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기필코 네게 진실을 전하리라 (中)
은자원은 과거로 회귀하였다.
굳게 닫힌 덧문.
두껍게 깔린 어둠.
낮게 가라앉은 묵향.
천장에서 새어 들어온 햇살.
희미하게 밝혀진 유등.
그리고 그 아래 책 속에 파묻히듯,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사내.
은백이었다.
그는 은자원의 깊은 침묵 속에 침잠되었다.
“흐음.”
탄식과도 같은 침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흐른다.
그의 눈이 은자원의 어두운 구석을 훑었다.
언제나 있던 한 사람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은자원의 여랑.
은랑의 자리였다.
고작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심지어 예전엔 없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어이한다.”
형운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오늘 새벽.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불손이 은백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레는 믿지 않았다.
그저 성질 고약한 백귀의 장난쯤으로 치부해버렸다.
“내가 뿌린 씨앗이로다.”
오래전, 그는 이레에게 만나자 한 적이 있었다.
대광통교였다.
그곳에서 이레를 보았었지.
그때, 그냥 지나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날 시작된 불신이 오늘에 이르러 이렇듯 뼈아프게 다가올 줄이야.
그래도 그렇지.
사람의 진심을 어쩌면 이다지도 몰라준단 말인가.
가슴이 갑갑하여 형운은 읽던 서책을 탁,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글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뇌리를 채우는 건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찌할까?
어찌해야 이레가 불손이 은백임을 믿으려나?
내가 불손이라는 어찌 증명해야 할까?
“어찌……. 어찌할까?”
“어허, 이래서야 어디 맘 편하게 쉴 수가 있나.”
길게 이어붙인 의자에 누워 코를 골던 서강율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것인지.
그는 온몸을 헝겊으로 둘둘 싸맨 채였다.
“은백, 뭔가? 뭘 그리 고민하는가?”
“고민 같은 거 없다.”
“아까부터 어찌할까, 이 소리만 열 번일세.”
“여덟 번.”
정확한 수치를 말하는 형운을 서강율은 질렸다는 듯 바라보았다.
독한 놈, 혼자만 들을 수 있도록 중얼거리며 서강율은 부채를 팔랑거렸다.
“여덟 번이든, 열 번이든. 하여간에 무슨 고민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
“말해 보게. 내 돈 빌려주는 것만 빼곤 뭐든 다 들어줄 터이니.”
“필요 없다.”
형운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서강율이 아니었다.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무엇인 고민인지 말해보게. 자네와 나, 둘밖에 없는 은자원에서 누굴 의지하고 믿겠는가. 지금부터 나를 형님이다 생각하고 다 말해보게.”
“그대를 형님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의지한 적 없고, 믿고 싶었던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의지하고, 믿어보게.”
쥘부채인 듯 양팔을 활짝 벌리며 서강율이 말했다.
형운은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난 언제든 너의 의지처가 될 자신이 있다는 듯 서강율은 눈빛을 보냈다.
그 반짝거리는 눈빛에 대한 답은 차가운 외면.
형운은 서강율의 시선을 말끔히 무시한 채 서탁을 내려다보았다.
서강율의 활짝 벌린 두 팔을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부유했다.
반짝거리던 눈동자에도 파르르 잔 경련이 일었다.
“허허허. 거참, 사람이 수줍음이 많군.”
쥘 부채질을 팔랑거리며 헛웃음을 흘리던 서강율은 이내 정색한 채 형운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서강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말하게, 말해보게. 뭔가? 뭐가 문제인가?”
말하지 않으면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기세라.
그 집요한 눈빛에 형운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은자원엔 어이하여 이리 괴이한 자들만 있는 것인지.
“물어볼 것이 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정석이지. 물어보게. 내가 모르는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서강율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형운을 마주했다.
잠시 망설이던 형운은 어렵게 입을 뗐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인지라.
서강율은 고개를 외로 기울이며 눈만 끔뻑거렸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어찌해야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가 물었다.”
“이 무슨 장자(莊子), 나비 날개 뜯는 소린가. 내가 나를 증명하라니?”
“…….”
두 사내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만났다.
“만나시게.”
싱겁도록 명료한 한마디가 서강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뭐?”
“내가 나임을 증명하고 싶다며?”
서강율은 유유자적한 눈빛으로 형운을 바라보았다.
씨익, 웃음을 흘리며 그가 다시 말했다.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꿈에서 일어난 내가 진짜 나인지. 그것을 증명하려면 딱 한 가지 방도밖에 없질 않은가.”
“…….”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번 입 아프게 말해 봐야 무소용일세. 직접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
서강율은 팔짱을 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를 바라보던 형운은 낮게 중얼거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고심하는 것이다.”
형운은 서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내 어쩌자고 저자의 세 치 혀에 휘말려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을까.
스스로를 타박하는 찰나.
톡톡.
천정에서 들려온 홍인모의 신호.
밖으로 나온 형운에게 홍인모가 아뢰었다.
“하궐에서 불러 계시다 하옵니다.”
