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것이오
주인 없는 방에 달빛이 스며들었다.
비스듬히 열린 창틈으로 달무리에 휩싸인 희미한 빛이 찾아와 우두커니 놓인 서탁을 비추었다.
스으윽.
서탁 위의 하얀 종이에 불현듯 검은 궤적이 그려졌다.
먹물도 없고, 붓을 잡을 주인도 없건만.
마치 도깨비의 장난인 양, 세상의 이면에 감춰진 비밀인 양.
종이 위에 제멋대로 글이 새겨졌다.
-오늘도 안 올 모양이군.
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 악, 예가 글을 썼다.
-아이가 며칠 걸릴 거라 했잖아.
-무슨 재간택을 며칠씩이나 하는지 모르겠네. 그저 밥이나 한 끼 하고 얼굴이나 보고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
-특이한 것으로 따지면 초간택이 더 했지 않소? 교지가 나오기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으니.
상이 웃었다.
-이 작자들이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구나. 설마, 아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거야? 그 애가 살아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아이를 오래 보아 정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백귀를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안 될 일이지.
화가 말했다.
-그럼, 그 아이가 백귀란 말인가?
상이 반문했다.
-백귀가 아니면? 설마, 그 아이가 사람이란 말이냐?
화가 다시 말했다.
-백귀라 하면 자고로 산처럼 쌓인 미련과 원망으로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한 원귀를 뜻함인데, 아이에게선 그 어떤 사악한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고로 사람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백귀라 단정하기도 어렵다.
예 역시 동조했다.
-어릴 적부터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소. 만약, 그 모든 이야기가 백귀의 농간이라 한다면 괴이한 것을 넘어 신비하다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오.
악도 거들었다.
-최근의 일만 봐도 그렇지. 간택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에 과장된 면은 없지 않으나, 절차나 과정에 흠을 잡을 수 없었다. 백귀가 제아무리 귀신이라 하나 어찌 신성한 궁궐의 법도와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단 말이냐?
상이 버럭 화를 냈다.
-이것들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한꺼번에 덤비는 거냐? 좋다, 덤벼라. 내, 네놈들 정도는 몇 명이 덤벼도 다 상대할 수 있으니.
발끈 달아오른 상과 달리 화와 예, 악은 시큰둥했다.
-되었다.
-오랜 경험으로 보아, 상대해주면 오히려 더 날뛰는 것 같소.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지. 그나저나 시험은 잘 치르나 모르겠군.
은근슬쩍 상이 끼어들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화가 아쉬움이 가득한 듯 말했다.
-나라면 이레의 마음이 어떻든 그 아이를 세손빈으로 정할 터인데.
악이 서둘러 맞장구쳤다.
-아무렴.
-하지만 이레는 달리 마음에 둔 사내가 있다질 않소이까.
-은자원의 모시기란 녀석이었지.
아쉬움 가득한 예의 말에 화가 말했다.
-음침하고 어두운 곳에서 글만 끄적인다 했던가? 대체 그런 녀석의 어디가 좋아서.
상의 험담에 화, 악, 예가 입을 모았다.
-그래도 나름 강단이 있는 모양이다.
-이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과감히 움직인 것도 그렇고, 단양에서의 사건만 봐도 그리 못난 녀석은 아닌 듯싶으니.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은 때로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였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 생각하오.
상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희 말이야. 정말 은백인지 뭔지 하는 백귀와 아는 사이 아니야? 먼 친척이거나.
악이 단호히 부정했다.
-그럴 리가.
-그런데 왜 자꾸 그 녀석을 두둔하는 거야?
화와 예는 당황했다.
-그건…….
-그러고 보니…….
악이 혼란에 빠진 모두를 구해주었다.
-군자 된 도리로, 어찌 모르는 사람을 험담하겠느냐. 은백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 중용(中庸)과 무사(無私)의 마음가짐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화와 예가 동조했다.
-바로 그렇다.
-참으로 나와 같은 뜻이오.
***
늦은 밤.
농밀한 어둠만큼 실의와 체념마저 짙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언젠가 할아버지들께서 해주신 말을 되새기며, 이레는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래야 했다.
‘불손. 이제 다시 속나 봐라.’
다짐을 거듭하며 양덕당,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어딜 가느냐?”
