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50화 (50/215)

#50. 전력을 다해 임하라

늦은 밤.

왕세자의 의중이 우의정 홍봉한에게 전해졌다.

원한다.

그러니 대책을 마련하여라.

간단명료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명을 이행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홍봉한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되었고, 노회한 정치가는 하룻밤 안에 일을 계획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을 묘안이 떠오른 것이다.

홍봉한은 여전히 둔한 표정을 하는 정홍순에게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실은 선희궁을 비롯한 몇 곳에서 은근히 추천한 인물이 있었다네.”

“선희궁이라면 영빈 마마를 뜻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움직였다면, 배경이 훌륭하였다는 말인데. 세자 저하께서 말씀하신 평등과 원칙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영빈 마마께서 몇몇 초간택인들에게 관심을 보여 다과회를 하였음을 아는가? 그곳에서 유독 눈에 띈 간택인이 있었던 모양일세.”

홍봉한은 말과 함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 한번 보게나.”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번 초간택에 참가한 간택인이 필사한 글귀일세.”

“이것이…….”

글씨를 살피는 정홍순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글은 무릇 마음을 나타낸다 하였습니다. 자간이 좁음은 급한 성격을 말함이고, 글의 크기 또한 균등하지 않으니 성정 또한 온순하지 않을 것이며, 먹의 농담 역시 신경 쓰지 않으니 이야말로 가치 없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정홍순은 제 감상을 가감 없이 내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우의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이것을 살피라고 하였을 땐 그만한 뜻이 있을 터.

“어찌하여 이 글을 살피라는 것인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예조판서의 신랄한 평가에 우의정 홍봉한은 신만을 돌아보았다.

“대감께선 어찌 보이시오?”

홍봉한의 물음에 신만 역시 심드렁하게 글을 살폈다.

“……음?”

일순간, 신만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탐탁지 않은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까지 만들며 찬찬히 살폈다.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글을 살피는 눈길이 모래 속에 숨은 진주를 찾은 듯하였다.

그 신중한 태도에 정홍순은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대체 저 글의 어디에 저렇듯 자세히 살필 구석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평범 이하의 글이었다.

잠시 후, 신만이 고개를 들었다.

“허어.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고.”

기다렸다는 듯 홍봉한이 물었다.

“어찌 보이시오?”

신만이 탄성을 흘리며 대답했다.

“일견 어수선하고, 허술해 보이나. 자세히 살피니 숲과 바다가 펼쳐져 있으니, 우거지고 아득한 광경에 잠시 넋이 나갈 지경이었소이다.”

영의정의 칭찬에 우의정 홍봉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께선 숲과 바다를 보시었소? 난 처음 이 글을 보았을 때, 대지와 구름을 연상하였소.”

“농담의 일정한 변화가 보이시오? 일필휘지(一筆揮之). 먹을 찍어 잠시도 쉬지 않고 글을 흘러내렸으니. 비록 미진한 부분이 없진 않으나 그 공부가 범상치 않음이라. 한데, 이 글을 진정 여인이 썼단 말이오?”

“저도 믿기지 않아 다른 글도 훑어보았을 지경이외다.”

“다른 글도 있단 말이오? 한번 보고 싶구려.”

영의정과 우의정이 간택인의 글을 놓고 품평하자, 정홍순은 서둘러 기록서를 찾았다.

초간택에 참가한 간택인들의 모습을 세세히 기록한 상궁들의 기록이었다.

곧 해당 간택인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말하는 소리의 맵시나 미모는 그 어디에 내어놔도 손색이 없으며 자세 역시 올곧고 반듯하니, 최상의 평을 받았습니다. 다만, 시선이 한 곳에 붙어 있지 않고 연신 주위를 살피니. 다소 부산하다 평가하였습니다.”

탁, 기록서를 덮은 정홍순이 말을 덧붙였다.

“미모와 자태는 훌륭하나, 글에서 보인 부산함이 행동에서도 묻어나니 역시 재간택인으로서는 부족함이…….”

예조판서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영의정 신만이 탁, 책상을 내리치며 결론을 내렸다.

“붙이시게.”

“대감. 하지만 이 간택인은…….”

“쯧쯧,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이 있나.”

우의정 홍봉한이 혀를 찼다.

“한 번 생각해보게. 세자 저하께서 엄명을 내리셨으니, 구색이라도 맞춰야 하지 않겠나? 다행히 여러 곳에서 추천한 인사가 있어 살펴보니 크게 부족한 점이 없네. 그러니 무엇이 문제일까? 아! 그런데 이 간택인이 어디 사는 집안의 여식인가?”

