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어림없는 소리
“내 사람이니, 권리 운운하는 말은 오히려 내게 더 어울리는 듯한데.”
장무열의 도발.
느긋하게 이어진 그의 발언에 형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형운은 이내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저 낭자는 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이다. 혼사니 매파니 하는 말은 애초에 불가한 이야기다.”
“소식이 늦구려. 허혼령이 내려졌소. 재간택 된 간택인들의 집안엔 교지가 내려졌으니, 교지를 받지 못한 초간택인들은 사실상 혼인을 하여도 아무런 흠이 되지 않게 되었소.”
“……!”
형운은 이레를 돌아보았다.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간택 교지가 내려오지 않았음은 사실입니다.”
재간택 교지가 내려오지 않을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더구나 형운의 정체를 짐작도 못 하였기에.
대답하는 이레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말을 듣는 형운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재간택 교지가 오지 않았다.
무거운 바위 하나가 거칠게 가슴을 내리치는 듯했다.
언젠가 우익위 홍인모가 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은랑은 재간택에 들지 못할 것이니, 마음 두지 말라 하였던가?
그땐 그저 사람 된 도리라, 선물에 대한 답례일 뿐이라 대답하였더랬다.
후회되었다.
제 마음, 정작 저만 몰랐으니.
이제야 비로소 홍인모가 걱정한 이유를 알겠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있으매, 그럼에도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세손이라는 위치가 그러한 것임을.
모든 것을 누리고 가져도 정작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단 하나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도, 가질 수 없음이라.
모두가 지극히 우러러보는 세손의 자리가.
화려한 용포가 뜻하는 숙명과 비극이 무엇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래,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때 인정하고 깨달았어야 했다.
다만, 그것은 홍인모의 말처럼 마음 주지 않기 위함이 아닐지니.
내 것을…….
내 사람을…….
은랑을…….
이레란 이름의 제비꽃 여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니.
온전히 내 품에 가두기 위함이니.
미리 손을 썼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일찌감치 계획을 세워두었어야 했다.
안일하였다.
매사에 넘치도록 준비하고 대비하였건만.
정작 운명의 중요한 순간을 깨닫지 못했다.
가슴을 관통한 알싸한 상실의 격통이 형운을 뒤덮었다.
“무슨 의도로 우리 사이에 나선 것인지 몰라도, 그만 물러나 주시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 같소.”
때마침 들려온 장무열의 음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형운의 마음에 불을 댕겼다.
저자가 지금 우리라 하였나?
감히 이레를 두고 우리 사이라 하였는가?
“……어림없는 소리.”
“무어라 하였소?”
형운은 푸른 불꽃이 이는 눈으로 장무열을 노려보았다.
순간,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던 또 다른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도 없다 하였다. 누구 허락을 받고, 감히 내 사람을 놓고 우리 사이 운운하는가!”
그 활화산처럼 뜨겁고 강렬한 눈빛에 장무열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은백이라 하였던가?
사람이 이리 돌변할 수 있을까.
좀 전까지는 호수처럼 맑고 청수한 선비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 격정과 혼란이 담겨있긴 하였어도, 정작 눈빛만큼은 작은 파문 하나 일지 않았다.
극도로 정련된, 불길과 망치질로 수없이 담금질하고 두드려 그 어떤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완벽한 형태를 이룬 듯 느껴졌었다.
귀한 난꽃처럼 고귀한 품위와 끝없이 펼쳐진 해무 같은 신비로움을 동시에 지닌 사내.
정중동(靜中動)의 극치를 보는 것만 같은 차가움을 간직한 자였건만.
그러하였던 사내가 일순간에 변했다.
절대로 부서질 것 같지 않던 금강석 같은 단단한 껍질을 부수고, 그 속에서 뜨거운 심장과 타오르는 열기를 가진 광기의 화신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람의 몸에 어찌 이처럼 이질적인 기질이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장무열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은자원의 은백이 대체 무슨 사연으로 저 여인을 내 사람이라 칭하는지, 무슨 권리로 양가의 합의를 막는다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장무열의 눈빛이 깊어졌다.
