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기필코 네게 진실을 전하리라 (下)
궁의 여인들에겐 궁 밖 사람들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그 무언가가 존재했다.
거대한 위압감과 짓누르는 듯한 권위의 상징인 궐이라는 갑옷 때문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궁이라는 엄격하고도 위험천만한 곳에서 살아온 여인들인지라.
그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킬 무형(無形)의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를 위압하는 눈빛일 수도 있었고, 부드러운 미소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름다운 외모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가시가 문 소원에게도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비정하였다.
이기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를 짓누르는 위압감과 바라보는 이를 질식시킬 것 같은 눈빛은 궐 안에선 따라올 자가 없었다.
신분이 비천하였기에 그만큼 절실하였고, 절실한 만큼 비정했다.
다행히 왕의 총애가 그녀에게 있으니, 권력에 목마른 문 소원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 소원의 그 차가운 눈빛을 정면에서 받아낸 이레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하였다.
사소한 표정의 변화조차도 없어,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저것이……!’
문 소원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무표정한 이레의 반응에 이상하게 배알이 뒤틀렸다.
저도 모르게 화가 불끈불끈 솟았다.
그럴수록 문 소원은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그래, 명선의 말처럼 평범한 아이는 아니로구나. 그럼, 어디 대답해 보도록 해라. 무어라 대답하는지 어디 한번 보자.’
문 소원은 눈꼬리를 가늘게 여미며 이레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잔뜩 독이 오른 문 소원과 달리 이레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스로 세손빈이 될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가?
창칼처럼 정곡을 찔러오는 날카로운 물음.
이레는 조금 전, 관상감 관원들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마침내 그녀는 짧은 정적을 깨트렸다.
“세상엔 마땅히 흘러가야 할 흐름이 있듯, 사람에게도 거스를 수 없는 천명이 있다 들었습니다. 물고기가 물에 살고, 노루가 숲을 거니는 것이 당연하듯,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옳구나. 저마다 타고난 분수가 있으니, 제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문 소원은 미소를 지었다.
이레를 보는 문 소원의 눈꼬리가 여우의 그것처럼 교활하게 휘어졌다.
이레의 대답이 이어졌다.
“하나, 그 천명이 어느 곳 어느 장소로 어떻게 이어질지는 그 누구도 모르니. 다만 전 먼 훗날, 후회 없이 살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천기를 훑고 지맥을 짚는 관상감도 한낱 서탁의 비밀은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 있다 하나, 과연 그 누가 남의 인생을 단언할 수 있을까.
“무어라?”
문 소원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엔 순리에 따를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와 후회 없이 살게 되길 바란다니.
대체 무슨 속셈으로 하는 말인가?
이레는 단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말한 것뿐이었다.
장무열의 형, 장선제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그저 제 마음을 숨기며 운명이 열어준 길을 무턱대고 걷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이레가 지금 원하는 바는 하나였다.
재간택에서 떨어지는 것.
그리하여 재간택 교지를 받기 전, 그때의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불리한 여건임에도 재간택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훌륭하구나.”
영빈 이씨가 이레의 재치를 칭찬했다.
“저 역시도 오랜만에 마음을 울리는 말을 들었습니다.”
“빈궁께서도 그리 들었군요.”
세자빈 홍씨에 이어 중전 김씨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체 무슨…….”
뒤늦게 문 소원이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영빈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말았다.
“대답 잘 들었다. 다른 재간택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전에 없이 단호한 영빈의 모습에 문 소원은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레는 절을 하고 물러났다.
문 소원의 시선이 뒷걸음으로 물러서는 이레의 치맛자락 끝에 사납게 매달렸다.
***
“후아, 정말 가슴이 떨려 죽는 줄 알았어요.”
선보이기를 마치고 양덕당으로 돌아오자마자 유경은 참았던 숨을 한껏 토해냈다.
그러고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채 연신 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그렇게 떨렸어?”
유경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주며 이레가 물었다.
“초간택에서 이미 했던 일이라, 이번엔 긴장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 많은 사람이 죄다 나를 쳐다보니. 숨을 쉴 수 없었어요. 당장 얼굴을 감싸고 어딘가로 숨고 싶어 혼났어요.”
“그래도 선보이기를 하러 안으로 들어갈 땐 떨지도 않고 잘하던걸.”
“떨지 않긴요. 주먹을 얼마나 꽉 주었던지 손바닥이 얼얼할 지경이었어요. 봐요, 여기 이렇게 멍이 다 들었잖아요.”