“아바마마께서?”
“네.”
“무슨 일이 있다더냐?”
“그것이…….”
홍인모가 작은 목소리로 세자의 명을 전했다.
짙게 가라앉아 있던 형운의 표정이 가벼워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던가?
아니면, 궁하니 통한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간절히 바란 길이 열렸다.
형운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은백, 어디 있는가? 내 조언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설마 어디 멀리 간 것은 아니겠지? 은백, 어서 돌아오시게.”
서강율의 목소리가 은자원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형운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같은 시간.
재간택인들의 임시 처소로 마련된 양덕당(養德堂)으로 대전의 지밀상궁을 비롯한 십여 명의 상궁이 들어섰다.
“곧 선보이기가 있을 예정입니다.”
지밀상궁의 목소리에 닫혀 있던 방문이 하나씩 열렸다.
모두 다섯.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재간택인들을 돌아보며 지밀상궁은 말을 이었다.
“모두 따르십시오.”
소리 없는 술렁임이 일었다.
매무시를 다듬는 듯 비단 스치는 소리가 작고 부산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툇마루 아래로 희고 뽀얀 버선발이 하나둘 내려섰다.
이레와 유경, 명선과 최미옥, 구연재.
다섯의 재간택인들은 서둘러 지밀상궁의 뒤를 쫓았다.
따사로운 가을볕을 밟으며 잰걸음을 얼마나 옮겼을까?
낮게 늘어선 전각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오목하고 아늑한 공간에 이르렀다.
팔작지붕의 전각 왼쪽에는 아담한 연못이 있었다.
전각의 우측 마당에는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오늘 내명부의 어른들에게 선보이기를 할 희정당.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전각 앞마당.
박석(薄石) 위에 간택인들을 세워둔 채 지밀상궁과 궁녀들이 자리를 떠났다.
일렬로 늘어선 여인들의 주위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이레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각 어디에도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은 까닭일까?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진 전각이 황량하게 느껴졌다.
마치 낯선 허허벌판에 버려진 기분.
아무도 없는 곳에 여인 다섯이 덩그러니 서 있자니, 발끝으로 불안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치마 끝단을 휘감는 가을바람이 유난히 시렸다.
선보이기일랑은 이미 초간택 때 경험하였건만.
그럼에도 처음과는 그 느낌이 달랐다.
그때 이레의 정신은 온통 오라비, 기대에게 향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는 간택에 참석한 여인들의 수도 많았던 터라.
지금만큼 긴장되진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엔 고작 다섯.
이 궁의 모든 눈과 귀가 다섯 명의 간택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생각에 거기에 다다르자, 이레의 심장은 사납게 박동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기갈 난 사람처럼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언니.”
귓가로 불안한 음성이 들려왔다.
유경이었다.
이레를 바라보는 유경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레는 유경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유경의 손은 연신 바르르 떨렸다.
“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괜찮아. 처음 하는 선보이기도 아니고. 초간택처럼 그저 인사를 올리고, 몇 마디 덕담에 감사함을 표하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을 거야.”
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건넨 그 말은 이레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채 긴장이 가라앉기 전.
“중전마마 납시오!”
늙은 내관의 가늘고 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라앉아 있던 공기에 쿵, 무거운 파동이 일었다.
화들짝 놀란 유경이 얼른 맞잡은 손을 풀었다.
이레도 마른침을 삼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 끝을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박자박, 단정한 발소리를 시작으로 우르르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느닷없이 일어난 사람의 해일은 간택인들의 곁을 지나갔다.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인 건 중전 김씨였다.
이레보다 대여섯 살 정도 위로 보이긴 했지만, 예순을 훌쩍 넘긴 왕의 여인이라기엔 너무 젊은 여인이었다.
어린 태를 완전히 벗어내지 못했지만, 한 나라의 왕비라는 위(位)는 감히 범접이 어려운 것이었다.
내명부의 안주인이라는 거대한 위엄과 권위로 무장한 중전은 곧장 희정당 돌계단을 올라갔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 대청마루를 지나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희정당의 정면 11칸 안채.
사잇문을 모두 걷어 올린 안채의 가장 상석.
그곳이 중전 김씨의 자리였다.
곧이어 영빈 이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과 함께한 세월이 가장 긴 후궁이자 세자의 생모인 그녀는 중전 김씨의 오른편에 앉았다.
곧바로 세자의 빈궁이자 세손의 어미인 홍씨가 나타났다.
세자빈 홍씨의 자리는 중전의 왼편이었다.
그다음으로 자리한 사람은 왕께서 총애하는 화완옹주, 정처였다.
정처는 대청의 오른쪽 벽을 등지고 앉았으며, 맞은편엔 왕의 후궁 중 가장 낮은 품계의 소원 문씨가 자리했다.
내명부의 여인들이 제 자리를 찾자, 상궁들이 서둘러 그 앞에 길게 발을 내렸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난 후.
한 무리의 관원들이 들어섰다.
그 수는 모두 아홉.
