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싫습니다
가을 햇살은 온화했다.
그 따스한 온기는 한적한 후원에도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선 이레의 얼굴은 한겨울을 맞은 사람처럼 잔뜩 얼어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선 사내 때문이었다.
“청을 들어주어 고맙소.”
사내는 고마움을 표했다.
분명 고맙다는 의사 표현인데, 정작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워낙 차갑고 사무적인 말투여서, 마치 협박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이레의 지금 심정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장무열이었기 때문이다.
한양 최고의 세 사내 중 한 사람.
재간택인들은 장무열이 찾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레를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누군가 지금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을 한 명을 대라면 그녀는 주저 없이 장무열의 이름을 댈 것이다.
가장 대면하기 어려운 사람을 꼽으라 해도 다시 한 번 장무열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떠올리리라.
사헌부의 장령이자 어사 장무열.
궁녀들에게 벌어진 불미스런 사건을 파헤치는 와중에 본의 아니게 여러 번 이레와 마주친 인물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장무열의 시선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이레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먼 허공으로 돌렸다.
행여 간택인 신분인 이레가 자격도 없이 수사에 나선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일이 간단하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이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자 저하의 용인과 암행대의 어사 서강율의 부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일인지라.
장무열은 은자원의 은랑에 대해 집요한 관심을 보여더랬다.
실제로도 그녀를 수상히 여긴 장무열은 여러 차례 조사하려 시도했다.
심지어 미행을 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장무열과의 만남이 달갑지 않은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어쩔 수 없이 장무열과 단둘이 어색한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명선을 비롯한 재간택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버티기 힘들었고, 두 번째는 도무지 물러날 생각을 않는 장무열의 집요함 때문이었다.
이런 편편찮은 사정으로 이레는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사내와 함께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장무열을 곁눈질로 살피던 이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와 마주친 횟수를 따지자면 최근의 은자원까지 포함하여 모두 네 번.
그중 거리에서 만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얼굴에 짙은 너울을 쓰고 있었다.
주근깨 궁녀와 몸싸움이 있었던 때도 쓰개치마를 깊게 눌러쓴 터라 얼굴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눈치가 귀신 같은 사내이니, 방심할 수 없었다.
“이미 소식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오만…….”
장무열은 낮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소식이라는 말에 이레는 뇌리로 별의별 생각들이 다 스치고 지나갔다.
외할머니의 환갑과 관련한 이야기이려나?
어쩌면 명선에게 전할 소식일지도 모른다.
직접 전하기 어려워 자신에게 대신 부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이레는 차라리 그런 이야기이길 빌었다.
저 붉은 입술 사이로 ‘그대가 누구인지, 무얼 하였는지 명명백백 다 밝혀내었으니, 조사를 위해 추포하겠소.’ 같은 소리가 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정작 이어진 장무열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매파가 그대의 집을 다녀갔다 들었소.”
놀람으로 이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내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나, 그대의 가문과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건 바로…….”
설마, 이 사내란 말인가?
이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형님이오.”
아,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이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적어도 이 사내는 아니었구나.
그러나 곧 안심할 일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가 바뀐 것뿐.
혼담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레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더불어 의문도 생겼다.
자신의 일도 아닌 제 형의 일에 굳이 이 사람이 나선 이유가 뭘까?
궁금증이 얼굴에 고스란히 떠오른 탓일까?
장무열이 곧 답을 내놓았다.
“내 형님과의 혼담, 파기해주면 안 되겠소?”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무열은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칫하던 이레도 그 뒤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수표교 근처의 장터였다.
대낮임에도 장터는 장사치와 물건을 구하는 사람으로 가득 붐볐다.
장무열은 장터 한구석으로 이레를 안내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립시다.”
도무지 영문을 모를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무열은 입을 꾹 다문 채 거리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한 식경이 흘렀다.
막연한 기다림에 지루해질 무렵.
불콰하게 취한 젊은 사내가 장터에 나타났다.
순간, 장무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미미한 반응을 이레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껏 장무열이 기다린 사람, 분명 저 술 취한 젊은 사내이리라.
사내는 대낮부터 많은 술을 마신 듯, 걸음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그렇게 행인들과 사정없이 부딪히며 비틀대던 그가 포목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심한 욕설과 함께 포목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점포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 나온 술 취한 사내가 그 위에 올라타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워낙 많이 취한 터라.
비틀거리는 주먹은 엉뚱한 곳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포목점 주인은 어렵지 않게 술 취한 사내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보복이라도 하련만, 포목점 주인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술 취한 사내는 두렵지 않지만, 그의 배경은 두려웠던 까닭이었다.
상대를 잃은 취한 사내는 그 후로도 한동안 씩씩대며 포목점 주위를 뒤지고 다녔다.
