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선(愃)
완연한 계절이었다.
과일 단내와 여문 곡식이 들녘을 가득 메웠다.
빈 곳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손길 역시 분주하였다.
바쁘게 종종걸음치는 것은 지상의 선계라 불리는 궁 안도 마찬가지였다.
곧 있을 세손빈 재간택을 위해 궁궐 곳곳이 부산했다.
재간택 동안 간택인들이 머물 전각을 청소하고, 시험에 필요한 물품을 빠짐없이 채웠다.
재간택인의 성품을 시험할 장소 역시 궁의 법도에 따라 화사하게 치장되었다.
모처럼 맞이하는 왕실의 잔치라.
아직 재간택 전이건만, 궁은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궁의 한 귀퉁이.
일 년 사계절, 어둡고 고요한 전각 은자원엔 평소보다 더 깊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어두운 은자원에 자리한 책상은 네 개.
그중 사선으로 마주한 책상에 형운과 장무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은자원엔 책상 셋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었었다.
그런 곳에 장무열이 들어오며 새로 책상을 들였다.
그렇잖아도 부족한 공간에 억지로 책상을 넣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배치가 되었다.
형운과 장무열은 은자원 내에서 가장 먼 곳임에도 고개만 들면 서로를 가장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색하고도 묘한 관계 탓일까.
두 사내가 자리한 은자원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서책 넘기는 소리만이 사람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오지 않는군.’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형운은 초조했다.
평소처럼 흐릿한 유등 아래 붓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형운은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장무열 때문이 아니다.
마땅히 올 사람이 오지 않아던 까닭이다.
은자원의 은랑, 이레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침 일찍 호위와 가마를 보냈거늘.
어찌하여 아직 오지 않는 것인가?
그때, 어둠 저편에서 반갑지 않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정신 사납게. 뭘 그렇게 거북이 마냥 연신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는 것이오?”
장무열이었다.
곧 형운의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의 일이다. 신경 꺼라.”
“나도 그러고 싶으니, 신경 쓰이지 않게 해 주시오.”
“사건 조사를 위해 이곳에 있다 하질 않았느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형운이 무표정한 눈으로 장무열을 보았다.
“딱히 무얼 조사하는 것 같지 않아 하는 소리다.”
“걱정해주어 고맙소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오. 그보다…….”
장무열은 이레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던 여인, 오늘은 어찌 안 보이는 거요?”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형운이 대답했다.
“불필지(不必知).”
알 필요 없다!
단호한 말을 끝으로 형운은 다시금 끝없는 침묵 속으로 침잠되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어 은자원 대문을 바라보았다.
장무열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궁금하였다.
은랑, 어찌하여 이리 안 오는 걸까?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궁금증에 조급증이 덧칠해졌다.
***
“어딜 가십니까?”
살금살금 별채 문을 여는 이레 앞에 선희궁의 장 상궁이 버티고 섰다.
이레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치수 재는 것도 끝난 것 같고, 피부 단장도 끝났다 들었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 그러니,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장 상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하지만 밖에 저를 기다리는 가마와 교꾼이…….”
“그들이라면 제가 돌려보냈습니다.”
“네?”
이레는 고개를 돌려 삐죽 열린 대문 밖을 보았다.
별채를 나올 때만 해도 분명 있었던 가마와 호위무사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긴요한 볼일이 있어 그럽니다. 잠시면 될 터이니, 다녀오게 해주십시오.”
거듭된 부탁에도 장 상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아가씨께 가장 중요한 일은 재간택입니다. 다른 일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재간택에 참여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제 소임입니다. 부디 제가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어요.”
장 상궁은 정중하게 이레를 별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안으로 향하면서도 이레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멀리 궁이 있는 곳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은백께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였는데…….”
***
오후의 햇살이 은자원의 천장에 난 창문 틈새로 스며들었다.
“이처럼 엉망진창인 곳은 처음이군.”
장무열의 입에서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내 침묵하던 형운이 고개를 들었다.
“또 뭐가 불만인가?”
“이곳 말이오.”
“은자원?”
“소속된 관원 중 무려 둘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 아니오. 아무리 하찮은 잡무를 도맡아 하는 부서라 하여도 그렇지. 이곳엔 규율과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따위 것 없어도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다.”
“조직의 체계는 물론이고 위계는 더더욱 없으니.”
“은자원의 정식 은자도 아니면서 남의 일을 함부로 떠들지 마라.”
“그럼, 이게 정상이란 말이오? 면사 쓴 여인은 그렇다 치겠소. 은협이라는 자는 어찌 안 보이는 것이오?”
“그 역시 그대가 알 필요 없다.”
형운의 무심한 대답에 장무열은 냉소로 응했다.
