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59화 (59/215)

#59. 난 여기 있소

아침나절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정오가 되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재간택 교지를 받고 궁으로 온 지 이틀째.

폭풍우처럼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던 첫날과 달리 둘째 날은 별다른 일정 없이 비교적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일정이라고 해봐야 영빈께서 다과회에 청한 일이 전부였다.

낮 것을 물린 재간택인들은 영화당으로 향했다.

인자한 얼굴로 재간택인들을 맞던 영빈이 곁을 따르는 송 상궁에게 물었다.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군.”

“대제학의 여식입니다.”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냐?”

“아침 드신 것이 거북하다 하십니다. 처소에서 잠시 쉬시겠다 하시었사옵니다.”

영빈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저런, 의녀는 보냈느냐?”

“약방에 기별을 넣었나이다.”

“별 탈 없어야 할 터인데. 겉으로는 강건해 보인다 하여도, 아직 어린 아가씨들인 것을.”

영빈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재간택인들을 둘러보았다.

“혹여 여기 계신 분 중에서도 몸이 안 좋은 분 없소? 만약 조금이라도 편치 못한 점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심려 거두십시오.”

재간택인들의 답에 영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떡과 한과와 함께 따뜻한 찻상이 재간택인들 앞에 놓였다.

“비가 오는 게 아쉽구려. 그러지 않았으면 산책이라도 즐겼을 터인데.”

재간택인들을 쓸어보는 영빈의 눈에 선한 주름이 잡혔다.

***

영빈과의 만남을 마친 재간택인들은 양덕당으로 돌아왔다.

창가에 앉아 잦아드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다른 방에 갔던 유경이 이레를 찾아왔다.

“언니.”

이레는 그 티 없이 말간 웃음을 사심 없이 반겼다.

“어서 와.”

“언니, 그 이야기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

“다른 재간택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오늘 시험이 없는 건 다음 과제 준비가 끝나지 않아서래요.”

“다음 과제의 준비?”

“네. 뭔가 어마어마한 걸 준비하려나 봐요.”

“그래?”

“대체 무얼까요? 뭐기에 이리 준비 기간이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어요.”

유경의 얼굴엔 근심과 긴장이 가득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궁에서 준비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빈틈이 없을 터인데.

과연 어떤 시험인데, 재간택의 일정마저 미루는 것일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험을 치르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이번은 유독 까다로운 것 같아요.”

“다른 때는 달랐어?”

“네. 들어보니 유난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유경은 재간택 과정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본래 재간택은 선보이기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왕비나 세자빈 간택은 둘 또는 세 명의 간택인이 삼간택에 올라요. 그중 한 명만이 비씨나 빈궁이 되고, 나머지 간택인들은 후궁이 되지요. 그에 반해 세손빈 간택은 오직 한 명의 간택인 만이 삼간택에 올라요. 그리고 큰일이 없는 한 삼간택에 오른 그분이 그대로 세손빈이 된답니다.”

그 이후에도 유경은 세손빈이 되기 위한 길고 지루하며 까다로운 과정과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이레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호응해 주었다.

유경은 세손빈 간택 과정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아니, 어쩌면 유경이 특별히 잘 아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손빈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앞에 두고 누군들 관심 기울이지 않을까.

더구나 집안은 물론 문중이 총력을 기울여 돕고 있으니.

오히려 이상한 것은 이레였다.

이토록 무지한 채로 간택에 참가한 간택인은 없으리라.

이레는 흘러내린 유경의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유경이는 정말 많이 알고 있구나.”

“정작 쓸모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어요. 당장 다음 시험이 무엇인지도 모르잖아요.”

“그걸 누가 알겠니.”

이레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 말간 웃음에 호응하듯 유경은 쉴 새 없이 과거에 있었던 시험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레는 좀처럼 유경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실, 온종일 정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

지난밤, 불손이 전한 글귀.

그것이 머릿속에 콕 박혀 온종일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널 기다리마.

지난밤은 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마땅히 할아버지들을 불러들였어야 할 서탁은 기이하게도 불손을 불러들였다.

기변(奇變).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맑은 달밤엔 할아버지들.

흐리고 달무리 진 날엔 불손이었다.

이따금 날씨의 변덕으로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는 있었지만, 달빛 맑은 날엔 할아버지들이라는 원칙만은 어긋난 적이 없었다.

한데, 유일한 예외가 어제 일어났다.

밝은 달밤임에도 할아버지들 대신 불손이 나타난 것이다.

서탁의 변덕이었다.

이상한 것은 서탁만이 아니었다.

불손의 말과 태도도 평소와 달랐다.

그는 엉뚱하게도 재간택 시험의 무성의함을 지적하며, 만나길 요구하였다.

만남을 요구한 건 벌써 여러 번이니.

별다를 것은 없었다.

처음엔 그에게 속아 대광통교까지 나갔던 일도 있지 않은가.

그때 농락당한 기억이 선명하여, 불손이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허튼소리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런 불손이 이번엔 자신을 은백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은백이라니.

