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기필코 네게 진실을 전하리라 (上)
성급한 바람이 새벽을 밀어냈다.
산자락에 앉은 안개는 뒤늦게 게으른 몸을 일으켰다.
해가 채 뜨기도 전.
경기관찰사 김시묵의 집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했다.
오늘은 이 댁 여식이 재간택에 참여하는 중요하고도 경사스런 날이었다.
그러나 길(吉)한 일엔 늘 삿된 것이 끼어드니.
그 어느 때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노마님의 엄명이 내려진 터였다.
별채로 향하는 손길과 발걸음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아침 공기 사이로 잰 몸짓들이 이어졌다.
말린 꽃잎을 띄운 목욕물이 준비되었다.
수모의 도움으로 몸을 씻은 이레에게선 정갈하고도 싱그러운 향내가 느껴졌다.
수모곁시가 머리를 빗기는 사이, 수모는 이레가 입어야 할 옷가지를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위에 다시 단속곳을 겹쳐 입는다.
너른바지 위에 풀 먹인 열두 폭 모시로 만든 대슘 치마를 입고, 마지막으로 무지기를 걸쳐 치마 속 맵시를 갈무리한다.
홑겹의 다홍빛 치마와 겹겹의 붉은 치마가 덧입혀질 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숨을 한 자락 크게 베어 물었다.
겹겹이 쌓이는 옷자락만큼이나 마음마저 무거워졌다.
여린 보라색 속저고리에 연노랑 저고리를 겹쳐 입고, 그 위에 수복(修復)이 금칠 된 초록 견마기를 걸쳤다.
마지막으로 단정히 매듭지은 저고리 고름.
길고 지루했던 입성이 끝났으나, 이제 고작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했다.
남은 일이 많았다.
화장하고, 머리를 단장하고, 패물을 차고, 꽂는 사이 시간은 물처럼 흘러 어느덧 진시.
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비가 오지는 않을까 걱정하였건만.
그 걱정이 무색할 만큼 하늘은 맑았다.
대문 밖.
아름다운 사인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호와 백호, 그리고 교꾼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배웅나온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행랑 할멈은 언제나처럼 눈물부터 흘렸다.
수모가 가마 문을 열어주었다.
가마 안엔 반가운 선물이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권의 책.
언제부터인가, 가마 안엔 매번 새로운 책 세 권이 마련되어 있었다.
은백의 배려이리라.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이레의 허락을 얻은 교꾼들이 가마를 들었다.
책을 들춰보던 이레는 잠시 창을 열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족들은 붙박이라도 된 듯 여전히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낮은 담벼락.
낡은 대문.
이 빠지듯 군데군데 망가진 기와.
오래되고 허름한 추억이 멀어져간다.
시리도록 푸른 세상을 머리에 인 늙은 벽오동 나무가 손을 흔들듯 잔가지를 흔들었다.
***
“통화문입니다.”
수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손가락으로 가마의 창을 밀었다.
비스듬히 열린 창틈 사이로 궁의 바깥 풍경이 지나쳐 갔다.
굳건한 성벽.
거대한 대문.
화려하고 웅장한 처마.
저 휘황찬란하고도 삼엄한 세상으로 다시 한 번 들어서는구나.
이레는 창을 닫았다.
눈을 감고 어지러운 머릿속도 비웠다.
초간택 때처럼 상궁이 궁의 외문 앞으로 마중 나왔다.
상궁은 외문을 지나 내문을 거쳐 이레를 후원 안쪽의 전각으로 안내했다.
“가마에서 내리십시오.”
상궁의 말에 이레는 가마에서 내렸다.
치열하게 선 전각과 이리저리고 뻗은 갈래 길이 낯익었다.
상궁이 안내한 전각.
다과회를 가진 영화당과 인접한 장소인 까닭이다.
재간택인들이 머무르게 된 전각 앞엔 이레가 타고 온 가마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개의 가마가 놓여 있었다.
본디 재간택 교지가 내린 여인은 여섯.
뒤늦게 이레에게 한 장의 교지가 더 내려 모두 일곱 명이 재간택인이 되었다.
그중 두 명의 간택인이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재간택에 참여한 간택인들은 모두 다섯.
이레와 유경 그리고 명선.