“경기관찰사 김시묵의…….”

“김시묵이라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홍봉한은 안심한 눈빛을 했다.

“다행히 배경이 그리 대단한 자는 아닐세. 먼 곳에 사는 것도 아니니, 이제라도 교지를 보내면 정해진 날짜에 늦지도 않을 테고.”

우의정의 거듭된 말에도 정홍순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영빈 마마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추천이 들어왔다는 점이 우려되옵니다. 매사에 공평하라 하셨는데, 세자 저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우의정 홍봉한이 다시 끼어들었다.

“듣자 하니 세자 저하께서 어떤 잔치에 참석하시어 우연히 여러 간택인을 보게 되었는데, 그중 한 간택인의 자태가 유달리 곱고 심성 또한 훌륭하여 보기 좋았다 하였네. 얼핏 듣기로 그 간택인이 경기관찰사의 여식이라 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영의정 신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자 저하께서 흡족하게 여기셨다면 더 긴말할 필요도 없겠군.”

신만이 정홍순에게 말했다.

“대비전에 재간택 교지를 하나 더 내어달라 청을 올리게.”

“어험. 시일이 촉급하니 차질없이 진행하여야 할 걸세.”

말을 마친 영의정과 우의정은 가례도감을 떠났다.

정신없이 벌어진 사태에 홀로 남겨진 정홍순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책상 위에 간택인의 글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는 조금 전의 일이 꿈은 아닐까 고민하였으리라.

“대체 이 글이 뭐라고 두 분께서 그리 요란을 떠실까.”

정홍순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글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대충 휘갈겨 쓴 글이건만.

이곳 어디에 숲과 바다, 대지와 구름이 있단 말인가.

다만, 먹의 농담이 일정하게 흐려지는 것으로 보아 한 번에 휘갈겨 쓴 글이라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글이 대체 뭐라고…… 흐음.”

무심코 글을 살피던 정홍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영의정 신만의 말을 들은 탓일까?

종이 위의 글귀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오래도록 바라보니, 산과 숲은 몰라도 기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제법 글을 가지고 노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쩌자고 이리 글의 모양이며 크기가 제각각이란 말인가.

이 좋은 기세로 어찌 이리 형편없는 필체를 가질 수 있을까.

일순간 그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부러 못 쓴 글씨렷다!”

마치 간택에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떨어지길 작정이라도 한 듯 부러 못 쓴 글씨가 틀림없었다.

정홍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필체에 담긴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비전에 교지를 청하려면 서둘러야겠구나.”

여인을 무시하던 마음일랑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했다.

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모두가 원하는 자리에 부러 떨어지려 했단 말인가.

사흘 후에 있을 재간택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

그날 저녁.

대비전의 지밀상궁이 재간택에 참가하라는 교지를 경기관찰사 김시묵의 집에 전달하였다.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문중의 어른들이 그의 집을 찾았다.

명성왕후 이후, 두 번째로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흥분과 설렘으로 문중이 들썩거렸다.

귀한 집안이 된 이후에는 그 문턱 한번 넘기 어려울 터이니.

미리 얼굴도장 한번 찍어보겠다고 생전 보지 못했던 자들이 김시묵의 낡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한밤중에 찾은 빈객의 수가 수십이 넘으니.

김시묵이 본가에서 분가한 이후로 가장 많은 객이 그의 집을 찾은 날이었다.

***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탕약을 마시는 문 소원의 귓가에 카랑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목소리에 담긴 서슬 퍼런 냉기.

문 소원은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맞은편에 자리한 명선을 바라보았다.

“곧 귀한 몸 되실 분의 심기가 어찌 이리 어지러울까?”

문 소원의 다독임에도 명선의 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찌 깜냥도 되지 않는 여인에게 재간택 교지를 내린답니까.”

“글쎄요. 대비전에서 그리 결정한 일을 이 사람인들 어찌 알겠어요?”

“혹여 대비전에선 다른 마음을 품고 계신 건 아닌지요?”

“다른 마음이라 하면?”

“빈씨가 바뀐다거나…….”

명선의 말에 문 소원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궁의 절차란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어, 일단 한 번 정해지면 좀처럼 변하는 법이 없답니다. 생각해보세요. 집이 무너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누가 감히 주춧돌을 바꾸겠습니까?”

