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내가 기다린다 하지 않았느냐?
“이 야심한 시각에 마마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문밖에서 최 내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레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나갈 채비를 서두르던 형운은 우뚝 행동을 멈췄다.
“저하께서는 침소 드셨는가?”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형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못마땅한 기색을 감춘 채 형운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밤에 뉘가 온 것이냐?”
최 내관이 대답을 서둘렀다.
“문 소원 입시옵니다.”
형운의 눈매가 한데로 모였다.
소원 문씨라면 할바마마의 후궁이 아니던가.
왕의 아이를 잉태하여 여러모로 궁 안팎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한데, 할바마마의 후궁이 이 늦은 밤 세손의 처소엔 어인 일인가?
“무슨 일로 오셨다 하느냐?”
최 내관에게 물었건만, 대답은 문 소원이 대신하였다.
“세손 저하께 아뢰시게. 평소 세손께서 밤낮으로 학문에 정진하시어 뜻을 굳게 세우심을 우러러보았는데, 다만 지나친 학업으로 과로하시지 않을까 걱정하였노라고. 우연히 사가(私家)의 오라비가 멧돼지를 잡았는데, 이놈의 덩치가 범 못지않게 크니. 멧돼지의 열을 세손께 올려 그간 쌓인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 드리고 싶노라고 말일세.”
최 내관이 허리를 접었다.
“그 따뜻한 뜻과 마음은 지극하오나,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날이 밝은 후에 다시 오심이 어떠하신지요?”
공손한 거절에 문 소원은 눈빛을 세웠다.
“모든 일엔 시와 때가 있는 법. 하물며 영약은 구한 후 바로 섭취해야 효과가 제대로 발휘하는 법일세.”
“하오나…….”
“내 이곳으로 걸음 하기 전 미리 주상전하께 의중을 여쭈었네. 전하께서도 기뻐하시며 허락하신 일이거늘. 한낱 환관인 그대가 주상 전하의 뜻을 거역하겠단 겐가?”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더는 지체 말고 아뢰시게.”
문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형운은 한숨을 뱉었다.
“최 내관, 안으로 뫼셔라.”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화려한 차림의 문 소원은 형운의 침소에 발을 들였다.
“늦은 밤, 감히 저하의 단잠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 내관을 쏘아보던 말벌 같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문 소원은 한없이 나긋한 여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오?”
형운의 물음에 문 소원은 그림자처럼 제 뒤를 따르는 도 상궁에게 눈짓을 보냈다.
도 상궁이 서둘러 비단보자기로 싼 그릇을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사가의 오라버니가 멧돼지의 열을 구했지 뭡니까.”
묵묵히 지켜보던 형운은 저도 모르게 꿈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에게 있어 서탁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각별하였다.
“고맙게 받겠소.”
형운은 열이 담긴 그릇을 서탁 아래로 내려놓았다.
조금의 머뭇거림 없는 거침없는 태도.
문 소원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변했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무엇이 변한 걸까?
문 소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다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멈춰 섰다.
세손의 형형한 검은 눈동자를 훔쳐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했다.
저도 모르게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내 그 연유를 알아차렸다.
기질 때문이었다.
‘그저 약하고 유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세손과는 자주 대면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왕실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먼발치에서나마 세손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때 본 세손의 인상은 지극히 소심하고 유순한 것이, 마치 겁먹은 어린 짐승 같았다.
까다로운 조부와 엄한 아비 아래라.
어깨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니, 자연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을 터.
그래서 그런지 세손은 타인과의 만남을 지극히 꺼렸다.
특히 여인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낯을 가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물론 지금도 여전히 여인인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경계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두려워 피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표정이 참으로 넉넉해 보이십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나는 살가운 사이라도 되는 듯 문 소원이 물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소.”
“그렇습니까? 못 뵌 사이, 부쩍 꿋꿋하고 굳세지시니. 그 사내다운 풍모에 잠시 넋을 놓을 지경이었답니다.”
낯간지러운 칭찬에도 형운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몸도 편치 않으실 터이니. 그만 돌아가 쉬는 게 어떻겠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저 멀리 해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형운의 미간에 초조한 그림자가 깊게 새겨졌다.
이레와 약조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늦으면, 어쩌면 영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설사 나중에 밝힌다 할지라도 그땐 이미 때가 늦으리.
하지만 불청객은 그의 다급한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문 소원은 교활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유가 무얼까?’
무엇이 세손을 변하게 했을까?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갑자기 변했다면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녀는 오늘 세손을 찾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 같은 세자와 더불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을 장해물 중 하나인 왕세손.
그저 거치적거리는 미미한 존재라 생각했건만.
문 소원은 배를 쓰다듬으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여길 찾은 진짜 용무를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 문 소원을 보며 형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할 말이라도 있소?”
“세손빈 간택이 진행되고 있음을 세손께서도 모르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형운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 소원의 말이 이어졌다.
“실은 그 재간택인 중에 특출나게 뛰어난 여인이 있답니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오. 신경 써서도 아니 될 것이고.”
“아무렴요.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걸 알면서 굳이 간택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워낙 뛰어난 여인인지라, 공연한 오지랖임을 알면서도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어떠신가요? 어떤 여인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지 않소.”