“알려주지 않는 것이오? 아니면 아는 게 없는 게요?”
“…….”
형운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장무열의 짐작대로 그 역시 은협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던 탓이다.
“필시 어딘가에서 흥청망청 놀고 있을 게 분명 하외다.”
장무열의 말에 형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도 그렇겠지.”
처음으로 형운과 장무열의 생각이 일치했다.
워낙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자이니.
이번엔 대체 어디서 게으름을 떨고 있는 걸까?
***
사대문 밖에서 말을 달려 반나절 거리.
유달리 골이 깊고 산세 험한 산이 있었다.
물 맑은 개천과 그럭저럭 길도 뚫려 있는 터라.
아주 오래전엔 산 아래에 제법 큰 규모의 마을도 있었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말이었다.
십여 년 전, 역병이 휩쓸고 간 이후엔 마을도 산도 버려졌다.
오후 늦은 시각.
심마니들도 피해간다는 그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버려진 마을에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열한 명.
이곳에서 일행의 행선지가 갈렸다.
열한 명의 일행 중 열 명은 마을에 남았다.
산에 오른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말을 탄 중년의 선비는 좁고 가파른 길을 느긋하게 올랐다.
그 위태로운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두커니 자리한 제법 큰 규모의 고택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곳은 고택이라기보단 거대한 요새에 가까웠다.
고택 안으로 들어가려면 거대한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고 넓고 깊은 구지(溝池:도랑)를 건너야만 했다.
고택을 본 선비는 품에서 흰 헝겊을 꺼내 눈 아래를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달렸다.
구지가 가까워지자, 숲의 그늘에서 칼 찬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정제된 의복.
날카로운 눈빛.
산적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 탄 선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의 입에서도 용무를 묻는 물음은커녕, 작은 숨소리 한 자락 나오지 않았다.
말이 없기는 말을 탄 선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비는 느긋한 동작으로 소매에서 패를 꺼냈다.
표면에 날개를 펼친 채 막 날아오르려는 ‘학’ 한 마리가 그려진 사각의 동패.
패를 확인한 무인들은 ‘학’ 선비에게 고개를 숙이고 길을 내주었다.
패를 수습한 ‘학’ 선비가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몇이나 오셨는가?”
“모두 모이셨습니다.”
“허허. 서둘러 온다 하였거늘, 가장 늦고 말았군.”
‘학’은 혀를 차며 고택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늦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좀처럼 서두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구지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건너자, 고택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이 나타났다.
길고 높은 담벼락엔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문이 무려 열 개나 존재했다.
그 열 개의 붉은 문마다 다른 그림과 문양이 오목새김으로 새겨져 있었다.
해(日), 구름(雲), 산(山), 물(水), 바위(巖), 소나무(松), 불로초(芝), 학(鶴), 사슴(鹿), 거북이(龜).
장생과 불사를 의미하는 십장생(十長生).
열 개의 붉은 문엔 홰가 걸려 있었는데, 그중 여덟 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문의 주인이 자리하였다는 신호였다.
불 꺼진 문은 ‘학’과 ‘거북이’뿐.
거북이는 주인을 잃었으니, ‘학’을 제외한 모두가 모인 셈이었다.
“흠흠.”
‘학’은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진 채, 그의 동패와 같은 문양의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며 몇 차례의 확인작업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학’은 고택의 중앙 전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사방 십장생이 수 놓인 긴 병풍으로 둘러싸인 전각의 중앙에는 긴 정방형의 탁자가 자리했다.
탁자의 양쪽으로 각기 네 개.
그리고 상석이라 할 수 있는 좌우에 각각 하나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각각의 의자에도 십장생을 뜻하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의자엔 이미 여덟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흑립을 쓴 사람도 있고, 패랭이를 쓴 자도 있었으며, 무인의 복색을 한 자도 있었다.
머리에 쓴 것도 다르고 차림도 달랐지만, 한 가지만은 똑같았다.
모두 ‘학’처럼 너울이나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늦었소.”
‘학’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상석에 앉은 ‘해’가 입을 열었다.
“십학사가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소.”
서로 간에 안부를 묻는 흔한 눈인사조차 없었다.
삭막한 시작이건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해’의 말이 이어졌다.
“제일 먼저, 공석으로 남은 ‘구’의 자리에 관한 안건이오.”
학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텅 빈 의자로 향했다.
‘거북이’의 자리였다.
‘학’이 물었다.
“이 자리가 비게 된 경위가 무엇이오?”
상석과 하석.
서로 앉은 위치는 달라도 그들은 서로를 함부로 칭하지 않았다.
‘해’가 입을 열었다.
