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은백이라 부르거라
산허리의 단풍이 산 정상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남촌골, 하월집 마당에 패랭이 갓을 쓴 사내가 들어섰다.
“여기는 변함이 없구먼.”
우람한 덩치에 어눌한 사투리.
충청도에 사는 몽돌이었다.
“어르신, 어르신 계셔유?”
“너, 몽돌이 아니냐?”
땔감을 정리하던 강현보가 한눈에 몽돌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현보, 너 어쩐 일이냐? 네가 어쩐 일로 얌전둥이맹키로 집구석에 붙어 있는겨?”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야 그렇다 치고, 너야말로 이곳엔 무슨 일이냐?”
현보의 물음에 몽돌은 하월집 안채를 턱짓했다.
“어르신 계시냐?”
“어머니는 왜?”
“내 주인의 서찰을 전하러 북촌 사는 유 생원 나리 댁을 찾아가는 길인데…….”
“한데?”
“어르신이 일전에 단단히 당부하셨단 말여. 유 생원 나리 댁으로 가는 서신이 있거들랑 그 댁으로 가기 전에 꼭 이리로 먼저 오라고.”
“어머니가?”
강현보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찰나, 어느 틈엔가 나타난 노파가 몽돌의 팔을 잡아챘다.
“덩치도 산만한 놈이 문앞에서 뭘 하는 게냐? 냉큼 따라오너라.”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
몽돌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월네의 뒤를 따랐다.
“어머니, 몽돌이는 왜 데려가십니까? 혹, 서신 때문이면 미련 버리십시오. 아무리 궁금하여도 팽례에게 주인의 서신을 미리 보여달라고 해선 안 됩…….”
말을 다 끝내지 못한 강현보의 입을 누군가 틀어막았다.
“뉘야? 뉘가 이 강현보의 입을…….”
역시나 이번에도 강현보는 말을 매듭짓지 못했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매섭게 노려보는 이가 다름 아닌 아내였던 까닭이다.
얼핏 보면 강현보가 아니라 그의 아내가 하월네의 여식이라 할 만큼 노파를 고스란히 닮은 눈빛이라.
심장이 쪼그라든 강현보는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러는가?”
“몰라 물어요?”
“내가 뭘?”
“어머님 하시는 일은 알려고 하지 말고, 알은체도 하지 말라 몇 번을 말해요?”
“아니, 나는 그저 원칙을 말한 것뿐이라네.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그 원칙은 어디까지나 팽례들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지요. 아무튼, 어머니 하시는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알았어.”
강현보가 시무룩하여 물러서자, 그의 아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사립문을 열기 무섭게, 난전에서 잡화 파는 허 씨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이쿠, 현보도 있었는가?”
강현보에게 아는 척을 하는 허 씨에게 아내의 매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 인사와는 말 섞을 필요 없소. 그래, 오늘은 뭘 찾아왔소?”
“이것저것 필요한 게 있긴 한데, 그보다 새로운 물건은 없는가?”
“마침 제법 괜찮은 물품이 들어오긴 했소만…….”
“어서 봅시다.”
괜찮은 물품이라는 소리에 허 씨가 발을 재게 놀렸다.
그런 그의 발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보게. 그 물품이라는 거 나도 한 번 보여주게.”
허 씨가 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저 망할 강 씨 놈은 오늘도 안 죽고 또 왔네.”
“내가 죽으면 자네 혼자 심심해서 어떻게 살려고. 아무튼, 그 새로운 물품이 뭔지 함께 보세나.”
허 씨와 강 씨를 시작으로 난전의 상인들은 해 그림자가 서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하월집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남촌골 하월집에서 못 구하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하월집을 나서는 상인들의 손엔 원하는 물건이 하나 빠짐없이 들려 있었다.
큰방과 작은방 사이의 대청마루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아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강현보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연신 하품을 해댔다.
볼일을 마친 몽돌이 그의 곁에 털썩 앉았다.
“입 찢어지겠다.”
몽돌의 뭉텅한 말에 강현보는 졸음 가득한 눈을 비볐다.
“끝났어? 뭔 얘기를 이리 길게 했냐?”