그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기다린다 하였는데, 어딜 가려 하느냐?”
하지만 발목을 붙잡는 목소리.
아득한 전율이 이레를 관통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녀는 몸을 떨었다.
환청일까?
당연히 그런 것이리라.
그러니 돌아보지 말아야지.
절대 걸음 멈추지 말아야지.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이레의 몸은 천천히 뒤로 돌아서고 있었다.
햇살에 눈 녹듯, 봄빛에 봉오리가 꽃잎을 터트리듯.
한없이 느리고, 한없이 신중하게.
그녀는 어둠 속을 돌아보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레의 눈은 한없이 커졌다.
홍매화 나무 아래.
꿈인 듯 허상인 듯,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은백?”
은자원의 백.
은백이었다.
그를 본 순간, 숨이 막혔다.
턱밑에 달라붙은 밭은 숨을 마저 내쉴 수 없었다.
이곳에 그가 있기를 바랐다.
은백이 아닌, 다른 사내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땐 서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를 보자,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그보다 더 그녀를 어렵게 만든 것은 은백이 불손이 말한 그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망설이는 사이 짙은 자줏빛 관복을 입은 형운이 다가왔다.
“좀 늦었소.”
약간 지친 기색의 그에게선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먼 거리를 전력을 다해 달린 사람처럼, 형운의 어깨는 위아래로 요동쳤다.
하지만 지금 이레에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그가 건넨 한마디에 집중되어 있었다.
좀 늦었소.
마치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자신이 정말 불손이라도 되는 듯.
너무도 태연하게, 너무도 당연한 얼굴로…….
믿기지 않는 상황에 이레는 그저 동그랗게 벌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형운이 물었다.
“왜 그렇게 날 보시오?”
“정말…… 진정 은백이십니까?”
“그럼, 아닌 것 같소?”
이 목소리.
자신을 바라보는 서늘하면서도 차분한 시선.
꿈도 허상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레는 여전히 눈앞에 있는 그가 믿기지 않았다.
“진정, 진정으로 은백이란 말입니까?”
형운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잠시 망설이던 이레는 가까스로 질문을 뱉어냈다.
“불손이십니까?”
질문을 던진 후, 이레는 형운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의 걸음, 사소한 움직임.
그 무엇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이윽고 기다리던 반응이 돌아왔다.
형운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렇소.”
“……!”
이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불손.
그저 백귀라고만 생각하였다.
실체 없는 혼백.
이승에 남은 미련으로 차마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서글픈 영혼.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손은 백귀도 아니었고, 구천을 떠도는 불쌍한 혼백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은백.
오라버니 다음으로 그녀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사내였다.
‘진정하자.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
이레는 혼란스런 마음을 다잡았다.
숱한 기억과 생각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불손이 한 말.
그와 나눈 이야기.
그의 불퉁한 글들과 때때로 걱정 섞인 지청구까지.
‘오만불손한 불손과 은백이 같은 사람이라니.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은백이 불손이며, 불손이 곧 은백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순,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혹시 귀신들린 건 아닐까?’
가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소통을 자청하는 무속인들이 있더랬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조상의 말을 후대에 전하거나, 억울하게 죽은 망자의 사연을 자신의 입을 통해 풀어놓곤 하였다.
혹시 은백도 그런 건 아닐까?
은백의 몸에 불손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니려나?
이레는 침착한 목소리로 형운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물어보시오.”
“은백과 불손은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이되 둘인 존재입니까?”
사뭇 진지한 표정.
질문의 요지를 깨달은 형운은 돌연 너털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은랑의 결점은 여전한 것 같소.”
“네?”
“뛰어난 통찰력이 오히려 그대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니 말이오.”
단양 이요루에서 형운이 이레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이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체온이 느껴지는 사내의 손.
그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어떻소? 아직도 내가 백귀로 보이시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이내 형운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눈치채고 안도했다.
손등으로 뜨겁게 약동하는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그는 정녕코 백귀 따위가 아니었다.
귀신 들린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숨결을 가진…….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은랑의 눈에는 내가 누구로 보이오?”
형운의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본 이레가 대답한다.
“은백. 제 앞에 계신 분은 분명 은백입니다.”