또한, 세손빈이 되는 건 애초에 마음 접은 듯 초간택부터 줄곧 명선의 곁에서 입안의 혀처럼 굴던 한성부우윤의 여식 최미옥과 승지 구영무의 딸, 구연재가 함께했다.
재간택인들은 사주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문을 통과하여 궐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가마에서 내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시기는 선후의 구별 없이 동시에 행해졌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실 겁니다.”
방자(匚) 모양의 전각은 안쪽 대청마루를 사이에 둔 방 두 개를 중심으로 각 양옆으로 날개처럼 작은 행방들이 이어져 있었다.
상궁은 재간택인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방을 배정하였다.
이레의 차례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대문과 가장 가까운 끝방.
고작 부르는 순번에 불과함에도 이레의 순서가 가장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몇몇 재간택인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견제 같은 건 이레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떨어지기 위해 온 것이다.
그들은 엉뚱한 사람에게 질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머무르게 되는 겁니까?”
재간택인 구연재가 상궁에게 물었다.
모두 궁금해하던 이야기라, 시선이 집중되었다.
상궁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일정은 아직 나오지 않았소.”
재간택인들 사이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낯선 곳에서 기약 없는 시험을 치러야 하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세손빈을 정하는 왕실 중요 행사에 정해진 기한이 없을 리 없다.
다만, 알려주지 않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 또한 시험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이레보다 한발 앞서 방에 도착한 수모 여울네가 내부를 살폈다.
혼자 지내기 충분히 너른 방이었다.
뒤따라 온 이레가 방을 살피는 동안 수모와 수모곁시는 집에서 챙겨온 물건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아가씨, 이건 어디다 놓을까요?”
수모곁시의 물음에 이레는 반갑게 무명 보자기에 싼 것을 받았다.
“이건 내가 정리하마.”
할아버지의 서탁.
제일 먼저 서탁을 챙기는 이레의 모습에 여울네와 수모곁시는 울상을 지었더랬다.
그러나 이것이 있어야 마음의 긴장이 풀린다는 말에 선선히 짐 싸는 것을 도왔다.
보자기를 풀어 서탁을 꺼낸 이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웃으시네요.”
내내 곁을 지키던 여울네가 한마디 건넸다.
“내가 안 웃었소?”
“이리 굳어 있었습니다.”
수모곁시가 과장된 표정으로 이레를 흉내 냈다.
이레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덩달아 웃던 수모는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에구머니나. 제가 주책맞았습니다.”
주위를 살피던 여울네는 어린 수모곁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럼 쉬시어요. 저희는 저희에게 마련된 숙소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여울네와 수모곁시가 전각의 대문 밖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하나둘, 재간택인들을 따라온 이들이 사라지자 전각 안에 어색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열린 다섯 개의 방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하거늘.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레는 몇몇 사나운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이레의 방문 맞은편.
언제나처럼 도도한 표정의 명선이 보였다.
허리를 꼿꼿이 한 채 한껏 눈매를 내리깐 모습.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굳은 표정을 한 명선이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그러다 이레와 눈이 마주쳤다.
명선의 눈동자에 노골적인 불쾌함이 서렸다.
저런 것과 함께라니.
가느다란 입술을 달싹이던 명선은 이내 쌀쌀히 방문을 닫았다.
이유 없이 냉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유달리 그녀를 반기는 이도 있었다.
툇마루 저 끝에서 통통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경이었다.
“언니.”
옆방에 짐을 푼 유경이 이레의 방으로 건너왔다.
“어째 그런 표정이어요?”
“응?”
“무에 근심이라도 있어요?”
“근심은 무슨.”
“그럼 어디 아픈 건 아니어요?”
다른 간택인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레만은 달랐다.
긴장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불편한 낯빛이었다.
“그럼 무어 기분이라도 나쁜 거여요?”
“아니야.”
기분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재간택이 주는 부담과 재간택인들의 불편한 시선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작 이레의 마음을 이리 편편찮게 만든 사건은 달리 있었다.
‘불손. 그 백귀와 필담을 나누는 게 아니었는데…….’
새벽의 일을 떠올리며 이레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텅 빈 백지는 눈 내린 벌판 같았다.
