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내가 널 기다릴 것이다
“불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익숙한 이름 하나를 뱉고 말았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튀어나오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쉿!”
상궁이 손가락을 입 앞에 세웠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이레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문제의 필체에 집중했다.
‘이 반듯한 필체는 불손의 것이 분명하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오늘 새벽에도 보았던 이 반듯한 필체를....
하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이곳에 불손의 글씨가 있는 걸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불손의 글과 마주했다.
이레의 고운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고민과 상념이 깊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레는 드디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이 글씨, 궁궐에서 통용되는 서체가 분명했다.
평소 불손의 하는 양을 들어볼 때 그는 궁의 사정에 훤한 백귀였다.
아마도 백귀가 되기 전, 궁에서 일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궁에서 통용되는 서체를 쓴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었다.
본디 서체는 그 시작과 지향점에 따라 수십 수백의 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손의 필체는 지나칠 정도로 바르고 올곧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그 지나칠 정도의 바름은 서체의 기본 교본이었다.
차라리 형운의 필체가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뚜렷했다면, 이레가 눈치채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형운의 서체는 만들어진 활자를 찍어낸 듯 매번 바르고 곧은 글씨라.
결국, 이레는 문제의 필체를 불손과 연결하지 못했다.
그렇게 필체와 관련하여 머뭇거리고 있자니, 앞을 지키고 섰던 상궁이 두루마리를 눈짓했다.
문제에 집중하는 의미.
그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답을 무어라 적어야 하나.’
사색, 밤 산책, 밤손님, 먹구름, 휴식.
수면…….
여러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떠면 굳이 밤안개를 언급하였으니 달무리, 장마, 안개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고심하던 이레는 ‘청하지 않은 손님(不請客)’이라 적었다.
적어 놓고 보니 ‘깊은 밤, 밤안개처럼 청하지 않아도 찾아온다는 대목이 청하지 않는 손님이라는 말과 무척 잘 어울렸다.
사실, 이레가 적고 싶은 것은 ‘무례한 손님(不遜)’이라는 의미의 불손.
그러나 문제의 의도와는 크게 동떨어져 보이니.
차마 불손이라 적을 수 없었다.
마지막 문제마저 푼 이레는 붓을 내려놓았다.
두루마리를 다시 접어 상궁에게 돌려주는 그녀의 얼굴엔 단 한 점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얼마 후,
둥둥.
두 번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시험 종료를 뜻하는 북소리였다.
***
저녁상을 물리자 수모 여울네가 찾아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울네는 시험을 잘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묻지 않았다.
그저 고생했다, 위로해 줄 뿐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 이레는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험에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그랬나?
시험을 너무 대충 치른 것 같아, 가슴이 찔렸다.
너무 형편없는 점수가 나오면 안 되는데.
이레의 불편한 기색을 읽은 여울네가 산책을 권했다.
“전각 뒤쪽으로 좁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상궁에게 물어보니, 너무 늦지만 않으면 산책해도 상관없다 하더군요.”
이레는 여울네의 권유로 전각을 나섰다.
꼿꼿하게 날을 세운 채 하루를 보낸 터라.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와 장소를 떠난 이레는 처음으로 편안하게 숨을 쉴 수있었다.
“아니다, 괜찮다 해도 실은 많이 긴장하신 모양입니다.”
여울네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이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는 모양입니다.”
“아무렴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당장은 길게 느껴지겠지만, 긴 인생 중에 짧은 순간일 뿐입니다.”
“그리하겠소.”
그래, 길고 긴 삶을 놓고 본다면 고작 며칠의 시간에 불과한 것을.
그깟 것을 못 참아낼까.
어쩌면 이 궁에서 보내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그리 생각하니 묵직한 마음이 가뿐해졌다.
그렇게 하루의 긴장을 털어낸 이레는 여울네와의 짧은 산책을 마치고 전각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는데, 마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대청마루 앞에 모여있던 재간택인들이 이레의 등장에 질시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왜 저러는 걸까?
의문은 쉽게 풀렸다.
유경이 통통거리며 뛰어왔다.
“언니, 이레 언니.”
다급한 목소리에 이레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야?”
“최상(最上)이래요.”
“최상?”
“네. 언니가 재간택인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대요.”
“뭐?”
이레는 일순간 멍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최고점을 받았다고?”
유경이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언니요. 최상. 언니가 재간택인 중에서 최고점이에요.”
“……!”
이레의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최상.
최고점.
분명 훌륭하고 좋은 의미의 말인데, 정작 그 점수를 받은 이레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설마, 착오겠지.”
착오일 터다.
아니, 착오여야 했다.
***
밤이 깊었다.
이레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이레는 결국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귓가에 유경이 한 말이 메아리쳤다.
