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서탁에 답이 있다
노을이 타오른다.
천일홍 붉은 빛깔이 세자궁을 휘감았다.
처소로 돌아온 형운 앞에 우익위 홍인모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좌익위 최치성도 함께였다.
“돌아왔구나.”
일전의 사건으로 좌익위는 자신의 집에서 근신 중이었다.
오늘은 그 근신이 풀린 날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한 탓인지.
최치성의 얼굴은 수척했다.
“좌익위.”
“소인, 이곳에 있나이다.”
형운의 부름에 최치성은 무릎걸음으로 세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은 죄가 워낙 위중한 터라.
무슨 명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좌익위의 자리에서 그만 물러나라 하실지도 모른다.
조언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세손 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외인에게 발설한 큰 죄를 저질렀다.
만약, 그자가 나쁜 의도를 품고 잠행 나온 세손 저하를 노리기라도 하였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마음을 굳게 다잡은 최치성은 왕세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형운이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역시.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어이 세손 저하의 입에서 좌익위를 그만두라는 명이 떨어지니, 슬프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최치성의 눈가가 붉어졌다.
“신 최치성. 저하를 모실 수 있어 무한한 광영이었나이다. 비록 지금은 죄를 지어 물러가나, 저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올 것이옵니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최치성의 목덜미로 형운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가다니. 어딜 간단 말이냐?”
“네?”
“설마, 예전의 그 일로 내가 널 내칠 거라 여긴 것이냐?”
“하, 하오나…….”
형운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따금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여야 부족한 부분도 찾을 수 있는 법. 그나저나 네 눈에는 내가 참으로 옹졸한 사람으로 보였는가 보구나. 고작 그 정도 실수를 하였다고 좌익위에서 내칠 거라 여겼다니 말이다.”
“좀 전에 그만하면 되었다고 하시어…….”
“자책하는 것을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우직한 사내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저하! 신 최치성, 앞으로 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옵니다.”
“유혈 낭자한 맹세 따윈 필요 없다.”
“저하.”
“사내 녀석이 무슨 눈물이 그리 많으냐? 아무래도 오늘은 때가 아닌 모양이구나. 그만 물러가 쉬어라.”
“아닙니다. 지난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밤낮으로 저하의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그 불굴의 정신은 내일부터 발휘하거라.”
지엄하신 명인지라.
최치성도 더는 항명하지 못했다.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날이 밝기 무섭게 저하의 곁으로 오겠나이다.”
최치성이 물러갔다.
혼자 남은 홍인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
“무어냐?”
“송구하오나. 혹,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사옵니까?”
“넌 속일 수 없구나.”
홍인모의 물음에 형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익위의 말처럼 그의 기분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이레에게 재간택 교지가 내려졌음을 뒤늦게 알게 된 형운은 크게 기뻤다.
그 좋던 기분이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졌다.
장무열.
놈의 그 눈빛.
마치 눈부신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놈의 집요한 시선이 이레를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한 느낌과 묘한 감정을 느꼈다.
화도 분노도 슬픔도 괴로움도 아닌…….
그 모두를 합한 만큼이나 불편한 감정이었다.
대체 왜 이리 불안하고 조급증이 인단 말인가?
그것의 이름은 몰라도 원인만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을 하여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장무열, 그자를 은자원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면 되리라.
‘무슨 수를 내어야 할 텐데.’
문제는 방법이었다.
절차상 문제가 없다면 지금 당장 장무열을 은자원에서 쫓아낼 방도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할까.
“인모야.”
“네, 저하.”
“너도 알다시피 은자원에 새로운 잡것이 붙었구나.”
“그자에 대하여 조사하겠습니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은자원에 오게 된 경위와 절차상의 문제는 없는지 알아보거라. 그 과정에서 부정한 청탁이나 비리가 없었는지도.”
“면밀하게, 하나 빠짐없이 조사하겠사옵니다.”
“그래야 한다.”
명을 받잡은 홍인모가 물러갔다.
“잘되어야 할 텐데.”
이레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장무열은 은자원을 떠나야 한다.
사헌부 장령이라.