더더욱 불손의 글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며 나오라는 그의 말도 진실로 와닿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저 가볍게 웃고 넘기면 그만일 것을.

이상하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웃고 넘기기엔 불손의 글과 글에서 느껴지는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한 획.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 제 마음을 전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하여, 이레는 거짓임이 뻔하다 생각하면서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또 속을 줄 아십니까?

-널 속인 적 없다. 오해일 뿐이다.

-네. 불손께선 오해라 주장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리고 깜박하셨는가 본데. 전 지금 재간택인의 신분이라,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길을 터놓으마. 명심해라. 해시말, 양덕당의 후원이다.

“휴우.”

지난밤을 떠올리던 이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하여 불손의 요구를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하였을까.

필시 이번에도 거짓임이 분명하거늘.

불손과의 필담은 매번 그러했듯, 이번 역시 평온한 그녀의 마음을 격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언니. 무슨 한숨을 그리 깊게 쉬세요?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유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저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알아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답답하겠지요. 첫 시험도 어려웠는데, 남은 시험은 또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어요.”

이레의 한숨을 지레짐작한 유경은 맞은 편의 텅 빈 방을 눈짓했다.

“자신만만하던 저분도 속병을 앓을 지경이니 말 다 했지요.”

“그러고 보니 약방으로 간 사람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구나.”

이레는 명선의 텅 빈 방을 바라보았다.

***

같은 시간.

명선은 궁궐 약방, 한쪽에 자리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의녀는 그녀에게 가벼운 고뿔과 체기가 있다 하였다.

처방으로 내놓은 환을 먹고 잠시 누웠는데,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보니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그만 돌아가야겠다.’

열도 내렸으니, 그만 양덕당으로 돌아가야 했다.

영빈의 다과회에 불참한 일도 마음에 걸렸다.

명선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안색이 좋지 않으니, 무리하지 말고 더 누워 있어요.”

약방 안으로 짙은 분내가 들어섰다.

강한 약초 향마저도 모두 뒤덮은 분내는 이내 명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문 소원이었다.

열두 폭 스란치마에 매화 꽃잎이 수 놓인 당의 차림의 그녀가 명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를 차리기 위해 명선은 상체를 일으켰다.

“이곳까지 소원께서 어인 행차십니까?”

“우연히 아가씨께서 약방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많이 불편하신 겝니까?”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랄 일이 있어서.”

“저런, 놀라선 안 되지요.”

문 소원은 제 배를 쓰다듬었다.

“그래, 무슨 일로 그리 놀랐습니까?”

달래는 듯한 문 소원의 물음에 명선은 마지못한 듯 입을 뗐다.

“사실, 놀랐다기보다 당황했다는 표현이 옳겠습니다.”

“당황하였다니요?”

“어제 문제 말입니다.”

명선이 주위를 힐끔거렸다.

문 소원이 물린 듯, 의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선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이었습니다.”

명선의 목소리엔 문 소원을 향한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그녀의 가문에서 이번 일을 위해 쏟아부은 재물의 양이 만만치 않거늘.

처음부터 무언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어제저녁에 본 시험이었다.

문 소원이 귀띔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나왔다.

두루마리를 한 장씩 펼치며 문제를 확인할 때마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였던지.

“그 일 말이군요. 나는 또 무슨 일이라고.”

문 소원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렇게 가볍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엉뚱한 구절만 공부하고 외우는 바람에 정작 문제엔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엉뚱한 아이가 최고점을 받았답니다.”

“무얼 그런 것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시험은 보여주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고. 빈씨가 되실 분은 내정되어 있습니다.”

“빈씨 될 여인이 정해져 있다면, 어째서 시험과 절차가 이리 복잡하단 말입니까?”

분을 토하듯 말한 명선은 자신의 말이 과하다 판단하였다.

그녀는 한숨과 함께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다만, 완벽한 빈씨가 되고 싶습니다.”

명선이 하얗게 마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완벽한 여인. 그리하여 이 왕실에 당당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고 말았습니다.”

명선을 바라보는 문 소원은 입가를 비틀었다.

이 고고한 아가씨께선 단 한 번도 져 본 적도, 그리고 빼앗겨 본 적도 없는 듯했다.

그러니 그 작은 일에도 저리 성화를 내고 안달을 볶는 것이겠지.

콧등을 찡그린 문 소원이 입을 열었다.

“실은 작금의 상황은 저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간택의 과정과 절차는 이미 오래전에 협의가 끝난 일이거늘. 엉뚱한 곳에서 자꾸만 간섭이 들어오는 바람에.”

“이번에도 동궁전입니까?”

문 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입니다.”

“대체 세자 저하께선 무슨 생각으로 간택 절차를 문제 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선 원래 괴이하고 편벽하여 엉뚱한 일을 자주 일으키곤 하신답니다. 하도 그런 일이 잦다 보니, 조정 대신들도 이젠 세자 저하께서 지시하는 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지경이라 하더군요.”

문 소원은 명선의 손을 잡았다.

“도도한 강의 흐름을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괜한 걱정 마시어요. 이 나라의 세손빈이 되실 분은 아가씨밖엔 없답니다. 다른 경우는 있을 수 없어요.”