“이미 다 정해진 교지가 또 내려지니. 저는 혹여 대비전에서 다른 마음을 품으신 건 아닐까 걱정입니다.”

“의외의 일이었음은 분명하나…….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랍니다.”

문 소원은 남아있던 탕약을 마저 삼켰다.

입가를 비단 천으로 훔치자, 도 상궁이 대추를 건넸다.

대추 끝만 베어 무는 모습이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 화내지 마세요. 내 나중에 조용한 시간에 대비전의 의중을 여쭤볼 것이니.”

“그래 주시겠어요?”

“그럼요. 사실 이번 재간택 교지는 하궐의 명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내린 것이라 하더이다.”

“하궐에서요?”

명선은 미간을 한데 모았다.

언젠가 후원에서 세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세자 저하께서 유난히 이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가?

“혹, 세자 저하께서 세손빈으로 경기관찰사의 여식을 내정한 것은 아닐까요?”

이레를 떠올린 명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느샌가 이레는 명선의 원망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치솟는 질투를 주체하지 못하는 명선을 문 소원은 그윽하게 응시했다.

“세자께서 정하신다고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대비전의 결정이니. 그리 걱정되시면 대제학께 넌지시 어려움을 전하세요. 대비전의 마음만 잘 단속하면 걱정할 일도 두려워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안심해도 될까요?”

“이런이런. 고운 얼굴에 주름이 생기겠어요.”

“송구합니다. 다만, 예상과 다른 일을 연거푸 경험하니. 이젠 별것 아닌 일에도 화들짝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럴수록 마음을 가라앉히셔야지요. 작고 하찮은 일에도 이처럼 불안해하시니, 앞으로 종사의 큰일을 맡게 되면 어찌 감당하시려고요?”

문 소원의 은근한 질책에 명선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잖아도 속상한 마음에 질책까지 더해지니.

불퉁가지가 솟구쳤다.

‘천한 것이 제가 뭐라고 훈계더냐?’

지금이야 정4품의 소원의 직첩을 받았다고 하지만 문 소원은 기실 천한 궁녀 출신이었다.

돌아가신 효장세자의 빈궁전에서 연신 어깨를 움츠리던 어린 나인이 운 좋게 주상 전하의 눈에 들어 출세하더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했다.

천한 궁녀 주제에 궁의 법도와 격식이라니.

명선은 속으로 비웃었다.

무릇 근본은 속일 수 없는 법.

아무리 다듬어도 짚신은 짚신이고, 아무리 더럽혀져도 비단신은 비단신이다.

타고난 물건의 가치가 불변하듯, 사람의 천성 또한 변하지 않는다.

타고나길 천하게 태어난 이가 누구에게 훈계며 질책이란 말인가.

온갖 칭찬과 어여쁨만 받으며 자랐던 터라.

명선은 주위의 작은 책망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턱대고 못마땅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어리석지도 않은지라.

그녀는 애써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송구합니다. 급한 마음에 그만 소원 마마 앞에서 괜한 투정을 부렸나 봅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아닙니다. 귀한 아기씨께서 제 투정으로 심기 불편하진 않으실까 걱정이어요.”

문 소원은 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왕자께선 도량이 넓고 깊으니. 아마 다 이해할 겁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왕자라 지칭하는 문 소원의 행태에 명선은 헛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아비가 말하지 않았던가.

문 소원의 품계가 높아지고 임금의 총애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집안에 유리하다고.

주상전하께서 유독 아끼고 귀애하는 정처(鄭妻:화완옹주)를 뒷배로 둔 문 소원이 아니던가.

그 든든한 뒷배 덕에 고작 정4품 소원 주제에 머리에 봉황 첩지를 올리는 무람없는 짓을 자행하고도 별 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 이 순간, 매달리고 애원할 쪽은 문 소원이 아니라 명선이었다.

명선은 얼굴 가득 온화함을 담았다.

“탕약은 입에 맞으시어요?”

“철마다 이리 챙겨서 보내니. 내 이 은혜를 어찌 갚을 것인지. 부담스러우니, 다음부턴 부디 마음만 소중히 받겠다 전해주시어요.”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마마께서 품고 계신 아기씨가 어디 보통 분이십니까? 이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위해 부디 강건한 아기씨를 낳으셔야지요.”

명선의 말에 문 소원은 제 배를 쓰다듬었다.

“그래요?”