“묻지 말어. 어르신이 암말 말라셨어.”
“뭔데? 나한테까지 비밀이냐?”
“나는 암것도 몰러. 궁금허면 어르신께 직접 물어보던가.”
“우리 어머닌?”
강현보의 물음에 몽돌이 특유의 둔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질렀다.
“몰러. 뒷문으로 나가시더라고.”
“뒷문?”
강현보의 시선이 안채에 딸린 뒤꼍으로 향했다.
하월집 뒤꼍.
커다란 자두나무 아래 작은 움막 한 채가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그 움막을 얼마 전부터 낯선 손님이 사용하고 있었다.
뒷문으로 나갔다 하면 틀림없이 움막에 계신 그 손님을 만나러 간 것이리라.
“북촌 유 생원이 아니라 그 손님께 온 연락이었나 보네.”
대강의 사정을 눈치챈 강현보는 풀썩풀썩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의 곁에서 몽돌이 송아지처럼 크고 순한 눈을 연신 끔뻑였다.
***
누군가에겐 어르신이라 불리고, 또 누군가에겐 하월네라 불리는 노파는 뒤꼍의 움막으로 걸어갔다.
움막은 텅 비어 있었다.
쓱쓱, 훑는 시선으로 사위를 살핀 하월네는 움막 바닥의 가장자리를 당겼다.
나무로 된 바닥 일부가 위로 열렸다.
이내 토굴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였다.
토굴 문을 열기 무섭게 짙은 쑥향이 코를 찔러왔다.
눅눅한 토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쌉싸름한 향을 뚫고 내려가자 제법 넓은 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라 하지만 바닥엔 대청마루를 깔아 습기를 막고, 흙벽엔 창호지까지 곱게 발라져 있어 어지간한 초막보다 아늑했다.
자두나무 뿌리가 드러난 곳에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도 여럿 뚫려 있는 덕택에 환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토굴로 들어선 하월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토굴 안이 평소보다 습했던 까닭이다.
너무 습한 것은 다친 환자에겐 좋지 않으니.
숯 담은 화로라도 가져다 놓을까?
잠시 궁리하던 노파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기구멍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하인지라.
자칫하면 질식의 위험이 있었다.
이런저런 방도를 떠올리며 노파는 토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청마루 안쪽, 두껍게 깔린 이부자리 위.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쑥뜸을 뜨느라 고스란히 드러난 사내의 상체엔 사나운 상처로 가득했다.
상처는 번듯하게 생긴 사내의 뺨에도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월네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몸의 상처야 언젠가는 아물 상처였던 반면, 얼굴에 남은 흉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었다.
순진하고 넉살 좋던 사내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하월네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직 주무시오?”
하월네의 물음이 귓가에 닿자 사내가 감은 눈을 떴다.
“깼네.”
사내가 상체를 일으켰다.
“간신히 아문 상처가 다시 벌어지겠소. 그냥 누워 계시오.”
“괜찮네. 견딜 만하니.”
하월네가 쯧쯧 혀를 찼다.
“이리 고집부리는 걸 보니, 그래도 이젠 살 만한가 보오.”
“다 하월네 덕분일세.”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뺨에 난 거친 상처가 웃음을 따라 꿈틀거렸다.
“다행이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저고리를 팔에 꿰었다.
하월네가 다시 말했다.
“어르신에게서 오늘 연락이 왔소.”
“뭐라 하던가?”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 하더이다.”
“이번엔 잘되어야 할 텐데.”
“쉽지 않을게요.”
“그렇겠지.”
묵묵히 그를 돕던 하월네가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 전, 나리의 누이가 다녀갔소.”
“……!”
사내의 움직임이 일순 뚝, 하고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표정한 낯빛을 되찾은 사내는 묵묵히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설마, 내가 예 있다는 걸 알리진 않았겠지?”
“늙었다고 눈치까지 사라진 건 아니니. 걱정 마시오.”
저고리 앞섶을 여며주며 하월네가 말꼬리를 덧붙였다.
“누이가 많이 걱정하는 듯했소.”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러니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와중에도 생의 징표를 전하지 않았던가.