“‘구’는 우리를 배신하였소. 은밀히 적과 내통하려 하여 어쩔 수 없이 제거하였소.”
“으음.”
“흠.”
학사들 사이에 나직한 침음이 흘렀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동료의 죽음.
더러는 안타까운 눈빛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의나 항의하는 자는 더더욱 없었다.
‘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석이 된 ‘구’의 자리에 새로 사람을 들여야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에 합당한 사람이 있소이까?”
“마침 적합한 자가 있소.”
고개를 끄덕인 ‘해’가 허공에 달린 줄을 흔들었다.
따랑, 따랑.
줄 끝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곧 십장생 중 하나인 ‘거북이’의 자리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평범한 얼굴, 엉거주춤하게 굽은 어깨.
언뜻 보기엔 미천하고 비굴한 면모의 사내였다.
“학사님들께 인사 올리네유. 그러니께 워떡하다 보니 오늘부로 거북이가 되었슈.”
‘거북이’의 공석을 채울 새로운 열 번째 학사.
한때 단양 관아의 호방이었던 박진봉의 얼굴에 히죽, 어리숙한 웃음이 떠올랐다.
***
박진봉을 바라보던 ‘학’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그가 ‘해’를 돌아보았다.
“설마, 저자를 ‘구’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것이오?”
‘해’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학’의 잇새로 쯧쯧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를 제외한 다른 자리에서도 불편한 헛기침이 들려왔다.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학’이 박진봉을 향해 지청구를 날렸다.
“십학사가 될 자가 어찌 얼굴도 가리지 않은 것인가?”
“워메, 깜빡 잊었네유.”
그제야 박진봉은 소매에서 헝겊을 꺼내 얼굴을 대충 가렸다.
그 한심한 모습에 ‘학’을 비롯한 학사들은 ‘해’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해’가 입을 열었다.
“이번 ‘구’의 배신을 색출하고 처결하는 데 있어 큰일을 하였소. 그 밖에도 오랫동안 학사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니, ‘구’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해’의 설명에도 ‘학’을 비롯한 학사들의 눈 속에 깃든 불신은 여전하였다.
슬그머니 제 자리에 앉은 ‘거북이’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마뜩잖았다.
‘해’의 맞은편 상석에 앉은 ‘구름’은 대놓고 실소를 흘렸다.
“못 본 사이에 ‘해’의 안목이 크게 낮아진 모양이오.”
노골적인 비난에도 ‘해’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응을 보인 쪽은 박진봉이었다.
그는 작은 눈은 끔뻑이며 ‘구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아니어유. 그러니께 말을 참 대간하게 하신다, 나가 그런 생각을 했네유.”
“학사는 자고로 고고한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거늘. 어디서 이런 근본도 없는 자를…….”
‘구름’의 도발에 박진봉은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글치유? 나가 요래조래 생각혀두 어이가 없었슈. 나가 무신 학사래유? 품위고 나발이고 나는 그런 거 잘 몰러유.”
“주제를 아니 그나마 다행이군.”
“근디 나가 요래 ‘거북이’의 자리에 냉큼 앉아 부린 이유를 아남유?”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나가 곰곰 생각해 보니께 그렇더라구유. 대단하신 분이나 나나 눈 두 짝에 콧구멍 귓구멍 가진 거 똑같고, 입하고 혓바닥 가진 건 똑같지 않겠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그 짝이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슈. 요렇게 별 볼 일 없게 생겼어도, 나도 남 달린 거 다 달렸슈. 그래서 한다 했슈. 학사님도 그렇잖아유. 품위 좋고 고상도 좋은디, 그런다고 모가지 뚝 끊어지면 안 죽는대유?”
“뭐라!”
분노한 ‘구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에 달린 칼 손잡이에 올라가 있었다.
당장에라도 피를 볼 듯 무서운 살기가 흘렀다.
실내엔 팽팽한 긴장이 가득했다.
박진봉은 그 와중에도 싱글싱글 유들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얼핏 천치 같은 모습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론 비웃는 듯한 느낌인지라.
‘구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 그의 칼이 검집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따랑, 따랑, 따랑.
‘해’가 줄을 세 번 당겼다.
열 곳의 문에서 모두 열 명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해’가 나직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이곳은 드잡이질이나 하는 장소가 아니오.”
‘해’는 그 흔한 협박 한 번 하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회의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느슨했다.
대신 그가 호출한 무인들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구름’은 잠시 ‘해’를 노려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해’는 여전히 무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내 말 못 들었는가? 드잡이질하는 장소가 아니라 했네. 흉기는 그만 내려놓게.”
‘해’의 말에 박진봉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혀유. ‘구름’ 학사님이 워낙 무서워서 말이쥬. 나가 실수혔네유.”