사내에게서 내내 시선을 떼지 않던 장무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내 형님이오.”
“…….”
이레는 말없이 장무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취한 사내가 장무열의 형일 것은 이미 짐작하였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왜 장무열이 자신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형이 어떤 인성을 가진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이런 사내이니 그 마음 곱게 접으라 권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장무열은 이번에도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이 또 어딜 가는군요. 따라갑시다.”
“어딜 또 간단 말입니까?”
“낭자가 꼭 봐야 할 것이 있소.”
***
대사헌의 망나니 큰아들.
도성의 소문난 무뢰한인 장선제는 기실 동생인 장무열 못지 않은 수재였다.
그런 장선제가 지금처럼 술에 찌들어 살게 된 것엔 말 못할 사연이 숨어 있었다.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 장선제는 장터 외곽의 허름한 초옥으로 향했다.
다 쓰러져가는 초옥 근처에 이르자 장선제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주위를 살피고 담벼락에 바싹 몸을 숨긴 채, 내부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 행동이 좀 전까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사내라고 믿기지 않았다.
잠시 후, 가옥의 비틀어진 문이 열렸다.
젊은 아낙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인 그녀는 그 무게가 버거운지 한발 한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담벼락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본 장선제의 눈에 슴벅한 물기가 서렸다.
여인은 인근의 기와집으로 향했다.
여인은 그곳에서 머리에 이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쉰은 넘어 보이는 늙은 영감이 보따리 안에 든 옷과 이불을 일일이 들춰보았다.
여인은 바느질하는 사람이었다.
영감은 옷을 들어 보이며 이런저런 트집을 잡았다.
기실 영감의 관심은 옷보다 옷을 고쳐온 여인에게 더 있었다.
훑는 눈길로 연신 여인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 양이 몹시 음흉했다.
삯바느질 값을 주며 영감은 은근히 혼자 사는 여인의 손을 더듬었다.
노골적인 추파.
차마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여인은 돈만 받고 도망치듯 기와집을 나왔다.
그녀가 사라지자, 구석에 숨어 있던 장선제가 나타났다.
도끼 눈을 한 그가 기와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곧 내부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일련의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이레가 장무열을 돌아보았다.
“저분은…….”
형인 장선제가 아니라 그가 남몰래 지켜보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내 형님이 연모하는 여인이오.”
***
쓰러질듯한 가옥에 사는 여인.
또한, 장무열의 형인 장선제가 연모하는 여인은 이레도 아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제향일에 맞춰 찾아간 깊은 산중에 위치한 절, 영화사.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낭패한 그녀에게 선의를 베푼 젊은 청상.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야 했던 기구한 인생의 여인.
쓰러져가는 초옥에 사는 여인.
또한, 장무열의 형인 장선제가 연모하는 여인은 바로 그 영화사에서 만난 과부였다.
그런데 그 여인이 어쩌다 이런 곳에서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장선제는 여인과 어떤 관계인 걸까?
장무열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누이처럼 우리 형제와 어울렸던 여인이오. 그런 여인을 어느 순간 내 바보 형님이 마음에 담았던 모양이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 제 마음 전하지 못하고 망설인 사이 여인의 집안에서 여인을 다른 집안으로 시집 보냈소. 그리 혼인을 하였으면 잘 먹고 잘살면 될 것을.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지아비를 잃었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레도 알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된 여인의 드센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예에 눈이 먼 그녀의 시가는 그녀를 몰래 살해하고 자결한 것으로 위장하려 하였다.
열녀문을 노린 명예살인이었다.
방을 바꾸는 바람에 여인 대신 북망객이 될 뻔한 이레이기에 누구보다도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무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무에 곱겠소. 아들 잡아먹은 계집이라며 시가의 박대가 여간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오. 급기야 지난봄에 제 며느리 죽여 열녀문을 하사받으려 수작을 벌였던 모양이오.”
“그런데 저분은 어찌 저런 모습으로 사는 겁니까?”
“천만다행으로 시가의 악행이 세상에 알려졌고. 일벌백계하라는 세자 저하의 엄명이 떨어졌소. 여인의 시가는 가진 재산과 직첩을 모두 빼앗겼고, 집안 대대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소.”
자업자득이었다.
죄 없는 며느리를 죽여 명예를 얻으려던 자들에게 천벌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여파는 며느리에게도 이어졌다.
“집안이 망했으니, 시가에서 그 며느리를 어찌 보겠소. 세자 저하의 엄명이 있어 함부로 해하진 못하나, 갖은 구박이 이어질 수밖에. 결국, 여인은 시댁의 눈총에 밀려 친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요?”
“여인의 친정에서 여인을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식이잖습니까. 저분이 잘못하여 그리된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자식을 내친단 말입니까?”