셋은 희정당 돌계단 오른쪽 아래에 섰고, 셋은 왼쪽에 섰다.
가장 연배가 높은 셋은 중전 김씨의 허락을 얻어 돌계단 위, 대청마루 바로 아래에 설 수 있었다.
자리를 잡은 관원들은 형형한 눈으로 재간택인들을 쓸어보았다.
심상치 않은 눈빛의 사내들은 모두 관상감 소속의 관원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타고난 해와 월, 시로 운명을 점하고, 생김으로 심성과 앞날을 짚었다.
천문과 풍수, 음양의 이치, 오행, 팔괘를 비롯한 도교의 철학 위에 명리학과 성리학, 주자학을 비롯한 유교의 사상을 얹은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학문을 익힌 사람들.
아홉 명의 관상감 관원들은 재간택인들의 여러 모습을 세심하게 살피고 짐작하여, 개인의 감상과 곁들인 내용을 하나 남김없이 기록하였다.
얼굴의 생김, 이마의 크기와 형태, 이목구비의 조화, 신체의 비율, 손과 발 그리고 귓불의 크기, 선 자세, 절을 올릴 때 허리를 어느 정도 굽히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말하는 속도, 음성의 고저, 시선의 위치.
심지어 절을 올리기 위해 전각에 오를 때 벗어놓은 신발의 위치와 방위까지도 기록의 대상이었다.
마당의 박석 위에서 선 채 그들을 지켜보던 이레는 문득 궁금했다.
나의 사주를 보고 내린 저들의 평은 무엇일까?
내 얼굴, 내 걸음, 내가 말하는 것을 어떻게 평할까?
뭐든 꿰뚫어 본다 하였으니.
밤마다 내가 서탁으로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는 것도 알고 있을까?
달빛의 초대에 응하여 시(時)와 공(空)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대의 지혜를 빌리고 있음도 알까?
아마도 모르겠지.
알고 있다면, 그 비밀마저 꿰뚫어 보고 있다면 나를 향한 시선이 저리 담담할 수는 없으리라.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백귀와 어울렸거늘.
사람의 시선과 관심이 무에 무섭고 두려울까.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이 불리었을 때, 이레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차분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 신을 벗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실내.
그나마 촘촘한 발이 내려져 있던 터라, 중전을 비롯한 대궐의 웃전들의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설사, 발이 없다 해도 궁중의 예법에 따라 감히 그분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으리라.
이레는 절을 올렸다.
“고개를 들어라.”
앳된 중전마마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세를 바로 했다.
허리를 곧게 하고, 시선은 겸손하게 아래로 깔았다.
곧 질문이 이어졌다.
중전은 건강을 묻고, 세자빈께선 기분을 물었다.
긴장한 기색이 보이지 않아 대견하다는 영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옹주는 차분한 규수라며 칭찬하였다.
마지막으로 소원 문씨의 차례가 되었다.
다른 재간택인들에겐 지루한 표정으로 덕담이나 짧게 하던 그녀가 유독 이레에게 날을 세웠다.
“아비가 경기관찰사라 하던데…….”
묻는 억양에 하찮게 내려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후궁을 총관하는 영빈 이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간택이 진행되는 동안 간택인의 집안과 배경에 관하여는 할 수 있는 한 언급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는 간택인의 출신 배경보다 간택인 본인의 가치를 우선하기 위함이었다.
영빈 이씨는 조용한 음성으로 문 소원을 타일렀다.
“소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간택인의 출신에 관하여 함부로 언급하지 말아야 할 장소일세.”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다들 말하지 않는다뿐이지,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공공연한 사실을 구태여 숨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안 그렇습니까? 중전마마.”
중전은 동의를 구하는 문 소원의 물음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소원의 말이 그르다고 생각지 않소.”
문 소원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중전까지 저리 나서니.
영빈은 불편한 헛기침을 흘릴 뿐, 더는 문 소원의 방약무인한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기세등등해진 문 소원이 이레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대는 이번 재간택을 어찌 생각하는가?”
“송구합니다. 제가 어리석어 소원마마께서 무엇을 물으심인지 짐작하지 못하겠나이다.”
문 소원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정녕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아둔한 척 능청을 떠는 것인가?”
“…….”
“좋네. 그럼 내 다시 물어보지. 그대는 스스로 세손빈이 될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가?”
“문 소원!”
영빈 이씨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문 소원의 질문은 명백히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것이었다.
영빈의 경고에도 문 소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독을 품은 질문이기에 이레의 대답을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과연 무어라 대답할까?
그 답이 무엇이건 간에 문 소원은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잔인하게 이레를 짓뭉개줄 생각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찮은 계집.
영빈이 연 다과회에서부터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기 전에 저 불안한 근원을 잘라내리라.
촘촘한 발 뒤에 앉은 문 소원은 붉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순진한 아이의 어리석은 대답을 두텁게 씹어 음미하듯 잘근잘근 괴롭혀 줄 생각이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할 이레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즐거워졌다.
“전…….”
마침내 이레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