무언가 마땅치 않다는 듯 떨떠름한 낯빛을 보이던 문 소원은 다시 입가를 길게 늘였다.

“우리 왕자님이 태어나실 땐 세손빈이 되어 있으시겠군요. 그때는 이리 마주 앉기도 어려울 것인데.”

“어머나,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저를 은혜도 모르는 그런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보지 마셔요. 여인에게도 의리는 있답니다. 세손빈이 된다 하여 제가 어찌 마마께 궁의 법도와 격식을 따지겠습니까. 부디 그 이후에도 절 멀리하지만 말아 주세요.”

“그래도 될까요?”

호호, 두 여인의 웃음이 전각 밖으로 새어나갔다.

얼마 후.

명선이 전각을 떠났다.

가식을 벗은 문 소원이 매섭게 찢어진 눈매로 손님의 빈자리를 흘겨보았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도 상궁이 제 주인의 곁에 바싹 다가갔다.

“무에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몰라 묻는 것이야?”

문 소원은 탕약 그릇을 눈짓했다.

“대제학, 그자는 매번 이런 것만 보내는구나. 이깟 탕약이야 내의원에서 올리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거늘.”

“…….”

“여식을 세손빈으로 만들려는 자의 배포가 어찌 이리 작은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탕약 담긴 소반을 멀리 밀쳐버린 문 소원은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툭하면 징징, 앙알대는 것은 아비나 여식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송구하옵니다, 마마.”

“부탁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려면 무얼 가져와도 제대로 가져와야 할 것이 아닌가? 고작 약 뿌리 몇 개 들고 와선 내내 징징대다 가니. 내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

“대제학이 사가에 무얼 보냈다는 소식은 없느냐?”

“그런 소식은 아니 들리옵니다.”

“청렴한 것은 아닌 듯하고. 아무래도 둔한 것이 틀림없구나.”

“풍문으로 듣자하니 대제학이 요령 없다는 소릴 곧잘 듣는다고 합니다.”

도 상궁의 동조에 문 소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나같이 답답한 작자들뿐이로구나.”

“그래도 대제학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요령은 없어도 운은 좋은 듯합니다.”

“운이 좋아?”

“마마께 이리 잘 보이려 애쓰니, 어찌 운이 좋지 않겠나이까?”

입안의 혀처럼 구는 도 상궁의 말에 문 소원은 깔깔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날 찾는 걸 보니, 요령은 없어도 운만은 제법 좋은 자로구나.”

“눈치가 조금 부족한듯하니, 제가 조용히 따라가 귀띔해주겠나이다.”

“그래, 차라리 그러는 게 좋겠다.”

허락을 받은 도 상궁이 잰걸음으로 처소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 소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경기관찰사라 하였던가? 대체 어떤 계집인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 드는 것이야?”

불길한 기운이 문 소원을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가뜩이나 얼마 전에 도모한 일이 허망하게 끝나버려 마음이 편치 않건만.

동궁전 소속의 감찰 궁녀 은가비.

놀랍게도 음양을 한 몸에 가진 고녀였다지?

대범하게도 궁녀들을 덮친 것으로도 모자라 사건을 세자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세자의 관자까지 훔쳤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 사건을 등에 업고 세자를 흔들려던 계획이 성공을 코앞에 두고 수포로 돌아갔다.

“멍청한 계집. 일을 저질렀으면 잘 숨어 있을 것이지. 고작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추포되어 버리다니.”

그 일만 잘 마무리되었어도 재간택과 같은 사소한 일에 이리 신경 쓸 필요 없었으리라.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도톰하게 솟아오른 배를 쓰다듬었다.

톡.

작은 생명이 어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발차기를 했다.

문 소원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랐다.

왕.

나는 기필코 왕의 어미가 될 것이야.

***

하늘이 흐렸다.

올해는 가을장마가 유난하여 맑은 날이 드물었다.

덕분에 오늘 밤에도 하늘엔 밝은 달 대신 뿌연 달무리만이 가득했다.

“하아…….”

동창에 턱을 괸 이레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세자 저하를 만나 큰 용기를 얻었다.

오빠의 동패가 큰 버팀목이 되었다.

작심한 이레는 할머니와 아버지께 제 뜻을 고했다.

몸도 마음도 준비되지 않았으니, 혼약을 잠시 미뤄달라 청하였다.

뜻밖에도 두 분은 흔쾌히 응하셨다.

