답답한 마음에 외간 사내와 정을 통하였다 핑계대는 건 아니겠지?”
명선은 대놓고 이레를 부정한 여인으로 몰았다.
다그치는 듯한 추궁에도 이레는 시공일관 평혼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명선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후원에서 제가 낯선 사내와 있는 걸 보았다 하였지요?”
“그렇다. 내가 보았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사실입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이레의 말에 주위가 크게 술렁였다.
명선의 말을 뒷받침하는 이레의 말에 주위에서 다양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하아.”
“저런…….”
“이 무슨 일이.”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은 시험 중 혼절한 구연재를 제외한 네 명의 재간택인들과 그들을 보필하는 수모들이었다.
또한, 지밀상궁과 십여 명의 궁녀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레의 한 마디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는 전대미문의 불미스런 사건이 터졌다며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 이레를 걱정하는 이는 수모 여울네와 재간택인 유경뿐이었다.
“조용!”
지밀상궁이 호통치듯 짧게 말했다.
주위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지밀상궁은 이레를 차갑게 응시했다.
“그 야심한 시각에 후원에서 낯선 사내와 대체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녀의 질문은 이제 사실 확인보다 이레의 죄를 추궁하는 것에 가까웠다.
심문과 같은 매서운 물음에 이레는 도리어 겸손하게 내리깐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질문을 꺼내 들었다.
“무얼 하고 있었다니요?”
지밀상궁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아가씨께서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지난밤 후원에 있었으며, 낯선 사내를 만났다고. 이제 와 발뺌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발뺌이 아니라, 정녕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레의 말에 지밀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지난밤 사내를 만났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과연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명선이 다시 나섰다.
“말장난은 그만두어라. 야심한 시각에 사내를 만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 말을 순진하게 믿어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쓸데없는 변명은 그쯤하고. 사실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 사내는 누구인지. 그와 무슨 관계이고, 무엇을 하였는지.”
이레는 독을 품은 듯한 명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투명한 눈망울로 물었다.
“말씀하는 걸 보니, 제가 그 사내와 무슨 짓을 하였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그곳에서 똑똑히…….”
“무얼 하던가요?”
“그건 분명…….”
송곳 같은 질문에 명선은 말문이 턱 막혔다.
분명 이레가 후원에서 외간 사내를 만나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거리도 먼데다 헤어지는 광경만을 본 것뿐이었다.
둘이서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얼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바는 없었다.
다만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에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예상한 것일 뿐.
적당히 비밀을 폭로하면 알아서 술술 불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레는 오히려 명선의 약한 부분을 파고든 것이었다.
“그때, 그때 분명…….”
“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레는 명선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추궁하듯.
꼬투리를 잡듯.
명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억지 부리지 마라. 네가 낯선 사내와 무슨 짓을 하였는지, 내 입으로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이냐? 그때 벌어진 일은 네가 가장 잘 알 터이니. 어디 그럼 말해 보아라. 그 밤, 그곳에서 낯선 사내와 무엇을 하였는지. 서로를 보던 그 시선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궁지에 몰린 명선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레는 한숨을 흘렸다.
“설마, 그때 일을 누군가 보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또한, 우연한 만남을 오해할 줄도 몰랐고 말입니다.”
“우연한 만남? 오해?”
“늦은 시각, 답답한 마음에 후원에 갔었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낯선 사내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이레는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사실 명선이 지난밤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 변명한다?
어떻게 말한다 해도 해명이 쉽지 않을 일이었다.
서탁의 귀신이 나오라 하여 가 보았더니, 그곳에 진짜 사람이 있더라. 한데, 그 사내가 평소에도 알던 사람이었다.
설사 사실을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믿어줄까?
오히려 상황만 복잡해질 뿐이다.
하여, 이레는 인내했다.
언젠가 화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이니라. 모름지기 성급한 자는 천 마디 변명으로도 화를 부르고, 성인은 침묵으로 화를 복으로 변하게 한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인내하여야 한다. 그렇듯 참고 견디며 인내(忍耐)하고 궁리(窮理)하면 언젠가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다.