강한 기질, 타오르는 소유욕.
제 것이라면 티끌 하나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과 승부욕이라면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명분이라면 오히려 이쪽에 더 있지 않은가.
“적반하장이 따로 없군. 양가의 혼사에 어찌 은백의 허락이 필요할까.”
“매파가 오간다 하여 혼사가 이미 끝난 것은 아닐 터. 당장 내일 일도 짐작할 수 없거늘, 어찌 사람의 일생을 확정한단 말인가.”
“영문 모를 소릴 하는군. 무슨 마음으로 남의 혼사에 끼어드는지 모르나, 괜한 트집은 이쯤 하였으면 하오. 서로 불편해질 뿐이니 말이오.”
“과연 괜한 트집일까?”
“이 사람은 지금껏 목표한 것을 단 한 번도 놓친 적 없소.”
“안타깝군.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형운과 장무열의 드세고 찬 눈빛이 맞부딪혔다.
창보다 날카롭고 벼린 칼날보다 매서운 시선이 허공 중을 나뒹굴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이레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일순, 두 사내의 시선이 이레를 향했다.
“어디 가시오?”
“왜 일어나는 것이오?”
형운과 무열의 마음이 처음으로 일치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이레가 손을 들어 보였다.
“송구하오나, 두 분 싸우시는 데 전 방해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두 분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레는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
닫힌 문을 바라보는 두 사내의 표정이 망연자실해졌다.
***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듯했다.
두 사내에게서 벗어난 이레는 외조모가 계시는 안채가 아닌 조용한 뒤꼍으로 향했다.
그곳엔 어린 시절, 그녀가 곧잘 찾았던 너른 바위가 하나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이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턱을 괸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흘러가는 밤하늘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무한히 펼쳐진 밤의 화선지 위엔 오로지 검고 흰 존재뿐이라.
서로의 구별도 밝고 어두움의 차이니, 마치 능숙한 화공이 조절한 농담(濃淡)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밤하늘이야말로 하늘이 그린 수묵화가 아니던가.
할 수만 있다면, 저곳에 글을 쓰고 싶다.
그렇다면 이 밤.
혼란스러운 이 마음.
조금은 다스릴 수 있게 될 지도 모를 터인데.
아! 아니구나.
달.
너만은 푸른 빛이 감도니.
무채색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존재로구나.
생기 잃은 사자(死者)의 세상에서 오롯이 생기를 머금었구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레는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멀쩡한 밤하늘이 서탁으로 보이니, 나도 참 단단히 빠졌구나.”
중독된 모양이다.
상 할아버지께서 이따금 ‘내 이놈의 서탁질을 끊어야지.’라고 하시는데, 오늘만큼은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능히 실감할 수 있었다.
“웬 한숨이냐?”
나직한 음성이 찬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이레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숲을 걷는 백호(白虎)처럼, 거침없고 당당한 걸음.
절대 이런 곳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존귀하신 분.
궁 안, 그곳에서도 깊고 가장 농밀한 곳에 계셔야 할 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 세자 저…….”
인사를 올리려는 찰나.
세자가 제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그만두어라. 내가 이곳에 있음은 비밀인즉.”
이레는 엉거주춤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법도대로라면 마땅히 예를 보여야 함인데, 정작 세자 본인이 거부하니.
갈등하던 이레는 허리를 깊게 숙이는 것으로 예를 대신했다.
그 대응이 적절하였던지, 아니면 그분의 성품이 넉넉하였는지.
세자는 털털하게 웃으며 이레가 앉았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 아프겠구나. 너도 앉아라.”
“…….”
“그쯤 하였으면 충분히 어려워하였다. 아니면 내가 널 올려다보길 바라는 게냐?”
이레는 별수 없이 세자가 권하는 대로 조심스레 앉았다.
석 자 간격.
조금은 먼 거리.
하지만 두 사람의 신분을 생각하면 턱없이 가까운 간격이었다.
세자가 물었다.
“사는 곳이 이곳이 아닌 줄 아는데?”