‘듣자하니 두 번째 문제를 낸 출제자는 세자 저하셨대요. 재간택인들의 답안을 훑어보던 세자 저하께서 유독 이레 언니의 답안을 보며 껄껄 웃으셨다네요.’
이레가 재간택인 중에서 최상의 평가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가 그 두 번째 문제 덕분이었다.
‘그런데 언니. 두 번째 산술 문제에 뭐라 답하신 거예요? 전 부끄럽지만, 계산이 복잡하여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했는데도 답을 제대로 내지 못했어요.’
이레는 차마 동그라미를 그려서 제출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가만있자. 그 문제를 제출한 사람이 세자 저하이시고, 답안을 채점한 분 또한 세자 저하시라면…….”
이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동그라미만 써 놓은 게 너무 무성의하게 느껴져, 변명처럼 이런저런 말들을 써 놓은 게 떠올랐다.
과세를 내리기에 앞서 백성의 형편부터 살펴야 할 것이라 하였지.
다시 생각해보니, 본의 아니게 세자 저하께 한바탕 훈계를 한 셈이 아닌가?
그 답안을 보시고 세자 저하께서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감히 어느 안전에다 그런 말을 한 것인가.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세 번째 문제의 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유경이 물어온 정보에 의하면 세 번째 문제의 정답을 알아맞힌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하였다.
“하긴 그렇게 괴이한 문제였으니, 정답을 아는 게 오히려 이상했을 테지.”
낮의 일을 되새김질하던 이레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최상, 그렇다고 최저도 아닌 세 번째 정도.
적당히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막상 나온 결과는 최상.
원치 않게 눈에 띄게 된 셈이니, 시작부터 계획이 꼬이고 말았다.
“정말로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구나.”
붙기도 어렵지만, 적당히 떨어지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괜찮아. 아직 시험이 더 남았으니.”
이레는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앞으로의 시험에서 적당히 못 하는 모습을 보이면, 실수로라도 웃전의 눈에 드는 일은 없으리라.
“괜한 노력을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구나.”
어차피 세손빈은 내정되었다 했다.
시험은 단순히 절차일 뿐.
그때, 문풍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니, 이레 언니.”
“유경이구나.”
이레의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방문이 빼꼼 열렸다.
유경이 작은 머리를 쏙 안으로 들이밀었다.
“언니.”
“무슨 일이니?”
“그것이…….”
유경이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나 오늘 여기서 자도 돼요?”
“여기서?”
대답이 떨어지지도 않았건만.
유경은 누가 볼세라.
서둘러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자는 건 너무 무서워요.”
어느새 이레의 옆자리를 파고들더니, 귀염성 있게 종알거렸다.
하는 양과 말하는 새가 밉지 않았다.
“크게 한 일도 없는데, 어깨며 허리며 안 아픈 곳이 없어요.”
“많이 긴장해서 그래.”
아직 어린 여인이 간택이다 시험이다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낯선 장소에서 시험까지 치르니.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였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네. 이리 안쪽으로 더 들어와.”
이레는 이불로 유경을 덮어주었다.
토닥토닥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노라니, 유경은 묻지도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유경의 꿈.
“만사여의(萬事女意)라는 분을 아십니까?”
“처음 듣는구나. 유명한 사람인 모양이지?”
“본래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는 만사여의(萬事如意)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따르다(如)는 말 대신 여인(女)이라는 말을 넣어 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었지요.”
“만사를 제 뜻대로 하는 여인이라. 뜻 그대로의 사람이라면 정말 수완이 대단하겠구나.”
“여인의 몸으로 시전의 3할을 차지한 여걸이라 들었습니다. 돈의 흐름을 귀신같이 꿰뚫고, 사람의 마음을 제 뜻대로 희롱하니. 그녀를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만사여의’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인다고 하더군요.”
“아!”
이레는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지난번 외조모의 환갑연에서도 들었더랬다.
다만, 그녀가 만사여의라 불리는 줄은 몰랐다.
유경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어찌 험하고 거칠다는 상계에 그처럼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렇구나.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이 세상에서 여인으로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밖으로는 율법으로 구속하고, 안으로는 도리로 잡아두니.
죄지은 사람처럼 떳떳하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어느 곳을 갈 때도 발목에 족쇄를 단 것처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이처럼 여인의 바깥 활동에 제약이 큰 세상에서 사내도 하기 어려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만사여의라는 표현이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유경은 녹지근하게 녹아내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그 만사여의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거상이 되고 싶은 것이야?”
이레의 물음에 유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요. 하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않겠지요. 사실, 산학에도 약하여……. 낮에 본 시험도 어려워서 눈물이 날 뻔했어요.”
“그럼?”
“거상은 아니지만, 만사여의처럼 사람들에게 회자하는 여걸이 되고 싶어요.”