지금까지는 진정한 모습으로 장무열과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자칫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장무열, 그자를 은자원에서 쫓아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
해가 저물었다.
그러나 경기관찰사 김시묵의 집안은 대낮처럼 불을 밝힌 채, 사람들로 북적였다.
은자원에서 돌아온 이레는 전과 다른 집안의 분위기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가씨, 이제 오세요?”
행랑 할멈이 이레를 반겼다.
“왜 이리 소란스러워? 손님이라도 계셔?”
“아이고 아가씨. 다 아가씨 손님이에요.”
“내 손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이레는 할멈의 손에 이끌려 안채로 향했다.
성장 차림의 여인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손님을 소개했다.
“선희궁에서 나온 분들이니라.”
“선희궁이요?”
영빈 마마 전각의 궁인들이 아니던가.
“귀한 분들께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선희궁 소속의 장 상궁이었다.
“갑작스러운 재간택 교지에 많이 놀라고 경황이 없을 줄로 압니다. 영빈 마마께서 저희에게 준비를 거들라 하명하시었습니다.”
“준비라 하심은…….”
“궁의 법도에 따라 초간택은 정해진 대로 입고, 신고, 장식해야 했지요. 하지만 재간택에선 사정이 다릅니다.”
초간택과는 달리 재간택에서는 뚜렷하게 정해진 차림과 장식이 없었다.
당연히 재간택인들의 집안에서는 재력이 닿는 데까지 여식을 꾸미고 치장하였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
그러나 뒤늦게 재간택 교지를 받은 이레의 집안에선 미처 무언가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속사정을 꿰뚫어본 선희궁에서 교지가 늦은 것을 구실 삼아 선의를 베푼 것이다.
감사하게 받아야 할지, 아니면 정중히 사양하는 것이 옳은지.
적당한 처신을 찾지 못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장 상궁은 방문 밖을 향해 음성을 높였다.
“들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형형색색 비단이 든 상자와 온갖 패물을 담은 오동나무 궤가 방으로 들어왔다.
장 상궁을 따라 궁에서 나온 침방(針房)과 수방(繡房)의 나인들이 이레를 세심한 시선으로 훑었다.
“시작하라.”
장 상궁의 명이 떨어졌다.
침방의 나인들은 이레의 치수를 재고, 색색의 비단을 종류별로 대어보고, 입고, 걸치게 하였다.
수방의 나인들은 침방 나인들이 선택한 비단에 수자를 놓았다.
그 와중에 살결을 곱게 하는 궁중의 비법이 이레에게 행해졌다.
약초와 꽃잎을 띄운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수십 가지의 곡물에 꿀을 넣은 가루로 얼굴을 연신 문질렀다.
그렇게 이레는 주위의 요구에 따라 쉼 없이 앉고 일어서고, 팔을 접고 벌려야 했으며, 숱한 손길과 향을 얼굴과 몸 곳곳에 둘러야 했다.
간신히 볼일을 마치고 별채로 돌아왔을 땐 어느새 밤이 깊어진 후였다.
그녀가 별채로 돌아온 다음에도 안채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재간택까지 이레가 입을 옷을 짓고, 수자를 놓자면 며칠을 꼬박 새워도 시간이 모자랐던 터라.
장 상궁을 비롯한 나인들의 모습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홀로 잠들기 미안하였다.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할아버지들을 뵌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잘 계신가요? 보고 싶습니다. 무척 그렇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들은 이레를 잊지 않았다.
-아이야, 네 글에 수심이 가득 비치는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화에 이어 상의 글도 나타났다.
-너는 어찌하여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것이냐. 또 무슨 일인데 그래?
예도 안부를 물어왔다.
-고민을 풀어 놓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일도 종종 있으니. 아이야, 무슨 일인지 말해보아라.
자상한 글과 따뜻한 마음.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뜻해졌다.
애써 뜨거운 울음을 삼킨 이레는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먼저 장무열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재간택에 관해서도 털어놓았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제게 재간택 교지가 내려졌습니다.
이번엔 악의 글이 나타났다.
-지난번에 떨어졌다 하지 않았느냐? 그 때문이 혼약 이야기가 오간다 하였던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재간택 교지가 내려왔습니다.