“외가댁입니다. 외조모께서 청하시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레를 외조모께서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으셨다.
몇 해 만에 본 이레를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친척들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소맷자락을 잡으셨다.
할머니는 갈등하는 이레에게 이곳에 머물라 허락하셨다.
그러곤 본인은 미련없이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로 인해 이레는 서탁을 그리워하며 심란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레도 묻고 싶었다.
궁궐에 계셔야 할 분께서 이곳엔 웬일이시냐고.
하지만 감히 여쭐 수는 없었다.
세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무척 선연하구나.”
“달은 늘 아름다운 듯합니다.”
“그래. 한데, 저리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어찌 한숨이었더냐?”
“고민거리가 있어 그렇습니다.”
“허어, 약동하는 젊음에게 어찌 고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저 즐겁고 넘치는 생동감만으로도 곱고 아름다운 때이거늘. 과연 무슨 고민으로 밤잠을 못 이룰까?”
“…….”
“뭐가 문제더냐?”
“…….”
“사내 문제로구나.”
“……!”
정곡을 찌르는 세자의 말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뒤늦게 머리를 숙였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세자 저하의 용안에 서린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반응을 보니 맞는 모양이구나.”
“…….”
이레는 말없이, 그러나 작게 머리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수줍게 고개 숙인 그녀의 귓가에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하였지만, 말하는 속도는 조금 빨라졌다.
“그래, 무슨 일인고?”
주저하던 이레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열병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따금 예기치 않게,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넋을 놓고 딴생각에 잠기면 문득 그 사람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거쳐 가는 열병이로다.”
“하오나 제 집안이 원하는 상대는 달리 있은즉, 어지럽고 번민 가득하여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을 훤히 보여주는 이레의 모습을 세자는 잠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만약 이레가 고개를 들어 세자의 얼굴을 보았다면 놀랐으리라.
그의 표정이 전에 심각했던 탓이다.
“결국, 너 자신과 가문의 바람이 달라 생기는 번민이란 말이렷다?”
세자가 몸을 일으켰다.
뒷짐을 지고 달빛 아래를 천천히 거닐었다.
“망할 놈의 굴레로고.”
돌연, 세자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그는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과 싸우듯 성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놈의 법도와 절차는 왜 그리 성가신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이 어찌 그리 많은지. 정녕 그리 옥죄고, 누르고, 가둬야만 바른길로 간단 말인가. 남이 간 길을 막연히 따라가는 것만이 과연 옳은 일이냐, 이 말이다.”
이레는 놀란 눈으로 세자의 돌변한 모습을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 거친 욕과 세상을 향한 험담을 섞어 중얼거리던 세자가 이레를 돌아보았다.
“아이야.”
좀전의 흥분이 거짓말인 듯,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네.”
“네 오라비는 팽례였다. 동패 하나만 믿고 이 넓디넓은 천하를 비좁다 여기고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활보하였느니.”
“…….”
“지금 네 오라비는 없지만, 그의 동패는 너에게 있질 않으냐.”
어찌하라, 내 생각은 이렇다.
세자는 그 어떤 강요나 조언도 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말은 하나 없었다.
세자는 그저 오라비와 동패 이야기를 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가 주는 깨달음은 컸다.
내 인생의 길잡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
집안에 휘둘리고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마냥 걷지 마라.
내가 걷는 길이 옳은 길이고, 바른길이 될 것이니.
찾아라.
너의 길이 어디인지 찾아보아라.
세자의 말속에 숨은 속내를 짐작한 이레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큰 가르침 감사합니다.”
세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가르침이라니. 난 그저 네 오라비 생각이 나서 한 자락 건넨 것뿐이니. 오히려 네가 있어 내 적적함을 덜 수 있었구나. 그래,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느냐?”
“네. 미약한 제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고 궁리하고 이루려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인 이레는 세자의 허락을 얻고 자리를 떠났다.
가는 동안 이레는 소매 속의 동패를 만지작거렸다.
그 단단한 쇠붙이의 느낌이 든든했던 오라버니를 떠올리게 하였다.
