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62화 (62/215)

#62. 잠실(蠶室)

느른한 햇살이 양덕당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레는 모처럼 머리가 맑은 아침을 맞이하였다.

지난밤 일로 잠을 뒤척일 줄 알았건만, 의외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이 잠들었다.

지쳐서 이리라.

그것도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은 의문 하나가 해소되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세안하고 아침을 들었다.

“표정이 좋으십니다.”

수모 여울네가 평소보다 밝은 이레의 모습에 반색했다.

궁에 들어온 이후 이레는 단 한 번도 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별빛을 담은 듯한 눈동자는 어둡고 탁하게 가라앉았고, 큰 시름이라도 있는 듯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정곡이 찔려 가슴이 뜨끔했다.

그러나 이레는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런데 내 표정이 그렇게 다르오?”

“아무렴요. 오늘은 처음 만났던 그때의 아가씨를 뵙는 것 같아 제가 더 기분이 좋아지네요.”

“저런. 내가 여울네에게 걱정을 안겨준 모양이오. 이젠 걱정하지 마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특별히 제 실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수모는 이레의 치장을 서둘렀다.

긴 머리를 곱게 빗고 꼼꼼히 땋았다.

얼굴에 진주분을 바르며, 머리에 꽂을 장신구를 신중히 골랐다.

“오늘은 이걸 사용하고 싶소.”

고심하는 수모에게 이레가 머리꽂이를 내밀었다.

어머니께서 주신 선물이자, 지난밤 형운이 돌려준 제비꽃 머리꽂이였다.

“오래된 물건이로군요.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껏 이레가 겪은바, 여울네는 참으로 진중한 사람이었다.

말본새도 단아하였고, 모시는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에도 탁월했다.

그녀는 굳이 낡은 머리꽂이를 고집하는 이레의 마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문중에서 보낸 수모였다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리라.

이레의 머리 위에 꽃 두 송이가 피어났다.

하나는 어머니의 선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라버니의 선물이었다.

이레는 제비꽃 머리꽂이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지난밤, 형운이 잃어버린 머리꽂이를 건네며 한 말과 표정을 떠올렸다.

어둠이 짙은 시각.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정체를 밝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달빛조차 흐린 그 캄캄한 밤에도 은백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손은 크고 따스했으며, 은은한 목소리는 깊은 밤의 궤적을 흔들고 적막한 밤공기마저 전율하게 하였다.

이레는 지난밤의 일을 되짚었다.

형운이 들려준 이야기들.

밤안개로 시작된 그와의 인연은 아스라이 잊혔던 추억을 건져주었다.

세우(細雨)에 옷 젖듯, 이레는 그의 말과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먼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

작은 개울에서 물장구치듯, 서탁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도도한 강처럼 흘러내려 최근의 위급 천만 하였던 사건들로까지 이어졌다.

영화사에서의 일을 들었을 땐, 그가 그 먼 곳까지 달려와 주었다는 소리에 얼마나 놀랍고 기뻤는지 몰랐다.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매 순간 그녀와 함께 있었다.

어린 시절,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도.

납치되어 죽음의 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할 때에도.

오라버니를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도.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단양을 찾았을 때도 형운은 이레의 곁에 있었다.

그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었다.

은자원에서, 그리고 서탁에서…….

그는 언제나 함께였다.

은인(恩人).

짧은 한마디로 단정 짓기엔 그가 자신에게 베푼 고마움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이레의 마음엔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마움과 오랜 추억, 그리고 운명 같은 인연.

미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 형운은 떠나야 했다.

그러나 떠나며 그가 남긴 한 마디는 이레의 심장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그대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것이오.’

울컥 뜨거운 물기가 심장에 고였다.

코끝이 알싸해지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른 감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벅찬 감동과 놀라움.

‘은백이 내게 베푼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

형운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만. 그렇다면 그분께선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할아버지들의 대화를 보았단 말이 아닌가.’

혹여 내가 할아버지들께 털어놓은 고민도 보았을까?

아니야.

보지 못하셨을 거야.

그는 한 달, 혹은 몇 달에 한 번만 볼 수 있었다 했으니. 아마도 대부분의 대화는 보지 못하였을 테지.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아.”

“이번엔 또 한숨이시네요.”

“잠시 딴생각을 하다 그만…….”

“하긴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요.”

수모는 이레의 한숨을 오해했다.

“궁녀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뤄진 시험이 오늘 치러질 모양입니다.”

“시험이 하루 늦게 치러지게 되었다던데, 그 이유가 무어라 하오?”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렇구려.”

