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48화 (48/215)

#48. 내 사람

잿빛 어둠이 씨앗을 뿌렸다.

움트기 시작한 밤은 금세 사위를 짙게 물들였다.

집집마다 굴뚝 위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낟알을 익혀 배를 불리는 일은 빈부와 상하를 따지지 않았다.

권문세가가 모인 북촌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 집에서 피워낸 기름내가 유난하였다.

회갑연이 한창인 이레의 외가였다.

평소의 인품을 말해주듯, 저녁 무렵임에도 먼 곳에서 축하하러 오는 사람들로 문턱이 몸살을 앓았다.

손님들을 대접하는 집안 여인들의 손길은 잠시의 쉴 틈 없이 분주했다.

같은 시각.

재간택인들이 모인 별당은 다른 이유로 소란스러웠다.

정오 무렵까지의 차분했던 분위기완 사뭇 다른 정경이었다.

고고한 눈빛과 기품 있는 태도, 그리고 고상한 말본새까지.

재간택 교지를 받아 마땅한 여인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그들이 자아내는 품격은 또래에게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아했다.

그랬던 재간택인들의 모습이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돌변했다.

장무열.

대사헌이 늦은 나이에 얻은 차남이자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학식으로 도성 여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사내.

그 사내의 등장으로 별당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사내가 찾은 한 여인 때문이었다.

명선은 차분한 낯빛으로 차를 마셨다.

그러나 평온한 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겉모습뿐.

깡마른 내부에선 벌건 불씨가 하염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화기가 당장에라도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기세라.

끊임없이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두 가문의 약조를 배신한 것은 자신이었건만.

언제까지고 손만 내밀면 닿을 곳에 있을 듯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했다.

잊자.

잊어버리자.

그러나 의문과 의혹은 아무래도 떨쳐낼 수 없었다.

‘그가 왜 그 아이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녀가 아는 한 장무열과 이레 사이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장무열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그의 조부는 예조와 형조, 병조를 거쳐 좌의정과 우의정까지 두루 역임한 명망가였다.

또한, 장무열의 아비인 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으로 성 안팎의 규율과 법도를 단속하는 위치인지라.

그 지위와 권세가 삼정승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조정 안팎의 범죄를 수사하고 각 부처의 비리를 감시하는 곳이라.

관직에 적을 둔 자라면 누구라도 대사헌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레 아비의 직책은 경기관찰사.

듣자하니 그 관직도 여식을 간택에 내보내기 위해 문중에서 허겁지겁 마련한 자리라 하였다.

명월과 반딧불만큼이나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격차였다.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장무열에게 있었다.

한양 사내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잘난 사내, 장무열.

뭇 여인들이 보이는 관심의 중심에 선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찾은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 여인이 이레라니.

재간택으로 하늘 모르고 치솟은 자존심이 처참하게 짓뭉개졌다.

공들인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세손빈이 될 몸이니.

그깟 사내 무슨 상관일까.

곧 범상한 자들이 사는 하계를 떠나, 지상에 펼쳐진 낙원의 주인 될 귀한 몸인 것을.

하나, 아무리 자위하고 달래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무열.

명선의 태중 혼약자.

어린 시절, 우연히 몇 번 스치듯 마주치긴 하였으나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랫것들이 속닥질하길, 제법 훤칠하고 번듯한 사내라는 말만 들었더랬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내는 번듯한 정도가 아니었다.

왜 여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지, 어찌하여 이 넓은 한양에서 세 손가락에 안에 드는 사내라 일컬어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툇마루를 넘어 방으로 성큼 들어서는 그를 본 순간, 명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넋을 잃고 그를 보는 다른 여인들의 마음을 그녀 역시 동감할 수 있었다.

여인들만 있는 별당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그 당당함에 한순간 혼이 빠졌더랬다.

곧, 경이와 부러움으로 가득한 시선들이 그녀에게 짓쳐들어왔다.

짧은 순간, 우월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느니.

바로 저 사내가 나와 태중 혼약한 그 사내이니.

운명의 부름에 슬픔을 머금고 저토록 황홀한 사내를 떨치고 가야 하는 나는 그야말로 숙명을 어깨에 진 가련한 여인이로다.

너희와는 태생이 다른 사람이다.

자부와 오만함이 그녀의 등을 절로 꼿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장무열이 향한 곳은 그녀가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자존심을 긁은 것은 그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분명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장무열은 그 흔한 눈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철저한 외면과 무시였다.

그것이 그녀를 분노케 했다.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대체 뭐라고.

그때, 다른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사내, 그 여인을 왜 찾은 걸까요?”

장무열과 이레가 별당을 떠나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여전히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난들 아나? 평소에 관심이 있었다거나…….”

누군가 명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태중 혼약한 정인이 있는데 말이오?”