***
홀로 남은 세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재간택이라. 잠시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저 아이의 일이 어긋나버렸구나.”
가을이 깊어진 탓인지.
지면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제법 찼다.
그럼에도 세자는 추운 기색 하나 비치지 않았다.
“빈궁의 청으로 걸음한 곳에서 뜻하지 않게 저 아이를 만나게 되었으니.”
친정과 관련한 일이라면 먼 일가붙이의 일까지도 살뜰히 챙기는 빈궁이었다.
적막한 구중궁궐.
그저 세자 하나만을 보고 살아가는 빈궁에게 지아비 노릇 해줄 것은 청하는 것을 들어 주는 것뿐.
오늘 환갑연도 그런 연유로 걸음 한 길이었다.
문득 달을 올려다보던 세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벗이여, 그대가 부린 조화인가?”
묻는 것도 세자요, 대답 역시 세자가 하였다.
“그간 훔쳐보기만 하였으니. 오늘은 그간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라 이것인가? 어떠한가? 지난번 동궁전에 소란도 떨어주고 오늘 고민도 들어주었으니, 이것으로 부채가 조금은 감해졌겠지. 안 그런가?”
세자는 먼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달.
칼로 벤 듯 선명한 달이 뜬 어느 날.
금강산으로 먼 원행을 떠났던 세자는 환궁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들려온 범의 거친 포효에 흥취가 인 건 호승심 강한 그의 성정 탓이리라.
대체 얼마나 거친 놈이기에 저리 요란하게 울음을 토해내는 것일까?
세자는 그림자처럼 따르던 호위마저 제쳐 두고 산을 탔다.
그곳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뜻과 의견이 오래 사귄 친구처럼 어긋남이 없었다.
마음이 크게 동하여 나이와 신분을 넘어 의기투합하였다.
밤새 술을 나눴고, 헤어질 때 징표로 서탁까지 건넸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세자는 달을 보며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보게. 기왕 조화를 부릴 것이면, 더 크게 인심 쓰는 게 어떻겠나? 보기만 하고 답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군. 예전처럼 다시 말하게 해주게. 언제쯤이면 되겠는가?”
세자의 외로운 혼잣말이 유성이 되어 밤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 듯 제자리를 서성이던 세자는 잠시 후 걸음을 옮겼다.
궁으로 향하는 세자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 자식에겐 이 외로움, 대물림하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서…….
뒤틀어진 계획을 바로 잡아야 했다.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돌덩이처럼 무심해지는 세손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 감정이 생기는 것을…….
그 마음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참에 아비 노릇 제대로 해 주어야지.
왕세자의 얼굴에 씨익, 웃음이 걸렸다.
***
이른 새벽.
대궐 문이 열리기 무섭게 예조판서와 호조판서를 겸임한 우의정 정홍순이 입궐하였다.
급한 듯 의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는 세손빈 간택을 위해 마련된 가례도감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인가?”
물어보는 정홍순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거칠었다.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이 정해지면 가례도감이 세워진다.
삼정승 중의 1명이 제조를 맡고, 그 밑으로 부제조 3명과, 정1품의 정사(正使) 1명, 정2품 부사(副使) 1명 등 여러 관원이 가례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세손의 경우는 도제조가 없고 예조판서와 호조판서가 당연직으로 들어가고 6명인 낭청 역시 3명으로 한정되었다.
비록 인원은 줄어드나, 그 격식이나 예법은 왕이나 왕세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중한 규율과 절차가 엄연히 존재하니, 줄어든 인원만큼 할 일은 더 많아지는 법.
그 부담은 가례도감에 소속된 관원들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사흘 후로 다가온 재간택일 일정으로 그야말로 하루를 한 달처럼 바쁘게 보냈다.
그제 밤에야 모든 일을 끝내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정홍순에게 갑작스러운 호출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정홍순의 사나운 눈빛은 금세 온순해지고 말았다.
가례도감의 집무실 가장 상석에 영의정 신만과 우의정이자 판돈녕부사 홍봉한이 자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두 분 대감께서 예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예조판서 정홍순이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그대를 이 이른 시간에 불렀으이.”