“그렇군요. 하면…….”
문 소원이 눈을 빛내며 물음을 이었다.
“혹, 달리 마음에 품은 분이라도 계십니까?”
“……없소.”
형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힐끔, 곁눈질로 그를 살핀 문 소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그러시군요. 제가 이렇습니다. 미천한 여인의 마음으로 혹여 저하께서 궁금하실까 싶어 이 늦은 시간, 감히 이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
“주상전하께 늘 꾸중을 들으면서도 이 버릇을 못 고치고 있질 뭡니까.”
“선물은 고맙소.”
“기회 되는대로 자주 찾아뵙지요.”
어색한 침묵을 끝으로 문 소원은 세손의 침소를 나왔다.
전각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표정은 좀 전과 달리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세손의 그 반응. 필시 마음에 둔 여인이 있으렷다?”
그 여인이 궁녀라면 상관없지만, 만에 하나 재간택인 중에 있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주상전하께선 세자와 달리 세손에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세손이 작심하고 달려든다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장담할 수 없으리라.
“그래선 곤란하지.”
문 소원은 제 배를 쓰다듬었다.
“이 나라의 다음 주인은 당연히 내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그것을 이어받으려면 든든한 바람막이가 필요한즉.”
세손빈은 그 누구도 아닌 명선이 되어야 한다.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꼭 그리되어야지.”
문 소원은 얇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런데 대체 뉘일까?
잘 짜인 판을 이리 뒤흔드는 여인.
세손을 저리 뒤바꾼 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
쿵쿵.
한 발짝, 한 발짝 그림자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이레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달빛을 등지고 선 사내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불손, 불손이십니까?’
이레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사내를 살폈다.
이윽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아!”
이레의 입에서 탄성도 탄식도 아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 장령님이시군요.”
서강율이 독종 중의 독종이라며 입에 거품을 무는 사내.
갑자기 이레에게 혼인을 청한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었다.
불손이 기다리겠다고 한 바로 그 장소.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이레를 기다린 사람은 은백이 아닌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장무열이 홍매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날 찾고 있던 게 아니었소?”
누군가를 찾고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장무열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라면…….”
장무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늦은 시각, 누굴 또 찾는 거란 말이오?”
“누굴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럼 여기까지 어인 걸음이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이나 할까 하여 나왔습니다. 그보다 장 장령님께선 이곳에 무슨 볼일이십니까?”
“혼인을 청한 사람이 이곳에 있다 하여. 잘 있는지 궁금하여 살피던 중이라오.”
일순간, 이레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장무열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농도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농이라. 부끄러운 말이나, 내 평생 쓸데없는 농을 해 본 적이 없다오. 지키지 못할 말은 뱉지 않았고, 일단 뱉은 말은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지켰소.”
“…….”
이레는 물끄러미 장무열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내, 닮았다.
그날.
그 밤.
은자원에서 파루의 북소리와 함께 약조하였던 그 어떤 사람과…….
그 사내의 눈빛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
“농이 아니라면 더더욱 곤란하군요. 혼인과 관련한 일이라면, 이미 거절의 뜻을 분명히 전했습니다.”
이레의 매몰찬 대답에도 장무열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해하오. 낯선 사내가 갑자기 나타나 느닷없이 혼인하자 청하니, 당황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오.”
“정식으로 진행된 일도 아니고, 그저 잠시 양가의 의사만 가볍게 묻는 정도였지요. 무엇보다…….”
이레는 양덕당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다시피 전 재간택인의 신분입니다.”
재간택 교지를 받는 순간, 양가의 혼인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레는 그 사실을 장무열에게 되새겨 주었다.
“그렇구려.”
“재간택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것은 아닐 테고…….”
장무열이 빙긋 미소 지었다.
“물론, 알고 있소. 더불어 삼간택에 오르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오.”
시원한 그의 대답과 웃음에 이레는 고개를 흔들었다.
“집요하십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지금까지 마음먹은 일 중에 해내지 못한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다오.”
“지나친 집념은 때로 집착이 되기도 한답니다.”
“집착이라. 그건 곤란하군.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무얼 말입니까?”
“내 집념을 집착이 아닌 애착으로 만들어 보리다. 그러니 낭자께서도 조금만 노력해주시오.”
“제가 무슨 노력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구려. 가령,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어 줄 수도 있겠고. 조금 더 선심을 써서 친근함이나 정(情)이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레는 장무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무열이 물었다.
“왜 또 그리 보시오?”
“장 장령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어서 그럽니다.”
이레의 물음에 장무열이 양손을 펼친 채 천천히 제자리에서 몸을 빙글 돌아 보였다.
“보다시피 이런 사람이오.”
“장 장령님과 저 사이엔 잠시 매파가 오간 일을 제외하면 아무런 접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당황한 모양이구려. 이해하오. 낭자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 지금 상황을 어찌 설명할까?”
잠시 턱을 긁적이던 장무열은 눈을 반짝거렸다.
“이렇게 말하면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구려.”
그가 이레에게 한 걸음 크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첫눈에 반했소.”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레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은백.
