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대를 보러 왔소
천지 만물이 양에서 음으로 그 기운을 탈바꿈하였다.
계절은 겨울을 향해 정신없이 치달렸다.
스산한 바깥세상과 달리 궐은 도홧빛 온기로 가득했다.
세손빈 간택이 한창이었던 까닭이다.
이번 세손빈 간택은 유달리 기간도 길고, 의외의 상황도 많았던 터라.
모이는 사람마다 관심을 보였고, 호사가들은 연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나 정작 시험을 치르는 재간택인들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미 내정된 자는 쓸데없이 늘어난 과정과 절차가 번거로웠고, 내정되지 못한 자는 모든 절차가 혼란스럽고 어렵기만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번 간택으로 영원한 반쪽을 맞이하게 될 세손 역시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왕세손 이형운.
재간택인들 앞에 선 그는 감회가 남달랐다.
‘마침내 그대 앞에 섰구려.’
형운의 시선은 줄곧 이레를 향해 있었다.
세손궁에서 고작해야 일다경도 걸리지 않는 곳이건만.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대는 모를 것이오.
나 역시도 이리될 줄은 미처 몰랐으니.
무릇 세상의 모든 일은 순리에 따르는 법이라 배웠다.
태어나고 죽는 모든 일이 운명으로 정하여졌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목숨붙이는 다만 운명이 마련한 반석 위를 묵묵히 걷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마땅한 흐름이며 도리이리라.
또한,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상이며, 이 살벌하고 근엄한 세상에서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지금까지 그 세상을, 그런 법도와 질서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리 사는 것이 옳다 하였으니.
서책을 통해 만난 옛 성현이 그리 전하였고, 할바마마께서도 그리 강조하였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곁을 지켜주었던 궁인들은 물론이고, 글을 가르친 스승들 역시도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때론 형언할 수 없는 갈증과 갑갑증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일랑 자신의 미숙함으로 빚어진 것이라 마냥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속에 갇혀있던 그의 완벽한 세상에 균열이 생겼다.
그 시작은 서탁이었다.
작은 서탁 위에 서투른 글이 저절로 떠오르던 그 날부터.
황금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가장 화려했던 둥지, 그를 촘촘하게 감싼 세상이 뒤틀렸다.
서탁의 아이는 그에게 바깥세상을 전하였다.
그녀의 세상엔 황금은 없었지만 대신 푸른 창공이 있었다.
돌처럼 굳은 차가운 정적 대신 인간 군상의 온갖 희로애락이 가득했다.
서탁을 통해 훔쳐본 바깥세상은 참으로 변화무쌍하여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문득 형운은 의문이 생겨났다.
궁 안의 하늘은 늘 낮고 지루하건만.
저 밖의 하늘은 어찌하여 저리 높고도 광활한 것인가.
세상의 진귀한 모든 것들을 모아 놓은 곳이 바로 이 궁궐이라 하였는데.
정작 그가 원하는 창연한 하늘은 궁궐 담벼락 너머에 존재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이 황금의 고치를 깨고 훨훨 날갯짓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왕세손이었다.
주상전하의 기대에 부응하는 총명하고 반듯한 왕세손.
왕실의 자랑.
그의 열망과 호기심은 그저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어야 했다.
언제나 한결같았던 그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을 살아가던 왕세손이…….
황금의 둥지를 깨고 나왔다.
제 어깨를 짓누르는 순리와 운명에 맞서기로 한 것이다.
단 하나의 이유.
단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났다.
‘은랑.’
내관들이 펼친 가림막 너머.
동그란 머리에 꽂힌 제비꽃 머리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은랑, 내가 왔소.
그대를 보러.
내 진실한 모습을 그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가 이곳에 왔소.
그러니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봐 주오.
은랑, 내가 여기 있다오.
서탁의 불손이, 은자원의 은백이.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의…….
진실한 내가 이곳에 있소.
형운은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이레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시선에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이레뿐만이 아니라 재간택인 중 그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어 세손을 보지 못하였다.
왕이 돌연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아무래도 우리 세손이 어색한 모양이구나.”
왕은 조금의 미동도 없는 형운의 행동을 오해했다.
“세손과 함께 산책 중에 마침 간택인들이 모여 있다 들었느니. 혹여 세손이 간택인들이 궁금하여 이리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더니. 아무래도 내 생각이 과한 모양이구나.”
왕은 자신의 어림짐작이 틀렸다 생각했다.
그러나 왕은 틀리지 않았다.
왕과의 산책도, 그리고 하필이면 그 산책길을 이곳으로 잡은 것도.
모든 것이 형운의 치밀한 의도였다.
이레를 만나기 위해.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전하기 위해.
*
지난밤.
이레와의 만남은 형운에게 설렘을 안겨주었다.
수없이 고민하고 걱정하였던 것과 달리 이레에게 자신의 진실을 알린 일은 무척 보람되었다.
자신이 불손이며 또한 은백임을 알린 것은 백번 잘한 행동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레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충격적인 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해하려 노력했다.
놀란 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면서도.