수염을 쓸어내리는 영의정 신만은 특유의 호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홍순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조정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영의정과 우의정이 함께 나선 걸음이니.
세손빈 간택과 관련한 무에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재간택이 쉬이 결정되지 않았던 터라.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삿된 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며칠 전, 대비전에서 재간택 교지가 내려지고, 재간택일마저 정해졌다.
잠시 여유가 생겼다며 한숨 돌리려던 참이건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음이 영 뒤숭숭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영의정 심만의 주름진 두 눈이 정홍순을 향했다.
“지난밤, 하궐에서 조용히 나를 부르시었네.”
예조판서 정홍순은 굽은 목을 들었다.
“하궐이라면…… 세자 저하 말씀이옵니까?”
“그렇다네.”
“그분께서 왜?”
“이번 세손빈 간택과 관련하여 민심이 흉흉하다며 다시 한 번 잘 살펴보라 명하셨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미 세손빈 되실 분을 정해 놓고 다른 간택인들을 병풍으로 내세우는 짜고 치는 놀음이라는 소문이 사대부는 물론이고, 저잣거리에마저 파다하게 퍼졌다고 하시네.”
“그런 절차는 이미 관례처럼 행해오던 것입니다.”
정홍순의 말에 우의정 홍봉한이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절차상 필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으나, 그분 말씀도 틀리지 않으니. 실제로 그런 일로 일부 사대부 집안에서 불만이 있었다네.”
“이번 일은 많은 관료가 오랜 시간 숙고하여 내어 놓은 결과입니다. 주상전하께옵서도 아무 말씀 없으시니, 조용히 넘어가심은 어떠한지요?”
정홍순의 말에 신만은 언짢은 듯 험험 헛기침을 하였다.
물색없이 태평한 그의 의견에 우의정 역시 제 가슴을 쳤다.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면 이 이른 시간부터 우리 두 사람이 예까지 걸음하였겠는가.”
신만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예판도 알 것이 아닌가. 세자께선 과묵하고 위엄 넘치시나, 관심 가진 일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끝을 보는 성품이신 것을. 그분께서 친히 이 일을 언급하였으니, 조금의 흠이라도 있어선 아니 될 것이네.”
신만이 정홍순을 흘끗 보며 물었다.
“예판, 그대는 과연 그분의 삼엄한 시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세자를 떠올린 정홍순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께선 화도 많았지만, 눈물 또한 많은 분이셨다.
온화한 중에 날카로움을 품어 어르고 달랜 후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끝내 내치셨다.
그에 반해 세자께선 꼭 필요한 말만 하였다.
대신 한 번 입 밖으로 낸 일은 어떻게든 관철하려 하였다.
그분께서 작심하고 살피시면 어찌 작은 흠 하나 발견하지 못할까?
“그럼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눈을 감은 채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댄 영의정이 한참 만에 눈을 떴다.
“그분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계획을 조금 수정할밖에.”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가문과 배경, 혈통을 배제하고 가감 없이 간택인들을 재평가하면 될 것 아닌가? 기존에 교지가 내려진 간택인들은 그대로 두고, 교지를 받지 못한 간택인 중에 괜찮은 이를 하나둘 뽑아 올리면 주위의 잡음도 가실 것이고, 그분의 명에도 호응하는 것이니.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일세.”
영의정의 말에 정홍순은 울상이 되었다.
“재간택일이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교지를 새로 발부하는 과정과 시간은 차치하고, 그렇게 선정된 간택인이 먼 지방에 있으면 제때 교지를 전할 방법이 없습니다.”
재간택일은 육조를 비롯한 궁 안의 모든 조직이 관여하고 상서로운 날을 잡아 정한 날이라.
편의대로 쉬이 바꿀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내내 뒤로 물러나 있던 홍봉한이 나섰다.
세자빈이 아비이자, 우의정이며 또한 주상전하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홍봉한은 조정의 실세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대체 무슨 말이 나오려나?
정홍순은 마른침을 삼키며 홍봉한을 응시했다.
이윽고 홍봉한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