유경이 이레의 코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언니가 손을 잡아주지 않았었다면 아마 희정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었어?”
“한데, 언니만 유독 시간이 더 걸리던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내가 시간이 오래 걸렀어?”
“아마 다른 사람들 두세 배는 더 걸렸을걸요.”
“이런저런 물음에 답하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네.”
“혹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 유경이 이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원마마 때문이에요?”
유경의 물음에 이레는 놀란 빛을 떠올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역시, 그랬군요.”
주위의 인기척을 살핀 유경은 좀 전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귓속말을 전했다.
“저도 어디에서 들은 말인데, 대제학의 여식과 소원 문씨 사이에 모종의 약조 같은 게 있대요. 그런데 대제학의 여식이 이상하게 언니를 싫어…… 아니, 경계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
이제야 문 소원의 날 선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명선은 이레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문 소원이 그런 명선과 결탁하였다면, 오늘 선보이기에서의 문 소원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나저나 왜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르겠구나.’
이레는 맞은편에 있는 명선의 방을 건너보았다.
“무얼 그리 보셔요.”
때마침 방으로 들어서던 수모 여울네가 물었다.
“아, 여울네.”
“바람이 차네요.”
방문을 닫고 들어선 여울네는 다음 일정을 전했다.
“오후에 시험이 있답니다.”
“오늘 말이오?”
유경은 울상을 지었다.
“좀 전에 본 선보이기로 놀란 가슴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소.”
“저런, 이 정도에 그리 놀라시니. 다음 소식은 전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또 무슨 소식이 있단 말이오? 그러지 말고 그냥 말해보오.”
“오후의 시험은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인데…….”
말을 하는 여울네의 입술로 이레와 유경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 시선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이던 수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을 출제하신 분들이 주상전하와 세자저하, 그리고 세손저하라는 소문입니다.”
“뭐?”
유경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세 분이 어떤 분이시던가.
경전의 깊이와 깨달음에 있어선 조정의 그 어떤 대신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분들이라 하셨다.
주상전하의 뛰어남은 이미 귀가 닳도록 들어 알고 있었고, 세자저하는 물론 세손 역시도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한 분들이셨다.
조강에 참석하기 위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공부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경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언니. 이제 어떻게 하죠?”
유경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누가 출제했든 간에 열심히 풀면 돼.”
어차피 떨어질 것이니.
출제자가 누구인 게 무슨 상관일까.
오전의 선보이기는 가문의 체면과 위상을 생각하여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틀린 답을 쓰는 건 문제 없다.
모르는 문제는 마음 편히 틀리면 그만이고, 아는 문제면 정답에서 살짝 비껴간 답을 제출하면 그만일 터이니.
중요한 것은 적당히 틀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떨어지길 작정한 것이 밝혀지기라도 했다간 왕실을 기만한 죄로 엄벌을 면치 못하리라.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여 간택에 임하기엔 마음에 부는 바람이 거칠었다.
할아버지들의 조언대로.
최선도 최악도 평범한 정도면 적당하리라.
***
어스름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저녁 식사 후의 나른함이 채 꺼지기도 전, 상궁들이 들이닥쳤다.
“시험이 있을 겁니다. 간택인들께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곧 밀봉된 두루마리들을 든 상궁들은 각자 자신이 담당한 재간택인들의 방으로 들어섰다.
상궁은 총 세 개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개의 두루마리에 단 한 가지 문제만이 적혀 있었다.
두루마리가 셋이니, 풀어야 할 문제 또한 세 개라는 의미.
“시작하십시오.”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문제가 담긴 두루마리가 이레의 손에 전해졌다.
‘과연 어떤 문제일까.’
이레는 서둘러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하나(一).
그것의 입구는 호리병처럼 좁다. 하나, 그 내부는 천하에 비할 데 없이 넓고 깊으니, 그 뜻은 능히 천리(千里)에 이르고, 성사됨은 하늘과 같다.
“아……!”
“으음.”
다른 방에서 재간택인들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찌 보면 단순한 수수께끼 같고, 또 달리 보면 말장난 같은 물음.
대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어떻게 답해야지 쉬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런 재간택인 중에서 오직 한 명, 이레만은 밝은 표정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어린 시절부터 서탁을 통해 할아버지들과 필담을 나눈 이레에겐 낯설지 않은 문제였다.
이레가 심심해할 때면 할아버지들은 이런 선문답과 같은 문제를 냈던 까닭이다.