이레는 화할아버지의 조언대로 침묵하고 인내하며, 빠져나갈 길을 도모하였다.
자칫 성급하게 말을 하였다간 그녀와 그녀의 집안뿐만이 아니라, 형운에게까지 그 화가 미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할아버지들의 조언은 옳았다.
이레가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하자, 도리어 명선이 흥분하였다.
승자의 기쁨에 도취 된 그녀는 지난밤에 본 이야기를 자랑하듯 풀어놓았다. 그렇게 풀어놓은 말에 이레는 한 가닥 구명줄을 발견하였다.
명선은 이레가 낯선 사내와 만났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무엇을 하였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정황을 파악한 이레는 궁리했다.
할아버지들에게 얻은 조언과 상황을 면밀하게 따지고 살피어 마침내 절망의 밑바닥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분은…….”
이레가 숨을 뱉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탐검(探檢)하던 어사셨습니다.”
“어사?”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명선을 비롯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설마, 낯선 사내가 어사였다니.
지밀상궁이 다시 나섰다.
“방금 지난밤에 만난 사내가 어사였다 하였습니까? 그 어사가 후원을 조사하고 살피고 있었다고요?”
“네. 그리 말했습니다.”
“그 어사가 누구입니까? 또, 양덕당 후원에서 무엇을 조사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조사 관련하여 몇 가지 물어보신 게 전부입니다.”
“무엇을 물어보았습니까? 중요한 사안이니, 대답에 한 점 숨김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후원에서 수상한 물건을 보지 못하였는지 물었습니다. 이상한 낙서나, 나무에 새긴 그림 같은 것을 물었지요.”
이레는 예전 팽례의 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밀상궁은 그 사건에 관해 아는 눈치였다.
“그런…….”
생각에 잠겼던 지밀상궁이 이레에게 다시 물었다.
“그 사내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게 사실입니까?”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레는 장무열을 떠올렸다.
명선이 본 사내는 형운이었지만, 지난밤 이레가 만난 사내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어사인 장무열도 만났다.
다행히 명선은 그와의 만남까지는 보지 못하였다.
만일 보았다면, ‘사내들’이라 정확히 지칭하며 무분별한 만남을 힐난하였을 테지.
결국, 이레를 궁지에 몬 사람도 명선이었지만, 빠져나갈 틈을 준 사람도 명선이었다.
명선은 지난밤에 만난 사내에 관해 물었으니, 이레는 지난밤에 만난 두 사내 중 하나인 장무열에 대해 대답하였다.
장무열과는 몇 번의 면식이 있을 뿐, 아는 사람이라 표현하기는 어려운 사이다.
그러니 잘 모른다는 이레의 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레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던 지밀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일은 사헌부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면, 알 수 있겠지요.”
지밀상궁은 나머지 간택인들을 향해 말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새로운 시험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내일 다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밤에 벌어진 일과 관련한 내용은 웃전에 보고를 올려야겠습니다. 결과가 확실해질 때까지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니, 다른 이야기가 있기 전엔 모두 처소에 계십시오. 특히…….”
지밀상궁은 이레에게 시선을 꽂았다.
“경기관찰사댁의 아가씨는 그 누구와도 만나선 아니 되십니다.”
***
밤이 되었다.
불안한 상황임에도 이레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려 노력했다.
이부자리를 펼치고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귓가에 명선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추궁하던 지밀상궁의 매서운 눈초리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어찌어찌 변명하여 넘어가긴 하였지만, 자칫하였으면 큰 곤욕을 치를 뻔하였다.
‘아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사건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의심의 눈길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았다.
당장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궁녀만 봐도 그러했다.
이레가 걱정된 유경이 찾아왔었지만, 결국 들어오지 못하고 목소리만으로 안부를 전하였다.