이레의 답에 상의 글이 곧바로 나타났다.
-뒤늦게나마 재간택 교지가 왔다니, 그래도 제대로 눈알 박힌 놈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구나.
-눈알이 뭐냐? 상스럽게.
악의 핀잔에 상이 곧바로 반격했다.
-그럼, 눈깔이라 할까?
둘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예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어허, 지금 그런 말싸움이나 할 때가 아니지 않소이까. 아이가 슬퍼하는 게 보이지도 않소?
악의 악필이 떠올랐다.
-보나 마나 뻔한 일이니 그렇지.
상이 물었다.
-뻔한 일이라니? 넌 아이가 왜 이러는지 짐작한단 말이냐?
-척 보면 모르겠느냐.
-무언데?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상의 재촉에 악의 악필이 서탁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오라비를 찾기 위한 간택 행이었다 하나, 재간택 교지를 받음은 가문의 영광이거늘. 그럼에도 근심하는 것을 보니…… 달리 마음에 둔 사내라도 있는 모양이지.
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이 비웃었다.
-뭐야? 아이에게 사내가 있단 말이냐? 푸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내 오늘 이때까지 저 아이가 제 오라비 말고 다른 사내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헛다리 짚었구나. 푸하하하하.
상의 웃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화의 글이 떠올랐다.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은자원의 두 은자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고…….
예가 화의 말을 받았다.
-장 모시기란 사내의 집안과 혼담도 오간다 하질 않았소. 심지어 자신과 혼인하는 게 어떠냐 묻기까지 하였다지?
상의 기세는 여전했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그래서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사내가 생겼다고?
예가 말했다.
-우리야 아이를 어려서부터 보아왔으니 막연히 어리게만 느낄지 모르나, 이미 간택에도 참여하지 않았소?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오.
상의 필체가 조금 작아졌다.
-분위기가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해? 아이야, 네가 한번 말해보아라. 아니지?
악도 물었다.
-어떠냐?
이레는 망설였다.
과연 어느 할아버지의 말이 옳은 걸까?
답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어두운 은자원.
파루의 종소리와 함께 굳게 약조하던 사내의 얼굴과 목소리가.
노을, 천일홍.
온통 붉은 천지에 가을 향기와 함께 새겨진 그의 모습이.
이레는 붓을 들었다.
-실은 신경 쓰이는 분이 계시긴 합니다.
짧은 대답.
그러나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상의 급하게 쓴 글이 서두를 장식했다.
-누구냐? 어떤 놈이냐?
악의 물음이 이어졌다.
-알아서 뭐하게?
상이 이를 갈았다.
-순진한 아이를 꼬드긴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아니지. 백귀니, 일단 그놈의 가문을 족치고 족보를 뒤져서 아작을 내야지.
악이 다시 물었다.
-남의 족보는 왜 뒤져?
상의 비장한 대답이 이어졌다.
-몰라서 묻느냐? 순진한 아이를 꼬드긴 가문이니, 그 심성이 얼마나 음흉하겠느냐? 안 봐도 뻔한 노릇이지.
화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상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군. 그래, 아이야. 그 사내가 어느 가문의 누구라고?
악이 바로 물음을 덧붙였다.
-화, 그대는 또 왜 그걸 궁금해하는데?
화가 웃었다.
-허허, 다른 뜻은 없다. 다만 조금 궁금하여…….
상이 꼬리처럼 화의 글에 달라붙었다.
-내가 오래도록 지켜봤는데, 이 서탁의 말 많은 자들 중에 화가 제일 위험해. 웃으며 남의 등에 칼 꽂을 성격이야.
악이 비웃었다.
-넌 대놓고 웃으며 칼 휘두를 것 같은데?
의외로 상은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난 뒤에서 찌르는 치사한 짓거리는 안 하지. 사내라면 정정당당해야지. 내 성격이 달리 호탕하겠느냐?
예가 흐트러진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둡시다. 아이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소.
악의 심드렁한 글이 떠올랐다.
-뭘, 그런 일로 근심까지 하느냐. 정히 싫으면 재간택에서 떨어지면 될 일을.