그 새하얀 들에 어느 순간 검은 점이 새겨졌다.
종이 위에 절로 일어난 먹의 조화는 순결한 설원 위에 새겨진 침입자요, 광폭한 약탈자, 날도둑이었다.
순백의 종이는 먹의 침략에 무기력했다.
무서운 기세로 일어난 시커먼 야욕에 속수무책으로 제 영토를 빼앗겼다.
서서히 영역을 확장한 먹은 이내 먹구름이 되었다.
먹구름은 바람을 타고 흘러 하늘을 이루고, 굳건한 기둥처럼 단단하게 떨어져 대지를 이루었다.
풀이 자라고 나무가 크고 이내 숲이 되었다.
물이 내를 이루고 바다를 만들었다.
야금야금 영역을 확장한 검은 침입자는 공허한 백지 위에 하늘을 만들고 땅을 지으며 마침내 세상을 구축하였다.
그 세상이 한 방울의 먹으로 농축되어 글이 되었다.
이레의 서탁 위에 절로 새겨진 글은 반석처럼 단단하고 돌기둥처럼 굳건하며 하늘과 땅처럼 온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이레는 서탁을 통해 여러 사람의 다양한 필체를 만났다.
글은 그 주인의 성품을 닮았으니.
네 분 할아버지들의 글 또한 본연의 성품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크고 섬세하고, 거칠고 넓으며, 자유분방하되 무한히 깊고, 예와 격식으로 무장한 필체들이 그러했다.
지금 서탁 위, 흰 종이를 채운 글은 그런 할아버지들의 글과는 또 달랐다.
이 필체를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완전하고 완벽하다.
글자가 이루는 균형은 철저하였고, 농담의 조절은 절묘했으며, 부분과 전체가 호응하는 조화 또한 무결하였다.
탄성이 절로 나올만한 명필.
하지만 정작 그 명필을 대하는 이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 좋은 필체로.
명필이라 불러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그 글이 전혀 엉뚱한 소리를 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날 은자원의 백(伯). 은백(隱伯)이라 불러라.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에 이레는 참으로 다양한 감정을 맛봤다.
놀람, 당황, 혼란을 거쳐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첫 마디는 한숨이었다.
“하아. 이 사람이 정말…….”
손으로 이마를 짚던 이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백귀니 사람은 아니지.”
이레는 붓을 들었다.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불손.
특별히 불손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강조했다.
-장난이라니?
-그럼, 불손 대신 은백이라 부르라는 말이 짓궂은 장난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가 은백이니, 은백이라 부르라 한 것이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뻔뻔한 불손의 태도에 이레는 타오르는 기운을 담아 힘차고 날카로운 기세로 글을 썼다.
-불손. 그렇게 안 봤는데, 대체 왜 그러십니까?
곧 불손의 답이 돌아왔다.
-은백이라 부르라 한 것뿐인데. 한데, 무슨 말이냐?
-아무리 귀신이라 해도 그렇지. 해도 되는 장난이 있고, 해선 안 되는 장난이 있는 법입니다. 어찌 남을 사칭한단 말입니까?
감정을 꾹꾹 담아 적은 탓일까.
불손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남을 사칭해?
-스스로를 은자원의 백. 은백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였다.
-그게 사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하필 그분을……. 이번엔 장난이 과하셨습니다.
-장난이 아니래도. 내가 정말 은백이란 말이다.
불손은 무척 당황한 듯, 단단하고 완전한 필체가 흐트러졌다.
-할아버지들께서 하신 말씀이 옳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네게 뭐라 하더냐?
-근묵자흑(近墨者黑). 남을 현혹하고 나쁜 짓을 하는 자를 멀리하라. 아무래도 제 경우엔 불손께서 그런 사람인 모양입니다. 잘 계십시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레가 붓을 놓았다.
그리고 종이를 막 치워버리려 할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다급한 반응이 날아왔다.
-증명하마.
필담을 그만두려던 이레는 흥미가 생겼다.
-어떻게 증명하겠단 말입니까?
-내가 은백이어야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마.
-해보십시오.
단 일말의 희망을 품고 이레는 서탁을 빤히 응시했다.
잠시 후.
-넌…….
톡, 톡, 호수에 내린 빗줄기의 파동처럼 검은 먹물이 종이 위로 번졌다.