끝끝내 형운과 맞닿은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돌아와 침소에 누워도, 눈을 감아도 그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동그랗게 커진 눈.
눈가에 맺힌 눈물.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며 묻던 그 목소리.
빨갛게 물든 뺨을 타고 흐르는 탄식 담긴 하얀 숨결.
턱 아래로 방울져 떨어지던 눈물.
가늘게 떨리던 어깨…….
그 애처로운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손을 잡고, 온기를 주고받았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충동적인 행동.
그때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아니다.
실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하였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보며 힘껏 껴안아 주고 싶었다.
자신의 뜨거운 열기로 그녀가 느낄 혼란과 추위를 모조리 내쫓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 실은 그녀의 턱을 가만 들어 올리며 그 붉고 보드라운 입술에 어떻게든 위로의 몸짓을 해주고만 싶었다.
불현듯 형운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구나.
그리워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런 생각마저 하다니.
잠자리에 들어서도 잊지 못하고 그녀를 그리고, 원하니.
참으로 몹쓸 사내가 아닌가.
“괜찮다. 이제부터 시작이니.”
불손과 서탁의 비밀을 밝혔으니, 조금씩 정진하여 그녀와 가까워지면 되리라.
괴이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도 전혀 문제없는, 그런 사이가 되면 되리라.
“암, 그래야지.”
성현의 말씀은 잘못되었다.
순리와 운명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대자연의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대로만 흐른다면, 어째서 사람은 갈등하고 번민하는가.
어찌하여 낯선 이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며 또한 연모하겠는가.
이 애틋하고 절실한 감정이 고작 번민에 불과할 리 없으니.
실제로 운명이 존재하여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하여도, 운명이 그 사람 대신 다른 이에게 나를 밀어낸다 하여도…….
거스르리라.
최선을 다해, 사력을 다해.
마음 닿는 곳으로 헤엄쳐 가리라.
하지만…….
“내가 그리한다 하여도, 은랑 또한 그런 마음일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가시넝쿨을 지나고, 험한 파도를 넘어 그녀에게 간다 하여도 정작 그녀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 아니던가.
자신이 서탁의 불손이며 은백이라는 사실을 알렸건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불안하였다.
재간택 교지를 받고 불만을 토로하던 이레의 글이 자꾸만 머릿속을 아른거렸다.
“세손임을 알렸어야 했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형운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백과 불손의 관계만으로도 혼란스러워하던 이레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에게 세손임을 밝히면 필시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 분명하였다.
설사, 믿는다 하여도 자신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여 이대로 영영 예전이 관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왕세손이란 자리는 그만큼 무겁고 버거웠다.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권력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가시방석과 같은 불편한 자리일 뿐이다.
자신이 아는 이레라면 아마도 불편하게 느끼리라.
그러나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이레가 아닌 엉뚱한 이를 일평생 곁에 두고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이레는 이번 간택에서 떨어지기 위해 사력을 다할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지. 그렇게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번민의 시간이 흘렀다.
갈등과 고뇌가 끊임없이 형운을 괴롭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밝히자.
떳떳하게 내가 뉘인지 그녀에게 보여주자.
그리하여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면…….
왕세손인 자신을 이레가 어려워한다면…….
설득하리라.
내가 도와주겠노라고.
그대가 감당해야 할 거센 파도 내가 함께 감당하겠노라고.
마음을 정한 형운은 날이 밝기 무섭게 왕의 처소를 찾았다.
그리고 청했다.
왕과 산책을 하고 싶다고.
간택이 진행 중일 땐 제아무리 세손이라 하여도 재간택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으니.
부득이 임금과 함께해야 했다.
할바마마의 호기심과 변덕스러운 성정이라면 기꺼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이레 앞에 설 수 있었다.
단지 고개 숙인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형운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들떴다.
이제 그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전하기만 하면 될 터.
마침 생각해둔 빌미도 있으니.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형운의 계산에 없던 존재가 불쑥 서향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주상전하.”
높은 콧소리와 함께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서향각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왕이 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소원이 아니더냐.”
“네, 전하. 소첩, 인사 올립니다.”
“이곳에서 자네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몸도 무거운데 쉬질 않고.”
왕의 걱정에 문 소원은 보란 듯 제 배를 쓰다듬었다.
“적당한 운동이 몸에 좋다 하여 산책 중이었습니다.”
“뭐든 적당함이 좋으니, 무리하지 마라. 그래, 예까진 어인 걸음이고?”
“우연히 전하께서 이곳으로 행차하시었단 소식을 들었나이다. 소첩, 너무도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혹여, 방해되었나이까?”
“방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
“다행이옵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은 문 소원이 재간택인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온데, 저분들은 간택인들이 아니옵니까?”
“맞다. 마침 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중이라 하더구나.”
“이곳에서의 시험이라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는 말에 지밀상궁이 눈치껏 나섰다.
“잠실에서 양잠을 하였나이다.”
“무릇 왕실의 여인이라면 능히 해낼 줄 아는 것이 바로 양잠이지요.”
“다행히 여기 계신 분들께선 두려움 없이 시험을 완수하였나이다.”
“장한지고.”