하월네의 며느리를 통해 누이에게 전한 호침(毫鍼).
총명한 누이는 그 호침만으로도 자신의 생존을 눈치챘을 것이다.
“휴우.”
고작 저고리 하나 입는 단순한 동작이었을 뿐인데.
사내의 이마는 송골송골한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힘겨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벽에 기대앉은 그에게 하월네가 물었다.
“누이는 언제 만나려오?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소식 전하는 게 어떻겠소?”
“아직은 아닐세.”
“그럼, 언제 만날 생각이오?”
“내 가족을 지켜낼 자신이 생겼을 때.”
사내의 시선이 허공을 응시했다.
텅 빈 눈동자에 어느 순간 선명한 기운이 떠올렸다.
형형한 푸른 불씨를 눈에 담은 사내는 낮게 읊조렸다.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우리 이레를 지켜줄 수 있게 되었을 때…….”
김기대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그 아이 곁에 갈 걸세.”
***
멀리서 새벽을 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재간택인들이 궁으로 향하는 날.
긴장해서일까.
밤새워 뒤척이던 이레는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숨도 못 잤건만, 머릿속은 얼음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선명했다.
대신 가슴이 갑갑하였다.
자꾸만 숨 끝이 길어졌다.
늘어지는 한숨을 한껏 토해내려 이레는 창문을 열었다.
아침이라기엔 이르고, 새벽이라 하기엔 늦은 시각.
서늘한 바람이 날도둑처럼 그녀의 가슴을 훑고 별채 안까지 파고들었다.
이레는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날씨건만.
변덕스럽기가 삼월의 봄바람보다 심했다.
간밤엔 맑고 쾌청하더니, 아침이 멀지 않은 지금은 또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비가 오지 않아야 할 텐데.”
입궁하는 날이라.
잔뜩 치장하고 나선 길에 행여 큰비라도 만난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으리라.
그나마 자신은 가마를 타고 가니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가마를 메는 교꾼과 수모는 불편을 피하기 어려울 터.
그렇다고 마냥 하늘만 바라보며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근심 걱정을 마음 한구석에 갈무리한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그녀의 치장을 도울 수모와 가마가 오려면 적어도 한 시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내처 그냥 보내기엔 아까운 시간.
누가 답하여주지 않겠지만, 끄적끄적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의 불안은 떨칠 수 있겠다 생각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할아버지들과 대화를 나누었더랬지.”
서탁의 할아버지들을 떠올리자 이레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제각기 표현의 방식은 달라도, 이레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한결같았다.
그에 반해 무심하기 짝이 없는 백귀, 불손은…….
이레는 할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던 불손을 떠올렸다.
“전력으로 임하라고?”
고운 이마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불손은 날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그간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젠 제법 친근해졌다 생각했는데.
정작 그는 그녀의 고민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명 예전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둔 게 분명 해.”
그러니 하기 싫다는 말에도 전력으로 임하란 소리나 하는 것이겠지.
서탁에 깃든 백귀는 모두 지혜롭고 자상하다 생각했는데.
불손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할아버지들에게도 불손의 말을 전했더니,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
-뭐라? 전력으로 임해?
-무에 그리 고약한 녀석이 있다더냐?
화와 악에 이어 예도 불손을 박하게 평가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불의한 자와는 가까이하지 마라.
상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자신의 마음을 조금의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불손이란 녀석이렷다? 그간 들은 네 이야기로 짐작해보니 몹시 독하고 악랄한 자로다. 어느 집안 핏줄인지 몰라도 그 집안의 가풍이 어떨지 안 봐도 뻔하구나. 필시 그 집안 작자들은 하나같이 뻔뻔하고 파렴치한 놈들일 것이다.
상은 불손과 더불어 그의 조상까지 싸잡아 욕했다.
평소에 워낙 인심을 잃은 상의 말이라 그런가.
다른 할아버지들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제일 먼저 나선 건 악 할아버지였다.
-뭘 또, 굳이 조상까지 들먹일 필요까지야.
화도 거들었다.