심지어 수모인 여울네조차도 그녀의 처소를 편히 드나들 수 없었다.
이레는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되었다.
“내 신세는 어디를 가나 변함이 없구나.”
이레는 쓴웃음을 지었다.
집에서도 별채에 갇혀 지냈건만.
궐에 들어와서도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풍지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이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등에 불을 밝혔다.
텅 빈 실내 한구석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서탁이 눈에 들어왔다.
별채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단지 갇혀 지내는 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서탁이 함께라는 것 또한 변함이 없다.
“서탁을 챙겨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이레는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다.
적당히 흐린 밤.
하지만 드문드문 흘러가는 먹구름도 달을 가릴 만큼 두텁지 않았다.
이레는 인상을 찌푸렸다.
‘달이 밝구나. 이런 날이면 할아버지들이 나오실 텐데.’
평소라면 밝은 달빛이 반가웠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만큼은 달무리가 진하게 지거나, 먹구름이 조금만 더 짙었으면 싶었다.
그래야 불손. 아니, 은백이라 부르는 그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만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라도 그와의 만남은 필수였다.
하지만 날이 이렇게 맑다면, 그를 만나기 힘들 것이다.
“북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어쩌면 늦게라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심혈을 기울여 먹을 갈고, 신중한 자세로 붓을 들었다.
비록 문밖에 궁녀가 지키고 있지만, 그녀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외부로 통하는 이레만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안 계십니까?
간절한 부름이 서탁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쓴 글씨가 이내 흐려졌다.
완전한 백지로 돌아간 종이 위에 기품 넘치는 글이 새로 떠올랐다.
-여기 있소.
반듯한 글씨.
은백이었다.
온종일 굳어 있던 이레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불손!
어떻게 된 일일까.
밝은 달밤임에도, 할아버지들이 아닌 불손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불손과 대화하였지.’
궐에 온 이후로 줄곧 불손과 대화하였다.
이유는 모른다. 장소가 변경되어 그런 것 같다는 의혹만 있을 뿐.
-불손.
이레는 다시 한 번 불손을 불렀다.
언제나 반가웠지만, 오늘은 그 반가움이 곱절은 더한 듯했다.
-앞으로 그리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소?
-은백…… 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리 불러주시오.
이레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글을 썼다.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전처럼 편히 말씀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서탁에서만큼은 은백이 아닌, 불손처럼 말씀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왠지……
“멀게 느껴집니다.”
굳이 뒷말을 붙이지 않았건만.
마치 이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형운은 그녀의 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원하면 그리하마. 하지만 더는 불손이라 불러선 아니 된다.
-알겠습니다.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은근히 비꼬던 제비꽃 여인이 이젠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대답하니. 다른 사람과 필담하는 것 같아, 영 어색하고 이상하구나.
이레는 숨죽여 웃었다.
-원하신다면 저도 서탁의 그 제비꽃 여인으로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비꽃 여인이라 부르시면 안 됩니다.
-그리하는 게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 날 반기는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
-아! 깜빡 잊을 뻔하였습니다. 은백께 긴히 물어볼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형운의 필체에 긴장이 묻어나왔다.
-긴히 할 말이 대체 무엇이냐?
이레가 답했다.
-은협께선 요즘 은자원에 계십니까?
-……은협?
-네.
-고작 물어볼 말이 은협에 관한 것이었느냐?
-네. 그분께 꼭 부탁할 말이 있습니다.
-다른 건 없고?
-무얼 말씀이십니까?
-가령, 낮에 있었던 일이라던가. 간택에 관한 일이라던가. 오늘 만난 사람 중 인상 깊은 사람이라던가.
-없습니다만.
-정녕?
-정녕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토라진 듯한 형운의 말에 이레는 빙그레 웃었다.
“간택에 관한 이야기라면,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긴 합니다.”
이레는 흔들리는 형운의 글을 보며 마음에 새기듯 조용히 읊조렸다.
이제부터…….
“전력을 다해…… 간택에 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