왕은 흐뭇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재간택인 중 유독 한 명만은 낯빛이 새카맣게 변했다.
최미옥이었다.
그녀는 단 한 올의 실도 뽑아내지 못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후회는 언제나 때늦은 법이었다.
재간택인들의 표정을 살핀 문 소원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다들 훌륭합니다. 과연 얼마나 잘하였는지 궁금한데…….”
왕도 뒤늦게 흥미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간택인들의 솜씨가 궁금하구나.”
이때, 명선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용케 눈치챈 문 소원이 왕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전하. 간택인들이 부끄러워하겠나이다.”
왕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런가? 하긴 편하진 않겠구나.”
눈치 빠른 문 소원이 꾀를 내었다.
“전하. 정 궁금하시면 차라리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무에,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자고로 여인의 정성 중 하나는 지아비에게 옷을 지어 입히는 것이라 들었나이다. 기왕에 실을 구하였으니, 그 실을 이용하여 옷을 짓게 하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허허. 내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하였느니.”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던 왕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나를 위한 옷을 한 벌 짓도록 하는 게 어떠할까?”
“네?”
놀라 반문한 이는 지밀상궁이었다.
느닷없는 하명에 그녀는 법도를 잊은 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오나 전하, 전하의 의관은 상의원에서…….”
지밀상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은 거침이 없었다.
“이번 입동 제례엔 저 아이들이 직접 지은 옷을 입고 종묘에 인사를 올리고 싶구나.”
왕이 재간택인들을 둘러보았다.
“어떠하냐? 나를 위해 그리해 줄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도 아닌 주상전하께서 입으실 옷을 지으라니.
재간택인들은 시험의 무게와 압박에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미흡하오나…….”
명선이었다.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허허허. 장한지고.”
넉넉한 웃음으로 화답한 왕이 문 소원을 돌아보았다.
“어떤가 내 생각이?”
문 소원은 눈가를 길게 늘이며 교활한 웃음을 숨겼다.
“참으로 명안이시옵니다, 전하.”
***
“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야.”
재간택인들에게 과제를 내린 왕이 신형을 돌렸다.
그 뒤를 문 소원이 바짝 따라붙었다.
뒷짐을 진 채 서향각 돌계단을 내려서던 왕은 문득 옆자리가 허전하였다. 왕세손이 보이지 않았다.
왕세손은 여전히 재간택인들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세손, 뭣 하느냐?”
왕의 물음에도 세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전해야 할 말이 있음이라.
그러나 불같은 성정의 왕은 세손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서 오질 않고.”
형운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로구나.’
모든 수를 쥐어짜며 간신히 이곳까지 왔건만.
목적달성을 코앞에 두고, 문 소원의 요사스런 웃음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으니.
“저하.”
최 내관이 전에 없이 굼뜬 세손의 행동에 안절부절못했다.
형운은 별수 없이 신형을 돌렸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요?”
양덕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경이 물었다.
이레가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세손저하 말입니다.”
“세손저하께서 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어 보였거든요.”
“그랬어?”
이레의 심드렁한 대답에 유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내내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던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고민은 무슨.”
“그런데 왜 그런 거여요? 주상 전하께서 납실 때도 그렇고, 하물며 세손께서 걸음 하셨는데도 전혀 관심도 없으시니.”
“내가 그랬어?”
“네. 말해 보셔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요?”
유경의 물음에 이레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별일 아니야. 정말…… 별일 아니란다.”
***
왕께서 재간택인들에게 내린 과제에 가례도감을 비롯한 내명부가 발칵 뒤집혔다.
재간택인들에게 옷을 짓게 하는 일은 큰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옷을 왕께서 입으실 거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입동 제례에 입을 것이라 하시니.
당장 상의원에서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왕께선 뜻을 거두지 않으셨다.
조상께서도 마땅히 좋아하실 거라 거듭 말씀하시니, 결국 왕의 뜻대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다만, 사안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재간택인들이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불과 반나절 만에 이뤄진 결정은 곧 양덕당에 머무는 재간택인들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
지밀상궁이 전한 소식에 재간택인들은 술렁거렸다.
그때 명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밀상궁의 물음에 명선이 입을 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자격이 없는 재간택인이 있소. 그런 이가 다음 과제를 해야 할 이유가 있겠소?”
느닷없는 말에 지밀상궁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격 없는 재간택인이 있다니.”
“말 그대로 자격이 의심되는 재간택인이 있어 그러하오.”
“그게 대체 누굽니까?”
지밀상궁의 독촉에 명선은 대답 대신 질문을 내어놓았다.
“만약, 재간택인이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오?”
지밀상궁은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정하고 불미하니, 마땅히 자격을 박탈하여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렇군요.”
명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녀가 멈춰 선 곳은 이레의 앞이었다.
“이제 그대가 대답할 차례인 것 같군.”
이레가 고개를 들어 명선을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하란 말입니까?”
“지난밤.”
“…….”
이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반대로 명선의 얼굴엔 미소가 짙어졌다.
“지난밤. 그대가 한 일을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겠는가?”
쿵!
이레의 가슴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