“그리고 또한 불손이기도 하오.”
이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우선 손을 좀 풀어주십시오.”
“……실례했소.”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형운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다.
손 틈으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손안을 가득 채웠던 부드러운 온기가 사라졌다.
이레가 그에게 물었다.
“은백이 곧 불손이며, 불손이 또한 은백이라 하셨지요?”
“그렇소.”
“이 사실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워할 것 없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오.”
그러나 이레의 혼란은 여전했다.
“그럼, 앞으로 제가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불손으로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은백이라 불러야 합니까?”
“이제부터 나를 은백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소?”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어떻게 된 사연인지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리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형운은 쉽게 말문을 떼지 못했다.
‘어디에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 처음부터 하여야겠지. 숨김없이, 모든 이야기를.’
마침내 형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유달리 밤안개 짙은 날의 일이었소.”
***
“밤안개 짙은 그 날 밤. 난 처음으로 서탁의 대화를 보게 되었다오.”
형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연히 서탁을 보게 되었을 때의 놀람과 호기심.
그리고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는 아이에게 느낀 깊은 동질감.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수개월에 한 번. 서탁의 대화를 볼 수 있었소.”
이레는 매일 밤 할아버지들과 필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형운은 아니었다.
그는 오직 밤안개 짙은 날에만 서탁의 대화를 접할 수 있었다.
“왜 보고만 있었습니까?”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오. 아무리 글을 적어도 내 말은 전해지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럼, 불손과의 대화는 무엇입니까?”
“그대와 대화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소.”
이레는 불손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왠지 모르게 당황하면서도, 자신을 잘 아는 듯한 태도.
무엇보다 대화가 된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는 눈치였었다.
“하면, 대광통교에서의 약조는 어찌 된 것입니까?”
예전에 불손은 이레에게 대광통교에서 만나자 약조하였다.
이레는 오라비의 도움으로 대광통교에 나가 불손을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불손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불손에게 깊은 불신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그것은…….”
형운은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곳에서 그대를 보았소. 백귀라 믿은 여인이 실재하는 것을 보고 나 역시 놀랐소. 지금 그대처럼 말이오.”
“그랬군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레 역시 은백과 불손의 관계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있음에도.
오랫동안 백귀임을 확신한 이가 실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레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럼, 그 이후엔 어찌 된 겁니까? 은자원에서도, 단양에서도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오. 그때는 그대가 제비꽃 여인인 줄 미처 몰랐으니까.”
“제비꽃 여인이라고요?”
“서탁의 그대를 난 그렇게 불렀다오.”
“네?”
“대광통교에서 그대를 제대로 본 건 아니었소. 다만, 그날 그대의 머리에 꽂힌 제비꽃 머리꽂이를 보았을 뿐. 그래서…….”
이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광통교에서 보았음에도 절 알아보지 못한 이유, 바로 그것이었군요.”
형운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내 불찰이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운은 은자원에서도 어둡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타인과의 교류도 달가워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니, 대광통교에서의 일도, 그 이후의 이야기도 충분히 설명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돌려주어야 할 물건이 있었군.”
형운은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풀어 보시오.”
이레는 작은 비단 주머니를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주머니를 풀었다.
그 속엔 손가락보다 작은 물건이 담겨 있었다.
손을 무척 타서 낡고 닳은.
그럼에도 자주색의 꽃잎만큼은 선명했다.
“이건…….”
이레의 숨이 거칠어졌다.
제비꽃 머리꽂이.
“이것을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양화사를 기억하오?”
당연히 기억한다.
아니, 어찌 잊을까.
할아버지의 제향일마다 매년 찾은 절이다.
그런데 올해, 그곳에서 큰일이 있었다.
형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가 제 날짜에 돌아오지 않아, 서탁의 백귀들이 많이 걱정하였다오.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보게 된 나는 양화사를 찾아갔소. 그리고 그대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었음을 알게 되었소.”
이레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고 일어났더니, 낯선 장소였다.
심지어 손발이 묶인 채, 자루 속에 갇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명예 살인을 모의한 괴한들이었다. 방을 바꾸는 바람에 엉뚱하게 이레가 그들에게 잡힌 것이었다.