이레는 오라버니께서 도와주신 거라 여기며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곧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이레는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재간택 교지가 내려왔다 하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혼인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랄 수 있지만.

재간택이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저 오라버니의 행방이나 알아보려 시작한 일이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이럴 때 할아버지들의 조언이라도 들으며 좋으련만.

하늘은 그녀의 마음처럼 흐리기만 하였다.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이레는 습관처럼 서탁 앞에 앉았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말짱하게 맑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오늘 이리 흐리단 말입니까. 급히 묻고 싶은 일이 있어 그러니, 사정 한 번 봐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서탁 위에 끄적끄적 붓을 움직였다.

-일이 꼬이고 꼬여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스르르.

무심히 쓴 글이 놀랍게도 사라졌다.

“됐다.”

반색한 이레 앞에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무슨 일로 그리 호들갑이냐?

자로 잰 듯 반듯한 필체.

아쉽게도 할아버지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단 게 어디인가.

“불손!”

반가운 마음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불손을 불렀다.

아차.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잠시 동창을 열어 밖을 살폈다.

야심한 시각이라.

듣는 이는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언제 또 흐려질지 몰라 이레는 얼른 서탁 앞에 앉았다.

-불손, 그동안 어찌 지냈습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언제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사람이니. 무에 별다를 일이 있겠느냐?

-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별일 없었단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이 야심한 시각에 어지럽고 혼란한 글로 서탁을 어지럽히는 것이냐?

-가슴이 답답하여서요.

-어이하여?

-제가 사실 간택에 참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불손이 아닌 다른 분이십니까?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냐?

-뭐랄까. 예전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필체는 불손이 분명한데, 느낌은 불손이 아닌 듯하니.”

예전에는 무심함과 차가움이 글 곳곳에 배어 있었다.

무슨 말에도 냉소하고 믿지 않던 불손이 아니던가.

오늘처럼 간택 이야기를 꺼내면, 당연히 백귀가 무슨 간택이냐며 차갑게 비웃었을 터인데.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하던 말이나 마저 해라. 간택이 어찌 되었단 말이냐?

조급함이 느껴지는 필체로 불손이 물었다.

-당연히 초간택에서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재간택 교지를 받고 말았습니다.

-…….

한동안 불손에게선 글이 오지 않았다.

혹, 달이 완전히 사라졌나?

아니었다.

희미하게나마 먹구름 사이로 달의 잔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손.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방금 무어라 했느냐?

-네?

-재간택이 어찌 되었다고?

-오늘 갑자기 재간택에 참가하라는 교지가 궁에서 왔습니다. 당연히 떨어진 줄 알았는데,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분명 재간택 교지가 왔다 하였느냐?

어찌 된 이유에선지 불손답지 않게 흐트러진 필체였다.

“오늘따라 이상한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레는 답을 썼다.

-네. 그리되었습니다.

-…….

또다시 불손은 침묵했다.

-불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불손.

이레가 쓴 글은 어김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보고 있음이 분명한데, 정작 되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손의 반듯한 글씨가 떠올랐다.

-고작 그 이야기였느냐?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구나.

-이것이 큰일이 아니면 대체 뭐가 큰일입니까. 불손, 참으로 섭섭합니다. 남의 일이라고 너무 태평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재간택에 오른 것뿐이다.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는데, 무에 걱정이란 말이냐?

-다시 말하지만 전 재간택에 오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간택에 참여하였지. 그렇다면 간택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 너의 소임이다.

-불손께선 모르시겠지만, 제게 소임이라 칭할 만한 일이 달리 더 있습니다.

“지금 제게 중한 일은 재간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레는 오라버니의 동패를 어루만졌다.

세자 저하의 말씀으로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거늘.

모든 일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도대체 왜 자신을 재간택에 넣은 것일까?

혹시나 싶어 부러 글도 엉성하게 작성하였는데.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무슨 말입니까?

-고작해야 운 좋게 재간택에 오른 것뿐이거늘. 혼란해할 것도 실망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니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불손.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신 것입니까. 저는 간택인이 될 마음이 없습니다. 제겐 달리 긴한 일이 있단…….

이레는 필사적으로 제 뜻을 전했지만, 오늘따라 불손은 자신의 말을 그치지 않았다.

-어리석구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지금 네 소임은 재간택에 임하는 것이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나랏님의 부름은 부모님의 명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어 불손의 크고 선명한 글이 서탁 위를 가득 메웠다.

-전력을 다해 재간택에 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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