이레는 문제를 풀기에 앞서, 필체부터 확인했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출제자에 따라 그 해답이 달라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같은 문제라도 직설적이고 화통한 성격의 상 할아버지와 섬세한 성정의 화 할아버지의 설명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획의 길이도 일정하지 않고, 글자의 크기와 비율 또한 제각각이니, 필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그러면서도 또 서예의 기본에서 어긋남이 없으니, 정말 독특한 필체가 아닐 수 없구나.’
굳이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비교하자면 화와 상을 적당하게 섞어놓은 듯한 느낌.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성향, 둘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기본을 중시하면서도 자신이 만든 원칙 또한 버리지 못하는 사람.
필시 고집도 상당하리라.
이러한 성향의 사람이라면…….
‘그 성품이 무척 까다롭겠구나.’
이레는 붓을 들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람일수록 상대에겐 엄한 잣대를 들이대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것은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하늘과 통한다 하였으니(天理), 그 뜻과 마음은 능히 천리를 갈 것입니다. 다만, 사람은 타인에게 좀처럼 속마음을 내보이려 하지 않으니, 이는 좁은 호리병처럼 진실로 친해지기 어렵다 할 것입니다.
담담하게 제 생각을 풀어낸 이레는 붓을 내려놓았다.
얼마 후, 북 치는 소리가 두 번 짧게 울렸다.
첫 번째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곧 상궁이 두 번째 두루마리를 건넸다.
“시작하십시오.”
이번에도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시험이 시작되었다.
둘(二).
연일 계속되는 가뭄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의 작물 수확이 눈에 띄게 줄었다.
조정에서는 1결당 미곡 4두(斗)로 과세하기로 한 즉, 예년에 2결 30부의 미곡을 생산한 황해도에 사는 서홍수가 내야 할 미곡은 얼마나 되겠는가? (서홍수의 식솔은 모두 여섯이며, 환갑이 넘은 늙은 노모를 모시고 있고, 아내와 어린 자식 넷이 있다. 최근 병든 아들 내외와 그에 딸린 어린 자식 셋이 합가하였다.)
두 번째 문제는 납세와 관련한 산술 문제였다.
단순한 산술 문제라.
이레는 붓을 들고 답을 적으려 하였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목적이 떠올랐다.
고민하던 이레는 답을 적는 자리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런!”
머리 위에서 작은 탄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방에 들어온 상궁이 낸 소리였다.
아마도 답을 적어놓는 자리에 텅 빈 동그라미만 적으니,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온 모양이다.
‘너무 성의 없어 보이려나.’
악 할아버지의 조언이 떠올랐다.
-세자빈 자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떨어지면 그만이다. 다만, 가문의 위신을 생각하여 지나치게 엉망인 모습을 보여서도 아니 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레는 동그라미 아래에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
-국법이 지엄하니, 과세와 군역은 백성된 자의 마땅한 의무일 것입니다. 하나, 황해도 땅은 험하고 척박하며, 연이은 가뭄에 식솔까지 늘었으니. 과세를 내리기에 앞서 백성의 형편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산술 문제에 엉뚱한 답을 달았으니, 틀렸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 아래에 주석을 달았으니 나름 고심하였다 생각해 주리라.
둥둥!
짧게 두 번 치는 북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 시험이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상궁이 마지막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봉인을 푼 이레는 서탁 위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곳엔 반듯한 필체로 적힌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를 읽은 이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응?”
세 번째 두루마리.
그곳에 적힌 문제는 앞선 두 문제와 달리 전혀 엉뚱한 물음이 담겨 있었다.
셋(三).
깊은 밤. 밤안개와 더불어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벗이 있나니.
그 벗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이레는 표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참으로 해괴한 물음이었다.
깊은 밤, 안개와 더불어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벗이라니.
떠올리는 것만으로 으스스해지는 기분이라.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문득, 서탁의 백귀들이 떠올랐다.
‘아니야.’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만약 그랬다면 밤안개 대신 서탁이나 달과 같은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를 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는 모양이구나.’
깊은 밤에 밤안개의 정취까지 필요한 걸 보면 말이다.
아니면 음침한 사람이거나.
‘그런데 이 필체 무척 눈에 익은데…….’
정작 문제보다 이레의 눈길을 끄는 건, 출제자의 필체였다.
척(尺)을 대고 쓴 듯 이 반듯한 필체는.
이레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불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