-훌륭한 가문에도 이따금 아둔하고 무지한 자가 나오는 법이지.
예도 빠지지 않았다.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불손이지, 그 집안은 아니라는 듯한 어조라.
상이 코웃음 쳤다.
-다들 왜 그래? 불손이라는 녀석과 아는 사이야?
화, 악, 예가 차례로 대답했다.
-그렇진 않다만…….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져서…….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하였으니…….
상은 잠시 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상 할아버지 역시 평소와 달리 금세 시들해져 버렸다.
*
“간밤엔 할아버지들이 조금 이상하셨어. 늦은 밤이라 피곤하셨던 걸까?”
고개를 갸웃한 이레는 서탁에 글을 남겼다.
-드디어 궁으로 가는 날입니다. 이제 한 시진만 더 있으면 가마가 오겠지요.
이레는 잠시 쓰던 글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들의 자상한 조언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괜찮아.
어차피 재간택까지야.
적당히 남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면 될 거야.
아무렴, 세손 저하의 곁자리를 지킬 귀한 분을 가리는 자리인데, 아무나 함부로 앉힐까.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새겼다.
-곧 인시(寅時:새벽 3시)가 됩니다. 제가 궁으로 들어갈 시간은 진시말(辰時末:아침 9시)이라 하였습니다. 상궁님 말씀으론 이번 재간택은 전과 달리 며칠 동안 궁에 머물며 치러지게 될 거라 하였습니다.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레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 가면 언제 나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요. 금방 끝나겠지요? 아무렴요. 저는 단순히 머릿수나 채우러 가는 것이니. 오래 붙들고 있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이레가 붓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스르르.
전혀 생각지도 않았건만.
서탁 위, 종이에 쓴 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이레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늦은 시각이라.
당연히 보는 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 시간에도 누군가 그녀의 글을 읽어주었다.
반가움과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시 후.
텅 빈 여백에 검은 먹이 번졌다.
-단순히 머릿수 채우러 가다니? 전력으로 임하란 내 말, 벌써 잊었느냐?
일정한 간격으로 쓰인 반듯한 필체.
-불손이시군요.
불손을 멀리하라는 할아버지들의 조언 탓일까.
아니면, 걱정하는 다른 백귀들과 달리 나라의 부름에 전력으로 임하라는 불손에 대한 서운한 마음 때문일까.
여느 때와 달리 불손을 경계하는 듯한 빛이 이레의 글에 묻어났다.
-어째 반기지 않는 듯하구나.
-그리 느끼셨습니까?
-그리 느껴지게 행동하는구나.
-오늘이 재간택일이라 아마도 긴장하여 그런 모양입니다.
-중요한 날이구나. 그래서 이리 일찍 일어난 것이냐?
-잠들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불손이야말로 이 시간에 왜 아니 주무십니까?
-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려야 비로소 잠을 청한다.
-역시…….
백귀로구나.
밤은 귀(鬼)의 시간이니.
어둠 내내 활동하다 환해지면 쉬는 것이리라.
-좀 전에 새벽 닭이 울었습니다. 불손, 그만 주무실 시간입니다.
-그래야겠구나. 그나저나 넌 언제까지 날 불손이라 부를 참이냐?
이레는 피식 웃었다.
“또 이러신다.”
당분간은 불손이라 부르라 하더니.
그 사이 잊기라도 한 것이려나?
에고, 한숨을 쉬며 이레는 붓을 들었다.
-불손으로 부르기 싫으시면 이름을 알려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그럼 그리 부르겠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알려주지 않으시겠지. 지난번처럼 또 마지못해 불손이라 부르라 하실 거야. 이쯤 하였으면 포기할 법도…….”
이레의 혼잣말이 채 끝나기도 전.
굵고 진한 두 글자가 종이를 채웠다.
-은백.
“뭐?”
이레의 눈이 커졌다.
툭.
그녀의 손에서 붓이 떨어졌다.
곧이어 서탁 위로 불손의 글귀가 반듯하게 이어졌다.
-은자원의 백(伯).
힘찬 글이 종이의 여백에 선명하게 박혔다.
-앞으론 날 은백이라 부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