“그거야 부모님이 정한 것이니, 그 사내 마음은 다를 수도 있지. 게다가 혼약한 사람이 재간택까지 들었으니…….”

저희끼리 소곤거리며 하는 말인데, 명선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와 그 속에 실린 비웃음까지 또렷하게 전해졌다.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명선은 냉소를 흘렸다.

“글쎄, 과연 그런 것일까?”

수군대던 여인들의 시선이 명선에게 모였다.

***

자신을 향한 시선을 즐기듯 명선은 눈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천천히 빈 찻잔에 차를 따라, 향을 음미하고 가볍게 한 모금 삼켰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다들 모르는 모양인데. 그 사내, 사헌부의 장령이라네.”

“사헌부면 어사대 말이오?”

“그렇지. 죄지은 자를 조사하고 문초하며, 비리를 캐내는 일을 하는 사람.”

“그렇다면…….”

물어보는 여인들의 음성에 옅은 긴장감이 깃들었다.

명선은 부러 느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사람, 이곳에 들어올 때의 분위기를 생각해보게. 그 표정이 어디 연모 따위를 고백할 얼굴로 보이던가?”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장무열의 눈빛과 낯빛은 찬 서리라도 한 겹 두른 듯 차가웠다.

“어쩌면 지금쯤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그에게 문초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 너무 과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혼잣말 아닌 혼잣말인지라.

여인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시작된 비밀 연애.

금단의 사랑.

태중 혼약한 여인과 진실로 사랑하는 여인 사이의 방황.

장무열과 이레를 두고 여인들은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그들의 머릿속과 주고받은 대화 속에 담긴 봄꽃처럼 아름답고 단풍처럼 화려한 상상은 명선의 이야기로 인해 차갑고 비정한 현실의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여인들은 더는 감미로운 연모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사기, 비리, 뇌물, 빚, 뒷거래, 역모…….

좀 더 현실적이며 참혹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이레의 죄보다 주로 그녀의 아비와 가문이 지은 죄일 거라는 구체적인 추측이 나왔다.

한 번 흐름이 비틀리자 여인들은 금세 새로운 흐름에 맞게 모든 정황을 재구성하였다.

시간 좀 내어 달라던 장무열의 무뚝뚝한 말과 그의 청을 거절하던 이레의 태도.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명선은 입가에 말간 미소가 돌아왔다.

질투와 반발심으로 저도 모르게 한 말이지만, 생각해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아무런 접점도 없는 두 사람을 결부시키기엔 아무래도 연모 타령보다는 가문의 비리 쪽에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아무렴. 틀림없이 그런 것일 터.’

명선의 눈매가 가늘게 여며졌다.

입가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여유를 머금었다.

그렇게 명선은 그녀만의 고상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간 유경이 돌아올 때까지는…….

“나타났습니다. 나타났단 말입니다.”

이레를 찾아 밖으로 나갔던 유경이 호들갑스레 별당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어가 나타났단 게요?”

“조금 전에 말한 한양에서 가장 유명한 세 사내. 그중 한 명이 나타났소.”

“그 사람이라면 아까 별당을 다녀가지 않았소?”

유경은 답답한 마음에 제 가슴을 두드렸다.

“이레 언니와 나간 그분 말고요.”

“그럼 또 한 명이 나타났다는 말이야?”

“누군데 그러오?”

“고작 서너 번만 모습을 보였다는 신비 공자. 바로 그 사내가 틀림없어요.”

재간택인들 사이에 소요가 일었다.

“그게 사실이오?”

“직접 본 사람이 많지 않다던데. 그 사내가 신비 공자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손님 중에 직접 그 사내를 본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어요. 그 사람이 말해주어 알게 되었어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실로 대단한 일이 아니요. 한양 최고의 세 사내 중 두 사내가 이곳에 온 것이니. 오늘이 길일 중 최고의 길일인 모양이오.”

뜻밖의 소식에 여인들은 놀람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 사내, 누구요? 대체 어느 댁 도령이라 하오?”

“생김은 어떻소? 소문대로 잘생겼소?”

유경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명불허전. 나도 먼발치에서 보아 제대로 보진 못하였으나, 멀리서도 고귀한 귀태를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오.”

“또 뭐가 남았단 말인가?”

“놀라지 마시어요. 그 사내, 신비 공자가 찾아온 사람이…….”

유경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바로 이레 언니였어요.”

“경기관찰사의 여식 말이오?”

“맙소사. 그럼, 세 사내 중 무려 두 명이 그 여인을 찾아온 것이오?”

“대체 그 여인에게 무슨 사연이 있기에.”

“입고 걸치는 입성부터 교꾼에 호위까지. 무엇하나 범상한 게 없다 하였더니.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게로군.”