이레는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많은 시도 끝에 머리꽂이를 이용하여 간신히 밧줄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괴한들이 그녀가 탄 가마를 둘러싸듯 포위한 탓에 좀처럼 도망칠 기회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죽음의 위기가 밀려왔다.
초조함이 극에 이르렀을 때였다.
느닷없이 큰 소란이 일었다.
문을 살며시 열어 밖을 살피니, 괴한들이 낯선 무리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혼란한 틈을 타고 이레는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단순히 운이 좋았다 생각했는데…….
“뒤늦게 그대에게 변이 생겼음을 알고 사람을 풀어 수색하였소. 다행히 수상한 가마 행렬을 찾아낼 수 있었다오.”
형운의 설명을 듣는 이레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그럼, 그때…… 괴한들과 시비가 붙었던 사람들이.”
“날 도와주는 사람들이었소.”
“……!”
이레의 숨이 거칠어졌다.
우연이라 생각한 일이, 알고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노력은 헛된 것이었소. 괴한들을 물리치고 가마 안을 살펴봤을 때, 그대는 이미 떠나고 없었으니. 대신 그 머리꽂이만 그곳에 남아 있었지.”
아니다. 그의 노력은 부질없지 않았다.
그가 양화사를 찾아왔기에.
그래서 자신이 납치되었음을 알았기에.
가마 앞을 가로막고, 괴한들과의 싸움을 마다치 않았기에.
그런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그녀는 간신히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달아날 수 있었다.
서탁이 부린 조화였으며, 할아버지들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이었다.
그리고 불손.
아니, 이제 은백이라 불러 마땅한 이 사내가 헌신한 덕이었다.
이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왜…….”
이제야.
“그 이야기를 이제야 하시는 겁니까?”
진작 알았어야 했다.
생명의 은인을 눈앞에 두고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양에서도.
그 이후에도 여러 번 형운의 도움을 받았다.
“그 머리꽂이, 은랑의 것이 맞소?”
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제 머리꽂이입니다. 그리고 양화사의 그 일도. 그 텅 빈 가마에 갇혀 있던 사람도 제가 맞습니다.”
“다행이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으니.”
형운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여…….
그의 마음이 고마워…….
툭, 이레의 눈가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형운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이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그녀의 볼에 온기를 전했다.
“울지 마오. 부디 울지 마오.”
달래듯 어르는 목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의 따스한 손길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옷고름으로 쓱쓱 눈물 자국을 지운 그녀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겠습니다. 이젠 은백께서 불손임을 알겠습니다. 한데, 왜 하필 지금이었습니까? 왜 이리 급하게 만나자 하신 겁니까?”
“더는 숨길 수 없었으니. 지금이 아니면 진실을, 내 뜻을 제대로 전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소.”
“왜…….”
이레는 묻고 싶었다.
왜 지금이 아니면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 하시는 겁니까?
그 사정이 대체 무엇입니까?
그녀가 막 물어보려 할 때였다.
둥.
먼 곳에서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하던 주위가 조금씩 어수선해졌다.
형운의 명으로 잠시 비워둔 경계가 본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순찰하는 군졸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번에도 내가 너무 늦고 말았구려.”
형운은 탄식을 뱉었다.
이 만남을 위해 양덕당 인근의 경계를 한 시진 정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소중한 시간을 문 소원이 방해했다.
“그만 돌아갈 시간이오.”
“아직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도 해주고 싶은 말이 많소. 하지만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소.”
“……알겠습니다.”
묻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
하고 싶은 질문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이레는 목 아래까지 치고 오른 말들을 애써 참아 넘겼다.
“언제 또 볼 수 있겠습니까?”
“곧.”
형운은 미소를 지었다.
“곧 다시 보게 될게요.”
둥둥.
시각을 알리는 진동이 은은하게 이어졌다.
먼 곳에서 들리던 낯선 발소리들이 점차 가까워졌다.
“다시 봅시다.”
형운이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해진 이레는 저도 모르게 형운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어디서 말입니까?”
어디서 또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처음 은자원을 오갈 땐 그와의 만남이 대수롭지 않았다.
오라버니를 잃은 후엔 그를 만나는 게 간절한 소망이었고, 그다음 한동안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중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어디든.”
“네?”
“서탁이든, 은자원이든…….”
형운이 담담하게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대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