그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낫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시퍼렇게 갈려진 낫을 본 ‘구름’의 눈자위가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구’가 언제 낫을 꺼냈는지 보지 못했다.
따랑, 따랑, 따랑.
‘해’가 줄을 다시 세 번 잡아당겼다.
무인들이 사라졌다.
“새로 십학사가 된 ‘거북’에게 불만이 있으신 분은 따로 시간을 갖기로 하고.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해’의 무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엔 한 사람의 명운을 정하는 일이오.”
그가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나무패를 탁자 위에 던져놓았다.
패엔 누군가를 뜻하는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음.”
“허허.”
“이 사람은…….”
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십학사들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요하지 않은 학사는 ‘해’와 ‘거북이’ 박진봉뿐이었다.
‘해’가 말했다.
“이 자의 해악에 관하여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수많은 학사의 희생과 노력으로 어렵게 구축한 이 조선의 질서와 법도를 어지럽히려 하는 무지하고 무도한 작자요. 지금까지 여러 학사가 이 자의 패악으로 피해를 보았소.”
몇몇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는 학사들을 둘러보았다.
“학사들께서 이 자의 운명을 결정해 주시오.”
말을 마친 ‘해’가 먼저 자신의 패를 던졌다.
고심하던 다른 학사들도 하나둘 패를 던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학’이 패를 던졌다.
탁자 위에 던져진 패를 살핀 ‘해’가 입을 열었다.
“만장일치로 이 자의 죽음(死)이 정하여졌소.”
그렇게 한 사람의 운명이 열 명의 학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
십학사들의 모임이 끝나고 얼마나 흘렀을까.
쥐 죽은 듯 고요한 고택에 큰 소란이 일었다.
허락받지 않은 수십의 사내가 고택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낯선 침입자들을 향해 고택의 무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고택의 무인들만큼이나 침입자들 역시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다.
차차창! 치잉!
양측의 무인들이 격돌하자 소란스런 쇳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사방에서 튀었다.
생사를 가르는 억눌린 비명이 고요한 산자락을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 한 사내가 돌다리를 넘어 고택 안으로 스며들듯 뛰어들었다.
사내는 어두운 복도를 달려 마침내 굳게 닫힌 문을 박차고 전각으로 들어섰다.
텅 빈 실내가 사내를 맞이했다.
예리한 눈길로 내부를 살피던 사내는 촥, 쥘부채를 펼치며 탄식을 흘렸다.
“이런, 또 늦고 말았구나.”
낡은 갓.
허름한 입성.
제법 쌀쌀해진 기온에도 쥘부채를 부적처럼 손에서 놓지 않는 사내.
은자원의 은협이자 마지막 남은 암행어사, 서강율이었다.
“모두 이곳에 있었구나. 오래되지도 않았어.”
곳곳에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번엔 틀림없이 잡았다 생각했거늘…….”
서강율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단양에서의 사건 이후, 서강율은 줄곧 십학사의 뒤를 쫓았다.
좀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자들이라.
뒤쫓기가 쉽지 않았다.
잡았다 생각하면 번번이 놓치기 일쑤니.
마치 신기루를 뒤쫓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간신히 이곳에 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하들을 이끌고 숨 쉴 틈 없이 말을 달렸건만.
그만 한발 늦고 말았다.
“나리.”
등 뒤에서 긴장한 목소리와 함께 칼을 찬 무사가 다가왔다.
격한 혈전의 끝이라, 무사의 숨결은 거칠었다.
서강율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밖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제압하였습니다.”
“우리 쪽에서 다친 이는?”
“적 중에 실력이 제법 뛰어난 자들이 있어…….”
한숨 소리가 서강율의 잇새를 뚫고 흘러나왔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후유증이 없도록 잘 치료해주거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곳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사의 물음에 서강율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쉽게도 늦었다.”
무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강율이 십학사를 찾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간신히 꼬리를 잡았다 생각했는데, 또다시 놓치고 말았으니.
서강율의 허무함이 무사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그래도 얻은 것이 전무한 건 아니니.”
서강율은 허리를 숙여 탁자 아래에 있는 작은 나뭇조각을 집어 들었다.
나무패의 뒷면에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름을 확인한 서강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적어도 놈들이 누굴 노리는지. 그것만큼은 분명해진 것 같구나.”
서강율은 쥘부채를 굳게 쥐며 쥐어짜듯 다짐했다.
“십학사, 네놈들이 감히!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무슨 짓을 써서라도…… 설사, 섶을 지고 지옥 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대도 네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말리라.”
서강율은 나무패를 내려다보았다.
나무패에 새겨진 한 글자.
선(愃).
십학사가 운명을 결정지은…….
이 나라 왕세자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