“넌 꼭 그렇게 될 거야.”
“고마워요. 언니.”
유경은 볼을 발그레 붉혔다.
이레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생각해 둔 거라도 있니?”
“아직은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당장은 재간택에 충실히 임할 생각입니다.”
“재간택에?”
의외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고, 누굴 질투하는 법도 없으며, 욕심을 드러내는 일도 없던 유경이 세손빈을 바라고 있을 줄이야.
유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재간택 교지를 받았을 때, 가문에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궁으로 오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 일가의 어른들이 얼마나 애써주셨는데요. 그러니 아무리 제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미흡한 사람일지라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허술히 임할 수 없어요.”
“아…….”
“전 열심히 할거에요. 어차피 세손빈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자리라, 저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지만.”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줍은 듯 유경은 쏙 혀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엽고 대견해 보여 이레는 유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언니. 전 언니가 세손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뜻밖의 말에 이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언니는 속도 깊고 마음도 넓어요. 또한, 지혜롭고 현명하지요. 누굴 미워하는 모습도 본 적 없고, 언제나 자상해요. 만약, 우리 중 누군가 세손빈이 되어야 한다면 전 꼭 언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은 고맙지만,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세손빈 자리는 이미 누군가로 내정된 모양인데.”
“지지 마세요. 언니.”
유경은 이레의 손을 꼭 잡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에요. 언니 같은 분이 세손빈이 아니면, 전 정말 억울할 것 같아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잖아요. 천심을 다해 노력하면 반드시 하늘이 길을 열어줄 거에요.”
그 순진한 눈망울에 이레는 차마 싫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지지 않으마.”
***
온종일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품고 있는 속내를 거침없이 풀어낸 터라 후련한 것이려나?
유경은 금세 깊은 단잠에 빠졌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이레는 살며시 창밖을 살폈다.
유난히 맑은 날이라.
시린 달빛이 밤하늘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서탁 너머로 유경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유등을 밝히고, 서탁 위에 종이를 펼쳤다.
달빛도 유난히 곱고, 시기도 적당하니,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먹을 한껏 머금은 이레의 붓이 서탁 위를 흘러다녔다.
-할아버지들.
기다리기라도 한 걸까.
글을 마치기 무섭게 서탁은 종이 위의 먹을 한 점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이레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하얗게 변한 종이를 응시했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누군가 읽은 것이 분명한데.
이레는 다시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스스슷.
다시 어김없이 사라지는 글.
그리고 다시 반복된 깊은 정적.
“왜 이러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는 이레의 눈동자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왔다.
-……왜냐?
“음?”
분명, 기다리던 대답인데, 반응이 이상했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필체였다.
반갑게 맞는 할아버지들을 기대했는데, 정작 서탁 위에 떠오른 필체는 자를 대고 쓴 듯한 반듯한 필체였다.
-설마, 불손이십니까?
상대는 이레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먼저의 물음을 반복할 뿐이었다.
-왜냐고 물었다.
종이 위를 채운 글은 여지없이 반듯하고 빈틈없이 필체였다.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유경이 깰까 살금살금 걸어 창문을 열었다.
구름 한 조각 없는 밤하늘. 둥근 달이 눈에 들어왔다.
밤바람이 유달리 매서웠다.
빈틈없이 창문을 닫은 이레가 빠른 움직임으로 서탁 앞에 앉았다.
-달이 떴습니다. 구름 한 점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할아버지들이 아닌 불손이 나타나시는 겁니까?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
-할아버지들을 어떻게 했는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불손, 제 할아버지들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럼, 어째서 할아버지들이 아닌 불손이 나오시는 겁니까?
-요망한 서탁의 일을 내 어찌 알겠느냐?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사태에 이레는 당황했다.
왜 갑자기 이런 거지?
무엇이 전과 달라져서 이러는 걸까?
설마, 이대로 할아버지들과 영영 작별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혼란에 빠진 그녀의 눈앞에 오만불손(傲慢不遜)한 불청객의 물음이 나타났다.
-왜 세 번째 물음에 엉뚱한 답을 하였느냐?
불손의 짧은 물음은 흐트러진 이레의 정신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이레가 붓을 들었다.
-그걸. 불손이 어찌 아시는 겁니까?
-내 이미 여러 번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불손이며 또한 은자원의 은백이라고.
-말도 안 돼. 어찌 백귀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기필코 네게 진실을 전하리니.
당황한 그녀에게 불손의 글이 이어졌다.
-내일 밤, 해시말(亥時末: 밤 11시). 양덕당의 후원으로 오너라. 그 길 끝에서…….
새기듯, 찍어내듯.
불손은 한 자 한 자 글을 적었다.
-내가 널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