“자, 이제 다 끝났습니다.”

여울네의 여문 손끝에 이레의 단장이 끝났다.

잠시 열린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밀상궁과 궁녀들이 들어섰다.

“다음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따르십시오.”

이레는 다른 재간택인들과 함께 양덕당을 나섰다.

유경이 언제나처럼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어떤 시험일까요?”

작은 종달새 같은 유경은 두 번째 시험에 관심이 많았다.

“대체 어떤 시험인데, 일정까지 미룬 걸까요?”

유경의 순한 얼굴을 보며 이레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궁 안의 중요행사에 일정이 미뤄지는 일은 좀처럼 드물 거야.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면…….”

“그렇다면요?”

“사람의 힘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요소가 있어 그런 게 아닐까?”

“네? 왕실에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단 말이에요?”

유경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궁과 그 안의 사람들은 하늘 위의 선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 손끝 하나, 말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위엄과 힘을 지닌 신비한 존재들.

그들에게 과연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기는 할까?

“글쎄.”

이레는 대답을 흐렸다.

그녀 역시 그저 짐작만 하는 것일 뿐.

확실한 정보나 증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저 여인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이레는 명선을 바라보았다.

지난밤까지만 하여도 불편하고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안색이 밝았다.

걸음은 구름 위를 걷듯 가볍고, 두 손은 자연스럽고 힘있게 움직였으며, 코끝은 높고 눈빛은 강렬하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첫 번째 시험에서 잃은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은 듯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칠 듯 대단하니.

단순히 다음 시험내용을 미리 아는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다.

무엇이 명선으로 하여금 저처럼 도도한 모습을 취하게 하였을까.

시선을 느낀 것이려나.

명선이 고개를 돌려 이레를 보았다.

두 여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명선의 눈가에 싸늘한 냉기와 비웃음이 서리리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나 정작 이레를 본 명선은 미소를 지었다.

의미심장한 웃음.

뭐지?

명선의 부드러운 미소 앞에 이레는 되레 불안했다.

***

지밀상궁은 재간택인들을 서향각이라는 나무 현판이 걸린 전각으로 인도했다.

“이곳이 시험장입니다.”

굳게 문 닫힌 전각 앞에서 지밀상궁이 목청을 돋웠다.

중년의 상궁은 어린 간택인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곧 이곳에서 앞으로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을 보게 될 겁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됩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재간택인들의 양옆에 궁녀들이 바싹 붙어섰다.

그렇게 한 명의 재간택마다 두 명의 궁녀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문을 열어라!”

굳게 닫힌 서향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너머는 새카만 어둠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곁에선 궁녀들이 허둥대는 재간택인들과 함께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혔다.

그나마 조금의 빛이라도 새어 들어오던 문이 닫히니, 사방은 온통 캄캄했다.

손끝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온 것이라,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한순간 눈먼 봉사가 된 것만 같았다.

재간택인들은 석상처럼 굳어져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둠에 미처 익숙해지기 전.

쏴아아아아…….

정체 모를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마치 한여름에 내리는 소낙비 같은 소리.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군가 불만 가득한 음성을 내놓았다.

유경이 이레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이레가 유경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곁에 항아님들도 계시잖아.”

“그래도…….”

겁에 질린 유경의 떨림이 이레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긴장되는 건 이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지밀상궁이 유등을 밝혔다.

흐릿한 불빛이 공기 중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빗소리를 닮은 소리의 정체.

이레와 유경을 비롯한 재간택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윽고…….

“으아악!”

재간택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싫어, 저리 가!”

단말마와 함께 누군가 바닥으로 풀썩 허물어졌다.

이레 역시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팔에 매달린 유경은 그야말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의 정체.

그것은…….

***

“누엡니다.”

지밀상궁은 뽕잎을 갉아 먹는 누에를 가리켰다.

재간택인 중 한 명인 구연재는 눈앞에서 꿈틀대는 벌레를 보곤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궁녀들이 그녀를 잠실(蠶室) 밖으로 부축했다.

남은 네 명의 간택인을 둘러보며 지밀상궁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왕실의 잠실입니다. 매년 3월 초사일(初巳日)에 왕실에선 선잠제(先蠶祭)를 행합니다. 백성들에게 양잠(養蠶) 장려하기 위한 행사이지요. 이때, 왕비께서 손수 누에를 쳐 만백성의 귀감이 되십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경의 물음에 지밀상궁은 엄격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누에고치에서 잠사 뽑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재간택인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지밀상궁은 그녀들의 면면을 일일이 살폈다.