그리고 이어진 말.
-너는 은자원의 은랑이다.
이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가 은랑임을 서탁과 대화하는 모든 이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은백이다. 언제나 덧창을 내려 은자원을 어둡게 하지. 그리고 책상에 항상 엎드려 있으면…….
-제가 입이 닳도록 한 이야기이지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비밀 이야기하듯, 귓속말하듯.
조용히 세 글자가 떠올랐다.
-……오로원(吾老園).
이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할아버지들과 얘기하는 것도 훔쳐보신 게로군요? 하긴, 그러니 은백과 은자원에 대한 모든 것을 이리 잘 알고 계신 거겠지요.
혹시 다른 이야기도 다 엿본 걸까?
-정말이다. 내가 바로 은자원의 은백이다.
불손의 글은 절규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은백을 사칭한 백귀의 만행을 이레는 용인할 수없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필담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내가 증명하겠다. 꼭 증명할 것이니…….
이레는 서탁 위에서 종이를 내렸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몹쓸 백귀일세.”
*
“꼭 증명할 것이라니. 또 무슨 못된 짓을 하려는 걸까?”
지난밤 일을 떠올리며 이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곁에 앉은 유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못된 짓이라도 꾸민답니까?”
“아니, 아니다.”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한숨도 자주 쉬시고.”
“어제 긴장하여 잠을 못 자 그런 모양이다.”
“언니도 그랬군요. 사실 저도 그랬어요.”
해맑게 웃은 유경이 호기심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언니, 이 서탁은 다 무어예요? 남들은 패물이며 저고리며. 치장할 거리만 다 챙겨왔는데. 서탁이라니…….”
유경이 이레가 맞잡고 앉은 서탁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할아버지 유품이라. 마음이 불안할 때 함께 있으면 긴장이 좀 풀려서 가져왔단다.”
“아…….”
이해된다는 듯 유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둥!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닫힌 전각의 문이 열리고 대전의 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 선보이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진정한 재간택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재간택에 임하는 간택인들의 표정에 비장함이 서렸다.
이미 세손빈으로 내정된 여인이 있다 하나,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는 종종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곤 하였다.
재간택인들의 얼굴엔 혹시나 하는 기대와 설렘이 깃들어 있었다.
단 한 사람.
이레만은 예외였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서탁을 손끝으로 쓸었다.
할아버지들, 제가 재간택에서 떨어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가능한 한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래야 그녀가 원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운 장소, 바라는 사람과 만날 수 있다.
그러니…….
‘할아버지들께서 알려주신 대로 최선을 다하여 떨어지리라.’
이레는 다시 한 번 굳게 결의했다.
***
“불안하구나.”
은자원.
덧창이 죄 내려져 밤처럼 어두운 그곳에서 누군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운이었다.
평소였으면 책상에 엎드린 채, 붓을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어야 할 그.
하지만 오늘 그는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어찌하여 믿지 않는단 말인가?”
그를 고민에 빠트린 원흉은 오늘 새벽, 제비꽃 여인과 나눈 필담이었다.
큰마음 먹고 자신이 은백임을 밝혔다.
크게 놀라고, 쉽게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결국엔 알아주리라.
은백과 은랑이어야만 알 수 있는 이야기와 약속을 전해주면 믿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서탁을 통해 대화한 백귀가 실은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신기해하며, 더 나아가 남과 다른 친근함을 느끼리라.
형운은 마땅히 이러한 과정을 제비꽃 여인이 거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반응은 그의 예측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말을 하여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은백과 은랑을 강조하고, 그간의 사연을 풀어놓아도 냉랭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사람의 진정을 그리 외면하다니.
가슴이 갑갑하여 형운은 읽던 서책을 탁,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글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뇌리를 채우는 건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찌할까?
어찌해야 이레가 불손이 은백임을 믿으려나?
내가 불손이라는 걸 어찌 증명해야 할까?
“어처구니없군.”
형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헛웃음도 잠시.
형운은 다시 심각해졌다.
“대체 어찌한다? 어떻게 해야 불손이 은백임을 증명한다?”
은자원의 깊은 어둠 속.
왕세손이자 은백 그리고 불손이기도 한 형운의 고심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