여인들은 놀라운 소식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명선이 뿌린 잿가루는 이미 무의식 너머 먼 곳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한양 최고라 불리는 두 사내와 이레의 모습이 여인들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대체 무슨 사연일까?

어떻게 그들을 만나게 되었을까.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펴느라 정신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으음.”

명선은 불편한 헛기침을 참지 못하였다.

“어째서…….”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아득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녀의 자존심이 부서지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

환갑연이 한창인 집 안으로 들어서는 대문 근처의 행랑방.

좁디좁은 방 안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여인과 두 사내.

형운과 장무열, 그리고 이레였다.

문밖은 흥겨운 잔치가 한창이건만, 방 안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형운은 눈을 감고 있었다.

골이 깊게 새겨진 미간이 잔뜩 언짢은 그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하였다.

장무열 또한 짙은 검미를 세우고 있었다.

이레에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 사람…… 내 사람이라…….”

무열은 형운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그가 이레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사내와는 어떤 관계요?”

이레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은백은 그녀에게 있어 어떤 사람일까?

오라버니와 같은 곳에서 함께 일하시는 분?

오라버니 찾는 일을 도와준 은인?

어쩌다 같은 곳에서 함께 일하게 된 동료?

그것도 아니면…….

그녀 스스로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타인보다 가깝지만, 혈육보다 먼…….

그 미묘한 위치를 딱히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은자원의 은랑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만 있다면 무어라 얼버무릴 수라도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상대가 장무열이라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은백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위치일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려나.

때마침, 형운의 입이 열렸다.

“내 사람이다.”

쐐기를 박는듯한 말이었다.

이레는 멍하니 형운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엄청난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장무열이 나섰다.

“내 사람이라. 같은 말을 또 하는군. 대체 그 내 사람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정확한 뜻이 무엇이오?”

“내 사람이니 내 사람이라 하였다.”

형운은 감은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당황한 이레의 모습이 담겼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 형운은 각인하듯 말했다.

“그 외에 또 달리 무어라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레의 놀란 표정이 박히듯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 크게 벌어지고 하얀 손이 입을 가렸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여태 본 것은 차분한 표정과 슬퍼 눈물 흘리는 광경.

씁쓸한 미소.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뿐이었는데.

저리 화들짝 놀란 표정도 지울 줄 알았구나.

지금의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겠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말하는 그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형운의 뇌리엔 좀 전에 본 장면들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자빈이자 그의 어머니의 먼 일가에 환갑연이 있다 하였다.

하여, 어마마마를 대신하여 선물을 전하러 온 참이었다.

세손이 아닌 그저 한 어미의 아들로 나온 걸음이라.

번잡한 의식과 예는 생략한 채 평범한 사대부의 모습을 하였다.

조용하고 단출한 인사와 선물이 오가고 다시 환궁하려던 형운의 눈에 이레의 모습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환상을 보았나, 제 눈을 비비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사한 하얀 얼굴.

유난히 검고 유난히 붉은 입술.

여린 듯 여리지 않은 당찬 모습은 분명 이레였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았을까.

이유가 무엇이건 반가웠다.

그러나 설렘 가득한 기쁨은 잠시에 불과했다.

이레의 뒤를 바짝 뒤따르는 키 큰 사내.

사내를 본 순간, 형운의 표정은 낮게 가라앉았다.

저자, 장무열이라 하였다.

다짜고짜 은자원에 들어오겠다 엄포한 사헌부의 장령.

그가 어째서 은랑의 뒤를 따른단 말인가?

살얼음이 부서지듯, 뾰족하게 부서진 불편한 감정의 파편이 형운의 속을 긁어댔다.

그 와중에 장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더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사람.’

결국,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뱉고 말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다.

바람직하지도 않았고, 순리도 아니며, 도리에도 맞지 않건만.

그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내어놓으니, 이상하게도 불편했던 속이 청량해졌다.

내내 거북했던 묵은 체증이 일순간에 사라진 느낌.

그리하여 형운은 장무열에게 따지듯 물을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그대, 무슨 권리로 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인가?”

시퍼런 칼날만큼이나 직설적인 형운의 물음에 이레가 되레 당황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이분은…….”

그때, 장무열의 목소리가 이레의 말을 끊었다.

“권리라. 그것이야말로 내가 묻고 싶은 소리로군.”

장무열의 태연한 모습에 형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 말인즉, 그대에게 내 사람에게 치근거릴 어떤 권리라도 있다는 뜻인가?”

“있다면 있다고 할 수도 있고.”

“무엇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려.”

장무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낭자와 우리 집안은 혼사가 진행 중이라오. 이미 내 집안에서 낭자의 집에 매파까지 보냈소. 그러니…….”

장무열이 짧고 분명한 어투로 찍어 누르듯 말했다.

“내 사람이니, 권리 운운하는 말은 오히려 내게 더 어울리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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