이레가 물었다.
-재간택에서 떨어지라고요?
-삼간택이라면 몰라도 재간택 정도라면 나중에 다른 사내와 혼인한다 해도 큰 흠이 되지 않으니. 아예 작정하고 왕실에서 싫어할 만한 일을 하려무나.
이레가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그게 뭐냐면 말이다…….
이후로 화와 예, 그리고 상과 악 할아버지의 조언이 이어졌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이레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더는 서탁에 쓰인 글이 사라지지 않았다.
밖을 살피니 어느새 달이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
같은 시간.
밤새 불이 켜졌던 세손의 처소로 희붐한 새벽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우리 저하, 또 아니 주무시네.
밖에서 들리는 최 내관의 한탄일랑 귓전에 담지 않은 채 형운은 서탁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했다.
“장무열. 그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오늘 우연히 이레와 백귀들을 대화를 보게 되었다.
“재간택이 그리 싫었던 건가?”
이레는 한결같이 재간택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다.
부담스러워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싫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큰일이구나.”
제아무리 형운에게 뜻이 있어도, 이레가 전력으로 재간택을 망치려 든다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신경 쓰이는 사내는 또 누구란 말인가?”
첩첩산중이라.
이레에게 사내가 생긴 모양이다.
그것이 단순한 호감인지, 아니면 그보다 깊은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내가 재간택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원인임은 분명하였다.
“필시 장무열, 그자일 테지.”
최근 이레 근처에 나타난 사내는 장무열 하나뿐이다.
장무열이 이레에게 지근거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할 일이 많아졌군.”
상황이 어려워졌음에도 형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더욱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형운은 백지 위에 두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장무열.
김이레.
장무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내면 그만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탈탈 털어 사소한 비리나 부정이라도 나오면 그걸 빌미로 아예 삭탈관직하여야지.
문제는 이레였다.
사람의 마음은 본시 남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니.
“어찌한다. 선물이라도 보내야 할까?”
형운은 이내 머리를 저었다.
쓸데없는 일.
이레가 범상한 여인과 같지 않음은 이미 수차례 확인하지 않았던가.
값비싼 장신구는 물론 귀하디귀한 비단과 화려한 가마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즐겨 읽는다는 서책조차도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면, 그날 오로원에서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
대지를 가득 메운 붉은 천일홍.
2만 권의 서책을 품은 서재.
가을 향기 물씬한 그곳에서 이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때,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진실로 마음에 드는 한 가지가 이곳에 있노라고.
대체 그게 무엇일까?
아직 그 한 가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내가 되어 여인에게 그런 것을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정체를 밝힐 수도 없으니…….”
이레에게 자신이 세손임을 밝히면 어떨까?
아마도 굳어 버리리라.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겠지.
부담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테고.
어려워하며 끝내 멀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자연스럽고 스스럼없는 미소와 ‘은백’을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는 그대로 영영 잃어버리게 되리라.
“어렵구나, 어려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여인의 마음이라 하더니.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구나.”
형운의 탄식이 깊어졌다.
세상 그 무엇보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레처럼 서탁의 백귀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서탁의 백귀들은 박학다식하여 그야말로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으니.
언뜻 보기엔 혼란스러운 대화일지라도, 그들의 이야기 속엔 반드시 물음에 대한 답과 길이 있었다.
어린 시절엔 백귀들의 지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순히 재미있는 우스갯소리 정도로 치부하였더랬다.
철 들고 나이 들어서야 비로소 백귀들의 현명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정치와 궁궐의 예법에 관하여는 세손인 그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만약 형운이 세손이 아니었다면.
그의 할바마마께서 왕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형운은 백귀들을 진짜 왕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백귀들은 한 나라의 왕세손이 능히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운은 이따금 그들의 대화를 보기만 할 수 있을 뿐.
이레처럼 직접 대화할 수는 없었다.
“서탁, 서탁이라…….”
고뇌하던 형운의 눈 속에 푸르스름한 이채가 떠올랐다.
“그렇군.”
형운은 고민의 근원이자 시작인 귀물을 내려다보았다.
서탁.
그곳에 그가 간절히 찾던 해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