그 사람은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꼭 필요할 때만 자신을 보았지.
그에 반해 장무열, 이 사내는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단 한 번도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적이 없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세상에서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가장 안 어울리는 분이 바로 장 장령님이십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첫눈에 반한 건 아닌 걸로 합시다.”
“네?”
이레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무열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야 날 제대로 보는구려.”
“……!”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이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장무열의 잔잔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낭자께서 이 상황이 그리 새삼스럽고 황망하다면, 내 서두르지 않으리다.”
“…….”
“단서 찾듯, 흔적을 쫓듯.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작은 것부터 하나씩. 그렇게…….”
장무열은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를.
추위에 언 그녀의 하얀 뺨을.
입술을 타고 흐르는 창백한 입김을.
그래, 이것이었구나.
이 모습이 보고 싶었구나.
그날, 면사 쓴 모습으로 당돌하게 제 앞에 섰던 그 눈빛이.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 태도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이곳을 찾아 나무 위까지 올랐던 것이겠지.
장무열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두 눈에 담았다.
“그러니 우리…… 천천히 시작합시다.”
***
“밤이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밤 산책은 그만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더는 어색한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레는 장무열을 향해 헤어짐을 고했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밤이 새도록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스산한 추위에 그녀가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먼저 들어가시오.”
“아닙니다. 여긴 제가 머무는 곳이니, 장 장령님께서 먼저 가십시오.”
“아무래도 아직 찾을 게 남은 모양이구려.”
“그저 산책을 나왔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시간이 나면 홍매화 나무 위도 살펴보시오.”
“홍매화 위요?”
장무열이 하얗게 웃었다.
“……내가 그곳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오.”
***
이레는 멀어지는 장무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상한 사람이다.
처음엔 마냥 엄하고 고지식한 사람 같았다.
은협의 말을 들었을 땐, 참으로 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 형의 이야기를 할 땐, 우애가 남다른 사람이라 느꼈다.
느닷없이 혼인을 청할 땐, 매사에 쓸데없는 진지한 사람이라 단정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지막에 보인 그 머쓱한 웃음.
지금까지 이레가 어림짐작하던 장무열의 그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
“그런데 홍매화 나무 위에 무얼 남겨두었단 걸까?”
호기심이 생긴 이레는 그가 섰던 곳을 살펴봤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물건이나 표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남을 놀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고개를 갸웃하던 이레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홍매화 나무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가 섰던 곳.
나무껍질이 잔뜩 벗겨져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라 나무 이곳저곳에 무수한 흔적과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설마…….”
이레는 그가 서 있던 나뭇가지 아래에서 양덕당을 보았다.
담벼락 너머, 양덕당의 지붕이 보였다.
홍매화 나무 위에 오르면 그 안을 어렴풋이 볼 수 있으리라.
‘이곳에서 양덕당 방향을 보면…….’
정확하게 이레가 묵고 있는 방이 보인다.
장무열이 한 말이 귓가를 맴맴 맴돌았다.
‘혼인을 청한 사람이 이곳에 있다 하여. 잘 있는지 궁금하여 살피던 중이라오.’
설마, 농이 아니라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가 홍매화 나무에 남긴 것은 이레에 관한 호기심과 관심이었다.
또한, 그의 마음이었다.
“참으로 여러 모습을 가진 사람이구나.”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아! 한 사람 있었다.
은백.
답답할 만큼 한결같은 모습만을 보이던 사내.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그 변화가 매번 새롭고 놀라워, 저도 모르게 설레곤 하였다.
이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속았구나.”
나쁜 백귀 같으니라고.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 은백의 이름을 말해 사람을 이리 헤매고 방황하게 하다니.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 때문일까?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온종일 기다리겠노라는 그 한 마디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더랬다.
그 얄팍한 술수에 속아 갈팡질팡했던 것이 억울하기만 했다.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이레는 불손을 떠올리며 다짐 또 다짐했다.
‘그만 돌아가야겠구나.’
늦가을 밤의 한기에 이레는 어깨를 감싸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를 슬픔과 우울한 감정이 가슴과 어깨를 한없이 처지게 하였다.
그때였다.
“어딜 가느냐?”
어둠을 흔드는 중저음의 목소리.
이레는 걸음을 멈췄다.
이 목소리는…….
늘어진 어깨가 긴장으로 팽팽해지고, 감정을 잃은 심장이 무섭게 방망이질 쳤다.
아니다.
괜한 기대 말자.
장 장령님이겠지.
그가 몰래 돌아와 장난치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째서 이리 몸이 떨릴까.
어이하여 목이 메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일까.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걸음을 떼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자니,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가느냐 물었다.”
감미로운 채근.
더는 참지 못한 이레는 뒤를 돌아보았다.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곧 떨리는 입술 사이로 서럽고도 그리운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은…… 백.”
은은한 달빛 아래.
그가 있었다.
그날, 그 밤.
그곳, 어두운 은자원에서 마주친.
그 사람, 그 사내.
그곳,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주한.
그 눈빛, 그 얼굴.
그 어느 것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은백이자 불손인 그 사내가…….
“내가 이곳에서 기다린다 하지 않았느냐?”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