“잠사를 뽑는 일. 그것이 이번 시험의 과제입니다.”

***

재간택인들 앞에 물레와 물에 잠긴 누에고치가 든 항아리가 놓였다.

왕비를 비롯한 내명부의 여인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라지만, 곱게만 자란 여염집 여인들에게 대부분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엄지보다 조금 큰 크기의 하얀 뭉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니, 더더욱 꺼림칙하였다.

재간택인 중 유일하게 물레를 돌리는 사람은 이레였다.

시험내용을 들은 이레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치의 실을 물레에 걸었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물레를 돌렸다.

물레가 돌 때마다 고치들이 실타래를 풀어내듯 돌돌 돌았다.

물레를 돌리니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좀 전까지는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한껏 들떠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전에 불손에 한 말 때문이었다.

‘재간택에 최선을 다해 임하라.’

불손이 정말 은백이라면.

또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면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혹, 그와의 관계를 자신만 오해한 것은 아닐까?

사내와 여인이 아닌.

애정이 아닌.

그저 은자원의 동료로서의 단순한 관심이라면.

생각해보면 은백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인연.

그와의 접점도 마음에 걸렸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내민 계기도 오라버니 때문이었다.

오라버니를 잃어버렸을 때.

마치 오라비의 빈자리를 대신하듯, 친 오라비처럼 자상하게 음으로 양으로 돌보고 감싸주었다.

그런 걸까?

그래서 재간택에 전력을 다해 임하라 한 것일까?

그저 오라비의 마음으로.

단순히 어린 누이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렇다면 지난밤에 보인 그의 따뜻한 미소는 무엇이었을까.

구태여 찾아와 불손과 은백이 같은 사람임을 밝힌 이유는 무얼까.

“어, 언니.”

이레의 상념은 유경의 다급한 부름으로 끊기고 말았다.

“응? 왜 그러는 게야?”

“물레가…….”

“아!”

이레가 돌리던 물레가 헛돌고 있었다.

고치의 실을 모두 풀어낸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저도 모르게 물레 돌리는 속도가 빨라진 모양이다.

“언닌 정말 대단해요. 전 이제 간신히 물레에 실을 걸었는데요.”

유경은 물레에 고작 두 가닥의 실을 걸어두었다.

말 그대로 정말 간신히 시작한 듯, 물레에 감긴 실의 양은 턱없이 적었다.

“잘했어.”

“전 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어요?”

이레는 물레에 실을 걸며 대답했다.

“몇 번 해 본 적이 있었어.”

이레에게 누에치기는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니었다.

집안의 천덕꾸러기.

별채에 버려진 아가씨.

작은 별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수를 놓고 책을 읽어도 하루해는 여전히 중천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읽을 책도 많지 않았다.

몰래 구하기도 하고, 오라버니에게 받기도 하였지만.

바닥 없는 늪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그녀의 열정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였다.

글을 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낡아 해진 서책의 모양까지 모조리 기억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그저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그녀가 외로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서탁의 할아버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 뜨는 밤이면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끝없이 펼쳐진 지식의 바다요, 별 무리처럼 무수하게 펼쳐진 지혜의 밤하늘이었다.

그분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레에겐 가뭄에 내린 단비와 같았다.

어쩌다 먹구름이 끼거나 그믐이면 어찌나 억울하였던지.

마치 소중한 제 보물을 빼앗긴 것처럼 슬펐다.

하지만 밤은 짧고, 잠 못 드는 낮은 한없이 길기만 하였다.

그녀를 찾으러 오는 사람도 이따금 놀러 오는 오라버니나 행랑 할멈뿐이었으니.

그러던 차에 행랑 할멈이 하는 누에치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레를 돌리다 보면 머릿속을 들쑤시던 생각들이 잠잠해지곤 하였다.

그 경험 덕에 두 번째 시험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전 아무래도 여기서 끝인가 봐요.”

유경이 울상을 지었다.

“끝이라니. 괜찮아. 충분히 잘했어.”

“하지만 너무 못하는걸요.”

이레는 끝내 눈물을 보이는 유경의 손등을 토닥였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하얀 꽃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게 무엇인 줄 아니?”

“사람을 이롭게 하는 흰 꽃이요?”

이레는 물레를 천천히 돌리며 대답했다.

“그 첫 번째가 목화꽃이란다.”

“두 번째는요?”

“가을에 탈곡을 끝낸 하얀 쌀이지.”

“그리고요?”

“세 번째는 곶감에 피어난 하얀 분꽃이야.”