이레의 음성이 절로 높아졌다.
“부모가 자식을 감싸는 건 당연한 순리이나, 몇몇 사대부의 어리석은 자들은 혈육보다 체면이나 남의 눈을 의식한다오. 그들에게 있어 여식은 가문의 영달을 위한 수단과 방편일 뿐.”
“세상의 모든 사대부가 그런 마음으로 여식을 대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저 여인의 아비는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이었소.”
“…….”
“여인의 아비에겐 청상이 된 여식은 수치였던 모양이오. 지아비가 죽었으면 함께 죽는 것이 여인의 도리인데. 그것을 행하지 못해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다 역정을 내고, 여인을 내쳤다 하오.”
“저 여인의 아비에겐 저분께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망신이자 죄였던 셈이었군요.”
열녀문을 원한 건 시댁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친정 또한 효부를 바랐다.
너무 아프고 시려 차마 입 밖으로 내고 소리 내고 싶지 않은 현실.
그러나 그것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두운 단면이기도 하였다.
장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가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믿었던 친정에선 내쳐지니. 기댈 곳 없는 여인이 살아갈 방법이 무에 있겠소. 바느질로 날품이나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힘든 생활을 할 밖에.”
“그럼, 저분께선…….”
“형님은 여전히 저 여인을 연모하는 모양이오.”
이레는 장선제를 응시했다.
담벼락에 붙어 내부를 훔쳐보고, 행여나 여인에게 못된 짓 하는 자가 없을까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떠할까.
이토록 애타게 그리워하고 염원하여도 가까이할 수 없는 현실이 갑갑하여 견딜 수 없을 터.
이 모든 것이 너무 잘난 가문의 장남이라는 멍에 때문이다.
집안의 위신이라는 막중한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니, 마음이 있어도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음이라.
장선제의 가슴 아픈 보살핌을 지켜본 이레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장무열이 그런 이레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하겠소?”
비로소 장무열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장선제와의 혼약은 모두에게 참담하고 불행한 결말만을 만들 뿐이다.
장무열은 그 사실을 알고 이레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있었다.
형인 장선제는 필사적으로 거절할 테니, 그대 역시 사정을 전하고 거절해달라, 도움을 청하는 것이리라.
“네. 무슨 말인지 알아…….”
이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장무열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혼약을 위해 매파가 그 댁으로 걸음 하였으니. 이제 와 없던 일로 하자면 낭자의 모양새가 우스워질 터이니.”
“…….”
“낭자만 괜찮다면 그 혼약, 나와 하는 것이 어떻겠소?”
장무열의 물음이 이레의 귓전에 선명하게 날아들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내 형님에게 이런 사정이 있으니, 그 혼약 대신 나와 하는 게 어떻겠냐 물었소.”
그의 표정은 실로 비장했다.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대와 그대 가문의 체면을 위해.
내 형님을 대신하여, 내 가문의 위신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리다.
장무열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문득, 이레는 지금까지 이 사람을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집요하고 치밀한 게 아니라, 매사에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사람인 건 아닐까?
이레는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돌려 초가를 바라보았다.
날이 어두워졌다.
기름 살 돈도 없는지, 초가 내부는 밖보다 더 어두웠다.
찬 바람이 불어왔다.
담벼락에 기대고 선 장선제가 붉게 언 두 손을 입김으로 녹이고 있었다.
분명 마음 아프고 시린 사연이건만.
왜일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건.
장무열이 다시 물었다.
“어떻소?”
이레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장무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습니다.”
***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이레의 뒤를 장무열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다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소?”
예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반복한 질문.
못 들은 척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보니 어느새 외가댁의 솟을대문 앞이었다.
이레는 장무열을 돌아보았다.
“그 대답이라면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 간단히 대답할 문제가 아니질 않소?”
물론, 그의 말처럼 간단히 답할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혼담은 그녀와 장선제의 선택과 무관하게 부모님의 의사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레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요?”
장무열의 진지한 물음이 이어졌다.
“내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요? 내 생긴 게 마음이 들지 않소? 아니면 내 성격이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장 장령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요?”
이레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 했다.
그녀보다 한발 앞서 되묻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말이다.
“그걸 몰라서 묻는가?”
등 뒤에서 들려온 물음.
이레와 장무열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외가댁의 솟을대문 아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특이하리만치 큰 갓을 쓴 잘생긴 사내.
형운이었다.
“그대가 왜 그 여인의 뒤를 따르는가?”
지극히 차가운 시선으로 그가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내 사람의 뒤를 왜 따르는가 물었네.”
형운의 시선과 장무열의 눈빛이 허공 중에 맞닿았다.
팽팽한 긴장감에 순식간에 공기가 부풀어 올랐다.