“참말이지요?”

“아무렴요.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왕실의 어른들께서도 입이 닳도록 아가씨를 칭찬하고 있으니. 염려는 내려놓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문 소원은 가벼운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편안한 마음으로 잘 드시어요. 곧 다음 시험이 시작될 겁니다.”

“다음 시험이라 하시었습니까?”

명선이 불안한 얼굴로 문 소원을 올려다보았다.

“혹여 다음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럼요. 첫 번째 시험은 느닷없이 치러져서 미리 알릴 수 없었지만, 이번은 사정이 다르답니다.”

문 소원이 허리를 굽혀 명선의 귓가로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명선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

습윤한 대지 위로 검은 밤이 찾아왔다.

재간택인들이 머무는 양덕당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들이 머무는 방에서 하나둘 불이 꺼졌다.

응축된 긴장과 경계 속에서 하루를 보낸 탓인지.

양덕당의 밤은 유난히 일렀다.

그러나 한 사람.

이레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 꺼진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 서탁을 노려보았다.

-해시말, 양덕당 후원.

분명, 서탁 위엔 아무런 글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본 불손의 글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글귀.

정신 차려, 이레야.

불손이 어떤 백귀인지 벌써 잊었느냐.

속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널 기다리마.

누웠던 이레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큰일이구나.

대체 불손이 뭐라고.

그가 보자는 그의 말이 대체 무엇이라고, 이리 불안하고 초조해진단 말인가.

그때 멀리서 해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마치 초간택의 밤 은자원에서 은백을 만났을 때 들려왔던 파루의 북소리 같았다.

“내가 정녕 귀신에게 홀렸구나.”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은백을 사칭하여 사람 마음을 이리 흔든단 말인가.

탄식을 뱉은 이레는 벗어놓은 옷을 다시 입었다.

그러곤 방문을 빠끔 열어 전각의 사정을 살폈다.

저녁 무렵까지 내리던 비는 어느새 멎었다.

비 웅덩이 고인 전각의 마당은 고요했다.

‘길을 터 주겠다 하더니, 정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삼엄한 시선으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나인도 오늘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잠시만. 잠시 후원에 다녀오기만 하자.’

누군가의 눈에 걸리면 가슴이 답답하여 아주 잠깐 밤공기라도 마시려 나왔다고 변명하자.

마침 약속장소인 후원은 문만 나서면 금방이라.

초간택 때처럼 위험하게 궁궐 이곳저곳을 활보할 필요도 없었다.

이레는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먹장구름 사이로 모습을 숨겼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밖으로 나온 이레는 후원을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양덕당을 감싼 담장 오른쪽에 난 작은 쪽문.

그 쪽문으로 나가면 곧바로 양지바른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이 바로 양덕당의 후원이었다.

뒷산과 이어진 후원은 늘어진 홍매화 나무와 작은 연못이 운치를 더하는 곳이었다.

재간택인들의 출입이 자유롭게 허락된 몇 안 되는 곳인지라, 이레도 어제저녁 수모와 함께 거닐었더랬다.

어제는 재간택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은 곳이건만.

오늘은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사방을 경계하며 걸음 하였다.

“하아.”

이레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희뿌연 숨결이 그녀의 뺨을 타고 긴 여운을 그려냈다.

‘이곳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다 했는데…….’

이레는 후원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늦은 밤.

달빛이 있다곤 하나, 달무리에 먹구름까지 끼어 사위가 어두웠다.

바람이 불어왔다.

발아래에서 으스스한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몸을 한껏 움츠린 이레는 홍매화 나무를 향해 걸었다.

후원엔 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면 홍매화 나무가 있는 바로 저곳이리라.

‘정말 있을까?’

혹시나 하는 기대.

이레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돼.

백귀의 말이다.

다른 백귀도 아닌 불손의 말이다.

설마, 그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부정하는 생각과 달리 그녀의 심장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쿵! 쿵! 선명하게 북을 울렸다.

홍매화 나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걸음도 빨라졌고 심장 소리 또한 조급해졌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긴 이레는 마침내 홍매화 나무에 다다랐다.

“아!”

늦가을.

흐린 달빛 아래.

홍매화 나무는 홀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다린다던 사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나무나 근처 어딘가에 표식이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주위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표식은커녕 그 흔한 낙서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맥이 탁 풀렸다.

문득,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은백이라는 그 한마디에 속아 이 늦은 밤, 밤잠을 쫓아가며 여기까지 나오다니.

“나도 참 미련하구나.”

도대체 몇 번이나 속아야 제정신을 차릴까.

서탁은 백귀들의 세상과 연결된 것.

그러니 할아버지들도 불손도 사람일 리 없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되니 마음이 후련하구나.”

답답하던 가슴 속이 조금은 개운해졌다.

이제 더는 미련 갖지 않을 것이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이레는 양덕당, 따스한 아랫목을 찾아 몸을 돌렸다.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

“어딜 가시오?”

이레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이레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늙은 홍매화 나무 위.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여기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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