“참으로 맛난 꽃이네요.”

긴장이 풀린 듯 꼴깍 단침까지 삼키는 유경을 보며 이레는 이야기를 이었다.

“그다음으로 귀한 꽃이 하나 더 있단다.”

“그게 뭘까요? 이번에도 먹는 꽃인가요?”

이레가 작게 웃었다.

“바로 누에 꽃이란다.”

“누에 꽃이요?”

“하얀 누에가 이렇게 고치를 만드니. 그것으로 너와 내가 입고 있는 귀한 비단을 만들 수 있지.”

유경은 자신이 입고 있는 고운 색의 당의를 내려다보았다.

이레의 말처럼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옷이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하여 당장 저 고치가 귀엽고 귀하게 보이진 않겠지. 하지만 유경아, 마냥 꺼리진 마라. 열심히 자라 사람을 위해 귀한 제집을 준 장한 이들이니.”

유경이 이레를 빤히 응시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달라서요.”

“달라?”

“제가 만난 그 어떤 사람도 언니 같지 않았어요. 언니는 뭐랄까요. 사람을 보는 눈도 사물을 살피는 시선도. 사대부의 다른 규수들과는 확연히 달라요.”

제 말을 마친 유경은 이레의 팔을 꼭 안았다.

“고마워요. 언니. 이젠 늦었을지 모르지만, 누에들을 어여쁘게 보도록 노력할게요.”

“대견하네.”

이레는 유경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제 자리로 돌아간 유경은 신중한 표정으로 열심히 물레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자신의 조언은 필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 시험은 물레로 얼마나 많은 실을 뽑아내는가를 겨루는 내용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과정 자체가 시험일 테지.’

잠실은 누에에게 꼭 필요한 장소.

하지만 고치의 실을 뽑아내기 위해 구태여 이 장소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어두운 곳에서 실을 뽑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거늘.

그럼에도 구태여 이 캄캄한 잠실에서 실을 뽑게 함은, 일을 잘하는지를 살피는 것보다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시험일 가능성이 컸다.

이레는 다른 재간택인들을 둘러보았다.

명선 역시 열심히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이를 악문 모습이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참고 견디는 것을 보면, 집념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최미옥은 창백한 표정으로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녀는 시험이 끝나는 순간까지 끝내 물레에 실을 걸지 못했다.

***

“그만 멈추십시오.”

상궁의 엄중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렀다.

재간택인들은 저마다 돌리던 물레를 내려놓았다.

이레의 실타래가 가장 컸고, 다음으로 명선과 유경이 뒤를 이었다.

누에고치를 잡을까 말까 망설이던 최미옥은 끝내 한 오라기의 실도 뽑아내지 못했다.

빈 실타래를 내려놓는 그녀의 얼굴엔 낙심이 가득했다.

스윽, 훑는 시선으로 재간택인들을 둘러보던 상궁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실타래에 감긴 실의 양은 살피지도 않았다.

이레의 짐작이 적중했다.

이번 시험의 과제.

이 일을 감당할 담력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자리였다.

눈가가 붉어졌던 유경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이만 양덕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지밀상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서향각의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서니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빛살에 실눈을 뜬 이레는 조심조심 서향각의 돌계단을 내려섰다.

그렇게 더듬거리는 걸음으로 서향각 안마당에 막 내려섰을 때였다.

우르르르르.

다급한 발소리가 서향각 마당을 가로질렀다.

무슨 일일까?

녹색 관복을 입은 환관이 지밀상궁에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납시었습니다.”

지밀상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하, 하지만…….”

예정에 없던 일이라.

지밀상궁이 허둥대는 사이,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상전하 납시오!”

어린 환관의 알림과 함께 거대한 붉은 양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머리를 조아리십시오. 절대 고개를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지밀상궁의 빠른 단속에 재간택인들은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용포 자락이 바닥을 향해 있는 재간택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감히 고개를 들어 임금의 용안을 살피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음이라.

행여 실수라도 할까 싶어 재간택인들은 제 발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늙은 왕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허허, 산책하던 중에 우연히 간택인들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네. 하여,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음 하였으니. 주책맞은 늙은이라고 너무 허물치 마라.”

왕은 뒤를 돌아보며 웃음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세손. 너와 함께 산책하다 보니 우연히 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구나. 혹, 재간택인들이 보고 싶어, 부러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아니더냐?”

내관들이 펼친 가림막 뒤에 선 사내가 답했다.

“제가 그런 요령을 어찌 알겠나이까.”

세손의 겸손하나, 힘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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